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를 한다는 건-5화 (5/131)

5화. 이번에는 다르다.(4)

콰직-

푸우욱-

우리는 고블린을 차례차례 죽였다.

한꺼번에 몰려온 건 45마리였지만, 실질적으로 달려드는 건 5마리에서 7마리.

솔직히 손쉬웠다.

튜토리얼이라는 단어가 이토록 어울릴 수가 없었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진다.

왜 예지 속에서는 40마리 전부가 달려든 거지?

혹시...

‘혼자 남는다면 모든 고블린이 달려든다.. 뭐 이런 건가?’

이런 정보는 그 누구에게도 들은 적이 없었는데...

그 생각과 동시에 실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일반인인 사람들이 이런 비상식적인 현실에서 살인을 저지른다?

그건 미친놈일 확률이 높다는거고, 그런 놈이 무슨 수로 개떼처럼 달려드는 고블린을 상대로 살아남을수있겠는가.

대충 생각을 정리하고 눈앞의 고블린의 면상에 주먹을 꽂았다.

주변을 살폈다.

나를 제외한 모두는 아직까지 ‘인간성’이 남아 있었다.

김예원은 겁먹은 것처럼 뒤에서 꼼지락거리며 화살을 찔끔찔끔 날리고 있었고 박철중은 무언가에 억눌린 사람마냥 이를 악문 채로 고블린들을 피하기 바빴으며, 한태식은 나처럼 주변을 경계하면서 한 놈씩 처리해가고있었다.

그러니까. 실질적으로 대부분의 고블린을 죽인 것은 나다.

시간이 조용히 흘러갔다.

나 혼자서 30마리가 넘는 고블린을 죽였을 때.

”으..으아악!“

박철중의 비명이 울려 퍼진다.

그는 남아있던 미약한 인간성의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억눌린 것을 토해내기라도 한 것일까.

그는 앞서나가더니 결국 어깨에 단검 하나를 허용하고만 것이다.

한심하다.

상황을 가볍게, 조금만 자세하게 언급하면, 나는 거의 전면에서 고블린들의 어그로를 끌고 있었다.

그때 뒤에 짱박혀있던 박철중이, 나도 이런걸 할 수 있다 라는걸 보여주려는 것처럼 앞으로 달려 나갔고 세 마리의 고블린과 대치했다.

그리고 칼에 맞았다.

쯧..

가볍게 혀를 차고 말았다.

콰앙-

발악하는지 강타를 사용해 고블린 한 마리를 날려버렸지만 아직 그에게 붙은 고블린은 두 마리가 남은 상황.

저 상황이면 죽음이 거의 확실시 되는 상황이다.

물론, 내가 그쪽으로 가면 그를 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가 않다.

벌써부터 저렇게 방심하고 머저리 짓을 하는 사람을 살릴 필요가 있을까?

지구를 구하는데 필요한건 ‘강한 시련자’이지. 그냥 ‘시련자’가 아니다.

합리화의 사유로는 충분했다.

그래도 심성이 착한 것인지 김예원은 아이스 에로우 하나를 집어던져 박철중에게 붙은 고블린 한 마리를 처리했다.

다만, 그게 전부였다.

결국 단검 하나가 박철중의 목에 꽂히고. 그가 쓰러진다.

띠링!

[Tutorial#1이 갱신됩니다.]

[당신은 10001번째 시련 후보자입니다.]

[‘정글’에 서식하는 고블린 무리를 처치하십시오.]

[고블린 47/50]

[고블린 족장 0/1]

[보상 : 시련자 자격 획득, (1000코인)]

[제한 시간 : 없음]

500코인이었던 보상이 1000코인으로 늘어났다.

그 순간, 나는 눈만 힐끔 움직여 ‘누군가’를 확인했다.

한태식.

찰나였지만 놈의 눈동자가 번뜩이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혼자 먹을 수 있는데 왜 나눠서 먹냐고 했던 예지속의 말이 떠오른다.

분명 이때부터였을 것이다.

저놈이 배신하기로 마음먹은 것이.

쯧, 싸이코 패스 같은 새끼.

생각을 접고 고개를 틀었다.

단검이 내 옆머리를 한 치 차이로 스쳐지나간다.

눈으로 목표를 훑고, 망설임 없이 주먹을 내질렀다.

콰직-

고블린 하나의 목이 절대로 꺾일 수 없는 방향으로 꺾인채 뒤로 멀리 날아간다.

