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헬스레이드-179화 (179/197)

179 불쌍한 사람들(1)

뱀파이어들의 얘기는 충격적이었다.

북미, 아시아, 심지어는 유럽과 아프리카에서 거주하던 일반인들인 이들은 중국의 장기 밀매 집단에게 사로잡혀 장기를 적출당하고 던전에 버려진 것이었다.

“……혈액이 아직 남아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이곳에 사는 뱀파이어 로드에게 피를 빨려 몬스터화가 된 거죠.”

“뱀파이어 로드라니, 그런 몬스터가 있었나?”

태하는 지금 저들이 거짓말을 하는 것인지 아닌지 판별하는 능력이 있었고, 그 능력을 바탕으로 조사해 본 결과 진실로 판정되었다.

만약 그렇다면 이들은 정말로 억울하게 탑에 갇힌 셈이었다.

“뱀파이어 로드는 10층에 사는 보스 몬스터입니다. 그렇게 강력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약하지도 않죠. 하지만 그놈이 어떻게 4층으로 내려올 수 있었는지, 그게 미스터리네요.”

빅토리아의 말을 들은 한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미스터리는 아니죠. 그런 능력을 가진 빌어먹을 놈들은 얼마든지 있잖아요?”

“아하! 헬파이어?”

“그리고 금성탑이요.”

금성탑이 악의 축이라는 사실은 이미 확인되었다. 그들이 이곳까지 마수를 뻗치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다는 소리였다.

태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흠……. 우리가 이곳에서 내려가면 이 뱀파이어들은 어쩌죠? 그놈들이 또 쳐들어와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르잖아요.”

“그건 그런데, 지금 당장 우리가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요. 이곳은 제1바벨탑이 아니잖아요.”

이곳이 만약 제1바벨탑이었다면 지금과 같은 일이 일어났을 리도 없었겠지만, 설사 이런 일이 발생했다고 해도 분명 사정이 훨씬 나았을 것이다.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총총이 앞으로 나섰다.

“지하도시를 만드는 거다요!”

“지하도시?”

“우리 몰먼시티처럼 저 뱀파이어들이 살 수 있는 지하도시를 만들어 주는 거다요! 어떠냐요?”

“아아……!”

“굴만 파서 집을 지어도 최소한 좀비에게 물어뜯기는 일은 없을 것이다요!”

총총의 아이디어에 모두들 무릎을 쳤다.

타악!

“이야, 총총! 대단한데?!”

“동병상련이라고 생각했다요. 그래서 우리랑 상황이 너무 똑같아서 몰입했었다요.”

“……아아, 하긴.”

태하는 뱀파이어들에게 총총의 사정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다.

지금까지 몰먼들이 당해 왔던 모든 것, 그리고 지금 그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려 주었다.

그러자 뱀파이어들이 눈물을 쏟았다.

“흑흑, 그랬었군요! 존경스럽습니다!”

“헤헤, 존경이라니! 다 같은 처지인데.”

“아무튼 간에 그럼 지하에 굴이라도 좀 파 주실 수 있겠습니까? 선생께서 굴만 파 주시면 우리가 어떻게든 습격에서 버텨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우리 중에도 박사들이나 기술자들이 꽤 많거든요.”

“아아, 그러냐요?! 그럼 여기에 굴을 파고 발전기를 하나 주고 가겠다요!”

“……정말 고맙습니다.”

“그나저나 그렇게 되면 뭘 먹고 사냐요? 뱀파이어는 피를 마셔야 하는 것 아니냐요?”

“이게…… 정말 슬픈 얘기이지만, 이렇게 극단적인 배고픔에 수십 년이나 시달리다 보니까 소화기관이 진화를 해서 바뀌더군요. 이제는 피를 빨지 않아도 살 수 있습니다. 고기 종류는 먹을 수 없습니다만, 식물성 음식은 얼마든지 먹을 수 있습니다. 조리를 못 한다는 단점이 좀 있긴 하지만요.”

“허어, 그렇게 진화를 하기도 하냐요? 그건 몰랐다요!”

“저희들도 놀랐습니다. 아무튼 이제는 헌터들에게 사냥을 당하지 않아도 되고 좀비에게 뜯어 먹히지 않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얼마를 굶어도 행복할 것 같아요.”

태하는 이들의 사정이 워낙 딱하다 보니 뭔가 도움을 좀 주고 싶었다.

