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헬스레이드-195화 (195/197)

195 클리어(1)

불상은 마치 화통이라도 삶아 먹은 것처럼 미친 듯이 울어 댔다.

-으오오오오……!

“귀가 너무 아픈데! 그냥 부수면 안 될까요?!”

“……에라, 나도 모르겠다!”

한나는 오우거의 돌도끼로 불상을 있는 힘껏 내리찍었다.

쿠우웅!

아마 이 정도 타격이었다면 어지간한 보스 몬스터의 머리통도 남아나지 않았을 것이다.

허나 놀랍게도 불상은 여전히 그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끄오오오오오……!

“더, 더럽게 단단하네!”

“젠장! 더 시끄럽게 울잖아요! 아무래도 한 방에 불상을 부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는 게 좋겠어요!”

태하는 손을 휘 내저어 아공간의 틈을 만들어 냈다.

던전이 통합되기 시작하면서 태하는 그 어디에서나 몬스터를 소환할 수 있는 아공간의 틈을 열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의 손을 따라서 나온 것은 이블아이였다.

-크허어억!

“이블아이, 저놈을 스캔해 줘!”

-크허어어어!

이블아이의 눈에서 눈부신 빛이 쏟아져 나왔고, 불상의 머리와 몸통을 한 번에 훑고 지나갔다.

스스스스……!

불상의 상세 구조가 태하에게로 전해졌다.

그것을 살핀 태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것도 없어?”

스캔 결과에 따르면 저 불상은 안에 들어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상태라는 것이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기 위해 태하는 불상을 손으로 쥐었다.

끼이잉……!

“허, 허억!”

순간, 태하의 뇌리로 파고드는 뭔가 날카로운 것이 있었다. 그것은 마치 인간의 본성을 자극하는 두드러기와도 같은 것이었다.

불상을 만지는 순간, 태하는 무언가를 때려 부수거나 누군가를 때리고 쳐 죽이고 싶다는 파괴 본능을 느꼈다.

허나 태하는 자신의 충동을 억제하기에 충분한 인성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불상에서 가까스로 손을 뗄 수 있었다.

“으, 으으으윽!”

“헌터님 괜찮으세요?!”

“……저, 저거 만지면 안 됩니다! 살의를 느끼게 만들어요! 아마 우리가 1구역에서 보았던 그 처참한 몰골은 불상이 만들어 낸 극도의 살의에 의해서 그렇게 된 것이겠죠.”

“허어! 그럼 이걸 없애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이 물건은 세상에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물건입니다. 한마디로 모순 덩어리인 물체인 거죠.”

“그, 그게 가능한 건가요?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물건이라니.”

가만히 불상을 바라보던 아리사가 한마디 툭 던지듯 말했다.

“……그래요, 알 것 같아요! 내가 처음 이곳에 들어와서 느꼈던 감정도 딱 저랬어요. 뭔가를 부수고 싶고 죽이고 싶고, 심지어는 더 큰 자극을 느끼고 싶다는 막연한 감정을 갖고 있었죠. 지금 내가 변태적인 성향을 갖게 된 것도 다 그런 이유가 아닌가 싶은데요?”

“아아!”

“이제 이해가 되네요. 그 감정이라는 거, 상당히 모순적인 것이었어요.”

“변태적인 폭력성이 모순적이라고요?”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에요. 남에게 피해를 주는 건 범죄라고 배우며 살아왔죠. 하지만 인간이 도시를 이루고 국가를 건설한 이상, 남에게 피해를 주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이에요. 하다못해 동식물도 인간 때문에 서식지를 잃거나 남획을 당해 멸종하곤 하잖아요? 인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이 파괴한 지구를 되살리고 싶어 해요. 그게 바로 모순 아닌가요?”

“흠…….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나는 처음에 몬스터는 악하니까 변태적으로 죽여도 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저들이 아무리 징그럽게 생겼어도 분명 생명체임에는 틀림이 없어요. 하지만 그걸 어떻게든 잔혹하게 죽이겠다고 망치를 들고 연거푸 머리를 부수고 있죠. 이 감정, 모순이 아니면 무엇이겠어요?”

아리사는 던전에서의 12년 동안 일종의 득도의 경지에 오른 것이었다.

그녀는 불상을 손으로 들어 올렸다.

끼이이잉!

순간, 불상에 있던 악한 감정이 사라지더니 그 겉을 감싸고 있던 두꺼운 껍질이 벗겨지기 시작했다.

“타, 탈피?”

“허어! 이거, 그냥 불상이 아니었나 본데요?”

나무로 만들어졌던 불상은 이내 금동불상으로 변신해 버렸고, 그 얼굴에는 온화한 미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스칼렛은 이것이 바로 이스터에그라고 확신했다.

