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 영혼을 어루만지는 자(2)
용팔은 진중한 얼굴로 레이스들을 꾸짖었다.
“사악한 마음을 먹으면 그렇게 되는 겁니다. 엄연히 인간과 영혼이 사는 곳이 다르거들, 어떻게 산 사람을 해치려는 겁니까?”
-…우리는 그냥 겁만 준 거야. 해칠 생각은 없었다고!
“이곳에서 사람을 놀라게 하면 그대로 사망한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 솔직히 그 모습이 보고 싶었던 거죠?”
-아니야! 그건 절대로 아니야. 우리가 미쳤다고 사람을 죽여?
“그럼 왜 그러는 건데요?”
-…이곳에서 서부개척정책에 희생당한 여자들이 출몰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사람들이 우리를 기억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어!
“희생이요?”
-서부개척지를 약탈하는 미친놈들이 우리를 창녀로 팔아먹고 아편을 마구 먹여 손님을 받게 했다고!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정도였어. 너희들이 그런 고통에 대해서 뭘 알아?!
“음, 그랬던 거군요. 몰랐어요. 정말 미안합니다.”
서부개척시대는 인권이라는 것을 개밥처럼 대하던 때였고 정부도 반쯤 포기한 개척지에서 여성들이 약탈이라도 당하면 그대로 끝이었다.
모든 것이 사업이라는 미명하게 포장되던 그때, 만약 정착지가 무법자들에게 약탈이라도 당했다면 그 말로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뻔했을 것이다.
용팔은 그녀들의 한을 어떻게 하면 풀어줄지 생각해보았다.
“여러분들의 희생을 기리는 비석을 세워주면 좀 나을까요?”
-비석…? 그걸로 되겠어? 언젠가는 그 비석도 빛이 바랠 텐데.
“제가 위령탑을 세워드릴게요. 그리고 1년에 한 번씩 당신들을 위한 위령제를 지내도록 해드릴게요. 어때요?”
-…위령제?
“1년에 한 번씩 위령제를 지내고 마을에 축제를 열어주는 거죠. 당신들이 그렇게 희생해서 만들어진 마을에서 당신들을 업적을 기리며 축제를 여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죽었는데 축제를 열어? 그건 아니지!
“당신들의 자손들도 존재하잖아요? 그들이 1년에 한 번씩, 몇 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울고 있다면 좋겠어요?”
-…자손! 그래, 자손들이 있긴 했지!
“그들이 당신들을 잊지 않고 1년에 한 번씩 업적을 기리는 축제를 연다면 좋지 않을까요?”
그제야 레이스들은 어느 정도 수긍하는 눈치를 보였다.
-그렇다면야.
-그래! 우리가 희생해서 우리 아이들이 저만큼 살 수 있게 되었다면, 나는 그것으로 족해.
-나도!
-사신양반, 그럼 다른 것 없이 우리 아이들이 잘 살고 있는지, 그것만 좀 볼 수 있게 해줘. 위령제는 필요 없어.
“알겠습니다. 그리해드릴게요.”
레이스들은 다른 게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들이 잊혀지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었다.
용팔은 그녀들을 데리고 던전을 나섰다.
파앗!
일순간에 거리로 나온 용팔은 거리에서 영혼을 거두고 다니는 사신을 찾아갔다.
랄프라는 이름의 사신은 레이스들의 사정을 듣곤 흔쾌히 자손들에 대한 정보를 내어주었다.
“원래 이러면 안 되는데, 이번에만 특별히 해드리는 겁니다.”
“고맙습니다!”
“그나저나 자손들이 다들 잘 살고 있네요. LA에서 한 가닥 한다는 사람들이잖아요?”
“오호, 그래요?”
레이스들은 자손들이 번창해서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그제야 안심이 되는 모양이었다.
용팔은 자손들을 찾아가자고 했으나, 레이스들은 그것을 거부했다.
-…지금의 모습은 너무 추악해. 우리 자손들이 잘 살고 있다면, 그걸로 족해. 나는 이대로 명계로 갈래.
-나도. 추악한 모습을 내 자손들이 본다면, 나는 그 괴로움에 영원히 고통받게 될 거야.
