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 혹한의 던전(2)
게임 폐인 예티 덕분에 제3던전 100층을 순식간에 돌파한 태하와 일행들.
그들은 커다란 태블릿 PC를 손에 들고 연신 키득거리는 예티를 따라서 혹한의 땅을 걸었다.
휘이이이잉!
“……우와, 지독하게 춥네!”
“그나마 예티가 냉기와 복사 파동을 막아 주고 있어요.”
“그나저나 저놈도 대단하네. 이 상황에서도 게임을 하고 싶어서 태블릿을 가져오다니 말이에요.”
게임 중독은 치료가 필요하다고들 한다. 허나 태하는 굳이 예티를 치료해 줄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거의 영생에 가까운 삶을 사는 몬스터에게 저 정도 시간 플렉스야 얼마든지 해 줄 수 있는 거 아니겠는가?
“이봐, 예티. 가상 게임 계좌로 1억 골드 입금했어. 랭커 도전해 봐.”
예티는 당장 게임 계좌를 확인하곤 피식 웃었다.
딩동!
이내 도착한 녀석의 메시지.
[개노답 꼰대임? 1억 가지고는 검에 바르는 옵션 한 장도 사기 힘든 부분임]
“이런 개새…….”
나름대로 생각해 준 건데 저렇게 답장을 하니 한 대 쥐어박고 싶어진다.
허나 반대로 생각한다면 앞으로 저놈을 얼마든지 쉽게 부려 먹을 수 있다는 뜻이 되지 않겠는가.
그는 바로 옆에 있던 에밀리에게 물었다.
“그 게임, 어느 회사 거야?”
“회사는 왜요?”
“응, 내가 사 버리게.”
“……회사를 산다고요?”
“나에게 말이야, 남는 게 돈밖에 없거든.”
앞으로 예티는 태하에게 죽을 때까지 충성할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게임에 미친 예티를 따라서 걷다 보니 어느새 100층의 끄트머리에 도달할 수 있었다.
100층의 끝에는 지금까지 살면서 헬창스가 보았던 그 어떤 것보다 강렬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거대한 심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두근, 두근……!
심장이 고동칠 때마다 주변은 냉기의 파동이 생겨났고 만년설은 그 파동에 의해 눈꽃처럼 휘날렸다. 그리고 그 눈꽃은 잔잔하게 흐르는 오로라와 만나 환상의 하모니를 자아내고 있었다.
“……아름답다.”
“이게 그 말로만 듣던 얼음의 심장이로군요.”
아름답다는 말 이외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인간의 시선을 잡아끌어서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도록 만든 거대한 심장이 란돌에게 말을 걸어왔다.
-바벨탑의 수호자,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나를……?’
-오래도록 나에게 새로운 육신을 되찾아 줄 주인님을 기다려 왔습니다. 자, 이제 저의 시험을 통과하시어 제게 새로운 육신을 내려 주십시오.
아리따운 여성의 목소리. 허나 그 목소리에서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뭔가 강렬한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란돌은 동료들을 뒤로한 채 앞으로 나섰다.
“이제 내 차례가 되었나 봐요.”
“오오, 란돌 씨! 얼른 끝내고 오세요! 시험, 그따위 것은 가볍게 끝내 버려요!”
장비를 하나둘 벗어 던지곤 앞으로 나아가는 란돌.
파앗!
순식간에 그의 신형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
다시 정신을 차린 란돌이 눈을 떴을 때, 그는 우주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아, 아아아……!”
-당신에게 내려지는 시험입니다. 이 우주에서 당신의 자질을 가늠할 것입니다. 만약 바벨탑을 담을 그릇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될 시, 당신은 우주의 미아가 되어 버릴 겁니다.
“……뭔가 시험치고는 건강에 상당히 좋지 않은 것 같은데.”
-그거야 생각하기 나름인 겁니다. 자, 그럼 시험을 시작하겠습니다.
란돌의 앞에는 어느새 오색의 빛으로 만든 다리가 놓여 있었고, 그 다리를 통해서 엄청난 숫자의 인파가 몰려오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그 인파가 몰려가는 끝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곳에는 지구가 있었다.
“지구……?”
-지금 당신들의 행성을 향해 차원의 틈을 건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 사람은 이제 곧 지구를 약탈하고 바벨탑을 점령하여 지옥의 군대를 되살려 낼 것입니다. 만약 저들이 이대로 지구에 닿게 된다면 지구는 반드시 멸망할 테지요.
