26화. 군림(3)
"...대체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귀빈실에 앉아있던 성미령이 당황 섞인 어조로 묻는다.
대충 둘러보니 나성진과 한수아도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기야.
어제까지만 해도 ‘같은’ 시련자였던 사람이, 하루 만에 수십만이 넘는 이들을 거느리는 왕이 되었으니.
당황하는 건 당연했다.
물론, 설명 해 줄 생각은 개미 비듬만큼도 없었다.
“지금 능력치가 몇이지?”
“...말씀하신대로 19까지 맞춰놨어요.”
“저도요.”
내 물음에 냉큼 대답한 한수아와 성미령과는 비교되게, 나성진은 조금 망설였다.
시선을, 나성진에게 옮겼다.
“...저는 민첩만 14레벨이고, 나머지는 13레벨입니다.”
생각보다 높다.
평범한 시련자가 올릴 수 있는 수치는 아니다.
물론, 짐작 가는 건 있었다.
“선신들이 후원을 많이 해줬나보네?”
움찔.
뻔하다.
선신들은 악신들과 비교해 매우 비합리적인 퀘스트를 내려주었다.
당연히 그 내면은 악을 뿌리치고 대의를 위해 움직일 수 있는 자질을 가진 시련자를 솎아내기 위해서였고, 나성진은 그 의도에 부합한 인물이다.
당연히, 후원이 있을 수밖에.
“얼마 받았지?”
나성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뭘까.
이번에도 망설인다.
나 스스로가 관대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인내심이 바닥나는 기분이다.
“왜? 대답하기 싫어?”
“...아니요. 총 7만 코인 정도 받은 것 같습니다.”
물끄러미 나성진을 바라보았다.
그가 내 시선을 피한다.
후...
한숨을 내쉬고는 얼굴을 매만졌다.
오슨의 얼굴이 아닌, 내 본래의 얼굴이 드러나고, 한수아가 밝은 표정을 짓는다.
무시했다.
나성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나성진.”
“..예”
“에덴의 첫 번째 규율이 뭐였지?”
“...단장과 부단장의 말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것입니다.”
턱을 괴며 피식 웃었다.
알고는 있네.
“그러면 세 번째 규율은?”
“...에덴에 해가 가는 일을 할 시에는 합당한 벌을 받는다 입니다.”
“그래, 합당한 벌, 그건 사형이었지. 그런데 해가 가는 일이라는 게 아직 감이 안 잡히지?”
모두가 내 입을 바라본다.
내 시선을 피했던 나성진마저도.
“단체에 해가 가는 일이라는 건, 단장과 부단장이 판단하는 거야. 그러니까..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판단하면 죽는 거라고.”
“그게 무슨..”
“무슨 법이냐고? 무슨 법이긴. 에덴의 법이지.”
나성진이 입을 다물더니 무언가 말하려는 것처럼 뻐끔거린다.
“...그런데 그런 말씀을 갑자기 왜 하시는...”
“네가 지금 내 마음에 들지 않기 시작했거든.”
움찔.
“내 질문에 망설인다는 건 거짓을 섞었을 확률이 높다는 얘기지. 다시 묻는다. 정확히 얼마의 코인을 얻었지?”
“...9만 2천 코인을 얻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고민했다.
란지에를 뽑을지 말지를.
띠링!
[무의 극의를 깨우친 전사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선善에서 군림하는 자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이 메시지가 결정타였다.
보니까, 저 두 신이 나성진을 유의 깊게 주시하고 있었나보다.
“너, 상태창에 물음표 스킬 있지?”
나성진의 눈이 크게 떠진다.
이렇게 보니. 얘도 붕어 같다.
“그걸.. 어떻게...?”
피식 웃고 말았다.
언젠가 한번 언급했었던 고유 능력자.
발바닥을 마주치는 권능을 사용하던 그자가 바로 눈앞의 나성진이다.
광역기에 특화된 그 권능은, 솔직히 키우기만 하면 내게 압도적으로 도움이 될 능력이다.
쯧-
가볍게 혀를 차고 말았다.
자리에서 일어서고는 망설임 없이 란지에를 뽑았다.
그리고, 휘둘렀다.
서걱-
“아..아악!!”
나성진의 왼팔이 어깻죽지부터 깔끔하게 잘려나간다.
“이봐요!!!!”
