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 제5바벨탑(1)
제5바벨탑은 유라시아 북부 세베르나야제믈랴 제도에 위치하고 있다.
북극해 인근에 접해 있으며 사실상 유라시아 최북단에 걸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지 면적의 대부분이 빙하로 뒤덮여 있는 이곳은 1930년대에 발견되어 러시아로 편입되었고, 지금까지 지구상에서 가장 추운 곳 중에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허나 얼마 전부터 이 근방에 제5바벨탑이 들어서는 바람에 그나마 거주하던 인구는 거의 다 사라졌고 던전의 원정을 위한 인력만 기지촌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휘이이잉……!
“……황량하네요. 원래 세베르나야제믈랴 제도가 이런 분위기였던가?”
“70년대부터 주변이 황폐화되기 시작하면서 이런 모습으로 변했다고 들었어요!”
던전 인근은 잿더미뿐이었고 사방 천지가 죄다 자욱한 안개로 둘러싸여 있었다. 마치 대화재라도 일어난 느낌이었다.
허나, 세베르나야제믈랴 제도 전체에 불이 날 정도면 도대체 얼마나 큰 규모였고, 어째서 그것이 지금까지 연기를 내뿜게 만들고 있는 것인지 절로 의문이 들 수밖에는 없었다.
태하는 짙은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세베르나야제믈랴 제도의 중심이자 가장 큰 섬인 옥탸브리스코이레볼류치 섬을 찾았다.
과거 이곳은 ‘10월 혁명의 섬’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곤 했는데, 지금은 그 어떤 관광자원도 살아남지 못한 채 섬 전체가 아직도 불에 타고 있었다.
“불에 탄 지가 벌써 50년도 넘었다는 얘기잖아요?”
“네, 맞아요! 아직도 섬에는 연기가 자욱해요! 가끔가다 던전으로 가는 길에 사람이 실종되기도 하는데, 한번 실종되면 찾을 수가 없다고 하더군요.”
전체적인 느낌은 제4던전과 정말 비슷하긴 한데, 그 스케일 자체가 아예 비교가 안 될 정도였다.
현재 이곳은 러시아가 통제를 포기했고 바벨탑 관리기구인 제네시스와 국제헌터협회에서 공동으로 관리하고 있었다.
아리사는 일행들을 이끌고 능숙하게 길을 찾았다.
자욱한 연기 때문에 도무지 앞이 보이지 않는데, 대체 어떻게 길을 찾아가는 것인지 의문이었다.
섬에 닿은 지 무려 3일 만에 전진기지에 도착했다.
“짜잔! 여기가 바로 바벨탑 전진기지예요! 여기서부터는 본격적인 던전의 영역에 들어오는 것이라서 방사능 수치가 기준치의 무려 3,600배나 올라가죠.”
“……무지막지한 힘을 뿜어내고 있네요.”
세베르나야제믈랴 제도의 전체적인 풍광이 폐허였다면, 제5바벨탑 인근은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었다.
만약 인간이 천인공노할 죄를 지어서 지옥에 떨어진다면 딱 이런 곳에서 살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태하는 일단 그녀를 따라서 차분히 걸었다.
끼익, 끼익…….
던전의 입구로 추정되는 곳에는 ‘출입 시 모든 책임은 본인에게 있습니다’라는 푯말이 걸려 있었다.
지금까지 그 어떤 던전에서도 사람의 죽음을 이렇게까지 직접적으로 거론한 적은 없었는데, 그만큼 제5던전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는 뜻이었다.
“이곳에 들어가서 살아 돌아온 사람은 거의 없어요. 100명이 들어가면 90명은 죽어서 나오죠!”
“……아니, 그런데 당신은 이런 미친 소굴에 제 발로 드나들었단 말인가요?”
“헤헤, 들어가도 살아남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요? 게다가 들어갔다 나오기만 하면 레벨업이 아주 쭉쭉 되는데 들어가지 않을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
그야말로 대단하다는 말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그녀는 그야말로 담력이 가히 저세상 담력이라는 소리였다.
일행들은 준비한 장비들을 착용하고 바벨탑 안으로 들어갔다.
끼이이잉!
제5바벨탑은 지금까지 이들이 겪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구조였다.
이곳은 위아래로 층이 나뉜 것이 아니라 구역과 구역이 나뉘어 있었고, 깊숙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던전의 난이도가 높아지는 형식으로 되어 있었다.
