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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를 한다는 건-21화 (21/131)
  • 21화. 킹 슬레이어(1)

    3분 정도를 달렸다.

    불꽃은 순식간에 타올랐을 때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게 유일한 단점이라면 단점인데.

    이그라실의 과즙은 무언가에 잘 흡수되지도 않으며 쉽게 증발되지도 않지만 불이 붙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방금처럼 폭발적으로 타오르고 순식간에 증발하는데, 그 원리는 나도 잘 모른다.

    내가 말했던 것처럼 이그라실은 악마가 만들었고 그 세부 성분은 이곳 발바라 대륙에 존재하는 성분이 아니었으니까.

    여하튼, 나는 들고 있던 세 명을 그대로 바닥에 내려놓았다.

    한수아를 제외한 둘이 조금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왜일까.

    아니, 짐작 가는 게 없지는 않았다.

    ”묻고 싶은 거 있으면 물어.“

    ”저...“

    잠깐 망설이던 나성진과 성미령이 동시에 무언가를 말하려다 멈춘다.

    마치 쌍둥이를 보는 것 같다.

    성미령이 먼저 물었다.

    ”...조금 심한 게 아닌가 싶어요.“

    ”뭐가?“

    ”...저들 전부를 죽인 거요. #1때도 보았지만, 과하다고 생각해요.“

    고개를 돌려 나성진을 바라보았다.

    ”...저도 조금 과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한수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젓더니 내게 신뢰의 눈빛을 보낸다.

    미치겠다.

    쟤는.. 정말로 정신적으로 뭔가 문제가 있는 건가.

    쯧.

    가볍게 혀를 찼다.

    솔직히, 저 둘의 말이 맞다.

    저들의 시선으로 본다면 나는, 분명 과하다.

    그들은 내게 단순한 ‘위협’에 불과했고,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위협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죽였다.

    왜 그랬는지 답해 줄 생각? 당연히 있다.

    ”이 시련은 말이야. 항상 선택의 연속이거든.“

    ”...“

    모두가 내 말에 집중한다.

    ”그게 누군가를 배신하거나 혹은 누군가를 죽이는 것, 방금 너네가 보았던 것처럼 이 시련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런데 결국 그렇게 해서 살아남는 이들은 얼마나 될까? 그리고, 그렇게 살아남은 이들은 대체 어떤 놈들일까. 그리고 그 이후에는? 뻔하지. 그들은 항상 똑같은 선택의 기로에서 똑같은 선택을 하겠지. 그건 필연이야. 그리고... 그 끝에는 뭐가 있을 것 같은데?“

    ”...하지만.“

    ”하지만이 아니라. 사람은 변하지 않아. 쓰레기가 불연성 쓰레기처럼 가장해도 결국 쓰레기는 쓰레기일 뿐이지. 나는 지구를 구할 거다. 그 과정에서 쓰레기들의 합리화나 개소리를 들어줄 여유는 없다. 단 1초도.“

    벌레 지저귀는 소리와 밤늦게 불어 닥친 참사에 새들이 날개를 펄럭이는 소리가 조화를 이룬다.

    흡사, 베토벤의 선율처럼.

    ”얼토당토 않는 개소리처럼 들리겠지. 합리화처럼 보일 수도 있을 테고, 그런데.. 수많은 시련자중에 지구를 구할 수 있는 자가 얼마나 될 거 같은데? 내가 알기로 그게 가능한 사람은 딱 한명이었어. 그런데 최근에 한명이 더 늘어났지.“

    ”..그게 누군데요?“

    누구겠어?

    ”당연히 나지.“

    ”...“

    이들이 믿든 믿지 않던 그게 사실이다.

    저들은 내 손속이 과하다고 생각하겠지만 글쎄.

    멍청하고, 재능 없는 놈들 때문에 힘을 얻어야할 이들이 힘을 얻지 못하고, 힘을 얻지 말아야할 이들이 힘을 얻는다면 그 이후에 벌어질 일은 너무나도 자명하다.

    애초에 그들이 가지게 될 힘은 그들이 아니라 나나 형님이 가져가는 게 훨씬 낫다.

    이래 보여도 나는 지구의 멸망을 지켜본 최후의 생존자중 한명이었으니까.

    내가 보아왔고 겪었던 세상은 동화처럼 아름다운 세상이 아니었다.

    처참하고, 사방에 시체와 살점들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세상.

    나는 그런 세상에서 힘을 가지고 미쳐 날뛰던 놈들을 수도없이 봐왔다.

    잡으라는 몬스터는 잡지않는 시련자들, 세상이 인류의 희망이니 뭐니하면서 치켜 세워주자 숨겨뒀던 본성을 꺼내들고 강간,방화,살인, 수도없는 범죄를 거리낌없이 저지르던 놈들.

    후우...

