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 결국 돌파(2)
루쿤타와 마주한 탑의 수호자들.
그가 해 준 얘기는 놀라우면서도 약간은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스킬 : 절대적인 공명]
놀랍게도 루쿤타는 탑의 수호자 중 1명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다소 특이한 유형의 수호자였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우리를 지켜 주기 위해서 모든 위협에 혼자 맞서 싸워 왔다는 거잖아?”
“그런 셈이지.”
지금까지 태하와 그 동료들이 던전을 장악하는 동안 그 외부 세력들로부터 그들을 지켜 왔고, 심지어는 외계에서 넘어오려는 미친놈들까지 상대하느라 루쿤타는 죽을힘을 다하고 있었던 것이다.
로드리고와 마주친 것도, 태하와 마주친 것도 전부 루쿤타가 그들을 호위하고 있던 도중에 우연히 그리된 것이었다.
“아니, 그렇다면 우리가 적과 싸울 때에는 왜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지?”
“만약 내가 너희들의 앞에 매번 나타나 도움을 주었다면 과연 이렇게까지 힘을 키울 수 있었을까?”
“……훈련을 위한 것이었다?”
“모든 것은 마이트의 뜻이라고 할 수 있지.”
시련이 없는 성공은 없는 것처럼, 태하와 동료들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적과 위기라는 재료가 필요했던 것이다.
만약 루쿤타가 정말 보모처럼 이들을 돌보는 데 집중하기만 했다면, 아마 태하는 탑의 수호자가 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다면 왜 지금에서야 제2바벨탑에 모습을 나타낸 건데?”
“모든 탑을 정복하는 것은 그저 시작에 불과하다. 탑을 모두 장악하게 되면 이계에서 넘어오는 도전자들을 맞아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지.”
“이계의 도전자?”
“바벨탑을 차지하고 싶어 하는 놈들이 지구에만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지옥의 군대를 자신의 손에 넣고 지상의 왕이 되고 싶어 하는 놈들은 지천에 널려 있다고 할 수 있지.”
“……이계라. 아니, 도대체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거지?”
“내가 왜 샌드타워에서 그렇게 오랜 세월을 지냈었는지 궁금하지 않나?”
“샌드타워……?”
“그래, 그곳에서 인류는 무기도 얻고 발전에 필요한 자원도 얻었지. 하지만 왜 그곳에서 자원이 쏟아져 나오는지, 그리고 그 자원을 얻기 위해서는 왜 쓰레기와 같이 하찮은 것이라도 좋으니 이곳의 물건들을 집어넣어야 했는지 궁금하지 않아?”
“아? 그러고 보니 그러네? 지금까지는 그렇게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잖아?”
샌드타워는 인류 최고의 연구 대상이었지만, 언젠가부터 돈이 되는 곳으로 인식되었을 뿐이다. 결국 샌드타워에 대한 연구보다 윤택한 생활에 더 길들여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루쿤타는 이것이 바로 인류의 가장 큰 위협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지구에서 바벨탑을 노리겠다고 달려드는 놈들? 그놈들쯤이야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일거에 쓸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도 없어. 어차피 그놈들은 바벨탑이 통일되고 이계의 침략자들이 지구를 침략하기 시작하면 가장 먼저 죽을 것이거든.”
“그럼 우리는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루쿤타는 앞으로 태하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혹은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최선인지 일러 주었다.
“저놈들은 이계와 통하는 문인 샌드타워를 가로막고 있는 일종의 잠금장치가 풀리기를 바라며 이계의 많은 자원들을 이곳으로 보내 주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잠금장치가 풀릴 날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곳 지구의 정보를 모으기 시작했다.”
“쓰레기를 주는 만큼만 딱 이계의 물건들을 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로군.”
“그래, 그런 이유였다. 한마디로 너희들은 지금까지 적들에게 자기 집의 정보를 있는 대로 퍼 주고 있었던 거야.”
“……빌어먹을.”