“이곳은 편의상 층이라고 부르는 거지 구역이 나뉜다고 보면 될 거예요. 그래서 정확한 명칭은 층이 아니라 에리어라고 부르죠.”
“에리어라. 그럼 제1에리어, 제2에리어, 이런 식으로 부르는 건가요?”
“네, 맞아요! 제100에리어가 마지막 관문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사실 그게 존재하는지도 아직 잘 몰라요. 제30에리어를 돌파한 사람이 아직 없거든요.”
“……극악무도한 난이도인데.”
“헤헤, 그래도 익사이팅해요! 저도 30층까지 가 본 적이 있었는데, 거대 괴수가 아주 인상적이었죠.”
“이런 미친 난이도에 거대 괴수까지 등장한다고요……?”
“네, 그럼요! 여긴 인간형 몬스터가 대부분이지만, 각 에리어에 20마리 정도 거대 괴수가 서식하고 있어요! 잘못하면 그대로 피떡이 되고 말죠!”
도대체 아리사는 어떤 인생을 살아온 것일까?
태하와 일행들은 우주에서 사용할 법한 우주복 슈트에 공기 여과기를 착용한 채 길을 떠났다.
공기 여과기는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코어 필터가 들어가 있는 장치인데, 이것이 고장 날 때에 대비해서 스페어 여과기가 5개 정도 준비되어 있었다.
“코어 필터는 금세 고장 나요! 그러니까 만약 여분이 다 떨어지기 전에 미리 말씀하셔야 해요! 아셨죠?”
“알겠습니다! 그럼 2개쯤 남았을 때 얘기하면 될까요?”
“네, 딱 좋아요! 2개면 충분할 거예요. 자, 그럼 계속 갈까요?”
어쩐지 신이 나 있는 듯한 아리사. 그녀가 이곳에서 머문 시간은 거의 12년 남짓이라고 했는데, 태하는 이곳에서 1년도 머물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꺄아아아악……!
이곳에서는 몬스터의 괴성이 아니라 인간의 비명 소리가 BGM처럼 들려오고 있었다. 이런 던전을 혼자서 다녔다는 것 자체가 정말 놀라울 지경이었다.
제1구역에는 불에 탄 가옥과 건물들이 을씨년스럽게 늘어서 있었고, 도로와 터널도 있었다.
“현대적인 지형지물이 존재하고 있네요?”
“네! 맞아요. 그래서 학자들은 이곳이 평행우주에서 건너온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있답니다!”
“평행우주라? 단순히 이런 건물이 있다는 것만으로 판단하기엔 좀 이르지 않나 싶은데.”
“단순히 이런 건물만 있는 게 아니에요! 5층부터는 여러분에게도 제법 익숙한 지역들이 나와요.”
“익숙한 곳?”
“이를테면 파리 에펠탑이라든지 도쿄타워 같은 것들이요.”
“……네?! 그런 것들이 여기 있다고요?”
“헤헤, 몇몇 학자들밖에 모르는 것이긴 한데, 그래도 확실하긴 해요. 저도 이곳에서 에펠탑을 봤거든요.”
바벨탑에 대한 연구는 꽤 오래전부터 시작되어 왔지만, 유독 제5바벨탑에 대한 연구는 지지부진했다. 아니, 이곳에서 연구를 할 수 있는 인적자원 자체가 제한적이라고나 할까.
그나마 각성자 중에서 학자들이 드문드문 있어서 이 정도였지, 만약 그들마저 없었다면 제5바벨탑에 대한 정보는 극히 제한적이었을지도 모른다.
계속해서 길을 걷는 태하와 동료들.
-끼에에에엑!
“……몬스터다!”
“다들 진형을 갖춰야 해요! 지금부터 나흘 동안 몬스터가 계속 몰려들 거니까, 건물부터 찾으면서 전진하도록 해요!”
“나, 나흘이요?”
“네! 그것도 최소로 잡아서 나흘이요! 어쩌면 그보다 더 길 수도 있고요!”
나흘이나 몬스터가 쏟아지면 도대체 어떻게 인간이 버틸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문제는 이게 끝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쿠웅, 쿠웅……!
“……발소리?”
“거대 괴수요! 헤헤, 오랜만에 거대 괴수와 만나겠네?”
벌써부터 이런데 30층에서는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진다는 것인지, 태하는 도저히 가늠을 할 수가 없었다.
허나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끄어어어억!
손과 발이 기이한 형태로 꼬인 인간형 몬스터들이 괴기한 걸음으로 태하를 향해 달려들었다.
