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미친놈(1)
그때였다.
프스스-
기이한 소리, 그러니까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근원지를 찾지는 못했다.
혹시 누가 방구라도 뀐 건가 하는 웃기지도않은 생각은 집어치운 상태.
짜증이 샘솟는다.
생각을 좀 하려고 했더니 그새를 또 못 참고 사고가 터지려고 하네.
그때, 옆에 있던 한 여자가 비틀거리더니 내 팔을 움켜잡는다.
경계심을 흩트리지는 않았다.
주먹을 쥐고, 그대로 휘두르려던 그때, 그녀의 작고 오밀조밀한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창백하고,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 표정이다.
...몸이 약한 여자인가?
“하악..하아..“
그녀가 숨을 헐떡인다.
체력이. 정말로 약한가보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조금씩 주변에서 변화가 일어난다.
하나둘 숨을 컥컥거리며 자리에서 쓰러졌고. 누군가는 쌍욕을 터트리며 흉흉하게 손에 쥐고 있던 무기를 휘두른다.
그 와중에, 가장 멀쩡한 것은 나였다.
힘에 남은 모든 코인을 쏟아 붓긴 했지만 내 기본 체력은 낮은 수준이 아니다.
힘과 체력이 시너지를 발휘했고, 그것은 지금 이 순간 확실하게 체감되었다.
그래. 누군가 스킬을 쓴게 확실하다.
그것도 광범위 계열의 스킬.
묘하게 숨쉬기가 어려워지는 걸로 보아.
음..
아무래도 독계열 스킬인 것 같다.
[무의 극의를 깨우친 전사가 한숨을 내쉽니다.]
[혼란을 초래하는 거인이 조용히 당신을 바라봅니다.]
[만개의 언어를 깨우친 자가 흐뭇하게 웃습니다.]
[천령독을 만든 소인이 조금은 불만족스럽다는 듯 한 표정을 짓습니다.]
확실히, 시련은 시작되었다.
가라앉은 눈으로 주변을 훑었다.
패닉에 이어 혼란이 가중되려던 그 순간, 어느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짧은 머리에, 조금 음침한 눈동자.
놈과 눈이 마주치고, 놈이 순간 당황하고, 빠르게 표정을 바꾸는 그 과정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대략 10명 정도가 숨을 헐떡이는 그 와중에, 가장 중심에 있을 놈이, 저렇게 멀쩡한 면상으로 침착함을 유지한다?
우습다.
이미 연기 대상 받을 정도의 연기력을 뽐내던 한태식이나 김예원에 비하면 저 정도는 그냥 일반인 수준이다.
나는 천천히 그놈에게 다가갔다.
”야.“
”...뭡니까? 설마 당신이 이런 일...“
개소리는 무시했다.
”3초 준다.“
그가, 경계심 어린 눈으로 대답했다.
”...뭘요?“
”스킬 거두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죽인다. 3“
그놈의 눈 떨림이 심해졌다.
”당신이 그런 거 아닙니까?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2“
주먹을 쥐었다.
까드득.
강철 장갑이 부딪치는 소리가. 놈에게는 서늘하게 다가올 터.
확실히 놈의 눈 떨림이 몸 전체로 퍼져 나가는 게 눈에 보인다.
”1“
”아니 그러니... 젠장! 해체!“
주먹을 들어 올린 순간, 놈이 스킬을 거뒀다.
쓰러져있던 이들이 켁켁 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한결 숨쉬기가 편하다는 듯한 표정이다.
눈앞의 남자가 아쉽다는 표정을 짓고는 뒤로 물러서려던 그때.
나는 빠르게 손을 뻗었다.
놈이 피하려했지만 당연히 실패했다.
꽈아악-
놈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켁.. 왜... 왜 이러십니까! 스킬을 거뒀...“
놈의 면상을 코앞으로 가져오자, 놈이 말을 멈춘다.
겁에 질린 얼굴이다.