그는 빅토리아에게 이들을 원조할 수 있는 방법을 동원하자고 제안했다.

“몰먼족 장인들을 데려다가 발전 방법을 연구하면 어떨까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몰먼족의 장비를 빌려주고 한 달 정도 공사를 도와줄 수 있긴 하겠죠. 하지만 그 안에 습격이라도 당한다면?”

“그러지 않도록 우리가 이곳에서 상주하고 있어야 하겠지요.”

“음. 한 달이라.”

“그렇다고 이들을 이렇게 그냥 죽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잖습니까?”

“그럴 바엔 차라리 굴만 좀 파 주고 곡식을 수급해 주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10층을 조금이라도 빨리 공략해서 저들을 자유롭게 해 주는 것이 훨씬 나을 것 같은데.”

“자유롭게 해 준다고요?”

빅토리아는 뱀파이어들에게 물었다.

“만약 여기서 더 이상 되살아나지 않고 깔끔하게 죽을 수 있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죽을 수 있다고요? 정말요?”

“네, 죽을 수 있다면요.”

뱀파이어들은 저마다 다른 감정으로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너무나도 기쁘게 그것을 받아들이지만, 어떤 이들은 상당히 힘들어하기도 했다.

허나 감정은 다 달라도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것만큼은 다르지 않았다.

“……죽고 싶죠. 당연히.”

“괴로워도 죽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솔직히 죽음이 두렵기는 해도 여기서 매일 처참하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보다는 훨씬 낫죠.”

“맞습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가족들에게 우리의 생사 정도는 알려 주고 싶다는 점이랄까?”

태하와 동료들은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의 죽음을 가족들에게 알리지도 못하는 삶이라니, 이 얼마나 슬픈 일이란 말인가?

그런 태하의 감정을 잘 알기에 뱀파이어들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압니다. 우리가 좀 억울하긴 하죠. 하지만 인간은 누구나 죽습니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살아가다가 평범하게 죽었다면 좀 나았을지도 모르죠. 그러나 죽음의 공포는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이제 1년이라도 더 살고 싶다고 남을 처참하게 죽이는 짓 따위는 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음…….”

“생각해 보세요. 만약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었다면, 하루라도 더 살고 싶어서 남을 죽이고서라도 살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돈 몇십만 달러만 있어도 사람 하나 죽이고 장기 몇 개 가지고 오는 건 일도 아닙니다. 그런 미친 세상에서 살아가느니, 이렇게 깔끔하게 가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최소한 삶에 대한 미련은 없어졌으니 말입니다.”

이들이 돌아가면서 제물이 되어 왔던 것은 삶에 대한 미련이 있어서가 아니라 말 그대로 너무나도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태하는 용팔을 쳐다보았다.

“용팔 씨, 그럼 저들을 저승으로 데리고 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 줄 수 있어요?”

“……굳이 꼭 그래야 할까요? 지하에서 살아갈 수도 있잖아요.”

“일단 방법이라도 좀 찾아보고, 그건 나중에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요?”

“흠.”

용팔은 뱀파이어들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 있다는 소리에 지하에서의 삶을 어느 정도 포기한 모양이었다.

이건 포기하면 편하다는 둥의 방식이 아니었다.

“궁극의 안식으로 가기 위한 일이라.”

“만약 당신들께서 우리에게 궁극의 안식을 주실 수 있다면, 죽어서도 정말 웃으며 눈을 감을 수 있을 겁니다.”

사는 게 죽는 것보다 고통스럽다는 말은 이럴 때 하는 것이었다.

영원불멸의 삶을 살면서도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으며, 언제나 잔인하게 몬스터에게 뜯어 먹히거나 헌터들에게 살인을 당하면서 살아야 하는 감옥에서의 삶.

이런 고통을 느껴 본 뱀파이어들은 이제 죽음이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사실, 저희들은 이미 죽었어야 합니다. 이승에서 충분히 고통을 받았고 안타깝게 죽었지만, 결국 생은 다한 것이었죠. 재수가 없었어도 일단 죽음을 맞이한 것은 맞습니다. 그러니 자연의 섭리대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바람직한 일 아니겠습니까?”

“으음…….”

“방법이라도 좀 알아봐 주십시오! 이렇게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무리 사신이라도 용팔은 마음이 여린 인간이었다.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허나 그러다가 돌연 그의 입이 열렸다.

“……좋아요. 알아보기는 할게요. 하지만 이런 생각도 해 보세요. 언젠가는 이곳에서 가족을 만날 수도 있잖아요?”

