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를 한다는 건-15화 (15/131)

15화. 변수(3)

흔들리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던 쎄쎄가, 뱉어내듯 한마디 토해냈다.

“..잠시만요.”

그녀가 허공에서 무언가를 조작하더니, 내게 무언가를 건넸다.

온통 검은색으로 물들어있는 상하의 일체형 갑옷.

얼핏 옷 전부가 가죽 재질로 보이겠지만 그 내부는 달랐다.

아다만티움과 미스릴을 혼합해서 덧댔으며, 그 겉면에 드래곤의 가죽을 입힌 것이다.

정확히는 블랙 드래곤, ‘칼룸’의 가죽이다.

이 갑옷은 보통 공격에는 흠집조차 나지 않으며 자가적으로 복구도 가능하다.

참고로 이건 세트아이템이다.

갑옷과 장갑, 그리고 부츠, 총 3가지 아이템으로 이루어진 이 아이템은 유물급 아이템들 중에서 최상급 아이템이며, ‘성물’급으로 진화할 수 있는 두 종류 아이템중 하나다.

손을 뻗어 갑옷을 받아들자.

띠링!

[광전사의 갑옷의 소유권을 획득하셨습니다.]

[광전사의 갑옷이 당신에게 복속됩니다.]

[‘착용’.‘해제’ 두 가지 명령어를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슬며시 목을 풀고는 작게 중얼거렸다.

“착용”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촤르르륵-

갑옷이 해체되더니, 내 몸을 감쌌다.

상의부터 하의까지, 위에서 아래로 나를 뒤덮는 그 기분은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굳이 말하면 능력치를 올렸을 때의 쾌감이라고 할까.

그리고... 정말. 오랜만이다.

내가 지구에서 살아남는데 굉장한 도움을 주었으며, 내가 죽는 그 순간까지도 나와 함께했던 아이템.

그중 하나가 광전사의 갑옷이다.

일단 정보창을 띄웠다.

[광전사의 갑옷(유물遺物)]

-자가 복구

-?

-?

내 한 목숨, 제국과 인류를 위해 바치노라. - 여천濾天

팔을 움직여보고, 발을 움직여보았다.

움직이는데 전혀 어색함이 없다.

부츠와 장갑이 없어서 허전한 것 빼고는.. 매우 만족스럽다.

앞서 말했지만 이건 세트아이템이다.

뒤에 2가지 기능이 해방되지 않은 현재, 이 갑옷은 유물이라기보다는 말 그대로 그냥 ‘갑옷’의 기능이 전부다.

물끄러미 정보창에 나와 있는 문구를, 잠시간 바라보았다.

이 문구를 들어는 보았어도 이렇게 눈으로 직접 보는 건 처음이다.

내게 성물로 업그레이드된 광전사의 세트를 건네주던 형님은, 내게 말해주었었다.

이 갑옷의 원래 주인은 제국과 인류를 구하기 위해 단신으로 드래곤들과 싸웠고, 죽었다.

그는 죽기직전까지 50여 마리의 드래곤을 죽인 불세출의 영웅이었으며, Episode #2부터 등장할 ‘발바라 대륙’의 영웅이다....라고, 세상에는 알려진 상태다.

실상은 달랐다.

여천은 죽기 직전 또 한 번 격을 초월했고 결국, 신이 되었다.

띠링!

[천상의 학살자가 감회어린 눈으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현재는 선계열의 신이며, 선신들의 명실상부한 2인자. 그의 이명은 천상의 학살자.

지금 뜬, 저 신이 바로 여천이다.

나는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이 여천입니까?”

뒤에 있던 쎄쎄가 헉하며 숨을 들이마시던 그때.

[천상의 학살자가 고개를 끄덕입니다.]

이번에도 모르는 척 물었다.

“여기 적혀 있는 건 ‘인간’으로서 당신의 ‘유언’입니까?”

내 말의 의미를, 여천은 물론이고 쎄쎄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내 한 목숨, 제국과 인류를 위해 바치노라.

머릿속에 그 말이 맴도는 기분이다.

[천상의 학살자가 긍정의 웃음으로 답합니다.]

뭐랄까.

감회가, 되게 새롭다.

오랫동안 말하고 싶었다.

아니, 만나고 싶었다.

이 갑옷을 만들고 이 갑옷을 착용했던 진정한 주인에게, 정말로 이 말을 하고 싶었다.

“저는 세상을 바꿀 겁니다. 그리고 저희 세상과 인류를 구해 낼 겁니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천상의 학살자가 진심이냐고 묻습니다.]

진심이다.

지구에서 나는 내 목숨을 걸고 몬스터를 죽였고, 인류를 적대하는 시련자를 죽였다.

시련자가 된 지금도 그 생각과 결심에는 변함이 없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같다.

“하지만 당신이 생각하는 것과는 매우 다를 겁니다.”

[천상의 학살자가 의아한 표정을 짓습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내 눈은 천장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그 너머, 이 세계를 관조하는 신중의 하나.

얼굴이 보이지 않는 천상의 학살자를 생각했다.