바로 스텝을 밟고는 달려 나갔다.

그 와중에 바닥에 떨어진 단검 하나를 집어 들고는 박철중을 죽였던 고블린의 목에 칼을 꽂았다.

빠르게 몸을 돌리고는 아이스 에로우를 가슴에 얻어맞고 반죽음 상태인 고블린의 목을 짓밟았다.

고개를 돌렸다.

살아남은 고블린들은 없었다.

남은 것은 족장.

2m 크기의 거대한 체구를 자랑하는 족장이, 1m가 넘는 몽둥이를 들고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무거운 긴장감이 주변을 짓눌렀다.

약간이라도 환기시키려는 걸까.

한태식이 말했다.

”...이도야 예원아. 죽지마라. 우리는 끝까지 가자.“

단호한 목소리에 신뢰의 눈빛을 함께 담아 보내는 놈의 모습이, 정말로 역겹기 짝이 없었다.

네가 잘도 그러겠다 씹새야.

*

한태식의 말에 김예원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여자는 한태식을 진심으로 믿는듯하다.

이윽고, 족장이 달려든다.

그 순간 나는 웃고 말았다.

정말 안타깝게도 놈의 첫 번째 타깃은 내가 아닌 한태식이었다.

한태식이 경악한 얼굴로 손에 쥐고 있던 단검을 강하게 움켜쥔다.

동시에 족장의 몽둥이가 한태식을 향해 내려찍혔다.

그때, 이변이 발생했다.

한태식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움직임으로 스텝을 밟았고, 기적처럼 몽둥이를 피한 것이다.

그 순간, 나도 달려들었다.

지금 그 움직임.

확실하다.

저놈, 무술을 배웠다.

그것도 수준급으로.

심지어 그걸 또 숨기고 있었네?

귀여운 새끼.

내가 합류하자 아슬아슬 하던 상황의 무게추가 우리쪽으로 확연하게 기울었다.

신기하게도 나와 한태식은 호흡이 잘 맞았다.

내가 족장을 슬쩍 공격하면 족장의 균형이 무너지고 그 순간 한태식이 발을 휘두른다.

마치 태그 경기를 보는듯했다.

그 와중에도 나는, 계속해서 한태식을 관찰했다.

발놀림으로 보아.. 태권도인가?

호신술 수준으로 배운 게 아니다.

굳이 말하면 국가대표급이라고 해야 할까.

검사 임용에 무술 특채라도 있었던걸까

픽 웃고는 여유롭게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몽둥이가 스쳐지나간다.

지루함의 연속이다.

피하고 때리고, 살피고, 견제하고..

상황이 루즈해진다.

아무래도 끝낼 때가 온 것같다.

예지력에 대한건 상황 정리 좀 하고 천천히 생각해보기로하자.

한 번 더 족장의 공격이 나를 향해 휘둘러진다.

으음.. 저 공격을 피하고 한태식을 기습하고.. 놈을 방패 삼아 죽인뒤에 족장을 처리하는게 어떨까.

짧은 생각이었지만 꽤나 괜찮은 판단이다.

오케이. 그렇게 하자.

느긋하게 고개를 숙이자 몽둥이가 내 머리를 스친다.

자연스럽게 앞으로 달려 나가려 다리에 힘을 주려던 그 순간. 한태식이 뒤로 스텝을 밟으며 거리를 벌렸다.

내 입 꼬리가 살짝 꿈틀했다.

아쉽네.

아쉽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이거.

우연의 일치라기엔 너무 절묘하다.

순간 확신했다.

저놈도 어렴풋이 눈치 채고 있다.

서로의 배신을. 그리고 지금의 상황을.

슬며시 웃고 말았다.

오랜만이다.

이런 심리적인 싸움.

그런데..미안, 어울려 줄 생각은 없어.

그 순간.

”예원아!!!“

한태식이 외쳤고, 족장의 시야가 돌려진다.

약속이라도 했던걸까.

뒤에서 화살이 날아와 족장의 가슴에 박히고 한태식의 뒤꿈치가 족장의 낭심을, 그리고 조금 뒤늦게나마 내 주먹이 족장의 옆머리를 후려치는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털썩-

족장의 눈이 풀리고, 머리가 움푹 파인 채로 천천히 균형을 잃는다.