“가족……?”

“네, 그래요. 가족.”

뱀파이어들은 가족이라는 말에 눈시울을 붉혔다.

허나 그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시기상 가족들은 다 사망했을 겁니다. 인간은 그렇게 오랜 세월을 살 수 없어요.”

“아……!”

“죽으면 다음 세상에서 가족들을 만날 수도 있겠죠. 그렇게 된다면 더없는 행복일 겁니다.”

“……그렇군요.”

용팔은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다는 것을 깨닫곤 뱀파이어들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다.

***

제1던전에 위치한 몰먼시티.

몰먼들은 뱀파이어들의 안타까운 소식을 접하곤 장비와 인력을 대대적으로 지원해 주기로 했다.

“뱀파이어들이 농사까지 지을 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데 1년이면 충분하다요! 지금 당장 먹고 잘 수 있는 설비는 한 달이면 뚝딱이다요!”

“그럼 다들 함께 가 주는 거냐요?”

“당연하다요! 어떻게 그런 불쌍한 인간들을 그냥 지나칠 수 있냐요?!”

몰먼족은 뱀파이어들이 자신들이 당한 것과 똑같은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에 격분했다.

만약 할 수 있다면 던전 밖에서라도 그 몹쓸 놈들을 확 쓸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외쳤다.

“총총, 우리 나리에게 부탁해서 그놈들을 죽이자요!”

“오우오우오오!”

몰먼들의 여론은 뱀파이어들을 구해 주고 그들을 고통에 몰아넣은 범죄자들을 죽이자는 것이었다.

총총은 이들의 여론을 종합해서 태하에게 전해 주었다.

태하는 이 사실을 다시 청룡방에게 전했다.

백선은 당연히 묵과할 수 없는 사실이라며 분노했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놈들이로군.”

“척살대라도 보내야 할까요?”

“당연하지. 하지만 우리끼리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내가 직접 파워드 피스를 포함한 국제헌터협회를 만나야겠어.”

이른바 ‘통나무 장사꾼’으로 불리는 장기 밀매 조직의 문제는 꽤 오래전부터 심심치 않게 거론되어 왔다.

백선은 이참에 아예 뿌리를 뽑으려는 것이었다.

그는 태하에게 정부 및 공공기관들과 접선해 달라고 부탁했다.

“자네가 청와대나 백악관을 찾아가 줘. 자네라면 이미 인간들의 영웅으로 부상했으니 충분히 그들을 구원해 줄 수 있을 걸세.”

“예, 어르신. 그나저나 10층부터 일단 돌파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10층은 나와 함께 가세. 그 전에 일단 이 사실을 최대한 널리 알리는 게 좋아. 저런 사람들이 이곳에만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잖나?”

“아아……!”

“나, 백선이 목숨을 걸고 장담하건대, 10층까지 일주일이면 올라갈 걸세.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일단 정부의 힘부터 하나로 모으기로 하세.”

“예, 어르신!”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백선이 직접 던전에 오른다면 10층까지 일주일이 아니라 나흘이면 충분할지도 모른다.

태하는 그런 사정을 전하기 위해서 정부를 찾아갔다.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백악관이었다.

던전에서 촬영한 영상을 백악관으로 가지고 가자, CIA와 FBI 등 정보 및 수사기관의 수장들이 한곳에 모였다.

그들은 태하가 가지고 온 영상 및 유전자 정보를 바탕으로 찾아낸 실종자 정보를 손에 넣었고,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수사를 시작한 것이었다.

“……일단 여러분들이 손에 넣은 정보를 바탕으로 수사를 해 보니 수십 년 전에 실종자 신고가 되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장기 밀매를 언제부터 해 왔던 거죠?”

“장기 밀매……를 당한 것은 90년대부터인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납치는 훨씬 더 오래전부터 자행되었습니다. 의학 실험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실험에 동원된 것이죠.”

“……아무리 실험이 중요하다 해도 사람을 마구 잡아들여요?”

“납치는 과거에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일어났습니다.”

“빌어먹을.”

“아무튼 간에 우리 백악관에서는 이 일을 그냥 넘어가지 않겠습니다. 국제사회에 이 사실을 알리고 마피아와 흑사회 등 장기 밀매에 동원된 세력을 깡그리 섬멸해 버리겠습니다.”

드디어 미국에서 마음먹고 칼을 뽑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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