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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를 한다는 건-20화 (20/131)

20화. 멍청이들(4)

품에서 지포라이터와 하얀 물약 한 병을 꺼내들었다.

하얀 물약, 내가 상점에서 샀던 1만 코인짜리 아이템, 성수다.

내가 성수의 마개를 열고 주변에 뿌릴때까지도 라미레즈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않았다.

그의 시선은 뭐랄까.

마치 죽기직전의 상태로 바닥에 꿈틀거리는 벌레를 바라보는 시선이라고 해야하나.

음.. 혹시 저놈은 내 손에 들린 권총이 장난감으로 보이는 걸까.

놈이 여유가 한가득 묻어나오는 어조로 묻는다.

”라이터는 뭐 하러 꺼냅니까? 최후의 담배 뭐 그런 겁니까?“

픽 웃고 말았다.

”금연한다 빙신아.“

”...“

굳어진 표정의 라미레즈가,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올린다.

스킬을 준비하는 건지, 아니면 전투를 준비하라고 신호를 내리는건지 애매하다.

그 전에...

”혹시 그거 알아?“

”뭘 말입니까?“

”이쪽 세계에는 이그라실이라는 열매가 있거든.“

뜬금없는 내 말에 모두가 고개를 갸웃한다.

“코코넛이라고 생각하면 돼. 그런데 코코넛이랑은 매우 다르지.”

라미레즈가 피식 웃더니 묻는다.

“유언인거 같은데.. 한번 들어나보죠.”

그래 더 들어라.

“코코넛은 음료수지만. 이그라실은.. 음.. 연료라고 생각하면 돼.”

“...?”

모두가 눈을 휘둥그레 뜬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그중에서 내 말의 뜻을 눈치 챈 것은 성미령과 한수아가 유일했다.

여하튼.

“다만 그 연료가 휘발유보다 가연성은 높은데, 신기하게 냄새가 안나, 당연히 물보다 무겁고.. 증발도 잘 안되지. 맛도 더럽게 없어, 그래서 세간에는 이걸 악마의 열매라고 부르거든. 실제로 악마가 만들기도 했고.”

“그러니까. 지금 그걸 왜 말...설마?”

내 입가에 씩 미소가 지어진다.

그래 그 설마다.

띠링!

[만개의 언어를 깨우친 자가 그만 떠들고 당장 이도를 죽이라고 외칩니다.]

다급한 메시지와, 하늘에서 빛이 내려오고, 그 안에서 수천마리의 고블린이 등장하는 것까지.

이 모든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끼익 끽!“

고블린들의 괴성으로 골짜기 전체가 순식간에 시끄러워진다.

귀가 아플 정도다.

그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치직-

라이터에 불이 붙었고 이내, 나는 지포라이터를 집어던졌다.

지포라이터가 땅에...

투욱-

떨어지고.

...화르르르르륵!!!!

작은 불씨고 나발이고, 그런건 의미가 없었다.

이그라실의 과즙을 뿌린 곳, 그 드넓은 지형에 불길이 치솟아오른다.

시련자들과 고블린들이 당황하고, 그들 모두의 몸에 불이 붙는다.

나무는 불에 탔고, 잡초도 불에 타고, 연기가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골짜기는 순식간에 불바다가 되었다.

”으..으아아아악!! 불!! 불이다!!! 도망쳐!! 도망쳐!!!“

”이도 이 개새끼야!!!!!!!!!“

믿기지 않게도 이 모든 일이 벌어진 것은 1초, 아니 2초도 걸리지 않았다.

내가 상점에서 샀던 이그라실의 양은 절대로 적은게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이 골짜기 전체를 뒤덮을 정도라고 해야할까.

그래, 나는 대기실에 있었을 때부터 지금 이 상황을 대비했다.

솔직히 처음에는 고블린만 몰살시키려고 했는데, 도중에 계획을 바꿨다.

선신들의 무능함을 직접 눈으로 본 걸로 위안 삼아야하나?

