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이것 봐라?(2)
“제가 혹시 기분나쁘게 한 거 있나요?”
글쎄.
지금 기분 나쁘게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쎄쎄의 말 안에는 숨길 수 없는 장난기가 엿보이고 있었다.
됐고,
“안내자니까 안내 좀 해줬으면 좋겠는데. 나한테 알려줄 거 더 없나?”
내 말에 쎄쎄는, 잠깐 나를 뚫어져라 응시하더니 이내 어깨를 으쓱했다.
“좋아요. 내가 다 이해할게요. 우선 얻으신 코인으로 아이템을 사거나, 스킬을 사거나, 혹은 능력치를 올리실 수 있어요. 다만 말씀드렸다시피 이도님은 스킬을 획득하실 수 없으니 무조건 능력치만 올리셔야겠죠?”
그녀가 손을 휘젓자, 눈앞에 거대한 홀로그램창이 떠오른다.
그곳에서 쎄쎄는 어느 한곳을 가리켰다.
[능력치]라고 적혀있는 항목이다.
슬며시 눈매를 좁혔다.
1레벨에서 2레벨로 올리는데 필요한 코인은 250코인.
2레벨에서 3레벨은 500,
3레벨에서 4레벨은 750.
이거다.
이게 신들의 수작질 제 2탄이다.
적혀있는 숫자는 각각 9레벨까지.
나는 모르는 척 물었다.
“설마 모든 능력치는 레벨 9가 한계라는 말은 아니겠지?”
“물론 아니죠. 9레벨에 도달하시면 그 다음 것이 오픈되는 형식이거든요.”
순간 찌릿하고 무언가가 올라온다.
내 능력치가 9레벨에 도달하는 순간, 안내자는 다음 레벨을 오픈해준다.
즉, 내 능력치 창을 보지 못하는 신들이, 내 능력치를 알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더 웃긴게 있다.
신들의 수작질은 이게 끝이 아니라는 거다.
제3탄도 있고 4탄도 있다.
치밀하고 또 치밀한 놈들. 그게 신들이다.
시발.
들었을 때는 그러려니 했는데 직접 겪어 보니 더 엿 같다.
아무것도 모르는 시련자들은 각자 배당된 안내자에게 여러 가지를 물었을 것이다.
당연히 그중에는 능력치에 대한 것도 있을 것이고 유도신문 같은 것에 이끌리는 이들도 많겠지.
그리고 그 정보는 필터도 거치지 않은 채 네이키드 상태 그대로 신들에게 들어간다.
이게 어떻게 보면 좋은 거 일수도 있지 않겠냐고?
아니.
이면세계의 신들은 세 진영으로 나누어진다.
선善 계열과 악惡 계열. 그리고 중립中立 계열.
세 계열에 소속된 신들의 숫자는 비등비등하다.
하지만 악계열의 신들은 두 진영의 신들에 비해서 시련자들에게 뿌리는 ‘후원’이 더 후하다.
그 후원은 아이템이 될 수도 있고, 코인이 될 수도 있다.
그런 악신들이 가장 먼저, 누구를 노릴까.
생각 할 필요도 없다.
다른 시련자들에 비해 강하고, 능력치가 더 높은 이들을 타깃으로 삼는다.
안 그래도 성장이 빠른 ‘유망주’들한테 거부하지 못할 후원을 하면서 그들에게 힘을 주고, 동시에 그들의 성향까지 바꿔놓는다.
시발새끼들.
그래서 재능도 있고 강하기까지한 이들이 지구에서 잡으라는 몬스터는 안 잡고 인간을 착취했지.
나는 아직도 형님의 그 말을 잊지 못한다.
-악신들의 수작질에만 놀아나지 않았어도, 시련자들의 수준이 이렇게 개판까지는 안됐을 거야.
영웅이라 불리던 시련자가 인류의 희망이 되기까지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이들의 피가 흩뿌려졌다.
천천히 머리를 쓸어 올렸다.