”살고 싶어?“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이 손 좀.“
”살고 싶었으면 애초에 일을 벌이지 말았어야지.“
”예? 자..잠깐!!“
우두둑-
놈의 목을 부쉈다.
털썩-
놈이 바닥에 쓰러진다.
망설임 없이 나는 발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놈의 심장을 짓밟았다.
콰지직-
목이 부러지고 심장이 움푹 파였으니, 살아날 확률은 0에 수렴한다.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앞으로 벌어질 시련, 그러니까 에피소드들의 절반정도는 ‘협동’과 관련이 있다.
그런데 이렇게 뒤통수부터 치려는 불순종자는 일찍일찍 골라내 죽여 놔야 한다.
지금처럼.
띠링!
[업적! 「살해자」를 달성하셨습니다!]
[300코인을 획득하셨습니다.]
놈의 시체를 내려 보다. 순간 눈이 어느 한곳에서 멈춰 섰다.
시계.
놈의 손목에는 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쪼그려 앉고는 그 시체를 풀어서 내 팔목에 채웠다.
바로 시간을 확인했다.
현재 시간, 14시 04분.
자리에서 일어서고는 몸을 돌렸다.
주변에 있던 이들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선다.
방금 죽은 놈의 ‘스킬’, 독 스킬이 분명한 그것의 영향 안에 있었으면서도 효과가 없었으며, 살인조차 가차 없이 하는 나를, 심지어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워보이는 시계를 빼앗아서 차는 나를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듯한 움직임이다.
나는 제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때, 아까 전에 내 팔목을 움켜쥐었던 여자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나도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았고, 그녀도 내 눈을 피하지 않았다.
...이 여자는 뭐지?
나는 버릇이 하나있다.
사람의 눈을 살피는 버릇.
나는 알 수 있다.
사람의 눈은 감정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했던가. 나는 사람들의 눈을 보면 그놈이 구라를 치는지 혹은 두려워하는지, 그런 감정들을 ‘확실하게’ 캐치해낸다.
그런데, 이런 적은 또 처음이네.
감정을 읽기가 어렵다.
그나마 확실한건 이 여자는 나를 경계하지도, 그렇다고 배척하지도 않는다는 것.
생각보다 웃기는 여자다.
눈도 매우 맑다.
이쁘기도 더럽게 이뻤고.
그녀가 무언가 말을 하려는 것처럼 붕어처럼 입을 뻐끔댄다.
말이 나오지 않는 걸까.
이 여자 뭐지 싶을 때, 그녀가 품에서 종이와 펜을 꺼냈다.
그리고 무언가를 적고는 내게 보여준다.
-고마워요.
말을 못하는 게 맞나보다.
살짝 고개를 끄덕이던 그때, 다시 주변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뭐 이새끼야??“
”새끼? 내가 니 새끼냐? 나이를 똥구멍으로 처먹었나.“
주변에서 언성이 높아진다.
아까 보았던 이철준과, 이름 모를 다른 시련자다.
둘이 싸우려는 게 눈에 보이자.
하아-
한숨을 푹 내쉬고 말았다.
도합. 36개의 시선이 나에게로 쏠린다.
암묵적으로, 나도 모르게 이 열차 칸의 강자가 되어있던 것이다.
웃음이 나오지는 않았다.
내가 원하는 구도였으니까.
나는 조용히, 그 둘을 노려보며 말했다.
“살해자 보상은 300코인. 고작해야 300코인 때문에 목숨 걸고 싸우고 싶나?”
불신의 눈빛도 있었고, 조금 당황하는 듯 한 눈빛도 있었다.
신경 쓰지 않았다.
“믿든 말든 니들 자윤데.. 싸울 거면 딴 데 가서 싸워. 내 눈앞에서 싸우면 그게 누구든 죄다 죽여 버릴 거니까.”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자 이철준이 슬며시 고개를 돌린다.
그와 싸우던 남자도 마찬가지.