“이거야! 이게 바로 마지막 이스터에그라고!”

“허, 그럼 우리 이제 더 이상 고생하지 않아도 되는 건가요?”

“물론이지!”

그녀는 곧장 불상에 손을 가져다 댔고, 금동불상은 그녀의 몸으로 스며들더니 이내 온몸 구석구석에 금빛 문신을 새기기 시작했다.

아무런 고통도, 느낌도 없이 스칼렛의 몸에 자리 잡은 금빛 문신은 이내 더욱 밝은 빛을 뿜어냈다.

스스스스, 파앗!

금색 빛이 사그라질 무렵, 헬창스는 제5바벨탑의 마지막에 도달해 있었다.

그곳에는 금빛으로 일렁이는 포털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아리사는 그것이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터널?”

“터널이라니요?”

“제5바벨탑은 이계와 이어져 있어요! 포털 앞에 서니 그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어요!”

그녀는 포털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치지지직!

뭔가 생명체가 다가오자 포털은 무형의 장막을 펼쳐서 결계를 만들어 냈다. 아마 보통의 생명체가 이곳을 지나간다면, 형체도 없이 사라질 것이 분명했다.

허나 아리사는 멈추지 않았다.

꿀렁!

그녀가 장막을 지나가자, 아리사의 뇌리에 박혀 있던 폭력성과 모든 충동들이 한 번에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아……!”

“아리사? 괜찮아요?!”

“……번뇌가 사라진 느낌이 드네요. 이게 바로 진정한 극락이 아닌가 싶기도 한데.”

“드, 득도를 한 건가?”

장막을 지나자, 아리사의 미간에는 금색 점이 찍혔다. 그리고 그 등에서는 한 쌍의 금색 날개가 돋아났다.

한마디로 그녀는 설화에 나오는 대천사처럼 온화한 빛을 뿌리는 존재로 탈바꿈한 것이었다.

“아아! 각성했네요! 저, 바벨탑의 수호자가 되었어요! 그리고 이계의 포털을 조율할 수 있는 권한을 얻게 되었죠!”

“우와, 축하해요!”

“하지만 이계의 포털을 조율할 수 있는 능력을 얻고 보니, 몇 가지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문제라니요? 우리의 여정이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는 뜻인가요?”

“지구를 제외한 몇 개의 차원에는 바벨탑을 찾아서 원정을 떠나려는 세력들이 존재해요. 그놈들을 쳐부수고 이계의 포털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우리가 회수해 와야 합니다.”

바벨탑은 공략했지만, 아직도 싸움은 끝이 나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피곤하고 지치지만 태하는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갑시다, 그럼!”

“이제 이곳을 조금 더 흉악하고 흉측하게 만들어 볼까 싶어요. 인간은 이곳에 접근할 수 없도록 폭력성과 잔혹성을 더욱 키워 주는 곳으로 만드는 거죠. 그렇게 위장을 해 놓고 이계의 포털을 닫아 버릴까 해요.”

“……폭력성이 짙어지면 원정을 떠나는 것조차 불가능해질 테니?”

“그래요. 애초에 이곳이 인간의 폭력성을 자극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던 거죠. 만약 협동심이 강했다면 제5바벨탑은 진즉에 정복되었을 거예요.”

바벨탑의 수호자들이 탑을 이렇게 희한하게 만들어 놓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제 태하는 잠시 쉬었다가 포털을 타고 모험을 떠나기로 했다.

“일주일간 준비하고 다시 돌아오자고요.”

“오케이!”

***

태하와 동료들이 바벨탑을 정복했다는 소식은 삽시간에 언론을 타고 공개되었다.

비록 헬창스가 언론에 자신들을 노출시키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바람에 자세한 인터뷰는 공개되지 못했다.

허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제부터 그 어떤 누구도 바벨탑을 노릴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며칠 전에 파이어볼이 화이트홀을 뚫고 던전에 진입하려고 했다가 처참한 주검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제는 던전의 방어기제가 작용하기 시작한 거죠.”

“드디어 제 모습을 찾았네?”

“이게 다 주인님 덕분입니다.”

태하는 길고 긴 여정을 떠나기 전에 유리아에게 던전을 맡겨 놓을 참이었다.

세세한 부분까지 지침을 주느라 3일 밤낮을 꼬박 지새웠지만 두 사람에게 피곤함이란 찾아볼 수 없었다.

“던전은 이제 단단히 방비되었고, 나는 길을 떠나기만 하면 되는 건가?”

“포털을 넘나드는 것은 너무나도 위험한 일입니다. 굳이 가지 않으셔도 충분히 방어는 가능할 것입니다만.”

“아니, 방어만 해서는 안 돼. 예방을 해야지.”