-내가 말했다시피 우리는, 시련에서 죽으면 그대로 죽는 걸로 알고 있었거든.
방금 전, 지침서라고 했었나?
‘1. 시련자의 자격 박탈과 추방은 죽음과 직결한다.’
우습다.
시련에서 죽으면 말 그대로 죽는 게 아니라 ‘대기자’ 상태가 된다.
그 상태로 최후의 시련자가 시련에서 탈락하거나, Episode #100까지 모든 시련을 클리어 했을 때 그때 변화가 시작된다.
죽었던 시련자들은 ‘대기자’ 상태가 풀리며 모든 시련자들은 지구로 귀환한다.
실종되었던 8월 15일에서, 고작해야 2일이 지난 8월 17일로.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
이걸 그대로 지침서에 적어놓고 싶었지만 당연히 적지 않았다.
피식 웃고 말았다.
생각을 대충 정리하고는 현재 보유 코인을 확인했다.
[보유 코인 : 9250 C]
으음.. 고블린 한 마리당 50코인을 얻었고 내가 죽인 고블린은 정확히 35마리다.
그리고 튜토리얼#1 보상은 2천, #2에서도 2천. 거기에 족장을 죽인 500코인에 플러스 2500.
계산해보면 총 8750코인인데..
다시 보유 코인을 확인했다.
[보유 코인 : 9250 C]
왠지 500코인이 오버된다.
뭘까 하는 생각을 하려던 그때. 또 다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1에서도 족장을 죽이긴 했다.
한태식과 김예원, 그리고 나, 총 3명의 합공으로 죽였는데..
나한테 500코인이 들어와 있다?
아하..
내가 막타를 때렸구나.
여러모로 운이 따르네.
그대로 있는 코인 전부로 능력치를 올리려다 멈칫했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첫 번째 시련, 그러니까 Episode #1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무기가 하나 있다.
상점창을 둘러보았다.
머지않아 내 눈이 빛난다.
이거다.
‘그것’을 고르자, 쎄쎄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정말 그걸 사시게요?”
당황이 가득 묻어나는 어조다.
“안 되는 건 아니잖아?”
“...그렇긴 한데... 일단 알겠어요.”
나도 가능하면 이거 쓰고 싶지 않아.
진심이야.
*
‘상태창’
[이름 : 이도]
[칭호 : 이레귤러]
[고유 권능 : 예지력豫知力]
[스킬 : X]
[능력치]
[힘 : LV 7]
[민첩 LV 4]
[지능 LV 3]
[체력 LV 3]
달라진 건 딱 하나였다.
바로 힘 스텟,
나는 약 4천 코인을 힘 스텟에 올인 했다.
주먹을 움켜쥐자, 상당히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제 곧 첫 번째 시련, Episode #1이 시작 될 거에요. 천천히 마음의 준비하세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는 침대에 앉았다.
이미 컨디션은 최상이고, 피로했던 정신도 전부 회복된 상태.
물론 전부 대기실의 치료 효과다.
그렇게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그냥 넘기려고 해도, 근본적인 의문점 하나가 계속해서 내 머리를 어지럽힌다.
나는 어떻게 회귀를 한 걸까.
그리고 왜 시련자가 된 걸까.
모르겠다.
짐작 가는 것도 없다.
하지만 딱 하나, 확실하게 단언 할 수 있는 건 있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지구는 멸망한다는 거.
아니, 어쩌면 무언가를 해도 지구는 멸망 할 수도 있다.
어쩌면 그것이 정해진 시나리오의 결말이자 피할 수 없는 ‘운명’일수도 있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예지력이라는 능력과, 형님에게 들은 시련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들..
인정하고 싶지도 않고, 감당하고 싶지도 않지만, 나는 유일한 인류의 희망 일수도 있다.
깜깜한 내 머릿속에, 엿 같아서 잊고 싶고, 외면하고 싶은 기억들이 아른거린다.