다른 열차 칸에서 비명이 울려 퍼지고, 언성이 높아지던 그때, 오직 2번 열차 칸만이 조용했다.
[무의 극의를 깨우친 전사가 흥미로운 눈으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혼란을 초래하는 거인이 눈빛을 빛냅니다.]
[만개의 언어를 깨우친 자가 당신에게 강한 적대감을 내비칩니다.]
[천령독을 만든 소인이 당신을 바라보며 조용히 웃습니다.]
조용히 메시지창을 응시했다.
무의 극의를 깨우친 전사, 그는 두 번째 시련이자 Episode #2부터 시작될 무대의 배경인 ‘발바라’ 대륙에서 탄생한 검신劍神이다.
격을 초월했고, 그 단계에서 또 허물을 벗어던진 괴물중의 괴물.
그는 ‘선’계열의 신이다.
혼란을 초래하는 거인은 Episode #40부터 나올 ‘타이탄’에서 탄생한 신이고, 성향은 ‘중립 계열’이다.
그 밑에 두 신은 악신이고, 악신중에서도 그 성격이 괴팍하고, 괴랄 하기로 유명하다.
특히, 만개의 언어를 깨우친 저자가 진국이다.
진명은 ‘탈레리안’.
형님은 저자를 증오했다.
발바라 대륙에서 탄생한 신이자 악신 중에서도 서열이 상위권에 다다르는 괴물이지만, 저놈은 스스로의 힘으로 격을 초월한 게 아니다.
스스로가 인간이었지만 그 본질을 외면했고, 무려 수천만이 넘어가는 인간들을 악신에게 제물로 바쳐 강제로 격을 초월한 존재.
그리고, 저놈에 의해 오백 명이 넘는 시련자가 시련 도중에 죽어나갔다.
즉, 개새끼중의 개새끼라는 뜻.
이렇게 일찍 등장해주니 감개가 무량해질 정도다.
오지 않았다면 오히려 내 쪽에서 먼저 불러냈을 것이다.
조용히 눈을 감았다.
어렵게 구한 달모어 50년산을 형님과 마시던 그 순간이 떠오른다.
-#60을 진행하던 때였나.. 남은 시련자가 고작해야 50명도 되지 않았을 때 처음으로 놈들한테 쌍욕을 날렸었거든.
낄낄 웃던 형님의 모습이, 너무나도 선명하다.
-그 뒤로 내가 악신들에게 표적이 되었는데.. 그때 생각했지. 만약 내가, 조금만 더 일찍 악신들에게 표적이 되었더라면 어땠을까하고.
-그거 안 좋은 거 아닙니까?
-아니, 놈들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니까. 거기다 그건 더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거든. 그땐 몰랐어. 신들의 협약이라는 게, 꽤나 포괄적이고 신들의 개별 행동을 제한하는 부분이 굉장히 많다는 것을, 여하튼 걔네들이 할 수 있는건 퀘스트를 내려 주는 것 말고는 없어. 물론 번외 퀘스트기에 보상도 꽤 컸고.
간단하게 말하면, 신들을 자극해서 기존 에피소드를 뛰어넘는 또 다른 퀘스트를 얻어낸다는 뜻.
-그리고 가장 엿 같은 게 뭐냐면, 선과 악, 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다는 것은 결국 그 두 진영 전부를 버리는 결과를 만든다는 거야. 중립은 말할것도없고. 그걸 조금만 더 일찍 깨달았더라면 아마 최후의 에피소드.. 그러니까 최후의 시련까지 클리어했을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중간에 한눈 판 게 너무 많았어.
형님은 남아있던 술을 그대로 원샷하고는 정말로 후회하는 듯한 표정으로 무거운 말을 토해냈다.
-애초에 악신들은 버렸어야했어. 시련자들이 죽는걸 쾌락으로 여기는 밥버러지새끼들. 그놈들을 적대하면 선신들이 자동으로 우호적으로 변한다는 걸 조금만 더 일찍 깨달았더라면.. 쯧.