“우리가 저들과 싸우면 되잖아!”
-아니요, 불가능합니다. 저들은 마법공학이라는 극도로 발전된 문명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저들이 지구를 약탈하려는 것도 황폐화된 자신들의 차원을 되살리기 위함인 것이죠. 저들이 지구를 약탈하게 된다면, 지구는 황폐화되어 아마 남는 것이 하나도 없게 되겠지요. 심지어 물 한 방울도 소중하게 마셔야 할 겁니다.
“제기랄! 그래서 나더러 뭘 어쩌라는 건데?”
-지금 당신은 초월적인 존재인 바벨탑의 수호자가 가진 능력 중 일부를 가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극저온의 우주에서도 버틸 수 있는 것이고 숨을 쉬지 않아도 살 수 있는 것이죠.
“아? 그러고 보니…….”
-지금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서 저들의 진입을 좌절시키십시오. 그게 시험입니다.
간단할 것이라고 했던 시험은 지금까지 란돌이 겪었던 그 어떤 일보다 복잡하고 어려웠으며,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허나 여기서 포기할 란돌은 절대 아니었다.
“후우, 그래! 제기랄, 이대로 죽을 수는 없지!”
란돌은 자신의 몸 안에 남아 있는 모든 힘을 쥐어짜내 손끝으로 가져왔다. 그런 후, 그 힘을 바탕으로 오색 빛의 다리를 그대로 내리쳤다.
쿠우우웅!
다리는 흔들렸고 그곳을 건너던 사람들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꺄아아아악!”
“이게 무슨 일이야?!”
“엄마, 무서워!”
순간, 란돌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지구를 약탈하기 위해 다리를 건넌다던 그 무리 안에는 어린아이와 여성, 노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깜짝 놀란 란돌이 얼음의 심장에게 물었다.
“이런, 미친!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저들은 선량한 시민들이잖아!”
-선량이라는 것은 관점에 따라 다른 겁니다. 대열의 끝과 끝을 좀 보세요. 양쪽 끝으로 강력한 무기와 힘을 가진 능력자들이 포진하고 있는 게 보이지 않으십니까?
“호위 병력일 수도 있잖아! 이 위험한 길을 떠나는데 호위 병력 하나 달지 않고 보낼 수는 없잖아?”
-어쨌든 당신에게는 시험이 주어졌습니다. 저들이 지구에 닿으면 지구는 반드시 멸망합니다.
“……젠장, 이딴 시험이 이 세상에 어디 있어?!”
-그렇다면 지구가 망하도록 내버려 두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다른 방법을 찾아보겠어!”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오로지 한 가지 방법, 저들을 몰살시키는 것만이 답입니다.
란돌은 혼란스러울 수밖에는 없었다.
분명 지구를 약탈하려는 세력이라고 했건만, 알고 보니 저들 또한 숨을 쉬고 말을 하는 인간이었던 것이다.
허나 차가운 심장은 계속해서 란돌을 몰아붙였다.
-당신이 하지 못하겠다면 당신은 지구와 함께 그 운명에 종지부를 찍을 수밖에 없습니다.
“뭔가 방법이 있을 거야!”
-거듭 말씀드리지만, 유일한 방법은…….
“그렇다고 내가 살자고 남을 죽여? 그런 방법은 옳지 않아!”
-그렇다면 당신이 생각하는 옳은 방법은 무엇인가요?
“둘 다 사는 것.”
이 세상에는 수많은 딜레마가 있으나 앞으로 악랄한 짓을 자행할 생명을 앗아 감으로 인해 평화를 지키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에 대한 딜레마는 단연 사람의 마음을 쥐고 흔들기 마련이다.
허나 란돌은 결코 물러섬이 없었다.
“저들이 약탈을 결심했다면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려 줌으로써 바로잡을 수도 있는 거잖아?”
-저들은 잘못된 것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말씀드렸잖습니까? 저들은 지구를 식민화시키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요.
“……말도 안 돼!”
-인류는 악독합니다. 자기가 살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죠. 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 약탈?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약탈은 계속될 것이고 당신의 선택으로 전 차원이 약탈로 인해 고통받게 되겠죠.
“제기랄!”
