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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를 한다는 건-4화 (4/131)

4화. 이번에는 다르다.(3)

”이도야? 괜찮아? 갑자기 왜 그래?“

한태식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온몸에서 오한이 돋았다.

한겨울에 아이스버킷을 연달아 두 번 맞은 느낌이다.

방금 전, 내가 보았던 그거.. 뭐지?

예지력... 분명 예지력이라고했지?

그렇다면 지금 내가.. 미래를 본건가?

순간 운석을 맞던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하늘이 무너지고 지표면이 개박살 나고, 숨이 턱 막히며 모든 것이 부서지고 찢겨지고, 나라는 존재가 우주의 쓰레기가 되는 것 같은 서늘한 기분.

..젠장.

손발이 축축하고 이마에 땀이 난다.

죽음은 먼 곳에 있던 게 아니라 매우 가까운 곳에 있었다.

고개를 들어 한태식을 바라보았다.

걱정스러운 듯한 눈빛과 몸짓.

그 어느 것 하나 어색함이 없다.

방금 보았던 예지속 한태식의 모습과 전혀 매치가 되지 않을 정도다.

당황했고, 순간 멍했다.

극과 극을 달리는 그 성격 변화가, 이토록 위화감이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다?

이게 말이 되나?

사람이, 나처럼 지옥에서 살았던 것도 아닌 ‘평범한’ 사람이 이 정도로 급격한 변화를 보인다고?

한태식이 품에서 손수건 같은걸 꺼내더니 내 이마를 닦아내는 것을 지켜보다 결국, 한마디 내뱉었다.

”...괜찮습니다. 잠깐 현기증이 와서..“

”...그래?“

조금 굳어진 내 표정을 잠깐 응시하던 한태식이, 이내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내 표정이 꽤나 자연스러워보였나보다.

한태식이 작게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린다.

”너 안되겠다. 그냥 가서 쉬어. 대충 시간 보니까 2시간 정도 남은 거 같은데, 남은 시간은 그냥 나 혼자 서지 뭐.“

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본게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고 분명 미래에 벌어질 일이라면 한태식은 지금 ‘연기’를 하고 있는 거다.

...농담이 아니라 검사가 아니라 배우로 직업을 전향했으면 방송 3사의 연기 대상을 휩쓸었을 것이다.

내 모가지랑 모든 것을 걸고 장담할 수 있다.

후우..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러 갈 거냐고?

아니.

가봤자 잠이 올 리가 없지.

가슴을 꿰뚫던 그 감촉과 고통이 이렇게나 생생한데.

그리고 잘 생각도 없다.

”이도야 왜 그래?“

놈이 쌍꺼풀 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 안에 담긴 감정은 호기심과, 미약한 경계심.

아니다.

그 경계심이 조용히 선을 넘어 무언가로 뭉쳐진다.

너무나도 많이 봐왔던 눈빛이다.

무언가를 꾸미는 모략자들의 눈빛.

시발.

확실하다.

이 새끼는 지금 연기를 하고 있는 거다.

구역질이 난다.

나는 배신이라는 걸 눈뜨고 당할 정도로 병신은 아니다.

내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고 동시에 주먹이 쥐어진다.

놈을.

지금.

죽여 버리자.

작은 생각이 결심으로 거듭난 그 순간,

-찌이잉

이명이 들려오고 눈앞이 깜깜해졌다.

**

”끼익! 끽!“

시야가 빠르게 좌우로 움직인다.

동시에 내 주먹이 움직였고 눈앞에서 날붙이가 날아다녔다.

퍼억- 퍼어억-

콰직-

나는, 고블린들과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

내 몸놀림이 예전 같지가 않다.

둔하다고 해야 할까.

마치. ‘데미지’를 입은 상태로 움직이는 것 같다.

전환되는 시야 속에서, 나는 놓치지 않았다.

목이 부러진 채 죽어있는 한태식과 안면이 함몰된 박철중과 김예원을.

