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 던전 각개격파(2)
계속되는 사냥. 헬창스는 10층까지 내려가는 데 무려 한 달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지금까지 그 어떤 던전을 공략해도 이보다 오래 걸린 적은 없었던 터라 당혹감이 적지 않았다.
태하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듯, 뭔가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겠다 싶었다.
“이스터에그를 발견하지 않는 이상, 100층까지 내려가는 건 불가능할 것 같은데.”
“……아니, 갈 수야 있겠죠. 언젠가는 말이에요. 허나 문제는 그 언제가 도대체 언제인가, 그거 아니겠어요?”
한나의 말처럼 내려가는 건 가능하다. 그 시간이 문제라는 점이었다.
게다가 한번 시작하면 며칠이고 잠을 못 잔다는 것도 너무나 큰 문제였다. 인간은 드래곤이나 몬스터와 다르게 잠을 자야 회복이 되는 생명체였으니까.
“포션으로 견디는 것도 한계가 있어요. 아무리 헬창포션의 효과가 좋아도 정신적인 부분은 해결이 안 되니까요.”
“흠, 그럼 어쩔까요? 스칼렛, 아직도 느껴지는 게 없어요?”
이스터에그인 스칼렛도 이곳을 함께 여행하면서 적지 않은 정신적 타격을 입고 있었다. 그나마 예티의 경우에는 사정이 좀 나았다.
녀석은 워낙 게임에 미쳐 있었기 때문에 게임 이외에는 별달리 신경 쓰는 것도 없었던 것이다.
“……느껴지는 게 있었으면 진즉에 찾아갔지. 이놈의 던전은 무슨 미친 변태가 만든 것 같네!”
“변태……?”
변태라는 말에 태하의 귀가 솔깃해졌다.
그는 이곳이 정말 변태가 만들지 않고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복잡하고 기괴하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렇다면 그 변태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면 일이 제법 쉽게 풀리지 않을까 싶었다.
태하는 원래의 계단 말고 그 위험하다고 절대 내려가면 안 된다고 했던, 이른바 ‘미아의 계단’의 앞에 섰다.
“자, 우리 한번 생각해 봅시다. 만약 변태라면 정상적인 사고는 하지 않겠죠? 그리고 던전은 원래 쓸모없는 것은 만들어 놓지 않아요. 왜냐? 원래 이곳은 마계 군단을 훈련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니까.”
“흠, 그렇다면 미아의 계단에도 뭔가 용도가 있을 것이라는 얘기네요?”
바로 그때, 태하의 메신저에 알람이 떴다.
딩동!
-이열, 제법? 저기서 뭔가 좀 이상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기는 함.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바로 예티였다.
태하는 허구한 날 태블릿 PC만 붙잡고 있는 중2병 예티를 볼 때마다 속이 답답했었지만, 오늘은 녀석이 제법 귀엽게 느껴진다.
“그래! 저기에 뭔가가 있다니까?”
딩동!
다시 메시지를 보내는 예티.
-그럼 나 먼저 간다?
“……뭐? 가긴 어딜 가?”
예티는 태블릿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미아의 계단으로 몸을 날렸다. 그야말로 다이빙을 하듯 편안하게 떨어져 내리는 예티를 보며 동료들은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아, 아니 잠깐! 저 중2병 예티가 미쳤나?! 쟤가 없으면 이스터에그를 찾아도 문제잖아요!”
“아놔, 저 미친 곰탱이가?!”
“아무튼 저 녀석을 따라갑시다. 이젠 어쩔 수 없잖아요?”
죽든 살든 일단 이곳에서 끝을 보지 않는 이상 바벨탑은 평생 공략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태하는 스칼렛의 몸통과 자신의 몸통을 로프로 잘 묶었다.
“자, 모두 로프에 몸을 묶어요! 같이 내려갑시다!”
“에라, 모르겠다!”
동료들은 마치 줄줄이 엮인 굴비처럼 서로의 몸을 밧줄로 묶은 후, 하나둘 계단의 난간 앞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가장 표정이 좋은 쪽은 역시 로드리고였다.
“그래, 한 번쯤은 가 보고 싶었지! 이곳이 정말 소문처럼 누군가를 미아로 만드는 곳인지 말이야.”
“아, 그렇지! 이곳이 미아의 계단이라 불린다면, 이곳에 들어가면 미아가 된다는 사실은 도대체 누가 알려 준 걸까요?”