가볍게 혀를 차던 그때, 나를 제외한 시련자들이 사방으로 도망치려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망설임 없이 총구를 겨눴다.

타앙-탕-탕!!

달려 나가던 다섯이 죽고, 불에 붙은 수백 명의 시련자가 바닥을 뒹군다.

라미레즈는 뭐 더 말할 것도 없다.

탄창을 갈아 끼우고, 다시 시련자들을 향해 난사했다.

탕-타앙-탕!

한발에 한명씩.

머릿속에 띠링하는 소리가 미친 듯이 울려 퍼졌지만 무시했다.

불길이 거세진다.

하지만 내 손은 멈추지 않았다.

나를 죽이려 했던 놈들, 코인에 눈이 먼 놈들.

살려둘 이유는 없다.

어차피 후에 가면 또 다시 배신을 할 놈들이니까.

그리고, 저런 모질이 새끼들이 힘을 가진다면 그건 재앙이나 다름이 없다.

”...과즙을 뿌리라던 게.. 이런 의미였어요?“

”...미치겠네.“

성미령과 뒤늦게 합류한 나성진이 중얼거린다.

이번에는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둘을 향해서가 아니라, 고블린들을 향해서.

족장 몇 놈이 불길을 헤치고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놈들 머리를 겨눴고, 쐇다.

탕-탕탕!!

이내,

콰과과광!!!

과즙을 밀집시켜 뿌린 곳에는 폭발까지 일어났다.

확실하다.

고블린은 ‘거의’ 전멸했다.

그렇게 탄창을 서너 번 정도 갈아 끼우고는 입을 열었다.

”다시 묻는다. 나랑 함께하겠다는 건 내 뜻에 동조하겠다는 거지?“

”..네“

”명심해. 죽일 땐 확실하게 죽여. 망설이면 너희가 죽는다. 내 말, 잊지마라“

화마에 휩싸인 시련자들이 비명을 내지른다.

살아남은 시련자는 얼추 70명 정도.

그중에서 나를 향해 달려오는 이들은 무려 11명이나 된다.

”지금부터 너희는 한 가지 일을 한다.“

”한가지..일이요?“

”사람은 살고 싶은 욕망이 있다면 그 무엇이든 해. 저런 상황에서도 살고 싶어 하는 이들이 있지. 지금 달려오는 저놈들처럼.“

”...“

설마 하는 눈으로 나성진이 나를 바라본다.

나는 내가 지을 수 있는 최대한 단호한 눈을 한 채 말했다.

”죽여. 기회는 이미 충분히 주었으니까.“

”하.. 하지만..“

성미령이 무언가 말하려할 때 나성진이 그녀를 막았다.

나를 오래 겪은 놈은 아니지만, 확실히 나성진은 눈치가 빠른 남자였다.

지금 이렇게 사방이 불타는 와중에도 내 주변에는 연기 한 점 흘러 들어오지 않았고 심지어 숨 막히거나 뜨겁거나하는 그런 증상조차 없었으니까.

이게 바로 성수의 효과다.

나성진은 그런 내게서 기이한 무언가를 느낀 거고.

한쪽 입 꼬리를 비틀며, 최후통첩을 날렸다.

”나는 앞만 보고 달릴 거다. 발목 잡는 놈은 데려가지 않아. 그러니까. 빠지려거든 지금 빠져.“

한수아를 제외한 둘의 눈이 낮게 가라앉는다.

이곳에 있는 이들은 튜토리얼을 거치면서 고블린과 족장을 죽인 이들이다.

그들에게 필요한건 방아쇠를 당길 계기다.

그리고 그 계기를, 지금 내가 제공 해준 거고.

그래, 그거면 된다.

고개를 돌려 한수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조금 애매하다.

남은 둘이 마음을 다진 것과는 다르게 조금.. 뭐랄까.

망설인다고 해야 하나?

아니지.

저 모습은 마치, 자기가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다는 걸 보여주는 듯한 모습이었다.

으음..

그때였다.

불길을 헤치고 달려오는 시련자의 숫자가,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다.

조금전부터 생각한건데.

