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 혹한의 던전(1)
제2바벨탑에 설치된 웨이포인트를 통해 제3바벨탑으로 이동하는 동료들.
스스스스……!
모든 것은 자연의 흐름과 함께 물질계를 탈피하여 무형의 공간으로 흘러갔고, 그것이 반대편 웨이포인트에 닿았다.
“아하! 이래서 자연계와 물질계를 이어 주는 징검다리라고 했던 것이구나!”
“한마디로 서로를 연결해 주는 통로 역할이라고나 할까요?”
지금부터는 란돌이 제3바벨탑을 공략하는 즉시 제1바벨탑의 몬스터들을 끌어올 수 있게 되었다.
한마디로 100층까지 굳이 헬창스의 손이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잠시 후, 태하 일행은 혹한의 땅인 제3바벨탑에 도착했다.
휘이이잉……!
을씨년스러움을 넘어선 스산함의 혹한이 태하와 동료들의 얼굴을 자극했다.
“……말 그대로 춥네요. 아니, 춥다는 말로는 설명이 안 된다고나 할까?”
“100층 가까이 올라가면 그때부터는 우주의 평균 온도보다 낮다고들 하죠.”
“우주 공간보다 춥다고요……?”
우주 배경 복사 온도는 2.7k, 그러니까 섭씨 영하 270도 정도 된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인체가 노출되는 그 즉시 온몸이 얼어붙어 죽을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헌데 그보다 온도가 낮다면 도대체 생물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지 의문이 절로 든다.
란돌은 자신의 앞마당이나 마찬가지인 이 혹한의 던전에서 몬스터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했다.
“이곳에 사는 몬스터들은 2개의 심장을 가지고 있어요. 하나는 일반적인 코어, 다른 하나는 혹한의 코어.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건 일반적인 코어이지만 혹한에 적응시켜 주고 냉기의 능력을 펼칠 수 있게 해 주는 건 두 번째 심장인 혹한의 코어라는 뜻이죠.”
“아하! 심장 자체가 냉기를 품고 있기 때문에 영하 300도 가까이 되는 곳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로군요.”
“실제로 이곳에 사는 몬스터의 시신을 해부해 보면 근육부터 혈관, 심지어는 혈액까지 특별한 구조로 되어 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어는점이 극도로 낮으며 강도 역시 극단적으로 높아서 이곳에 사는 몬스터의 피를 ‘얼지 않는 물’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죠.”
“얼지 않는 물이라니!”
“심지어 이곳의 2층부터는 계곡에 물이 흐르고 있어요. 3층부터는 눈이 아니라 비가 내리기도 하죠. 하지만 그 온도는 평균 영하 100도 이하라는 것이 함정입니다.”
“허어, 그건 너무 모순적인 풍경인데.”
“이곳의 물은 어는점이 극단적으로 낮아요. 식물 역시 그런 물을 먹고 살게끔 진화해 왔죠. 그래서 그런지 질퍽질퍽한 늪지대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빠지면 그 자리에서 얼어 죽곤 합니다.”
“……늪지대에 빠져 산소 부족으로 죽는 게 아니라 얼어서 죽는다니. 너무 극한의 땅이 아닌가 싶은데.”
란돌은 극한의 땅이라는 말에 아주 큰 긍정을 보였다.
“극한이죠. 심지어 바람의 온도 또한 영하 200도까지 내려갈 때가 허다하니까요.”
“아니, 그럼 건강을 악착같이 아끼는 란돌 씨는 여기서 어떻게 버티는 건데요?”
“건강을 악착같이 관리하니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겠죠?”
“……흠.”
“뭐, 능력 자체가 혹한에 특화되어 태어난 것도 한몫을 하겠지만요.”
란돌은 이곳에 오기 전에 뉴욕의 장비 제작 업체에게 특별한 한 가지를 주문했었다.
그것은 바로 전투용 우주복이었다.
“아이스트롤로 만든 전투용 우주복을 제가 주문했었죠? 그걸 이번에 착용할 겁니다.”
“밖에서 싸울 때를 대비하는 건가요?”
“그것도 그렇긴 한데, 아마 50층부터는 몰먼의 장비가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서요.”
총총은 크게 놀라서 란돌을 쳐다보았다.
“……우리 장비가 멈춘다요?! 말도 안 된다요!”
“나도 인정하고 싶지는 않은데, 어쩔 수 없어. 혹한의 던전은 기계 자체를 가동할 수 없게 만들어 버려. 이곳에는 냉동 복사 파동이라는 것이 몰아치는데, 이상하게도 그게 기계에 닿으면 작동을 하지 않더라고.”
“아아, EMP다요!”
“EMP?”
이쯤에서 나서는 윤정. 그녀는 얼마 전에 던전에서 보여 주었던 무기를 꺼내 들었다.