    짧게 심호흡하자 들끓어오르려던 마음이 조금 진정된다.

    마저 말을 끝마치자면, 이 세상에서 미래를 알고 있는 건 오직 나뿐이고 나는 예지력이라는 사기 권능으로 죽음 또한 피해갈 수 있다.

    심지어 시련 내부에서 죽는다해도 실제로 죽는게 아니라는걸 아는 시련자도 나밖에 없다.

    당연히, 그 사실을 밖으로 내뱉을 생각도 전혀 없다.

    그 무게를, 나는 견디려고한다.

    형님을 만나도 이 사실만큼은 형님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우유부단하고 착하디 착한 형님이, 힘들어 하는 모습은 더 이상 보고싶지않으니까.

    이런 나를, 누군가 자만이 똘똘 뭉쳐 오만이 되어 미쳐버렸다고 판단해도 상관없다.

    하지만 상관없다.

    정말로 상관없다.

    나는, 변하지 않을테니까.

    ”왜? 아직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가? 좋아. 난 관대하니까 한 번 더 기회를 주지. 빠질 거면 지금 빠져.“

    ”....“

    필사적으로 고개를 젓고있는 한수아, 그녀를 제외한 둘은 대답을 망설였다.

    그러다, 결국 고개를 가로젓는다.

    ”저는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저도요. 대신 과일 까는 건 앞으로 시키지 말아줘요.“

    다행이다.

    만약 지금 빠지겠다고 했으면 죽이려고 했는데.

    ”됐고, 이제 메시지창 확인해봐. 코인 꽤나 많이 들어왔을 테니까.“

    그들이 저마다 메시지 창을 확인하더니 눈을 크게 뜬다.

    물론 나성진은 예외다.

    일단 나부터 확인했다.

    [업적! 「방화범」을 달성하셨습니다.]

    [5000코인을 획득하셨습니다.]

    ....중략

    [업적! 「재능 있는 방화범」을 달성하셨습니다.]

    [와우! 어떻게 불을 지를 생각을 하셨을까요. 방화에 소질이 있네요!]

    [50000코인을 획득하셨습니다.]

    [업적! 「뛰어나게 정의로운 학살자」를 달성하셨습니다.]

    [15000코인을 획득하셨습니다.]

    [업적! 「뛰어난 사수」를 달성하셨습니다.]

    [15000코인을 획득하셨습니다.]

    [업적! 「몰이 사냥꾼」을 달성하셨습니다.]

    [50000코인을 획득하셨습니다.]

    ....중략

    [업적! 「뛰어난 몰이 사냥꾼 」을 달성하셨습니다.]

    [당신 생각보다 더 나쁜 사람이군요!]

    [300000코인을 획득하셨습니다.]

    [업적! 「후환은 남겨 두지 않는다.」를 달성하셨습니다.]

    [50000코인을 획득하셨습니다.]

    그냥 이쯤에서 눈을 돌렸다.

    대충 눈에 9개가 더 보이는데.. 눈이 아플 정도다.

    깔끔하게 얻은 코인을 확인했다.

    [보유 코인 : 1,845,825]

    어마어마한 숫자다.

    유물 사냥꾼 칭호로 얻은 코인은 20%가 증가했으니, 확실히 받을만하다.

    메시지창도 읽어볼까 하다 대충 옆으로 치웠다.

    시선을 성미령과 한수아에게 옮겼다.

    저 둘도, 꽤나 많은 코인을 받았을 것이다.

    ”...방화범을 도운 예비 방화범? 내가 생각보다 나쁜년이라고? 이게 뭐야..“

    나성진을 제외한 저 둘은 나를 도와 이그라실의 즙을 이곳저곳에 뿌렸다.

    그건 그거 나름대로 나를 도와준 거니 당연히 업적에도 반영이 된다.

    다만 직접적인 효과는 나에게, 저 둘은 간접적인 효과에 그치는데, 대충 받은 코인은 많아봐야 20만 코인? 그쯤 될 것이다.

    확인차 물었다.

    ”보유 코인 불러봐.“

    나성진이 흠칫하던 그때.

    ”총.. 22만 4천 코인이요.“

    ”저는 28만 코인이요.“

    흠칫하던 나성진의 눈이 어마어마하게 크게 떠진다.

    그 작은 눈이 어찌 저렇게 커질 수가 있을까.

    ”이.. 이십..만?“

    정말 안타깝다.

    나성진이 성미령처럼 나한테 조금 일찍 붙었더라면 꽤나 많은 게 달라졌을 텐데.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너는 후에 기회가 있을 테니까. 걱정 말고.“

    저 둘은 코인을 어디다가 써야할지 모른다.

    그러니까. 그걸 조금만 도와줄 생각이다.