저놈들은 멍청이들인가.

왜 이쪽으로 오지? 반대쪽으로 필사적으로 뛰면 그래도 살 수는 있을 텐데.

말없이 총구를 겨누고 그들의 숫자를 줄였다.

탕탕-탕-타앙!

그렇게 몇 놈이 쓰러진다.

내게 달려오는 시련자의 숫자는 총 3명,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것 같지만 당연히 무시했다.

성미령은 죽어있는 기사의 검을 집어들고는 달려오는 시련자를 베었고, 나성진은 쥐고 있던 단검으로 시련자를 죽였다.

둘 다 망설임은 없었다.

하지만 역시, 한수아는 달랐다.

가까워지는 시련자 하나를 고민하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그와 가까워졌을 때, 그녀가 양손을 뻗어 불타는 남자의 얼굴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와 눈을 맞췄다.

찰나였다.

정확히 한 1초정도.

한수아가 손을 떼고 물러서자 기이한 상황이 펼쳐졌다.

몸이 불타는 남자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시 몸을 돌려 불바다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마치 불나방처럼.

”....“

나는 물론이고 성미령과 나성진은 할 말을 잃었다.

대충 보니까 성미령은 한수아의 능력을 몰랐던 것 같고, 나성진은 뭐 말할 것도 없다.

그러고보니 아까 한수아에게 물어봤을 때 그녀는 배운 스킬이 한 개도 없다고 말했었다.

남은 코인 전부를 체력과 지능에 투자했었다고 했나?

중요한 힘 스텟이 적으니 신체적인 능력이 매우 좋다고 할 수도 없으니. 방금 전의 행동은 그녀 나름 최선의 행동이었을 터.

...그런데 그게 더 이상하다.

음.. 그러니까.

아까까지만 해도 망설임을 보이는 듯한 그 모습은 살생을 해야 하나 말아야하나 하는 고민 때문이 아니라.

‘...어떻게 죽여야 할지 고민하던 거였나?’

그 결과가 다시 불속으로 뛰어 들어가라는 거고?

...어찌 보면 나보다 더 싸이코같은...

그때 한수아와 눈이 마주쳤다.

해맑게 웃고 있는 그녀를 보고, 나는 두 가지 확신을 얻었다.

일단 쟤도 확실히 나만큼 제정신이 아니라는것과 내가 만든 한수아라는 변수는 확실히 이 판 전체를 아우를 수 있다는것을.

통곡의 소리로 가득한 골짜기에서 나와 한수아는 잠시간 눈을 맞췄다.

그녀의 눈안에, 신뢰라는 감정이 소용돌이친다.

...역시, 한수아는 정상과는 거리가 먼 여자다.

순간, 미약하게 연기가 앞을 가리고, 열기가 느껴진다.

내가 뿌려둔 ‘성수’의 효과가 끝난것같다.

이제 머지않아 이곳도 불길이 덮칠 것이다.

짧게 숨을 몰아쉬고는 손을 뻗어 나성진을 어깨춤에 둘러맸다.

그리고는 양팔로 한수아와 성미령을 옆구리에 끼웠다.

갑작스러운 신체 접촉에 이 두 여자는 정말 정 반대의 반응을 보여주었다.

"꺄..꺄악!"

성미령은 놀란 비명을 내지르며 물고기처럼 파닥댔고, 한수아는 눈을 감고 자신의 허리를 감싼 내 팔을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보면볼수록 웃기는 여자다.

어깨춤에 둘러매어있는 나성진의 몸이 굳어있는건 관심도 없었다.

그게 끝이었다.

나는, 그 상태로 자리를 박찼다.

콰직!

땅이 움푹 파이는 것을 시작으로, 내 몸이 앞으로 쭉 뻗어나간다.

참고로 내 모든 스텟은 19레벨이다.

단순히 스텟으로만 따지면 네임드급 오크들과도 싸워도 쉽게 지지 않을 정도.

그렇게 우리는 불타는 골짜기를 벗어났다.

뒤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는 무시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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