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 100층까지 한 번에?(1)
제2바벨탑 지하도시 공사 현장에 마련된 식당 안.
달그락, 달그락!
의문의 여자는 미친 듯이 음식을 먹어 치우고 있었다.
“쩝쩝, 쩝쩝……!”
“처, 천천히 드세요. 그러다가 체하겠어요.”
“……이게 얼마 만의 음식인지 몰라. 자기들도 한번 80년 동안 음식이란 걸 못 먹었다고 생각해 봐. 얼마나 배고플지 감이 와?”
“뭐, 그건 그렇습니다만.”
태하는 그녀의 앞에 물잔을 놓아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안 그래도 목이 막혔다는 듯이 물 을 원샷 해 버렸다.
이윽고 조금 살겠다는 듯이 수저를 놓는 그녀.
“이제 좀 나아. 살 것 같다고!”
“그나저나, 이제는 답을 좀 주시죠. 당신은 누구세요?”
“내 정체가 궁금해?”
“물론이죠! 던전의 땅속에서 80년 동안이나 갇혀 지낸 사람이라니요. 관심이 가지 않겠습니까?”
그녀는 아리따운 금발의 미녀였는데, 170cm가 넘는 키에 늘씬한 몸매가 가히 압권이라 할 만했다.
도도하지만 털털한 매력을 가진 그녀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스칼렛 튀르센. 혹시 들어 봤어?”
“스칼렛 튀르센……?”
주변에 있던 뱀파이어들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스칼렛 튀르센은 특유의 도도한 미소를 지었다.
“후후, 이제 알아보시나 봐? 나야, 냐! 스칼렛 튀르센! 전설의 여배우 스칼렛 튀르센 말이야!”
스칼렛 튀르센은 40년대를 풍미했던 여배우로서 지금까지 할리우드에서 최고의 섹스 심벌이라 불리고 있었다.
그런 스칼렛 튀르센을 아는 뱀파이어들은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싶었던 것이다.
“아, 아니 잠깐! 스칼렛 튀르센은 지금쯤 할머니가 되었거나 사망했어야 맞지 않나? 우리 어머니보다 연상이라고 알고 있는데?”
“……할머니라니! 거 듣는 할머니 기분 나쁘게 말이야.”
“험험! 아무튼 반갑습니다! 이야, 이런 대배우를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이야!”
스칼렛 튀르센은 태하는 물론이고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아는 인물이다. 비록 실존 당시에는 함께하지 못했으나, 언제 어디서나 섹시한 여성 스타를 꼽으라고 한다면 항상 원톱으로 꼽히는 사람이 바로 스칼렛 튀르센이었으니 말이다.
심지어 그녀는 교과서에도 나올 정도로 유명했으니 요즘 고등학생들도 그녀를 모를 리가 없었다.
“스칼렛 튀르센은 언젠가부터 행방이 묘연해졌다고 들었는데, 설마 바벨탑에 갇혀 있을 줄은 몰랐네요.”
“참 나, 이놈의 바벨탑은 무슨 사람을 감금하는 고문장인 건가? 뭐 이렇게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이 많지?”
보통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부터는 이 비상식적인 일이 왜 일어났으며, 이스터에그는 왜 그녀에게 반응했는지 알아내야 한다.
태하는 이스터에그라는 것을 제1바벨탑에서 주웠으며, 그 퀘스트를 마이트가 주었으니 그에게 답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지금 마이트 본인을 만나 볼 수는 없다. 그는 태하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은퇴를 했으니 말이다.
“제1바벨탑으로 가 봅시다. 그곳으로 가면 답이 나올지도 몰라요.”
“아하, 메피스토의 서고!”
“그래요! 그곳이라면 답을 찾을 수도 있겠네요!”
***
제1바벨탑 100층에 설치된 메피스토의 서고를 찾은 태하.
그를 맞이한 레이스는 이제 어엿한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으며, 그 어느 때보다 생기가 넘쳐 보였다.
태하는 그녀를 보자마자 불현듯 제2바벨탑에서 보았던 레이스들을 떠올렸다.
“아 참! 너도 그러고 보니 레이스였지?”
“네? 너도 레이스였다니요? 제가 언제는 레이스가 아니었던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제2바벨탑에는 승천하지 못한 원혼들이 레이스로 변해서 떠돌아다니고 있었거든.”