“저는 제게 적이 된 자들을 뿌리조차 남기지 않은 채 모조리 짓밟고, 찢어 죽여 버릴 거니까.”

지구를 구할 수 있던 영웅이자, 가장 강했던 시련자인 형님은 생각보다 매우 착한 남자였다.

우유부단했으며 답답할 정도로 정의로웠다.

나는 그런 형님과 정 반대의 사람이다.

하지만 목적은 같다.

가는 길만 다를 뿐, 이게 내 각오다.

그렇게, 내 말이 끝나자 대기실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는다.

조용히 눈을 감았다.

여천은 수백 년전 자신이 몸담던 발바라 대륙을 구했다.

그것만 보자면 그의 말대로 인류와 그가 몸담았던 고대 제국, ‘마테리아 제국’을 구한 게 맞다.

하지만 근본적인 뿌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드래곤은 여전히 살아있었으며, 에피소드의 일부가 되었고 몬스터도 살아있었으며, 당시 여천이 목숨 걸고 지켰던 마테리아 제국은 자멸했다.

나는 여천과 다르다.

여천은 끝장을 내지 못했지만 나는 끝을 볼 것이다.

그리고 모조리, 뿌리째 뽑아 짓밟아 버릴 것이다.

그러기 위해, 나는 힘을 가져야한다.

멀리 갈 것도 없다.

나와 형님이 죽기전 보았던 그 거대한 운석.

시발.

생각해버렸다.

죽기 전 공기가 타들어가고 대기가 박살나며 온몸이 찌그러지는 그 좆같은 기분.

후우..

그 운석을 부수고 박살내려면, 한 행성 자체를 지워버릴 정도의 힘이 필요하다.

그 힘은 손가락을 튕기며 발화를 일으키거나, 손뼉을 마주치며 태풍을 만드는, 더 나아 다른 이의 정신을 지배하는 등.

그딴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그걸 하기위해서는 모든것을 초월해야한다.

인외人外 수준이 아닌 인외寅畏, 인간들 뿐만이 아니라. 몬스터, 나아가 신들조차 두려움에 떨 정도의 힘. 그걸 가져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히 준비 절차가 필요하다.

그렇게, 머지않아 반응이 왔다.

띠링!

[천상의 학살자가 광소를 터트립니다.]

그 뒤로, 다른 신들의 메시지도 이어졌지만 관심 없다.

나는 조용히 기다렸다.

입질이 오기를.

띠링!

[천상의 학살자가 당신에게 ‘광전사의 건틀렛’과 ‘광전사의 부츠’를 후원합니다.]

진짜 왔다.

월척이다.

-나도 처음에는 몰랐거든, 내가 말했잖아 신들은 사고방식 자체가 다르다고, 그들의 흥미와 관심, 그리고 그들의 목적의식을 건드리고 터트려주면 후원이 아주... 장난이 아니거든.

-그래서 이 광전사 세트도 그렇게 얻은 겁니까?

-당연하지. 내가 무슨 수로 이걸 얻어? 유물은 일종의 기연이야. 어디 동굴에 쳐 박혀있거나 누구도 생각하지 못할 곳에 숨겨져 있지. 하지만 생전에 유물을 사용했던 신들과 우호 관계를 맺어두면 가끔 유물을 후원 해주기도 해. 내가 알기로 이 아이템의 주인, 여천이었나? 그 양반이 되게 호탕하더라고, 멍청하기도 하고.

천천히 눈을 떴다.

아까부터 입이 떡 벌어져있는 쎄쎄는 별개로 하고, 천장에서 천천히 두 가지 아이템이 마치 깃털처럼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유물 아이템, 광전사의 부츠와 광전사의 건틀렛이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빛을 갚는다고 했던가?

나는 말 몇 마디로 수억 냥을 삥 뜯었다.

“잘 쓰겠습니다.”

[천상의 학살자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입니다.]

진짜 잘 쓸 겁니다. 이건 내 성장 기반이 될 테니까.

*

부츠를 착용하고, 건틀렛을 차자 변화가 일어났다.

띠링!

[칭호 「유물 사냥꾼」을 획득하셨습니다.]

[시련을 진행하면서 획득하게 될 모든 코인이  20% 증가합니다.]

[업적! 「나는 유물을 모은다.」를 달성하셨습니다.]

[200,000코인을 획득하셨습니다.]

[「유물 사냥꾼」효과로 40,000코인을 추가로 획득하셨습니다.]

상황만 보자면 웃음이 터져 나오기에 한 점의 모자람이 없었지만, 나는 웃지 않았다.

웃기엔 아직 일렀으니까.

띠링!

[광전사의 갑옷, 광전사의 부츠, 광전사의 건틀렛이 광전사의 전신 갑주로 통합됩니다.]

[광전사의 전신 갑주는 착용자의 온전한 의지가 아닌 이상 다른 이에게 양도할 수 없습니다.]

[광전사의 전신 갑주가 당신과 동화를 시작합니다.]

찌릿!

미묘한 신경통을 시작으로 내가 입고 있던 갑주에서 빛이 흘러나온다.

이어서.

콰드드드득-

갑옷이 점점 형태를 달리하며, 내 몸을 조이기 시작했다.