성미령이 난입하려던 그때, 조용히 성미령과 눈을 맞췄다.
난입하려던 성미령이 멈칫한다.
“당신... 당신.. 진짜...”
그녀의 잘게 떨리는 목소리와 흔들리는 눈동자.
그 이상 바라보지 않았다.
고개를 돌렸다.
나성진이 피가 터져 나오는 왼쪽 어깨를 부여잡고 있다.
죽일 생각?
방금 전까지는 죽이려고 했다.
내게 메시지를 보낸 저 둘이 아니었다면.
“저 둘을 봐서 딱 한번만 기회를 주지. 팔은 대기실로 가면 치료 될 거다. 이번 시련에서는 한 팔로 살아남아. 그리고, 다시는 내게 거짓말하지마라.”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나성진의 모습은, 딱 그 모습이었다.
늑대를 피하려 도망쳤지만 드래곤을 만난 모험가의 모습.
“대답.”
“...예.. 명심하겠습니다.”
[선善에서 군림하는 자가 작게 신음합니다.]
[무의 극의를 깨우친 전사가 당신을 노려봅니다.]
핏물조차 묻어 있지 않은 란지에를 그대로 검집에 집어넣었다.
성미령은 입을 질끈 다물고 있었으며, 한수아는 평소랑 다를 바 없었다.
인벤토리에서 3천 코인짜리 중급 회복 포션을 꺼내 나성진에게 건넸다.
“먹어.”
“....”
말 그대로 병 주고 약주는 내 모습에, 나성진이 혼란스러워한다.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가 결국 포션을 받아들고는 마셨다.
순식간에 절단면에서 피가 멎었다.
고통도 사라진듯하다.
미약하게 남아 있는 것 같긴 하지만.
“따라와.”
그 말을 끝으로, 나는 몸을 돌렸다.
어쩔 줄 몰라 하던 이들이, 결국 나를 따라 이동한다.
왕궁을 가로질러 지하로 내려갈 때까지, ‘우리’ 일행 사이에서는 한 마디의 대화조차 없었다.
물론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지하로 내려가자 바로 눈앞에 보인다.
2.5미터 정도 되는 철문과 그 앞을 지키고 있는 듯 한 근위병이.
“전하를 뵙습니다.”
근위병이 정중하게 한쪽 무릎을 꿇는다.
그의 인사를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응해주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문 열어.”
“...외람되지만 재상과 각 부의 인장이...”
“문, 열어”
병사가 망설이는듯하다 결국 문을 열었다.
끼이익-
“와...아”
성미령이 탄성을 터트린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이곳은 창고였다.
그냥 창고가 아니라 귀중품과 보물들을 모아놓는 창고.
어마어마한 보석들과 갑옷들, 그리고 비치되어있는 무기들까지.
화려한 수준을 넘어 아름답기까지 했다.
“나성진을 제외한 너희 둘, 저기서 원하는 거 세 가지씩 고르고나와.”
내 말에 조금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는 나성진의 얼굴이 더욱 더 어두워졌다.
그런 그를 힐끔 쳐다보던 성미령은, 이미 앞서 나가있던 한수아를 따라나섰다.
저마다 아이템의 정보를 확인하고는 크게 놀라는 모습이 한편의 연극을 보는 것 같았다.
아, 나는 아이템 고르지 않냐고?
필요없다.
내가 지금 차고있는 아이템들은 저기있는 부속품들과는 차원이 다른 아이템들이니까.
그 둘에게서 시선을 고정 한 채로 말했다.
“억울한가?”
“...아니요.”
옆에 있던 나성진의 대답이 들려온다.
억울하지 않다고?
아니, 너는.
“억울해 해라. 너는 기회를 놓친 거다. 어쭙잖게 나를 경계했기 때문에.”
“...”
“멍청하고. 병신 같고. 한심하지. 내가 큰 걸 바라나?”
“...죄송합니다.”
“나를 경계한다는 건 나를 적으로 생각한다는 건가? 내가, 그렇게 받아들이기를 원하나?”
“...그런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고개를 돌렸다.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붕어가 보인다.
“내가 하려는 일에 맹목적으로 따르라고는 하지 않아. 물론.. 원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말이겠지만.”