누가 저렇게 만들었는지는 생각 할 필요도 없었다.

나다.

내가 저 셋을 죽인 것이다.

고개를 숙였다.

스아악-

단검에 의해 잘린 머리카락이 하늘에 수놓아진다.

눈앞에 있었다.

지구에서 질리도록 보고, 질리도록 죽였던 고블린 족장. 분명하다.

그리고, 순간 내 머릿속에 정지혁의 말 하나가 떠올랐다.

-튜토리얼 #1이었나? 사람들이랑 밤에 자고 있었는데 고블린들이 기습을 하더라고. 다른 애들한테도 물어보니까 전개는 다 비슷비슷하더라. 처음 시작했을 때 5마리 쳐들어오고, 밤에 잘 때 45마리랑 족장이 한꺼번에 쳐들어오는 거.

혹시나해서 잠도 안자고있었는데. 운이 더럽게 없는건지 그 기습하는 타이밍이 지금이었나 보다.

젠장.

순간 ‘나’가 번개 같은 속도로 몸을 틀었다.

하지만 지친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지구에서의 감각과 지금의 감각은 차이가 있던 걸까.

푸우욱-

‘얼음 화살’이 내 옆구리에 그대로 틀어박힌다.

중심이 흐트러지던 그 순간, 족장의 주먹이 눈앞에서 짓쳐든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살짝 틀었다.

퍼걱-

젠장.

타점을 흩트리긴 했지만 방향이 안 좋았다.

뇌가 흔들린다.

중심을 잃고 한쪽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때, 나는 보았다.

안면이 함몰되어서 죽은 줄로만 알았던 김예원이, 한쪽만 남은 눈에 원망을 담은채로 나를 노려보고 있는 것을.

그렇게 눈앞이 깜깜해지고...

**

화아아악-

현실로 돌아왔다.

헉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시발..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이 예지력은, 진짜다.

생각하자.

생각을 멈추지 말자.

내 주력은 근접전이다.

지구에서 신체를 극한까지 몰아붙였고 죽은 시련자들이 남겨준 ‘아이템’들을 사용했으며, 결국 끝까지 살아남았다.

젠장.

왜 그 당연한 걸 생각하지 못했던 걸까.

지금 이 시점에서의 나는, 복싱을 그만두고 집밖을 나돌아 다니는 백수다.

삶의 목적을 잃고, 방황하던 내 몸은 확실히 ‘전성기’때의 몸이 아니었다.

그게 끝이 아니다.

나는 직감이 좋다.

일반인인 내가 어떻게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 살아 있을 수 있었겠는가.

나의 직감은, 정말로 초인의 그것을 능가할 정도로 뛰어나다.

그런 내가 이런 햇병아리 시련자들한테, 아니 햇병아리 시련 후보자들한테 죽는다?

이건 단순하게 몸 상태가 전성기 상태인지 아닌지의 문제가 아니다.

이 예지는 최악의 최악.

내가 방심하고 또 방심하고 계속해서 방심해서 벌어질, 최악의 행동들로 인해서 만들어지는 미래가 확실하다.

후우..

짧게 심호흡했다.

문제점을 하나하나 짚어보자.

왜 예지속에서 김예원은 살아 있었던 걸까.

아니, 그녀는 왜 내게 죽었던걸까.

그녀는 한태식에게 동조했던걸까?

젠장.

이게 아니다.

과정은 보지 말자.

결과만 보자.

내가 후환을 제거하는데 사용하는 '방법'은 매우 간단한 방법이다.

정확히는, 지구에서부터 내 방식은 하나였다.

목을 자르고 심장을 터트리는 것.

그런데 김예원은 안면만 박살났다.

순간, 눈매가 찌푸려진다.

머릿속에서 끌어당겨지던 줄이, 중간에 끊기는 기분이다.

내가 왜 그랬던 거지?

죽일 거면 확실하게 죽이던 내가, 왜 그런 실수를 한 걸까.