족장이 앞으로 쓰러지는 그 찰나의 순간,

한태식이 무언가를 결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나와 한태식의 눈이 허공을 사이에 두고 마주친다.

동시에 놈의 눈이 크게 떠진다.

내가 긴장을 풀지 않고 자리를 박차고 있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에.

놈의 눈에 당황이라는 감정이 들어선다.

그가 반사적으로 단검을 휘둘렀고 나는 달려 나가는 채로 고개를 숙였다.

스아악-

단검이 내 머리를 스쳐지나간다.

끝났다.

그가 힘을 숨기고 있든 아니든. 이 거리에서 이 정도의 빈틈이면 전부 무용지물이다.

나는 허리춤에 있던 주먹을 정면으로 내뻗었다.

퍼어억-

”커헉!“

한태식의 복부가 굽혀지는 것과 동시에 나는 뒤로 한발자국 물러섰다.

그리고 왼 주먹으로 놈의 머리채를 잡아채고 가차 없이 오른 주먹으로 놈의 면상을 찍어 눌렀다.

퍼걱-!

놈의 코가 가라앉고 안면이 찌그러진다.

그 충격 때문일까.

놈의 손에 쥐어져 있던 단검이 바닥에 툭 떨어진다.

그 속도와 거의 동일하게 놈의 몸도 털썩하고 쓰러졌다.

생각보다 충격이 컸나보다.

당연히 이게 끝일 리가 없다.

발을 들어 놈의 목을 찍어 눌렀다.

”켁..켁..이..이도야.“

”끝까지 연기하고 있네. 연기 대상 줘야겠어.“

놈이 애원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살짝 다리에 힘을 풀었다.

”왜.. 왜 이러는 거야.. 이도야..“

그런 한태식을 나는 싸늘한 표정으로 내려다볼 뿐이었다.

예지력.

나는 예지력이라는 힘을 얻었다.

의심 따위는 하지 않았다.

의심을 하려거든 애초에 내가 회귀를 했다는 것 자체를 의심했어야하니까.

지금은, 현재에 집중해야할때다.

그래, 예지력.

형님과 소수의 시련자들만이 획득했던 그 ‘고유 권능’이 나에게도 생긴 것이다.

하지만 이 예지력의 사용 방법이 애매하다.

고유 권능을 사용하는 자들을 본적은 많았지만, 대부분 ‘스킬’과 비슷한 형식으로 사용했었다.

하지만 나는?

내 머릿속에 그때의 상황이 그려진다.

한태식과 대화하고 있었고, 미묘하게 한태식이라는 남자에게 호감 비스 무리한 것을 품었다.

그때 첫 번째 예지가 발동됐고..

그 이후에는 한태식을 죽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두 번째 예지가 발동됐다.

그 미래가, 최악의 미래였다고 가정한다해도 너무나도 많은게 부자연스럽다.

내가, 이런 허접들한테 죽는다고?

아니지, 위기를 겪는다는 표현이 적절하리라.

솔직히 아무리 과장한다해도 그건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오만과 자만심, 그런게 아니다.

나는 직감이 정말로 좋다.

최고의 복싱 유망주라고 불렸던 그때부터, 지옥에서 살던 그때까지.

나는 그 직감 하나만으로 싸워웠으며, 사선을 넘나들었고 살아남았다.

어찌보면 시련자들보다 더 괴물같은놈은 나였을것이다.

그런 내가, 이딴 놈한테 죽을리없다.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할 이유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다.

내 마음이 조금 풀렸다고 해도 내 감각은 여전하다.

그렇기에, 더욱 더 말이 되지 않았다.

이 예지력은 대체 뭘까.

예지속에 등장하던 나와, 지금의 나는 분명 약간의 괴리가 존재했다.

감각도 평형을 이루지않았으며, 판단도 비슷한 부분은 있었지만 엄밀히 말하면 평행을 이루지않았다.

그렇다면... 예지속의 '나'는, 내가 아닌 또 다른 '나'인가?

평행우주도아니고.

시발.

너무 복잡하다.

잡생각을 지웠다.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본격적인 시련에 들어가기 전, 이 튜토리얼에서 나는 이 예지력에 대해 확실하게 알고 있어야한다.

어떤 방식으로 사용하는 건지. 혹은 어떤 식으로 발동이 되는 건지.

하다못해 이 예지력을 어떤 식으로 활용 해야 할지에 대한 감 정도는 잡아야 한다.