마치 영상의 빨리 감기 버튼을 누른 듯이 전진해 오는 몬스터들.
빠각!
-끄어억……!
“이놈들, 예전에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제1바벨탑에서 봤잖아요! 지옥에서 올라온 놈들이라고요!”
“……제기랄, 지옥귀들이 여기서도 설치다니?”
이른바 지옥귀들은 오로지 지하세계에서만 서식한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이제 보니 제5바벨탑에 있는 놈들과 별반 다르지가 않았다.
허나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이곳에 있는 놈들은 몸에서 산성 물질을 뿜는다거나 용암 따위를 쏟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체액이 피랑 비슷하네요?”
“아! 여기에 있는 아이들은 체액에 힐링 포션과 비슷한 성분을 품고 있어요. 그래서 이곳에서 열흘만 사냥해도 포션회사를 하나 차릴 정도라고 하죠!”
“아하! 그래서 돈이 되는 것이구나!”
힐링 포션은 한 병에 한화로 거의 100만 원 단위가 되기 때문에 1.5리터만 가지고 있어도 수천만 원은 벌 수 있었다. 헌데 이곳에는 걸어 다니는 포션들이 떼로 몰려들고 있는 데다, 1마리만 죽여도 약수통 하나 정도의 분량은 나왔다.
아마 하루에 수억 원을 벌어들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었다.
물론,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다는 가정하에서의 일이지만 말이다.
빠각!
-끼에에엑!
“제기랄, 끝도 없네! 계속 몰려들어요!”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성당이 하나 있어요! 그 성당은 이상하게도 거대 몬스터가 공격을 하지 않기 때문에 거기서 잠시 머물면서 이놈들을 상대하기로 해요!”
“젠장, 아무튼 일단 갑시다!”
이른바 세이프존이라고 불리는 제1구역의 성당 앞에는 이미 썩어서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헌터들의 시신이 즐비했고, 심지어는 머리와 척추를 길게 뽑아내어 긴 장대에 전시해 놓기도 했다.
그야말로 소름 끼치는 성당이 아닐 수 없었다.
“……저걸 몬스터들이 해 놓은 건가요?”
“아니요! 사람이요.”
“사, 사람이요?!”
“이곳에 오래 갇혀 있는 사람들은 정신이 좀 이상해진대요. 도대체 왜 그런 것인지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는데, 인간이 극도로 폭력적인 성향으로 변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무리에 분열이 자주 일어나고 헌터들은 서로를 죽여서 이렇게 효시하곤 하죠. 그렇게 드문 광경도 아니에요.”
인간이 가진 폭력성의 끝을 볼 수 있는 곳, 바로 제5바벨탑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이곳까지 온 것은 잘못된 선택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절로 드는 순간이었다.
허나 태하에게는 이제 든든한 지원군들이 있었다.
끼리리리릭!
뼈로 만들어진 공을 바닥에 집어 던지자, 태하의 절친한 친구인 메이지가 튀어나왔다.
-크헬헬!
“자, 메이지! 이제부터 이곳에 있는 몬스터들을 쓸어버릴 거야. 스켈레톤 부대를 소환해 줘!”
-크헤에엘!
메이지의 마력은 이제 어지간한 90층 보스급을 넘나들고 있었고 아무리 다른 바벨탑이라고 해도 마치 자기 홈그라운드처럼 싸울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녀석의 손짓 한 번에 무려 4천 마리의 스켈레톤 나이트가 소환되었다.
-끼리리릭!
“자, 그럼 제대로 한바탕해 보자! 가자!”
태하를 필두로 충성스러운 스켈레톤 나이트들이 오와 열을 맞춰서 진격하기 시작했다.
스켈레톤의 최종 진화형이라고 알려진 모르스 나이트보다 불과 세 레벨 아래인 스켈레톤 나이트의 공격력은 이미 이곳의 몬스터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빠각!
-끼에에에엑!
-크헤에에에엘!
스켈레톤 나이트의 뒤로는 스켈레톤 매지션들과 스켈레톤 스카우터가 줄을 지어 서 있었는데, 그들이 내뿜는 화력은 가히 압도적일 정도였다.
쿠우우웅!
“……블랙파이어 애로우?”
“후후, 메이지가 요즘 운동을 제대로 한다 싶더니 이런 엄청난 마법을 쓰는 매지션들을 소환하네요.”
“솔직히 이 정도면 100층까지 가는 데 굳이 이스터에그도 필요 없겠는데요?”
그야말로 던전을 초월하는 존재들의 향연이 아닐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