“아아! 그녀들과 저는 다르죠! 에이, 알 만하신 분이 왜 그러세요?”
이제 그녀는 심지어 성격까지 바뀌어서 이렇게 너스레를 떨곤 한다.
태하는 그녀의 너스레를 뒤로하고 이번 사건에서 자신이 알아야 할 것들에 대해 물었다.
“그나저나 내가 궁금한 것이 있는데 말이지.”
“말씀하세요! 검색해 드릴게요!”
“이스터에그에 대해서 한번 검색해 줄 수 있나?”
“이스터에그요? 잠시만요…….”
이제 레이스는 아무리 검색을 해도 졸지 않고 태하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바로 답을 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잠시 후, 레이스가 검색을 끝내고 답을 주었다.
“이스터에그에 대한 정보를 드릴게요!”
“오오, 찾았어?”
“이스터에그는 던전을 설계했던 당시, 설계자인 바알제붑이 남겨 놓은 것이라고 하네요.”
“바알제붑?”
“흔히 바알이라고 불리죠. 마계 군단의 참모총장이자 던전의 설계자로 유명해요. 마법이라는 것을 신에게서 빼앗아 사용한 최초의 대악마로 알려져 있죠.”
“흠, 그런 몬스터가 있었던가?”
“아무튼 간에 바알제붑이 던전을 설계할 때에 던전 곳곳에 숨겨 놓은 것이 바로 이 이스터에그라고 해요. 일종의 던전 클리어의 지름길을 만들어두었다고나 할까요?”
“지름길이라.”
“잘하면 100층까지 한 번에 돌파가 가능하대요. 게다가 다른 이스터에그를 만나면 이스터에그가 이스터에그를 통해 각성하기도 하고요. 한마디로 이스터에그 하나를 찾았다면 나머지를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란 거죠.”
태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잠깐. 내가 찾은 이스터에그는 처음엔 계란이었고, 그게 부화해서 납치당했던 여성의 얼굴이 되어 버렸어. 그럼 그녀가 이스터에그라는 거야?”
“맞아요! 사람 자체가 이스터에그가 되기도 하는데, 아마 그녀는 자신이 죽기 직전에 바알제붑의 분신에 의해서 이곳으로 소환되었겠죠. 두 번째 이스터에그가 되어 남은 이스터에그를 품기 위해서요.”
바알제붑은 이스터에그를 테스트 용도로 남겨 두었던 것으로 보였다.
허나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든다.
도대체 그렇다면 왜 하필 스칼렛을 이 시점에 소환해서 이스터에그로 만든 것일까?
“왜 하필이면 스칼렛이었을까? 그리고 그녀를 왜 지금 굳이 납치를 해서 만들어 두었던 걸까?”
“이건 그냥 제가 정보를 취합해서 만든 것이니 참고만 하세요.”
“그래! 어서 말해 봐!”
“제 생각에는 바알제붑은 마계 군단을 영원히 봉인해 버리려고 했던 것 같아요.”
“봉인하다니?”
“처음에는 마왕의 뜻에 따라 자신이 지상을 지배하고 싶었겠지만, 잘 생각해 보니 그게 옳지 않은 일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겠죠.”
“그럼 뭐야, 결국 바알제붑이 철들어서 이런 일을 꾸몄다는 거네?”
“그런 셈이죠. 만약 그게 아니었다면 굳이 분신까지 만들어서 일을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 필요는 없었겠죠.”
“허어……!”
“아마 뱀파이어는 바알제붑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었겠죠. 하지만 그들에게 지하도시를 만들어 주기 위해서 땅을 파다가 일이 이렇게까지 된 것을 보면, 어쩌면 운명의 수레바퀴가 주인님을 수호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흠…….”
“아무튼 간에 이제 100층을 한 번에 올라갈 수도 있게 되었어요. 스칼렛이라는 사람, 이제 주인님과 하나의 운명으로 묶였으니 한번 잘 지내보세요!”
***
그날 오후.
태하는 서고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 모두에게 알려 주었다.
동료들은 이 또한 성좌의 축복이라며 기뻐하고 있었지만, 스칼렛은 다소 오묘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평화를 위해 이용을 당했던 셈이네?”