“그러고 보니 그러네? 던전은 보통 팀 단위로 움직이니까 들어가도 같이 들어갔을 것이고, 독고다이로 던전을 조지는 사람도 혼자서 들어갔으니 소식을 전할 수 없었을 거잖아요?”
“허어, 정말 그러네?”
여러모로 이 던전에는 미스터리가 많았다. 허나 그 미스터리가 어쩌면 전부 진실이 아닐 가능성도 있었다.
태하는 동시에 뛰어내리기로 했다.
“다 같이 손잡고 같이 뛰어내립시다.”
“아, 아니! 멀쩡히 계단이 있는데 뛰어내리겠다고?!”
스칼렛은 계단을 걸어서 내려가기를 원했으나, 이미 중2병 곰탱이가 번지점프를 했기 때문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태하는 먼저 발을 뗐다.
“갑시다!”
“어머나! 나는 몰라, 꺄아아아악!”
너 나 할 것 없이 동시에 끝도 없이 뻗은 계단을 향해 뛰어내렸다.
그야말로 눈을 질끈 감지 않으면 도저히 답이 없을 것 같은 높이였다.
쿠웅!
“어……?”
허나 허무하게도 땅은 단 1초 만에 그 존재를 드러냈다.
평평한 바닥에 서서 일행들을 기다리고 있던 예티는 키득거리며 메시지를 보냈다.
딩동!
-ㅋㅋㅋㅋㅋㅋㅋ
아무래도 예티는 처음부터 뭔가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아마 인간들이 지지고 볶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껏 웃고 싶은 마음에 장난을 친 것으로 보였다.
일이야 어찌 되었건 간에 해결만 잘되었으면 된 것이다.
태하는 호탕하게 웃어 버렸다.
“으하하! 됐지 뭐! 이 정도면 해피엔딩 아닌가요?”
“……젠장, 그건 그렇죠.”
“아무튼 간에 이제 이곳에서 이스터에그를 찾을 차례인가요?”
동료들은 이제 100층으로 금방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허나 그 예상은 생각을 약간 빗나갔다.
딩동!
-ㅋㅋㅋㅋㅋㅋㅋ 여기가 바로 이스터에그이지롱!
“뭐가 어째? 여기가 이스터에그라고?”
-여기에 공간을 조종하는 녀석이 있어. 바로 내 발 밑에서 아저씨들을 비웃고 있다고!
태하는 거의 본능적으로 고개를 아래로 내렸고, 그 아래에는 정말로 낄낄거리며 태하와 일행들을 보며 웃는 무언가가 있었다.
스칼렛은 열이 받은 나머지 놈의 머리채를 잡고 위로 쭉 들어 올렸다.
우득!
-아, 아야!
“이 새끼가 돌았나?! 할 짓이 없어서 사람을 가지고 장난을 쳐?!”
-……흑흑, 죄송해요! 너무 혼자 오래 있어서 그만 장난 좀 쳤어요. 아줌마, 다시는 안 그럴게요!
“아, 아줌마?!”
주먹으로 한 대 후려칠까 진지하게 고민하던 스칼렛은 그만 녀석을 놓아주었다.
때릴 생각보다는 대의를 먼저 생각한 것이다.
“흥! 그 값은 나중에 치르고, 일단 100층부터 가 보자.”
-어라? 더 안 때려요?
“이제 너한테는 관심이 없어. 100층으로 가자.”
-……묘하게 기분 나쁘네. 누군가 만나 본 게 너무 오랜만이라서 그랬다니까?
“아무튼 100층부터 가자니까?”
마치 홀로그램처럼 뿌연 형상을 한 의문의 존재는 뭔가 억울하다는 듯이 잔뜩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멍청이들! 여기가 바로 100층이잖아.
“여기가 100층이라고?”
-그래! 이 던전은 그 자체만으로도 전부 신기루야. 반물질의 보석? 그거 내가 심심해서 하나씩 뿌린 거거든?!
“심심해서 뿌리다니. 네가 뭔데?”
-나?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스칼렛은 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길을 재촉했다.
“몰라, 관심 없어. 아무튼 100층부터 클리어하자. 가서 좀 씻고 싶어!”
“흠, 그럼 그럴까요?”
-……나 좀 봐 달라니까?!