후우..

최대한 결론을 도출해보자.

저 두 가지 경우에는 단 하나의 공통점이 존재한다.

-내가 죽음과 가까워 지는 상황이 벌어지면 그때 예지가 발동한다.

잠깐.

순간 머리속에 번개가 쳤다.

젠장.

이 예지력이 정답이 아니다.

이건 힌트다.

말 그대로 힌트.

앞서 도출 했던 결론을 조금 수정했다.

내 예지력은.

-내 죽음과 가까워 지는 상황이 벌어지면 그때, 나에게 '경고'를 해준다.

이거다.

엄밀히 말하면 예지속에서 나는, 한태식에게 죽지않았다.

김예원에게 얼음 화살을 맞고 족장한테 안면을 가격당했어도 죽지는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 남을 자신이 있다.

나는, 지구에서 항상 내 몸과 생명력을 대가로 살아남았었으니까.

그런 위기는 일상이다.

예지력은 내게 위험을 경고해주었다.

그 경고가, 지극히 현실적인 입체감을 가지고 있던 것일 뿐.

그리고 지금, 미래가 완전히 달라졌다.

나는 위기도 겪지 않았으며, 비교적 온전한 몸으로 상황을 정리했다.

순간 웃음이 터져나올뻔했다.

이 예지력을 어떻게 활용 할지에 대해 명확한 길이 밝혀졌으니까.

이 예지력이 내려주는 힌트로, 새로운 정답을 도출해내는것.

머리속이 조금, 맑아졌다.

조금 가라앉은 눈으로 여전히 켁켁 거리는 한태식을 내려다보았다.

희미해져가는 놈의 눈동자가 내 시야에 한가득 들어온다.

만약에, 내가 지금 이 발을 치우고 이 남자에게 사과를 한다면?

모든게 오해였다고 말한다면?

그 상태에서 몸을 돌리고 이 남자에게 내 뒤를 보여준다면?

나 스스로가 그 위험을 인지하고, 그 속에 뛰어든다면?

그때도 내 예지력은 '힌트'를 내려줄까?

과연 예지력은 나의 위기를 방치할까 아니면 내게 경고를 해줄까.

매우 흥미로운 주제다.

그 순간.

찌이이잉-!

이명이 들려오는 것과 동시에 눈앞이 깜깜해졌다.

**

눈앞의 상황은 달라진 게 없었다.

아니 딱 하나가 달라졌다.

나는 발을 치우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한껏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다.

”죄송합니다. 제가.. 착각을 한 것 같습니다.“

”괜찮아. 쿨럭.. 그럴.. 수도 있지.“

그가 어색하게 웃는 순간,

후우웅-

푸욱-

”커헉-“

순간 내 명치에 ‘얼음 화살’이 꽂힌다.

시발-

너무 아프다.

그 자리에 쓰러지려던 찰나, 한태식이 바닥에 널부러져있던 단검을 움켜쥐고는 내 어깨를 찍어 누른다.

푸욱-

푸슛하고 피가 치솟는다.

나는 힘겹게 고개를 들어올렸다.

한태식이, 방금 전까지는 가면을 썼던 것처럼 너무나도 싸늘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본다.

”아.. 이 개새끼 눈치 존나 빠르네..“

섬뜩하다.

인간을 보고 섬뜩하다고 느낀 게 언제였는지 손에 꼽을 정도였는데, 지금이 그랬다.

역시 예지력으로 본게 맞다.

이놈은 개새끼다.

그리고 이 화살.

눈앞이 흐릿해지던 그때,

”아.. 오빠 뭐에요. 그러게 진작에 죽여 버리자니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잘못들은게 아니다.

김예원. 그녀가 분명했다.

고블린을 보고 울음을 터트렸던 그녀가, 저런 목소리로 말을 한다고?

미치겠다.

나를 죽이려던 놈은 한 놈이 아니었구나.

”지금이라도 죽였으니까 된 거잖아. 그리고 너 연기 잘하더라. 대상은 너한테 줘야겠는데?“

피식하는 웃음소리가 머리위에서 들려온다.

”됐고요. 여기서 나가면 제 전과기록 지워주셔야해요?“

”당연하지.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지워준다니까? 검사 못 믿어?“

...이 미친년 놈들이 지금 뭐라 씨부리는거야?

그러니까 날 죽이려고 두 연놈이 합작을 했다?

