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 제5바벨탑(2)
제1구역의 몬스터들을 쓸어버리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30분 남짓.
이제는 거대한 괴수를 쓰러뜨릴 차례였다.
“블랙라이트!”
태하의 명령에 따라 스켈레톤 매지션들은 주변을 환하게 밝히는 검은색 구체를 공중으로 쏘아 올렸다.
블랙라이트는 홀리라이트와는 다르게 주변을 어두침침한 정도로 밝혀 주는 역할을 한다. 때문에 공중으로 고개를 올려도 눈이 부시지 않아 전투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었다.
다만 이 마법은 산 자는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은 사용 불가였다.
“덕분에 주변이 잘 보이네요!”
“메이지, 대단해!”
-크헬헬!
메이지는 동료들과 하이파이브를 했다.
짝, 짜자자작!
이제는 메이지도 헬창스의 멤버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들은 끈끈한 전우애로 똘똘 뭉쳐 있었다.
이주현은 메이지의 곁에서 망원경으로 거대 괴수의 모습을 관찰했다.
“……이야, 큰데요?! 엄청나게 커요!”
“저 녀석의 전투력은 얼마나 될까요?”
태하의 질문에 아리사는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제1바벨탑으로 따진다면 그레이트 오우거 정도?”
“그럼 어지간한 헌터들은 아예 제1구역도 지나갈 수 없다는 뜻이 되잖아요? 지금 그레이트 오우거는 과거 30층 보스와 맞먹는 전투력을 갖고 있는데요.”
“맞아요! 거대 괴수의 전투력은 상당히 높은 편이죠.”
“허어, 그럼 30층까지는 도대체 어떻게 간 겁니까? 이 정도 전투력에 주변이 그렇게 어두웠다면 전투를 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을 텐데.”
“이곳에서 오래 지내다 보면 감각으로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시점이 와요! 물론, 그동안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겨야 하겠지만요.”
그야말로 무식하기 짝이 없는 도전 방식이었다. 허나 이런 방식은 태하와 별반 다르지 않았기에 헬창스는 그러려니 하고 수긍했다.
그보다는 이제부터 맞서야 할 저 괴수를 처리하는 문제가 더 심각했다.
태하는 괴수의 공략법에 대해 물었다.
“어떻게 죽이면 됩니까? 저 이상하게 생긴 괴물 말이에요.”
“뭐, 그렇게 특별할 것 없어요. 보통의 몬스터처럼 그냥 두들겨 패면 알아서 죽더라고요.”
“……두들겨 패요?”
“헤헤, 내가 시범을 보여 줄까요?!”
순간, 아리사의 눈동자가 광기로 번쩍이는 듯했다.
태하와 동료들은 그저 가만히 서서 그녀의 활약을 지켜보기로 했다.
“원하신다면야…….”
“히히, 좋아요! 그럼 내가 시범을 보여 줄게요! 잘 봐요!”
마치 떡메처럼 생긴 뭉뚝한 망치를 들고 다니는 그녀는 온몸이 연금술로 만들어진 장비로 무장이 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도약 한 번을 하더라도 무려 5미터 이상을 뛰어오를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낼 수 있었다.
-쿠오오오오!
“앗, 온다!”
“……뭐야, 생긴 게 왜 저래?”
“왜요? 귀엽기만 한데!”
“와, 보는 눈이 일반인이랑은 완전히 다르네. 저 촉수 괴물이 귀엽다는 거예요, 지금?”
“헤헤, 귀여운데?”
톱니 모양의 주둥이에 촉수가 여럿 달린 괴물, 거기에 눈알은 거의 50개 이상 있어서 저게 지금 정상적으로 움직여도 되는 물체인지 가늠이 잘 안 될 지경이었다.
오랜 세월 던전에서 살았던 태하마저도 그 괴기스러움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확실히 보는 눈이 특이하긴 하네요.”
“아무튼 오늘은 제가 저 아이를 좀 교육시켜 볼게요!”
사람을 이해하고 못 하고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 던전을 얼마나 더 슬기롭게 빠져나갈 수 있느냐, 바로 그것이었다.
태하는 그녀가 하는 것을 그냥 지켜보기로 했다.
파바바밧!
아리사는 무려 7미터나 도약하더니, 이내 촉수 괴물의 머리통을 있는 힘껏 후려갈겨 버렸다.
콰아아앙!