이를 악물었다.

-...이걸 너한테 줄까 말까. 정말 고민을 많이 했거든.

광전사, 왜 하필이면 광전사일까.

이유는 별게 없었다.

이 갑주는, 말 그대로 착용자를 미친 전사로 만들어주니까.

-이 갑주를 착용하고 싸우게 되면.. 너는 아마 인간의 한계를 초월할거다.

콰드득!!

고통이 이어진다.

광전사의 전신 갑주는 마치 생명체와 흡사했다.

갑주 안에 내가 입고 있던 트레이닝복, 심지어 속옷까지.

그 모든 옷가지들을 조각조각 내어 밖으로 배출해내고는 내 몸에 가시들을 박아 넣었다.

아니, 정확히는 내 몸속, 혈기(血氣)를 노린 것이다.

-그 한계를 초월하는 대가는, 당연히 네 목숨이야. 이 갑주를 완벽하게 활성화시키는 거.. 나는 그걸 ‘혈신’ 상태라고 하거든. 네가 혈신 상태가 되면 될수록, 너의 수명은 줄어들 거다. 부작용이라고 할 수도 있지.. 하지만, 시련자가 아닌 일반인이 시련자와 비슷해지거나 압도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는 건 ‘풍령의 갑주’를 제외하고는 이게 유일해.

과거에 들었던 형님의 목소리와 몸을 꿰뚫는 섬뜩한 피륙음이 뇌를 관통하고, 전신을 옥죄었다.

몸에서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이질감.

새롭지만 익숙하다.

미묘한 그 경계선에서, 뇌리를 찌르던 고통이 점점 줄어든다.

-너의 그 초인같은 직감과 이 갑주는 정말로 잘 어울리거든. 조금 매정하게 들릴 수도있겠지만 앞으로 벌어질 싸움에서는 단순히 직감만 가지고 살아남을 수 없어. 나는 네가 오래 살았으면 한다. 내 욕심이라고 생각해도 좋아. 내 목적에 너를 이용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어. 다 이해해. 하지만.. 그런 것들을 넘어서 나는 네가 필요하다. 그리고 네가 죽지 않았으면 해.

빛이 사그라졌고, 나는 아까처럼 그 자리에 서있었다.

천천히 목을 풀고, 주먹을 쥐었다.

까드득-

평소와 다를 바 없었지만 글쎄.

정말 그럴까.

나는 내 몸, 그러니까 심장 주변을 감싸고 있는 구렁이 같은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내 잠재력과 선천지기를 폭발시켜 광전사가 될 수 있는 갑옷.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아이템이다.

앞으로도 쭉, 그러니까 한 Episode #39가 끝나기 전까지는 무조건 필요한 아이템이다.

-이도야, 이거만 명심해 그 부작용을 막기 위해서는 영단과 영물들의 내단이 필요한데 내가 가지고 있는 건 몇 개 없어. 그러니까... 혈신 상태가 아니라면 도저히 빠져나오기 불가능할 것 같은 경우, 그런 경우에만 사용해. 부탁이다.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광전사의 전신 갑주는 내게 복속되었다.

아니, 단어가 잘못되었다.

이건 동기화다.

내가 ‘해제’를 명령하는 순간 이 갑옷은 나에게서 떨어지고 아까처럼 아이템 형태로 돌아간다.

물론 다시 착용할 때는 당연히 지금의 고통을 또 한 번 겪어야한다.

피를 먹는 갑옷, 피를 추구 하는 갑옷.

띠링!

[천상의 학살자가 당신이 걸어갈 그 길에 찬사를 보냅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오랜만에 느끼는 이 이질감을 조금 더 감미했다.

눈을 감았다.

씹고, 달래며 천천히 맛을 본다.

미치도록 달콤하다.

고작해야 Episode #1이 끝난 현재 얻었다기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업적이다.

그래, 이것이야말로 업적이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진정한 먼치킨으로 향하는 첫번째 걸음...이 적당 할 것 같다.

띠링!

[시작을 알린 아룡이 이거, 이래도 되는 거냐고 묻습니다.]

[만개의 언어를 깨우친 자가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고래고래 소리 지릅니다.]

[천상의 학살자가 누군가를 노려보며 입 닥치라고 외칩니다.]

등등등.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건 싸움 구경이다.

그러니까 말싸움만 하지 말고 주먹질이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악신 몇명 죽여주면 더 좋고.

생각을 정리하고는 짧게 심호흡했다.

얻을 건 충분히 얻었다.

이제, 깽판 칠일만 남았다.

고개를 돌려 쎄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이 참 볼만하다.

눈동자는 떨리고 있었고, 파리가 들어갔다 나와도 모를 정도로 벌려져있는 입은 절로 나를 웃음 짓게 했다.

“...당신 대체... 뭐에요?”

이거 사진이라도 찍어뒀으면 좋았을 텐데.

“뭐긴 뭐야? 너도 알잖아?”

“...네?”

“이레귤러, 난 이레귤러잖아?

씩 웃자 쎄쎄가 눈을 껌뻑인다.

마치 붕어처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