아니, 대체 언제부터??

이 상황이 뜻하는 건 하나다.

고블린들이 기습하기 전, 나는 한태식을 죽이겠다고 마음먹었고 그때 예지가 발동했다.

그 예지의 이유가, 고블린들이 쳐들어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니다.

예지력은, 내게 말 그대로 힌트를 내려주고있었다.

배신자는 한태식뿐만이 아니라. 김예원까지 둘이라는 사실을.

아니지.

박철중도 어쩌면 저 둘과 한배를 탓을 수도 있다.

그 순간, 내가 생각했던 몇 가지 의문점들이 하나하나 밝혀졌다.

불침번을 정할 때 반발의견은 없었다.

나와 한태식이 조를 이뤘고, 김예원과 박철중이 조를 이뤘다.

내가 그들을 일일이 감시했던것도 아니다.

분명, 그들이 나를 빼고 대화를 나눌 시간은 충분하다.

언제였을까.

나뭇가지를 모아오던 그때였을까?

그러고 보니 내가 한태식과 불침번을 섰을 때, 왜 김예원과 박철중은 잠을 자지 않았던 걸까.

그리고 한태식은 왜 내가 ‘일찍’ 자기를 바랬던 걸까?

아니, 혼자서 불침번을 서겠다고?

이런 비현실적인 상황에서?

하하...

역시, 결국에는 ‘왜’ 라는 의문점 하나가 남는다.

왜 내가 잠들기를 기다렸을까.

피식 웃고 말았다.

하나밖에 없지.

나를 죽이려고.

밖에 있는 고블린들보다 그 고블린을 가차 없이 죽이는 내가 더 위협적이라고 판단한걸까?

연쇄 살인범 운운하는게 문득 떠오른다.

솔직히, 나는 굉장히 유명하다.

나의 아버지는 무려 30명이 넘는 이들을 죽인 연쇄 살인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인 나는 최고의 복싱 유망주였다.

나를 아니 꼬워 하는 놈들이 단 한명도 없었을까?

아니, 내가 복싱을 관둔 이유는 그거다.

아버지가 연쇄 살인범이라는게 밝혀지고, 대한민국 전체가 나를 향한 증오로 들끓었으니까.

뭐라고했더라.

30명을 죽인 괴물의 아들이, 복싱으로 출세를 한다는 건 도의적인 문제인가 아니면 사회적인 문제인가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

어쩌구 저쩌구,

"그런데 태식 오빠, 우리 이래도 되는거에요?"

"뭐가 문젠데? 너도 봤잖아 이런 상황에서 당황 한번 안하고 지 애비가 사람 죽이듯 괴물들 죽이는 거, 우리가 이놈 안 죽였으면 이놈이 우리 죽였을걸? 나 검사야. 딱 보는 순간 알았지."

알긴 뭘 알아 시발놈아.

미치겠다.

웃고 싶은데 웃음이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더 미치겠다.

그때였다.

푸욱-

위에서 살 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커..컥... 오빠.. 왜....“

”왜긴 왜야? 혼자 먹을 수 있는데 나눠 먹는 게 이상한거지.“

피식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화아아악!!

현실로 돌아왔다.

내 표정은 여전했다.

얻고자 하는 건 얻었다.

내 예지력은 힌트다.

위기에 관한 힌트이자, 죽음에 가까워지는 상황을 경고해주는 등대.

그래, 이 정도면 충분하다.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내 발 밑에는 한태식이 쓰러져있었고, 밑에는 단검이 굴러다니...

에라이 시발새끼.

그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발을 들어 한태식의 목을 강하게 짓밟았다.

콰직-

무언가 부서진 것 같다.

그리고 그 반동을 이용해 대각선으로 몸을 굴렸다.

아니나 다를까.

방금 전까지 내가 있었던 곳, 그곳으로 얼음 화살이 스쳐지나가더니 퍼석하고 바닥에 틀어박힌다.

고개를 돌리자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는 김예원이 보였다.

하지만 찰나에 불과했다.

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녀의 표정이 돌변했다.

나약하고 연약한 평범한 20대 여자로.

”아..미안해요 오빠. 이게.. 저는 오빠를 도우려고 한 건데...“

표정 변화가 너무 자연스럽다.

가증스러웠다.

아니. 진심으로 역겹다.

이거 튜토리얼이라매?

그런데 시발 왜 이런 놈들 밖에 없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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