“하지만 그런 말도 안 되는 일도 때론 도움이 되기도 한다. 왜냐고? 저놈들은 지구를 안다 해도 거의 수박 겉핥기식으로밖에 모르거든. 적을 어설프게 안다는 것은 차라리 모르는 것보다 더 위험할 때가 있지. 지금이 바로 그런 때야. 특히나 너희들이 얼마나 강한지 모를 때, 그때가 최고의 찬스라고 할 수 있겠지?”
“그럼 우리가 지금보다 더 단련해야 한다는 얘기야?”
“단련? 더 이상 단련할 필요도 없다. 던전이 너희들의 놀이터가 될 텐데 굳이 그럴 이유가 있겠나? 너희들은 결정적으로 각자의 구역에서는 이미 신에 이르지 않았던가? 이 정도만 되어도 이계의 침략자들쯤은 가볍게 눌러 버릴 수 있다.”
“그럼 뭘…….”
“지금부터는 정보를 최대한 숨겨라. 그 어떤 누구에게도 너희들의 정보를 흘려선 안 된다. 심지어 너희들이 신뢰하는 인간들에게도 말이다.”
“이를테면 청룡방과 같은 사람들에게도 말이야?”
“가능하면 이제부터 모든 얘기는 비밀에 부쳐라.”
“그럼 우리의 신뢰 관계는?”
“신뢰 관계? 그딴 것이 지구보다 중요하다는 건 아니겠지?”
태하는 마이트의 후예가 된다는 것이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것이라 생각은 했었다.
허나 그 막연했던 느낌보다도 이 일은 훨씬 더 어렵고 복잡했다.
“……쉽지 않겠는데?”
“그 대신 100층의 보스들을 잡을 때까지 주변의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하겠다.”
루쿤타는 태하의 손을 잡더니, 이내 자신의 가슴에 가져다 댔다.
꿀렁!
별안간 그의 심장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태하의 손.
“어, 어어어……?!”
“앞으로 이 심장의 절반을 너희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겠다. 이로써 우리의 계약은 성사되는 것이다.”
“계, 계약?”
“보호자와 피보호자의 관계 말이다.”
설마하니 이렇게 직진으로 훅 들어올 줄은 몰랐기 때문에 태하와 동료들은 크게 당황할 수밖에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하의 동료들은 루쿤타의 말에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
“계약은 체결되었다. 앞으로 닥칠 위기에 잘 대비하기 바란다.”
절대적인 공명으로도 깰 수 없는 강력한 연결 고리가 태하와 수호자들 사이에 생겼다.
***
루쿤타가 던전을 떠난 뒤, 태하와 동료들은 대자연의 정령왕인 알란트라와 마주했다.
휘이이이잉……!
거대한 바람, 그리고 그 속에 일렁거리는 불길이 마치 사람의 얼굴을 형상화한 듯했다.
-제2바벨탑의 수호자여. 나의 시험에 응할 준비가 되었는가?
“물론!”
-좋다. 이리로 오라.
알란트라가 입을 벌리자, 이내 그의 입은 문의 출입구와 같은 모양으로 변해 버렸다.
빅토리아는 깊은 심호흡을 내뱉곤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디뎠다.
“빅토리아 파이팅!”
“오우오우오오!”
모두의 응원을 받으며 알란트라의 시험에 응하는 그녀.
파앗!
그녀가 미처 걸음을 다 떼기도 전에 그 신형은 물질계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그녀가 다시 스스로의 존재감을 느꼈을 때에는 방금과는 전혀 다른 곳에서 눈을 떴다.
“으읏!”
-반갑다. 나는 대자연의 정령왕이자 제2바벨탑의 수호자를 따르는 권속이다. 이제부터 시험을 낼 것이고, 그 시험에 통과하면 제2바벨탑의 수호자인 리치몬드의 뒤를 잇게 된다.
“그렇군…….”
마이트의 동료였던 마법왕 리치몬드는 탑의 수호자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공격력을 가지고 있었던 존재로 알려져 있었다.
그녀 또한 리치몬드를 만나 본 적은 있었지만, 그 힘이 얼마나 대단하고 강력한지는 알지 못했다.