잠깐 말을 멈추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
"너는 그저 네 신념대로 행동해라. 하지만 내게 거짓말을 하거나 내 앞길을 막지는 마. 그 신념 사이에서 줄다리기는 하는것도 네 재량이고 내 곁에서 무엇을 얻어 가는지도 전부 네 재량이다. 그러니까 명심해. 다음은 없어.“
“...명심하겠습니다.”
역시, 나는 생각보다 관대한 놈이다.
기회를 이렇게나 많이 주니까말이다.
고개를 돌렸다.
창고문을 연 뒤에도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는 근위병이 시야에 들어온다.
나성진과의 대화와는 별개로, 이 근위병의 말이 머릿속에 맴돈다.
‘재상과 각 부의 인장이 필요하다고?’
말려가는 입 꼬리를 막을 수가 없었다.
먼저 말했듯. 이 세상도 지구만큼이나 개판이다.
처음 이 왕성으로 들어서자마자 내가 한 일은, 사라진 하루간의 일을 대신大臣들에게 ‘설명’하는 게 아니라 이 왕국의 체계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형님에게 들었던 이야기와 그 외 다른 시련자들에게 들었던 이야기들을 계속해서 떠올렸고, 머리속으로 기억의 잔재와 현실의 유사성을 조합했다.
물론 요점 정리까지 했다.
일단 이 발바라 대륙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판테온이라는 거대한 제국이다.
그 제국에 부속되어있는 다섯 개의 왕국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발리스타 왕국.
여기서 흥미로운 게 하나있다.
일단 제국을 제외하고 다섯 개의 왕국은 체계가 똑같았다.
일단 왕이 있었고, 그 밑으로 재상이 있었다.
재상은 행정부와 군사부로 나누어진 이 국가를 관리하는데, 그 권한이 생각보다 막강하다.
일단 대부분의 일들은 재상의 선에서 마무리되며, 재상은 왕에게 보고만 한다.
그리고, 왕은 황제에게 특이사항을 보고한다.
웃기게도 제국에는 오공작 체계가 있으며 귀족이라는 작위가 있지만 왕국에는 없었다.
마치, 특별 자치 구역 같다고 해야 할까.
이게 다섯 왕국의 공통적인 체계였다.
매우 기형적이고 이상하지만, 더 이상한 건 바로 군사부였다.
이게.. 정말 생각할수록 웃긴 부분인데.
군사부는 제국에서 파견된 대장군 급의 기사한명과 발리스타 왕국 내에서 왕이 임명한 두 명의 단장, 그렇게 총 세 명의 지휘관이 있다.
당연히 군사부내에서 최고 권력자는 제국에서 파견한 대장군, 즉 군사부장이다.
하나만 가볍게 더 언급하자면 군사부에는 한 개의 기사단과 네 개의 병사단이 존재한다.
그들의 총 숫자는 기사단 500명, 병사단 약 4만 명.
총 4만 500명이다.
방금 근위병이 말했던 재상과 각 부의 인장이라는 것은 재상과 군사부장, 그리고 행정부장의 날인이 찍힌 총 3개의 인장을 말하는 것이다.
이쯤 되니 눈치 챘겠지만 이 왕국이라는 건 말 그대로 형식적인 국가였으며 왕이라는 존재는 그저 황제의 꼭두각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즉, 이 발바라 대륙은 판테온 제국이라는 '단일국가'가 지배하고있는 형태라고 봐도 무방하다.
왕들은.. 굳이 말하면.. 황제의 애완견이라고 할까.
아니지, 황제가 달래주는 사냥개... 라는 게 더 어울릴 듯싶다.
이들은, 황제에게 있어서 정말 계륵 같은 존재들이다.
몬스터가 존재하지 않는 이 세상에서 기氣를 다루는 괴물들은, 황제의 편에 선다면 너무나도 든든하지만 반대편에 선다면 너무나도 위협적이다.
계륵도 괜찮고 애물단지라는 표현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나저나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쿵쿵쿵-
“전하!! 전하!!!!”
계단에서부터 한 노인의 목소리가 울린다.
처음, 나에게 편찮은 데는 없냐고 물었던 그 노인이다.
직급은 행정부장.
나를 발견한 그가 다급한 표정을 거두지 않은 채로 외친다.
“매캐넌 왕국에서... 아니, 매캐넌 국왕이 통신을 보내왔나이다.”
다시 말하자면 나는 형님이 깨지 못한 '황제'라는 업적을 깰것이다.
그 시작은, 매캐넌 왕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