    ”너희 둘은, 일단 그 코인으로 스텟부터 올려.“

    ”스텟이요?“

    ”모든 스텟을 19로 맞춰놔. 아이템은 내가 알아서 맞춰 줄 테니까.“

    딱 봐도 압도적인 갑주를 걸친 내 입에서 나온 말이기에, 너무나도 믿음직스럽게 들린 걸까.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퀘스트창 확인해봐.“

    내 말에 나성진까지 총 3명이 퀘스트창을 확인했다.

    아마, 내 눈에 보이는 거랑 같겠지.

    [축하합니다. Episode #2를 클리어 하셨습니다.]

    [10,000코인을 획득하셨습니다.]

    [대기실로 귀환하시겠습니까?(Y/N)]

    [당신은 곧바로 Episode #3에 도전할 수 있습니다. 도전하시겠습니까?(Y/N)]

    ”귀환하기 전에, 한마디만 더하자.“

    내 말에 모두가 집중한다.

    ”너희와 나는, 지금 이 순간부터 한 단체에 소속된다.“

    ”단체요?“

    ”이름은 ‘에덴Eden’, 나는 단장이 아닌 부단장이고 너희는 일반 단원이다.“

    지구를 구하기 위해 결성된 단체.

    몬스터와 변절한 시련자를 죽이기 위해 결성된 조직.

    에덴.

    그 에덴이 시간을 뛰어넘어 지금, 여기서 결성됐다.

    성미령이 물었다.

    ”....단장은 누군데요?“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단장?

    한명밖에 없지.

    정지혁.

    일단..

    ”그건 나중에 알려주지. 우리의 목적은 하나다.“

    사실 목적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애초부터 나는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지구를 구한다. 그게 우리 목적이다.“

    내 말에 담긴 진심에, 세 명의 표정이 조금 격양되는 게 눈에 보인다.

    ”단체내부의 규율은 세 가지. 첫째. 단장과 부단장의 명령에는 절대복종한다. 둘째. 우리의 적은 몬스터뿐만이 아니라 신들의 수작에 놀아나는 멍청한 시련자들까지다. 셋째. 단체에 해가 되는 행동을 할 시에는 그에 합당한 벌을 받는다.“

    알 수 없는 무게감이 주변을 짓누른다.

    ”그 벌은 '사형'을 표준으로하며 오직 단장과 부단장만이 예외로 작용하고, 합당한 벌도 단장과 부단장만이 수정 할 수 있다. 이 세 가지 규율은 무조건 지켜라.“

    ”...네.“

    말도안되는 비합리적인 규칙이 적용되는 단체지만, 놀랍게도 이 단체는 지구와 운명을 끝까지 함께했었다.

    그리고 지금, 이번생에서도 에덴은 지구와 운명을 함께 할 것이다.

    물론 좋은 방향의 운명이다.

    ”이제 할 만큼 했으니까 너희는 지금 귀환해.“

    ”예?“

    ”잔말 말고, 그리고 너 나성진.“

    ”..예?“

    당황한 그가 당황한 어조로 물었다.

    ”내 쪽에 붙은 이상 뒤는 없어. 그리고... 배신하지마라.“

    내 마지막말이 섬뜩한지 그가 팔목을 쓰다듬는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가봐.“

    그렇게, 나성진과 성미령이 빛무리에 휩싸이더니 자리에서 사라졌다.

    남은 것은 한수아. 그녀 혼자였다.

    그녀가 내게 다가온다.

    물론, 나를 붙잡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내가 경계하는 것을 알기에.

    ”왜?“

    짧게 물었고.

    ”제가 귀환하면.. 왕 아저씨.. 매혹 풀릴거에요.“

    조용히 웃었다.

    ”나도 알아 그건.“

    ”..하지만 그러면..“

    망설이는 그녀의 모습이, 조금 흥미롭다.

    고개를 살짝 숙인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주었다.

    아.. 이 말은 꼭 해줘야겠다.

    ”고개 들지 마라.“

    그녀가 고개를 푹 숙인다.

    그녀도 알고 나도 안다.

    그녀가 매혹을 사용하려면 눈을 마주치고 신체를 접촉해야 한다는 걸.

    그녀는 내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마치 강아지처럼,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

    ”전부 계산하고 행동한 거니까 걱정 말고 가봐. 코인은 내가 쓰라는 것만 쓰고.“

    그 말을 끝으로 손을 떼자 한수아가 한껏 아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마치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을 것 같은 표정이다.

    피식 웃고는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그렇게 잠시간의 시간이 흐르고, 빛무리가 그녀의 몸을 감쌌다.

    조용하다.

    밤벌레 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적막함과 함께, 사방에서 불어온 바람이 나를 스친다.

    나는 혼자가 되었다.

    조용히 목을 풀었고, 몸을 체크했다.

    이상은 없다.

    베레타를 인벤토리에 집어넣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거대한 궁전.

    오슨 발리스타가 거주하는 궁이었다.

    내 시련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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