그 무기는 전력을 사용하는 몬스터를 한 방에 잠재웠던 대포였다.
“전자 펄스, 한마디로 셧다운을 시킨다고 생각하면 쉬워요.”
“아하! 그게 냉동 복사 파동과 비슷한 것이라는 소리인가요?”
“그런 셈이죠. 만약 복사 파동이 물체에 직접 영향을 주어서 뭔가 이상을 일으켰다면 인간의 심장마저도 멎었겠죠. 하지만 그건 아니라는 소리 아니에요?”
“맞습니다. 인간은 멀쩡했어요. 우주복만 제대로 입고 있다면 말이죠.”
“그럼 전자 펄스가 맞겠군요. 우리는 그럼 50층부터는 꼼짝없이 걸어가야 해요.”
“……쉽지 않은 여정이 되겠군.”
이곳에서 당장 이스터에그를 찾지 않는 이상, 헬창스는 얼마나 걸릴지 모를 대장정을 시작해야 한다.
허나 태하가 있기에 그럴 필요는 아마 없을 듯했다.
짝짝!
태하가 손뼉을 치자, 에밀리가 포털을 타고 나왔다.
그녀는 저번보다 한층 더 성장해서 이제는 18세 소녀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부르셨어요?”
“가자. 네가 좋아할 만한 던전을 돌파하는 거다.”
“……제3던전이네?!”
혹한의 던전은 에밀리의 집으로 삼아도 될 정도로 그녀와 상성이 딱 맞는 곳이었다.
심지어 그녀는 이곳에서 방호복 하나 없이 찬물로 샤워를 즐겨도 될 정도로 냉기에 대한 내성도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녀는 혹한 그 자체인 존재인지도 몰랐다.
그녀는 슬그머니 미소를 짓는다.
“후후, 드디어 제가 활약할 때가 왔군요.”
“50층부터는 기계가 움직이지 못한대. 네가 우리를 좀 태워 줘야겠는데?”
“물론이죠! 제가 100층까지 한 방에 뚫어 드릴게요.”
고심했던 모든 것들이 허무하게 정리되는 순간이었다.
***
1층에서 50층까지 올라가는 데 겨우 3일이 걸렸다.
만약 던전 자체의 거리만 짧았어도 사실 몇 시간 걸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혹한에 최적화된 에밀리는 100층까지 가는 데 보름이면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허나 그보다도 더 간단한 방법이 있었다.
바로 이스터에그의 활용이었다.
에밀리는 아마 53층쯤에 이스터에그가 존재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제가 50층까지 오면서 느낀 것인데 말이죠. 53층에서 강력한 에너지가 느껴져요. 아마 이스터에그가 아닐까 싶은데요.”
“보스 몬스터를 착각한 건 아니고?”
“아니요. 그런 것과는 달라요. 뭐랄까, 강력한 이계 방사선의 느낌이 난달까?”
“아하! 그렇다면 이스터에그가 확실하군!”
이스터에그가 있다면 100층까지 올라가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이다.
심지어 영하 몇 도라도 버틸 수 있는 에밀리가 있는 한 100층을 돌파하는 것도 손쉬운 일이었다.
이제부터 중요한 것은 이스터에그를 찾는 것이었다.
“에밀리! 그럼 지금부터 이스터에그를 찾으러 떠나 보자고.”
에밀리는 일행을 보호막에 꽁꽁 싸맨 후, 자신의 등에 태워 순식간에 53층까지 올라갔다.
그러는 동안 만난 몬스터들은 드래곤의 살기에 압도되어 두려움에 떨기 바빴고, 그녀는 자동으로 던전을 돌파할 수 있었던 것이다.
53층에 도착하자, 정말로 말로 형언하기 힘든 뭔가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정말이네. 이계 방사선의 강렬함이 절로 느껴져.”
“이제 이곳의 땅을 파내기만 하면 됩니다.”
“좋아, 시작하지.”
드래곤은 단순히 덩치만 거대한 것이 아니라 수영을 하거나 땅을 파는 능력도 압권인 종족이다.
에밀리는 앞발로 힘차게 땅을 파내기 시작했다.
파바바바밧!
손으로 흙을 몇 번 떠내면 금세 동네 뒷동산보다 더 큰 흙더미가 만들어졌다. 만약 드래곤이 공사판에 뜨면 중장비들은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 분명했다.
잠시 후, 에밀리는 돌연 손짓을 멈추었다.
“……찾았다.”
“저게 이스터에그라고?”
무려 지하로 50미터 이상을 파고 내려간 후에 발견된 것은 바로 작은 털 뭉치였다.
일행들은 저절로 스칼렛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에밀리의 꼬리를 타고 흙바닥 위에 놓인 털 뭉치를 집어 들었다.