“죽음의 기억은 없지만, 죽음 직전에 이를 만한 상황이 있었을 겁니다.”
스칼렛은 그제야 모든 것이 맞아떨어진다는 듯 무릎을 쳤다.
“……그래! 나는 약물 부작용으로 심장마비를 겪고 있었어. 비록 죽지는 않았지만, 숨이 끊어지기 전에 가슴이 갑자기 가벼워지고 사방이 깜깜해지는 느낌을 받았지. 그래, 죽지는 않았지만 죽을 뻔했던 거야! 아마 그대로 시간이 흘렀다면 나는 꼼짝없이 죽어 버렸을 것이고.”
그녀는 다소 시크한 성격의 소유자로, 의외로 인정이 빠른 편이었고 생각보다 쿨한 성격이었다.
태하는 그런 그녀에게 앞으로 같이 동료로 다니자는 제안을 했다.
“우리와 함께 가시죠. 당신은 평화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인물입니다.”
“굳이 나에게 그런 부탁을 할 필요가 있을까? 당신은 앞으로 내 주인이나 마찬가지라면서.”
“저는 아무리 주인이라도 권속이 싫다면 굳이 끌고 가지 않습니다. 바벨탑에 있는 친구들도 동료 의식으로 저를 따르고 있는 것이죠.”
“음.”
“이 일이 마무리가 된다면 아마 당신도 여유로운 삶을 되찾을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장담하겠습니다.”
그녀로선 그다지 나쁠 것 없는 조건이기도 했다.
스칼렛은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당신을 따르도록 하지. 단, 이 일이 끝나면 여유롭고 윤택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해 주겠다고 약속해.”
“돈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매일 돈을 물 쓰듯 써도 다 못 쓸 정도로 드릴 수 있다고 장담합니다.”
“오호, 당신 돈 많아?”
태하의 옆에 있던 용팔이 웃으며 그의 재산에 대해 한마디 덧붙여 주었다.
“코어시장을 독과점하는 기업의 총수이십니다! 우리 헌터님의 재산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뉴욕시티 전체의 부동산을 다 사고도 남아서 도쿄에 서울까지 덤으로 쇼핑할 수 있을 정도랄까요?”
“……무슨 사람이 돈이 그렇게 많아?”
그녀가 원한다면 돈이야 정말 질릴 때까지 쓸 수 있게 해 줄 수도 있었다.
태하는 아예 액수까지 정해 주기로 했다.
“원하신다면 액수까지 아예 맞춰 드리겠습니다.”
“음…… 한 천만 달러 정도?”
“물가 상승률이 높습니다. 한 5억 달러 정도 드릴 테니 하고 싶은 거 다 하시면서 사세요.”
한화로 5천억이 넘는 돈을 준다는 것이다. 이 정도면 어지간한 중견 기업 몇 개쯤 사고도 남을 것이다.
스칼렛은 실소를 흘렸다.
“허 참, 내가 그 정도 속물로 보여? 됐고, 나중에 집이랑 일자리나 좀 알아봐 줘.”
“일자리라면야 얼마든지 알아봐 드릴 수 있죠!”
“그럼 끝! 자, 그럼 일하러 가 볼까?”
말이 좀 세서 그렇지 스칼렛은 이 세상의 수많은 속물들과는 아예 결이 다른 사람이었다.
태하는 그녀의 행동거지에서 그런 걸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나중에 타이탄 컴퍼니의 전속 모델로 기용해야겠어. 헬스장에도 좀 취직시키고 말이야.’
이제 100층까지 올라갈 이스터에그도 섭외했겠다, 태하 일행은 본격적인 여행을 떠나 보기로 했다.
태하는 레이스에게서 알아낸 이스터에그의 사용법에 따라서 100층까지 한 방에 올라가기로 했다.
“제2바벨탑 100층에는 무엇이 살고 있다고 알려져 있나요?”
“소문에 의하면 대자연의 정령이 살고 있다고 하더군요.”
“정령? 아아! 드래곤의 주변에 있던 정령왕 같은 것이요?”
“아니요, 그런 단순한 의미의 정령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스케일이 대자연 그 자체를 움직일 정도로 엄청나다는 뜻이죠.”
“대자연의 정령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