...내가 가정했던게 맞는 걸까?

이 예지는 방심의 방심, 그리고 내가 나의 직감을 무시하고 어쭙잖게 행동했을 시에 벌어지는 미래.

그러니까 실제로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실제와 가장 유사하게 벌어질 일...

예지가 중간에 끊겼다는 것도 미심쩍다.

나는 예지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게 맞는걸까?

헛웃음이 터져나올 정도다.

확실히 하자.

예지는, 내 죽음을 예지해준다기 보다는 죽음에 가까운 위기를 예지해준다.

젠장.

짜증이 치솟아오른다.

아니 답답하다.

저것도 맞는것같고, 이것도 맞는것같고, 여러 가지 추측이 머릿속을 헤집는다.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해가 완전히 내려앉아 어둠밖에 없는 정글.

그리고 내 시선이 조용히 대각선 쪽으로 움직였다.

내가 만든 간이 텐트에서, 자는 줄로만 알았던 박철중과 김예원이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나와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이, 동시에 흠칫하고 놀라더니 눈을 감는다.

자는 척을 하던 걸까 아니면 자다가 깬 걸까?

모습을 보니 저건 자는 ‘척’을 한 거다.

헛웃음이 터져 나온다.

단순히 잠이 오지 않았던걸까. 아니면 무언가를 기다리고있던걸까.

미치겠다.

나는 사람을 잘 믿지 않는다.

저 셋을 뼛속깊이 신뢰하거나 그런적은 당연히, 아니 애초부터 없었다.

가능하면 살리겠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을뿐이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이야기다.

저들이 내게 이빨을 들이민다면, 나는 그 이빨은 물론 턱주가리까지 모조리 뽑아버릴생각이다.

후우...

짧게 심호흡하며 대충 생각을 정리했다.

이제, 머지않아 고블린이 기습을 시작할 것이다.

확인 해야 할 것도 있으니, 조금만... 조금만 지켜보자.

다시 고개를 돌렸다.

걱정스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한태식과 눈이 마주친다.

그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내게 다가온다.

나는 짧게 심호흡하고는 한태식이 아닌 그 둘을 바라보며 말했다.

”안자는 거 아니까. 전부 일어나세요.“

”이도야 갑자기 왜 그래?“

한태식의 표정은, 다시 봐도 진심 같다.

그런데 그거 알아?

나도 너 못지않게 연기 잘하는 거.

나는 한껏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의 씨가 될 한 문장을 내뱉었다.

”고블린이 곧 쳐들어올 것 같습니다.“

”...응? 그게 대체 무슨 ..."

나를 제외한 모두의 표정에 당황이 서리던 그때,

“끼익! 끽!”

주변이 소란스러워진다.

밤이 깊었고, 해도 뜨지 않았지만 그런 건 시련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

김예원과 박철중도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쩝.

괜스레 입맛을 다셨다.

예지력이 30분만, 아니 10분만 더 일찍 발현되었더라면 어땠을까.

에휴..

슬며시 목을 풀고, 몸의 긴장을 끌어당겼다.

빠르게 달려오는 고블린들을 바라보다. 마지막으로 한태식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어깨를 툭 두드려주었다.

그가 그랬던 것처럼.

“긴장 푸세요. 지구로 돌아가서 저희 아버지 사건 재조사 해주셔야죠.”

그가 웃었고, 나도 웃었다.

솔직히, 시련자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만, 그렇다고 너무 많은것은 좋지 않다.

모순적이지만 그게 사실이다.

그리고, 이건 지구에서 벌어질 일을 겪은 나만 할 수 있는 말인데,

시련자들 중 한태식 같은 놈은 반드시, 무슨 수를 써서든 죽여놔야한다.

저런 놈은 몬스터가 아닌 인간을 등쳐먹을 새끼니까.

그런 한태식의 목숨이, 아주 잠깐 연장되었다.

바퀴벌레 같은 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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