파룡 바하무트에 의해 불타죽은 여동생과, 할머니.
그리고 지구에서 나와 함께 생사를 나눴던 사람들.
아직도 선명하다.
그들이 죽어가면서 내지르는 비명소리가.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지금부터 내가 할 일은, 나 말고는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단순히 힘을 얻는데서 멈추면 안된다.
내 주먹이 조금 더 강하게 쥐어진다.
나는, 지구를 구하기 위해서 그 어떤 짓이든 서슴치않고 행동할것이다.
목표가 확실하게 정해졌다.
“심정이 복잡한건 다 이해해요.”
문득 들려온 쎄쎄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제가 그 부분을 건드렸다면 미안해요. 사과할게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해맑은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첫 번째 시련은 조금 힘드실거에요. 부디 살아 돌아오기를 빌게요.“
고개를 끄덕였다.
복잡한 상황이지만 덧셈뺄셈을 할 정도의 정신은 남아있다.
처음 나를 병신으로 취급한건 뺄셈이지만, 깔끔하게 사과하는 건 플러스.
굳이 덧붙이자면 –1 2, 결국 남는 것은 플러스와 약간의 의구심이 전부였다.
속을 알 수 없지만 도움 되는 존재는 확실하니, 이용하자.
그러다 문득 잡생각 하나가 떠오른다.
쟤는 대체 몇 살일까.
실없는 생각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머릿속에 깊게 자리했다.
[대기 시간이 종료됩니다.]
[잠시 후 Episode #1으로 이동합니다.]
이내 빛 무리가 내 몸을 감쌌다.
*
기차였다.
철로에 연결된 기차는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다.
주변 풍경이 홱홱 하고 빠르게 뒤바뀐다.
뭘까.
높이가 수백 미터는 훌쩍 넘을 거대한 나무도보이고, 어마어마한 크기의 골짜기도 보인다.
절대로, 지구의 환경이 아니다.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어리둥절한 표정과, 떨리는 눈으로 주변을 바라보는 시련자들.
그때였다.
띠링!
알림음이 들려오자마자 퀘스트창을 읽어 내려갔다.
[Episode#1 생존]
[당신은 5번 기차, 2번 열차 칸에 탑승한 상태입니다.]
[1번 열차칸 20/20]
[2번 열차칸 20/20]
[3번 열차칸 20/20]
[4번 열차칸 20/20]
[제한 시간이 끝날 때까지 생존하십시오.]
[보상 : 5000 코인]
[제한 시간 - 60:00]
내용은 별게 없었다.
목적지 도착까지 남은 시간은 정확히 60분.
지금 카운트가 시작되었고 59분 58초가 되었다.
이 퀘스트를 해석해보면, 사실 별게 아니다.
그냥. 1시간동안 가만히만 있으면 된다.
하지만 그래서는 시련이라고 할 수 없겠지.
‘이번 시련은 조금 어려울거에요.’
쎄쎄의 말이 떠오르고, 연이어서 언젠가 들었던 시련자들의 넋두리가 떠오른다.
-첫 번째 시련, 거기가 지옥이었지.
다시 한 번 주변을 둘러보았다.
조금 당황했다.
몇몇의 얼굴이 낯익긴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이름도 기억난다.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철준, 고블린과의 전투에서 죽었지.’
그 옆에 있던 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여성이었다.
20대 중반의 여성.
‘성미령, 마찬가지로 고블린들과의 전투에서 앞서나가다 죽었고..’
내가 아는 몇몇의 얼굴, 확실하다.
그러니까...
이들은 ‘오래’살아남는 시련자가 아니다.
그게 뜻하는 것은 두 가지다.
지금, 이곳에서 죽은 보잘것없는 시련자이거나, 향후 악신들에게 휘둘려 시련 도중에 재능도 꽃 피우지 못한 채 사그라지는 시련자일 경우.
하지만 악신들에게 휘둘렸다고해도 그들의 힘은 약한 게 아니다.