그 힘이 어찌나 강력한지, 사방으로 파장이 울려 퍼지면서 대지가 진동할 정도였다.
망치질 한 방으로 눈앞이 멍해진 녀석은 그대로 휘청거리더니 가까스로 중심을 잡기 시작했다.
아리사는 그대로 팔을 걷어붙이더니 망치를 계속 휘둘러서 때린 곳만 또 때리기 시작했다.
빠각, 빠각, 빠각!
점점 함몰되기 시작하는 괴물딱지의 머리통. 허나 그녀는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지으며 놈을 계속해서 공략해 나갔다.
“한 대, 두 대, 세 대!”
한 방씩 망치가 꽂힐 때마다 녀석은 그야말로 괴성을 지르며 괴로워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아리사의 눈에서는 말로 형언하기 힘든 광기와 희열 같은 것이 느껴졌다.
-끄어어억…….
생명력을 잃어버린 괴물.
아리사는 확인 사살 차원에서 놈의 머리통을 한차례 더 후려갈긴 후, 두 손을 모아 합장했다.
“부디 좋은 곳으로 가시길!”
죽음 직전에 애도를 하는 것까지, 그야말로 완벽한 레이드가 아닌가 싶었다.
더할 나위 없이 깔끔한 그녀의 사냥 방식에 태하는 그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
“어때요? 쉽죠?”
“그, 그러네요.”
“헤헤, 그럼 다음 구역으로 넘어가 볼까요?!”
제5바벨탑의 수호자는 원래부터 약간 변태 기질이 있었던 것일까?
***
제2구역에서의 전투는 1구역과 별반 다를 것 없이 엄청난 숫자의 몬스터가 몰려들어 태하와 일행을 공격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허나 태하의 일행이 워낙 강력하다 보니 거대 괴수들을 잡는 것만이 메인이벤트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서걱!
고영수의 검이 괴수의 목을 스치자, 그야말로 썩은 두부처럼 허물어져 내렸다.
그는 검에 묻은 피를 닦아 낸 후, 칼집에 검을 넣었다.
그러자 아리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으음,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니라니?”
“몬스터는 자고로 때려서 죽여야 제맛인데!”
“……무슨 레이드에서 손맛을 따집니까?”
“뭐, 그냥 그렇다는 거죠. 헤헤, 그렇다고 화를 내시는 건 아니죠?”
“아닙니다. 그냥 좀 놀라서 그런 것뿐입니다.”
천하의 강심장인 고영수마저도 당혹스럽게 만들 정도로 그녀의 사고방식은 일반인이 이해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허나 깊이 생각해 보면 그녀의 이런 성향이 아주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아리사 씨. 혹시 예전부터 쭉 이런 특이한 성향을 갖고 계셨어요? 반드시 몬스터는 때려서 죽인다든지, 뭐 그런 것들이요.”
“아니요! 저는 원래 개미 새끼 하나 죽이지 못했어요! 하지만 던전에서 친구를 잃고 난 후에는 몬스터를 죽이는 데 가책이 사라졌죠. 그리고 그게 오래 쌓이다 보니 죽이는 걸 즐기게 되었고요. 물론, 인간은 죽이지 않아요. 그건 미친 행동이니까요.”
“역시…….”
이 던전은 사람의 폭력성을 끌어내는 곳이 틀림없었다.
아리사가 대단한 것은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던전에서 12년을 버텼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한마디로 그녀는 스스로를 컨트롤하는 능력이 그야말로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뜻이었다.
이것은 공포를 다스리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경지일 수도 있었다.
짝짝짝!
로드리고는 그녀에게 박수를 보내 주었다.
“대단하군! 나는 하라고 해도 못 할 일인데 말이야.”
“여기서 살다 보면 다들 그렇게 돼요.”
“하지만 말이야, 스스로를 컨트롤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야. 만약 이 폭력성이 변질되어서 인간에게로 향했다고 생각해 봐. 끔찍하지 않아?”
“으으, 그건 생각해 본 적 없어요. 무섭고 징그럽잖아요! 인간이 인간을 공격하다니!”
아직도 제대로 된 인성을 간직하고 있다니, 정말 대단한 사람이 아닐 수 없었다.
태하와 일행들은 그녀를 따라서 순식간에 제5구역까지 갔다.
5구역부터는 제법 몬스터의 레벨이 올라간다고 했는데, 스켈레톤 군단이 워낙 막강했기에 그것도 별로 소용이 없었다.