두근!
순간, 그녀의 심장에 강력한 고동이 느껴진다.
그제야 스칼렛은 이것이 바로 제3던전의 이스터에그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맞아. 이게 바로 이스터에그야.”
“그럼 그 털 뭉치를 스칼렛이 먹어 치우면 되는 겁니까?”
“아니. 먹는다기보다는 앞으로 나와 평생을 함께하게 되는 거지.”
스칼렛이 의문의 털 뭉치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털 뭉치가 서서히 커지더니 이내 5미터의 거대한 키를 가진 설인으로 변신했다.
-쿠오오오오!
“예티……?”
“이 설인이 바로 이스터에그야. 우리 이스터에그끼리는 영혼의 파동이라는 것을 느끼는데, 이것이 서로를 이어 주는 유대감의 끈이자 연결 고리인 모양이야.”
“그럼 이제 100층까지 한 방에 올라갈 수 있게 된 겁니까?”
“아, 그게…….”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심심하다네.”
일동은 마치 연습이라도 했다는 듯이 동시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뭐가 어떻다고요?”
“심심하다고. 뭔가 재미있는 게 없냐는데?”
황당해서 설인을 쳐다보는 태하.
녀석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태하를 내려다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크울?
“……흠. 어지간해선 말을 안 들을 타입이라 이건가?”
“헌터님, 저 곰탱이를 어쩌면 좋죠?”
에밀리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심심한 게 문제면 밖으로 데리고 나가면 되잖아요.”
“밖으로 데리고 나가?”
“밖에는 재미있는 게 너무 많아요. 이를테면 게임이라든지, 드라마라든지 뭐 그런 것들?”
“……아하!”
생각해 보면 세상에는 재미있는 게 너무 많다.
심지어는 설인까지 홀릴 정도로 말이다.
***
며칠 후, 다시 찾은 던전.
설인은 마치 뭔가 불안한 듯, 자꾸만 손발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용팔이 태하에게 물었다.
“쟤 왜 저래요?”
“아, 저거요? 이계의 생명체에게 지구의 매력적인 오락거리를 좀 선물해 줬더니 저래요.”
“오락거리? 그럼 스칼렛은요?”
스칼렛은 눈 밑이 퀭했고 피부는 푸석푸석해서 한 며칠 빛도 보지 못하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태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미드에 빠져서 그래요.”
“미드? 뭐, 바스트?”
“아니, 그 미드 말고. 미국 드라마요. 고국의 드라마에 빠지더니 더 이상 헤어 나오지를 못하네요.”
사람 폐인을 만드는 드라마는 지천에 널리고 널렸다. 게다가 고리타분한 과거의 미국에서 온 개방적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 자극적인 드라마를 접한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스칼렛은 인생 최고의 드라마를 계속 시청하면서 무려 나흘 동안이나 잠을 못 자다가 바로 얼마 전에 15시간 숙면을 취하고 다시 일어났다.
“……미치겠어. 끊을 수가 없다고! 젠장, 내가 살아 있을 때엔 왜 이런 명작들이 나오지 않았던 거지?!”
“그만큼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는 거겠죠.”
태하는 이제 100층으로 향하기로 했다.
그는 예티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 가자!”
“…….”
“가자니까?”
허나 녀석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허나 대신…….
탁탁, 다다다닥.
딩동!
돌연 울리는 메신저의 알람.
태하는 깜짝 놀라서 자신의 팔에 있는 메신저의 수신 버튼을 눌렀다.
-악마의 다이아몬드 100개, 아사히드의 축복 300시간, 1억 골드 입금되면 바로 출발함. 네고 ㅈㅅ요.
“……이게 뭔 개소리야?”
냉동 복사 파동 때문에 메신저는 먹통이 된 줄 알았는데, 그것이 작동한다는 것에 놀랐다. 허나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메시지를 보낸 사람이 예티이고, 무슨 얼토당토않은 제시를 한다는 것에 두 번 놀라고 말았다.
옆에서 태하의 메시지를 힐끗 쳐다본 에밀리가 슬그머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호, 어나더 월드? 내가 이 게임 랭커라는 거, 다들 알고 있었어요?”
“어나더……. 그게 뭔데?”
“가상현실 게임이요. 쟤, 이제 막 입문한 뉴비 같네요. 악마의 다이아몬드니 하는 걸 찾는 것을 보면.”
에밀리는 수신처를 복사한 후, 자신의 메신저에 캐릭터 정보를 올려서 예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딩동!
잠시 후, 예티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에밀리에게로 달려왔다.
-크우우울!
“후후, 그래. 이 누님에게 충성하란 말이야.”
-크울!
“자, 그럼 100층으로 가자!”
폐인과 폐인이 만나다니,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순간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