전체적으로 이 던전은 정신이 없는 게 특징인 것 같다.
***
제4바벨탑의 끝에는 어느 것이 본체인지 알 수 없는 그림자와 홀로그램들이 로드리고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로드리고에게 시험을 내렸다.
-우리 제4바벨탑은 믿음을 시험합니다. 그리고 담력과 신념도 시험을 하죠.
“믿음과 담력, 신념이라니. 그건 어떻게 시험하는 건데?”
-당신은 지금부터 저 계단을 혼자서 내려가야 합니다.
“던전을 혼자서 여행하라는 건가?”
-네, 맞아요. 당신들이 미아의 계단이라고 말했던 계단만이 진짜이고 그 옆에 있던 넓은 미로는 전부 신기루에 불과합니다. 인간의 공포심이 만들어 낸 허상에 불과한 것이죠. 한마디로 계단은 오로지 하나만 존재했던 것이죠. 당신은 그 계단을 혼자서 99층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그럼 시험은 알아서 끝날 겁니다.
“그냥 계단만 내려가면 된다고?”
-그렇습니다. 손전등도 그냥 사용하시면 됩니다. 하지만 전등만 단 하나, 나머지 그 어떤 장비도 챙기면 안 됩니다.
“좋아, 그렇게 하지.”
-그리고 마지막 조건이 있습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당신의 이능력이나 스킬을 사용해선 안 됩니다. 아시겠죠?
바벨탑에서는 어떤 몬스터가 나타날지 아무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킬이나 능력을 사용하지 말라는 것은 자살을 하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드리고는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오케이, 거부할 이유가 없지.”
-좋습니다. 그럼 시험, 시작하겠습니다.
로드리고는 동료들의 응원을 받으며 출발했다.
“로드리고 파이팅!”
“꼭 성공하세요!”
그는 다소 시큰둥하게 반응했으나, 동료들의 응원을 받으니 절로 든든해지는 것을 느꼈다.
잠시 후, 로드리고는 던전 입구에 섰다.
스아아아아……!
처음에 보았던 던전의 입구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뭐랄까, 지금 그가 보는 것이 훨씬 더 공포스럽고 미스터리하다고나 할까?
“이상한 던전이라는 것은 진즉에 알았지만, 오늘 보니 더 이상하군.”
로드리고는 용감하게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한 층을 내려가는데 150개의 계단이 있었고, 그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그의 눈에는 그저 나선형 계단의 기둥과 검붉게 산화된 철제 계단만이 보일 뿐이었다.
한마디로 그 흔한 몬스터라든지, 심지어는 귀신도 하나 보이지 않았다.
“……지나치게 고요한데.”
차라리 어떤 소리라도 나고 몬스터라도 급습했다면 좀 나을 텐데, 너무 적막이 흐르니 오히려 극단적인 공포가 느껴졌다.
그렇게 무려 1,500개의 계단을 내려왔을 때, 로드리고는 불현듯 공포라는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
“이거, 끝은 있는 건가?”
다시 돌아갈까, 아니면 여기서 계단을 부수고 던전 자체를 붕괴시켜 버릴까?
정말이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허나, 그는 아까 그 홀로그램들이 했던 얘기를 기억했다.
고개를 가로젓는 로드리고.
“음, 그럴 수는 없지!”
그는 불굴의 의지를 가진 채 계속해서 계단을 내려갔다.
허나 1,500개의 계단을 다시 내려갔어도 이번에는 5층밖에 내려가지 못했다.
“가면 갈수록 점점 계단이 많아지는 것인가?”
만약 이런 식으로 계단이 계속 많아진다면 문제가 심각해질 수도 있었다. 잘못하면 50층대에서는 거의 무한에 가까운 계단이 나타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막연한 공포감이 로드리고를 엄습해 온다.
허나, 그는 여기서 주저하지 않았다.
탕, 탕, 탕……!
의연하고 용감하게, 하지만 더 이상의 잡생각은 하지 않은 채 발걸음을 내디뎠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어둠은 점점 짙어졌고 그의 뇌리에는 잡념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그의 귓전에 믿을 수 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끄어어어어!
“몬스터……?”
스킬을 사용하면 몬스터쯤이야 별것 아니었다.
허나 지금 그는 스킬을 사용할 수 없다는 페널티를 안고 있지 않던가?
“역시 쉽지 않은 시험이네.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