-시험은 간단하다. 네가 마력의 불길을 흡수할 수 있는지, 없는지 그것을 시험할 것이다.
“방법은?”
알란트라는 빅토리아에게 진한 녹색의 서판을 건네주었다.
서판을 받은 빅토리아는 순간, 자신의 눈이 번쩍 뜨이며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을 한 번에 외울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이것은?”
-지식의 서판이다. 운명의 서판이 탄생하기 전, 지혜의 여신 유미나스가 자신의 왼쪽 눈을 바쳐 얻어 낸 것이지. 운명의 서판은 지혜의 서판으로 인해 비롯된 것이다. 지혜의 서판과 운명의 서판은 서로 갈래를 같이하나, 만약 지혜의 서판이 악독한 자들의 손에 들어가는 날에는 이 세상은 멸망하고 말 것이다.
“너무 엄청난 물건인데.”
-그렇다. 엄청난 물건이다. 마력은 이곳에서부터 비롯되었다. 모든 것은 운명의 서판을 봉인하기 위함이었지. 우리는 탑의 수호자에게 이 서판을 맡기는 한편, 자연과 물질계를 연결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맡길 생각이었다. 이 서판에 사악하거나, 나약하거나, 지혜롭지 못한 자가 손을 대게 되면 그 즉시 영혼이 소멸하게 된다.
“……극단적인 방법이로군.”
-만약 피하고 싶다면 피해도 된다.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다면 보내 주겠다.
빅토리아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천만의 말씀!”
-과연 당돌한 인간이로군. 좋다, 리치몬드의 후예인지 알아보는 시험을 시작하겠다. 서판에 손을 올려라.
지식의 서판에 손을 올리는 그녀의 표정에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한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의 온몸을 타고 서판의 녹색 기운이 서서히 옮겨 갔다.
스스스스!
“……크윽!”
-모든 것은 자연이 흐르는 대로 따라갈 것이다. 자연의 흐름에 모든 것을 맡기면 된다.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것인지, 사실 빅토리아 본인도 잘 알지 못했다.
허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곳이 생사의 갈림길이고 그녀는 이제 죽거나 살거나 둘 중에 하나만 남았다는 사실이었다.
그 사실을 인지하고 나니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죽음도 자연의 일부분인 것이지.’
어쩌면 죽음을 인정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이 죽음을 인정하는 순간, 세상은 다르게 보인다.
솨아아아……!
따뜻한 봄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눈을 간질였다.
이내 눈을 뜬 빅토리아.
“……아?”
-축하한다.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네 모습에 지식의 서판이 감동한 모양이다. 이제 너는 제2바벨탑의 수호자가 되었다.
“이것으로 시험은 끝난 것인가?”
-시험은 끝났으나 너의 운명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앞으로 나아가는 길이 험난할 것이다. 그것을 이겨 낼 수 있는 힘을 오늘 얻었다고 생각하길.
잠시 후, 그녀의 주변 풍경이 빠르게 변했다.
파앗!
이번에는 거대한 나무 위에 지어진 저택에서 눈을 뜬 그녀는 얼떨떨함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는 작은 불길을 중심으로 소용돌이가 치고 있는 기이한 형상의 어떤 존재와 마주했다.
빅토리아는 그 존재가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알란트라?”
-반갑다, 주인! 이제부터 나는 네 권속이 된다. 시키고 싶은 일이 있으면 무엇이든 시키기 바란다.
“주인이라.”
-우선은 바벨탑을 점령했으니 그 구조부터 바꾸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된다. 지금의 이 구조로는 적들을 온전히 막아 내기에 무리가 있으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지?”
-언제라도 제1바벨탑의 강력한 몬스터들이 지원을 올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그러고 나면 다른 바벨탑으로도 그 공간을 확장해서 연결시킬 수도 있고.
“아공간을 연결시킨다는 거야?”
-우리는 그것을 웨이포인트라고 부른다.
“아하! 포털과 포털을 이어 주는 거구나.”
-비슷하다.
“좋아, 그럼 당장 리뉴얼 공사에 들어가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