일행들은 제4바벨탑에서도 이런 식으로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아니, 저번에는 왜 이런 생각을 못 했었지?”
“그곳은 정신을 지배하는 곳이잖아. 이런 생각이 안 들 만도 하지.”
“아하! 그렇구나! 제4던전은 사람의 생각까지 지배하는 곳이었던 거야!”
“우리가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맨몸으로 던전을 돌파할 생각은 하지 않았겠지. 한마디로 우리는 미쳐 있었던 거야.”
무한의 소환술사라는 타이틀에 걸맞은 소환만 했어도 제4던전에서 그토록 힘들게 버틸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신력이 왜 중요한지 알려 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계속해서 안쪽으로 들어가는 태하와 동료들.
6, 7, 8, 9구역을 차례대로 지나 10구역에 도달한 그들은 오래된 사찰과 마주했다.
아리사는 이 사찰이 이전에는 본 적이 없었던 것이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 지금까지 못 봤던 건데?”
“없던 사찰이 갑자기 생겼다고요?”
“네! 이것 참 이상하네.”
“흠, 그럼 일단 안으로 들어가 볼까요?”
아직 몬스터가 몰려들기 전이었기 때문에 헬창스는 아주 여유롭게 사찰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끼이이익.
문풍지는 다 삭아서 바람이 숭숭 들어왔고 나무로 만든 사찰 이곳저곳에는 자욱한 먼지와 거미줄이 서로 뒤엉켜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으스스한 게, 꼭 귀신의 집에 온 것 같네.”
“……느낌이 썩 좋지는 않은데요?”
그냥 서 있는 것만으로도 뭔가 안 좋은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이상한 직감이 느껴진다. 지금까지 살면서 이렇게까지 불길한 건축물은 난생처음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일행들은 이곳을 더 둘러볼 것도 없이 밖으로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허나 바로 그때, 이들의 발길을 붙잡는 것이 있었다.
두근, 두근!
“엇?! 뭔가 느껴지는데?”
“스칼렛……?”
“있어! 곰탱아! 너도 느껴지지?”
고개를 끄덕이는 예티. 태하는 가던 길을 멈추고 두 사람이 시선을 집중시키는 쪽으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잘하면 이곳에 이스터에그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윽고 태하를 따라서 다 같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서 사찰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희란이 뭔가 발견하곤 태하를 불렀다.
“대장! 이쪽이요!”
“왜? 뭔가 있어?!”
“불상의 눈동자가 좀 이상한데요?”
“이상하다니? 정확히 어떻게 이상하다는 건데?”
불상은 나무로 만들어졌고 상당히 오래되어서 이목구비를 구분하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허나 그 눈빛만은 아직도 또렷하게 살아 있었다.
“저게 왜…….”
“눈을 잘 쳐다봐요. 지그시 눈을 맞춰 보세요. 그럼 뭔가 이상한 점을 느낄 수 있을 거예요.”
태하는 희란의 말처럼 불상에 눈을 맞춰 보았다.
삐이-.
귓가에 잔잔한 이명이 들릴 정도로 불상의 눈동자에 집중했다.
허나 아무리 쳐다봐도 이상한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에이, 아무것도 없는데?”
“그래요? 분명히 눈동자가 움직였던 것 같은데?”
“눈동자가 움직여? 말도 안 돼!”
태하는 장난치듯 불상과 눈을 맞추며 좌우로 한 발자국씩 걸어 보았다.
스윽.
“……어?”
“움직였죠! 그렇죠?”
부릅뜬 불상의 검은자가 태하의 움직임을 따라서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보인다. 심지어 눈알이 움직일 때마다 흰자위에 있던 붉은 실핏줄의 생김새도 달라졌다.
한마디로 불상의 눈은 살아서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지, 진짜네?!”
“맞죠?! 내가 헛소리할 사람이 아닌데 참!”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예티는 성큼성큼 걸어 불상의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곤 손을 뻗어 불상의 눈알을 만져 보았다.
물컹!
-크, 크울?!
깜짝 놀란 예티는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았다.
쿠웅!
이윽고 그 충격으로 인해 기우뚱 옆으로 눕기 시작하는 불상.
-……으오오오오!
불상은 돌연 입을 벌리더니 요상한 괴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으으, 귀청이야!”
“……뭐야, 저거 진짜 살아 있는 불상이었던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