조용히 눈을 떴다.
메시지창이 눈에 보인다.
악신들의 표적이라...
형님은 항상 강한 모습만을 보여주었지만 나와 있을 때는 답지 않게 약한 모습을 자주 보여주곤 했었다.
자연스럽게 나는, 그런 형님이 했던 말들을 절대로 잊지 못한다.
내 표정이, 싸늘해진다.
대기실에서 생각했고, 이 순간 확실하게 결심했다.
이번 생에서 형님은, 절대로 그런 후회를 하지 않게 될 것이다.
“탈레리안.”
내가 갑자기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주변 분위기가 묘해진다.
하지만 메시지창은 달랐다.
[만개의 언어를 깨우친 자가 경악합니다.]
[만개의 언어를 깨우친 자가 당신은 도대체 누구냐고 묻습니다.]
[만개의 언어를 ....]
[혼란을 초래하는....]
[무의 극의를 깨우친...]
[시작을 알린 아룡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내가 누구냐고?
내가 미친것도 아니고 그걸 왜 말해줘?
평생 궁금해 해라.
시련자들 모두가 이변을 눈치 챘다.
그들이 상황도 잊고 홀로그램 메시지창을 바라본다.
마저 말을 이었다.
어조는 평소 답지않게 약간 무거운 어조로.
후우..
“진명을 버린 제국의 반역자이자 인류의 배반자여. 수없이 많은 동족을 제물로 바치더니 미쳐버린 것인가. 이명에 스스로를 숨기며 뒤에서 웃어대는 꼬라지가, 생각보다 참으로 가관이군.”
[만개의 언어를 깨우친 자가 할 말을 잃습니다.]
[만개의 언어를 깨우친 자가 극도의 분노를 표출합니다.]
[만개의 언어를 깨우친 자가 당신을 어떻게 해서든 쳐 죽이겠다고 소리 지릅니다.]
[만개의 언어를 깨우친 자가 당신은 ‘적’으로 규정되었다고 선언합니다.]
적으로 규정?
선언?
피식-
“당신에게 경고하지.”
[선善신들이 당신의 발언에 주목합니다.]
[악惡신들이 당신의 발언에 주목합니다.]
[중립中立의 신들이 당신의 발언에 주목합니다.]
“개수작 부리는 건 ‘머지않아’ 네가 뒤져서 달나라갈때나 쳐하시고, 지금은 그냥, 니 옆에 있는 악신 새끼들이랑 같이 주둥이 쳐 닫고 시련자들이 뭘 하는 지나 지켜봐. 보기 존나 좆같으니까.”
[악惡신들이 시련자 이도에게 강한 적대감을 품습니다.]
[선善신들이 시련자 이도에게 강한 우호감을 품습니다.]
[중립中立의 신들이 시련자 이도를 흥미롭게 바라봅니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게 세상이다.
내가 살아온 세상은 그랬다.
그리고 지금, 나는 하나를 버리고 두 개를 얻었다.
띠링!
[악惡신들이 5번 기차에 서브 퀘스트를 내주기를 요청합니다.]
[시스템이 악惡신들의 요구를 받아들였습니다.]
[선善신들이 5번 기차에 서브 퀘스트를 내주기를 요청합니다.]
[시스템이 선善신들의 요구를 받아들였습니다.]
띠링!
[이 퀘스트는 5번 기차 내의 모든 시련자에게 공통으로 적용됩니다.]
[시련자 ‘이도’를 죽이십시오.]
[보상 : 10,000코인 선택형 유물 아이템]
[제한 시간 : Episode #1이 끝날 때까지]
띠링!
[이 퀘스트는 당신에게만 적용됩니다.]
[살아남으십시오.]
[보상 : 10,000코인 선택형 유물 아이템]
[제한 시간 : Episode #1이 끝날 때까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를 바라보는 18쌍의 눈동자는 경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제 나한테 뒤는 없다.
자. 시작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