저들의 대열에는 정밀 장비는 물론이고 마법공학으로 만들어진 폭격 장비들이 즐비했다.
만약 협상이 가능하다면 몰라도, 저들이 지구에 닿으면 결코 협상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었다.
란돌은 눈을 질끈 감았다.
“결국 딜레마를 극복하는 것이 시험인 건가……?”
-스스로의 딜레마보다는 대의를 생각해야 한다는 겁니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란돌.
그는 결국 다시 한번 다리를 건너는 사람들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어쩔 수 없다!”
콰아아앙!
그의 주먹질 한 번에 다리에는 금이 가기 시작했고, 얇은 막으로 둘러싸여 있던 터널이 무너지면서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얼어붙어 버렸다.
우드드득!
순식간에 얼음덩어리로 변해 버린 사람들은 우주의 공간을 부유하기 시작했고 서로 몸이 부딪치자 산산조각이 나면서 흩어져 갔다.
파앗!
“허억!”
다시 눈앞이 흐려졌다가 이내 시야를 회복한 란돌.
란돌은 흐려지는 정신을 가까스로 다잡은 채 자신이 서 있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휘이이잉!
따스한 햇살이 쏟아지는 꽃밭에서 정신을 차린 란돌은 거대한 근육 덩어리의 사내를 마주했다.
그는 란돌에게 악수를 건네 왔다.
“반갑네. 바벨탑의 수호자 마이트라고 해.”
“……수호자 마이트?! 당신은 이미 은퇴했다고 들었는데?”
“나는 차원의 수호자로서 이계와 이계를 이어 주는 공간에서 충돌을 저지하는 역할을 하고 있어. 뭐랄까, 전직을 했다고 하면 맞을까?”
“아아! 역시, 마이트가 탑을 떠날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악수를 나누면서 란돌은 돌연 한 가지가 궁금해졌다.
“그런데 말입니다.”
“……?”
“그…… 식단과 보충제는 어떻게 운용을 하셨는지…….”
마이트는 처음에는 황당하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이내 박장대소하고 말았다.
란돌은 이 순간에도 운동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하! 진성 헬창이로군! 그래, 자네와 같은 사람이 탑을 수호해야 해. 헬창만큼 순수한 사람도 없으니까.”
그는 란돌에게 서적 한 권을 건네주었다.
그 안에는 고대에 마이트가 어떻게 운동을 했는지 자세히 나와 있었다.
“……엄청나다. 바위와 나무같이 자연에서 구할 수 있는 고중량 재료로 점진적 과부하를 적용해 운동을 했다니! 고대에도 이와 같이 체계적인 운동법이 존재할 수 있었다는 것이 너무나도 놀랍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강해지고 싶어 해. 그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다 똑같지. 그래서 웨이트트레이닝의 역사가 길 수밖에는 없는 것이고.”
인간이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단련하고 연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의 모습인 것이다.
마이트는 방금 전의 시험이 갖는 의의에 대해 설명했다.
“바벨탑의 수호자는 가끔 단호해야 할 때도 있어. 상생만을 생각하다간 하나를 위해 모두를 희생해야 할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니까.”
“그래서 저의 단호함을 시험하신 겁니까?”
“그래, 우리 원로 바벨탑의 수호자들이 자네의 단호함을 시험해 보고 싶었던 거야.”
“……그럼 저는 시험에 통과한 겁니까? 제가 올바른 선택을 한 것입니까?”
마이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네가 올바른 선택을 한 것인지는 아직 몰라. 자네가 죽인 그들은 정말로 약탈자들이고 황폐화된 고향을 위해서라면 악마와도 손을 잡을 지경이었거든. 하지만 그들을 절대 악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어.”
“이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없다는 거군요.”
“그래, 절대적이라 단정 지을 수 있는 것은 없어.”
“……어렵군요.”
“하지만 적어도 자네는 모두를 위해 자신의 신념을 꺾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어. 그것만으로도 수호자가 될 자격은 충분하다고 본다네.”
마이트는 란돌에게 파란색 보석이 박힌 반지를 건네주었다.
보석 안에는 마치 인간의 눈물처럼 빛나는 가루들이 수놓아져 있었다.
“혹한의 군주 하이든이 주는 것일세. 명심해, 하이든이 자네를 선택한 것은 완벽한 결정을 내리기 위함이 아니라 최선의 결단을 내리기 위함이라는 것을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