확신하건대 고블린 따위에게 죽어 나갈 정도가 아니라는 뜻이다.
하... 말하고 나니 더 우습다.
오크도 아니고 고블린이라니.
두 번째 가정은 그대로 접었다.
하나가 남는다.
이들은 모두 이곳에서 죽어나가는 시련자다.
시발.
최악이다.
시선을 뒤쪽으로 옮겼다.
그쪽에도 사람들이 보였다.
힐끗힐끗 보이는 머리카락과 몇몇의 외모로 보아 음.. 동남아쪽인것같다.
저기는 5-3번 열차칸.
그러니까 20명의 동남아인.
열차의 구조상 연결통로는 문 하나다.
간단하게 말하면 문 하나만 열면 5-1번과 5-2번을 그리고 5-2번과 5-3번 사이를 오갈수있다는뜻.
이번에는 앞쪽 칸으로 시선을 옮겼다.
5-1번 열차칸, 그들은 분명 서양인들이다.
의자에 앉고는, 턱을 짚었다.
생각에 잠기려던 그때.
치직-칙
마이크 켜지는 소리가 들려오고.
[안내 말씀 드립니다.]
기계적인 목소리가 열차칸에 울려 퍼진다.
[본격적인 시련의 시작에 앞서, 여러분들께 개방된 두 가지 사항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열차 천장에 박혀있는 스피커로 시선을 옮긴다.
당연하게도 나는 다른 시련자들을 살폈다.
스피커폰에서 목소리가 뻗어 나온다.
[하나는 ‘칭호’ 시스템입니다. 그게 어떤 것이든 한번 획득한 칭호는 시련자분들과 동등하게 성장 할 것이며 그 성장 과정에서 시련자분들은 생각지도 못한 ‘힘’을 얻게 되실 겁니다.]
문득 ‘이레귤러’ 라는 칭호가 떠오른다.
시련자가 되었지만 페널티를 받는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페널티도 성장하나?
더 안 좋은 쪽으로?
‘그건 듣지 못했는데..’
여기를 클리어하고, 쎄쎄한테 한번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한 그때,
기계음이 다시 이어졌다.
[두 번째는 바로 ‘업적’ 시스템입니다. 업적은 시련자분들 개개인에게 주어지는 일정한 과제이며 구체적인 내용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업적의 보상은 코인이며, 당연히 업적의 질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보상도 거대해집니다. 이상으로....아.. 죄송합니다. 투자자분들이 이 말을 꼭 언급해달라고하시네요.]
나왔다.
문제의 투자자.
투자자분들이라고 뭉뚱그려서 말하긴 했지만 저건 ‘악신’들의 소행이 분명하다.
[지금과 같은 시련에서 누군가를 죽인다면 ‘살해자’라는 업적을 개방하게 되실 겁니다. 칭호와 비슷하지만 분명 둘의 성격은 다릅니다. 칭호는 최초 획득자에게만 적용되지만 앞서 말했듯 업적은 개개인에게 부여된 도전과제이기에 획득 제한이 없습니다. 이상입니다. 고객께서 즐겁고 편안하게 여행하실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그게 끝이었다.
이내 주변 분위기가 낮게 가라앉는다.
저 내용을 종합해보면 간단하다.
저건 싸움을 부추기는 것이다.
특히 최초 살해 보상이라고 언급한 부분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더 웃긴 건 저 살해 보상은 내가 알기로 고작해야 300코인이다.
고블린 6마리를 죽이면 나오는 코인과 동등하다는 뜻.
물론, 이건 나만 알고 있는 정보다.
나는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섬뜩한 눈빛을 한 몇몇과, 그래도 아직은 착해 보이는 시련자들.
하지만 공통적으로 그들 모두의 눈동자에 ‘경계심’이 서려있었다.
나는 직감했다.
이제부터.
이 열차에서는,
거대한 살육전이 벌어질 것이라고.
조용히 긴장의 끈을 끌어당겼다.
자... 이제 어떻게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