“……예방이라.”

“아무튼 나 없는 동안 바벨탑을 잘 부탁해.”

유리아는 다소 복잡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 아무래도 태하를 먼 타지로 보내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태하는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며 안심시켜 주었다.

“난 죽지 않아. 너도 잘 알겠지만, 나는 죽으려고 바벨탑의 수호자가 된 게 아니거든.”

“압니다. 하지만 불안한 건 어쩔 수가 없네요.”

“하지만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야. 이 일만 끝나면 이제 억겁의 시간 동안 평화롭게 지낼 수 있어.”

유리아는 비록 기껍지는 않지만 자신의 주인을 보내 주기로 했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었다.

“좋습니다. 미련 없이 보내 드릴게요.”

“그래, 고마워.”

“하지만 지구에 다시 돌아오셨을 때에는 제게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선물을 주셔야 할 겁니다.”

“선물?”

“제가 이 세상에서 가장 원하는 것이요.”

“……아아?”

“그렇다면 제가 미련 없이 보내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

출정 이틀 전.

태하는 희란과 영화관에서 영화도 보고 팝콘도 먹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두 사람이 이런 시간을 보내는 건 지극히 일상적인 일이었지만, 오늘은 그 의미가 좀 남달랐다.

“각자 있을 곳을 찾았으니, 앞으로의 삶을 좀 설계할 필요가 있겠지?”

“뭐, 그렇기는 하죠. 대장은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데요?”

“이미 이계와 지구가 어떻게 연결된 것인지는 알아냈어. 하지만 지구와 은하계 어딘가에 숨어 있을 위험 요소들은 찾아내지 못했지.”

“이를테면 저번에 그 냉동원처럼 말이에요?”

“그래! 이 일이 끝나면 그것을 찾아서 떠날 생각이야. 탐사선에서 헬스 좀 하면서 말이지.”

“오호, 좋은 생각이시네요.”

“넌 어때? 이젠 불명의 존재가 되어 버렸잖아.”

“함께 탐사에 동참하라는 건가요?”

“너만 원한다면.”

가만히 태하를 바라보는 희란.

그녀는 깊이 생각에 잠겨 있다가 돌연 이런 말을 꺼냈다.

“지금까지 나는 대장과의 미래만 생각해 왔어요. 그게 남녀 관계든 아니든 말이죠.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내게 대장은 남자 그 이상의 존재였던 것 같아요.”

“남자 이상의 존재라?”

“얼마 전, 대장이 유시연 그 불여시 같은 것이라든지 빅토리아 그 깍쟁이 양키 같은 것들이 군침을 흘릴 때에 잠깐 눈이 돌아갔었잖아요?”

“그, 그랬던가?”

여자들의 알력 다툼에 잘못해서 새우 등이 터질 뻔했던 태하는 당시를 회상하면 그저 아찔하기만 했다.

허나 희란은 이제 그 모든 것을 초월해 버렸다.

“생각해 보니까 내가 왜 그랬는지 알 것 같아요. 나의 우상이 더럽혀지는 꼴을 보기 싫었던 거죠.”

“……우상이라니. 좀 감동인데?”

“그런데 내가 대장이랑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다고 생각해 보니, 그건 좀 아닌 것 같았어요.”

“뭐야, 나 지금 고백하기도 전에 차인 거야?”

그녀는 태하 때문에 결혼까지 미뤘었고 마냥 헬창스가 좋아서 남자도 만나지 않았었다.

그게 어쩌면 태하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겠지만, 희란은 사랑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음을 깨달은 것이었다.

“난 대장을 존중하고 사랑해요. 하지만 이 애정은 남녀 간의 애정, 뭐 그런 건 아닌 것 같아.”

“남매간의 우애, 뭐 그런 건가?”

“그래요. 그것과 가장 비슷하다고 볼 수 있겠네요.”

“허어, 그랬구나. 하긴, 나도 네게 결혼이라는 이슈를 꺼내는 것부터가 좀 망설여지긴 했어. 분명히 너를 아끼고 소중히 여기고 있었지만 말이야.”

희란은 태하에게 청금석으로 만들어진 펜던트를 건네주었다.

청룡방이 사용하는 명패의 재질과 같은 것이었다.

“우리 우정의 징표예요. 앞으로 과연 어떤 여자를 만나게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말의 죄책감이라도 혹시 있었다면 이제 털어 버리고 자유롭게 살아요. 나도 그렇게 살 테니까.”

“……고맙다. 우정의 징표라니. 솔직히 나, 감동받았어. 나를 이렇게까지 생각해 주다니 말이야.”

어쩌면 태하와 희란은 처음부터 가족이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의 이 감정은 가족애가 조금 더 깊어진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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