“그럼 더 이상 여한 없이 세상을 떠날 수 있다는 뜻이죠?”
-물론이지!
“좋습니다. 그럼 같이 명계로 가시죠.”
***
용팔이 레이스 열 명을 명계로 보내자, 3층에 내리던 비가 그치고 황산으로 가득찼던 온천이 다시 맑아졌다.
“우와! 신기하다요! 이제 산도가 낮아져서 사람이 발을 담가도 죽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요!”
“이래서 사람이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살아야하는 모양이네요.”
사신은 참으로 바쁜 존재이지만, 그만큼 보람을 느낄 만한 일이기도 했다.
아마 이제 이곳 3층에서 쓸데없이 사람이 실수로 죽는다거나 실종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었다.
4층으로 올라가는 길.
태하는 이제 슬슬 주변이 더워진다는 것을 절감할 수 있었다.
휘이이잉….
덥고 건조한 바람이 불어왔다.
“사막…인가요?”
“4층은 사막지대입니다. 몬스터는 딱히 강하지 않은데, 사막이 워낙 넓고 길을 찾기 힘든데다 물이 한 방울도 없어서 길을 잃으면 그대로 사망입니다.”
“이건 너무 극한의 난이도인데.”
“그래서 4층부터는 아예 A급 헌터 이하는 출입이 금지되어 있어요. 워낙 많은 사람이 죽다보니 그렇게 되었죠. 물론, 금지를 해도 사람들은 이곳을 찾습니다. 여기서 발견되는 다이아몬드가 워낙 귀해서요.”
“다이아몬드? 사막에서요?”
“4층을 노천 다이아몬드 광산이라고 불러요. 운이 좋으면 사람 주먹 만한 고품질의 다이아몬드를 구할 수도 있거든요.”
“허어, 그렇구나. 하긴, 그 정도면 목숨을 걸고 오를 만도 하네요.”
“사람의 욕심은 정말 끝이 없죠. 이곳은 거의 고비사막의 규모만큼 넓어요. 그런데도 사람이 오르는 걸 보면 한숨이 나기도 하죠.”
“흠, 그럴 만합니다. 저 안에는 몬스터도 분명 있을 텐데.”
“보스가 바실리스크인데도 사람들은 여길 찾아요.”
“바, 바실리스크요?!”
바실리스크는 상당히 난이도가 높은 몬스터이고 어지간한 S급들도 일대일로는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다.
그런 엄청난 몬스터가 4층에 서식한다는 건 그야말로 놀라서 까무러칠 만한 일이었다.
“다만, 당신보다 약간 더 큰 덩치의 몬스터일 뿐이에요. 그렇게까지 위협적이지도 않고요. 독을 쓴다거나 경직마법을 쓸 수도 없고요.”
“아아, 그렇다면 이해가 아예 안 되는 건 아니네요.”
“아무튼 간에 여긴 바실리스크만 없다면 그렇게 문제가 될 곳은 아니에요. 우리에겐 이두박근호가 있잖아요?”
몰먼족이 미래를 내다보고 이두박근호를 만든 건 그야말로 신의 한 수였다.
만약 총총이 동행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태하 일행은 타는 듯한 직사광선을 그대로 맞으며 사막을 건너가야 했을 것이다.
“에어컨 빵빵한 장갑차를 타고 사막을 건너다니. 솔직히 꿈만 같아요. 이래도 되는 건가 싶기도 하고.”
“히힛, 나리가 좋다면 나도 좋다요!”
“그나저나 총총, 이 장갑차는 모래바람을 견딜 수 있나요?”
“당연하다요! 드래곤 스킨은 버티지 못하는 게 없으니까 말이다요!”
사막이니 당연히 사막폭풍도 불어 닥칠 텐데, 어지간한 일반차량은 당연히 그 안에서 고장이 날 게 분명했다.
허나 이 차량은 드래곤 스킨으로 맥질이 되어 있기에 그럴 걱정은 아예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아니, 잠깐.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까지 모래폭풍을 그냥 뚫고 지나갔다는 뜻이잖아요?”
“뚫지는 않았어요. 잠깐씩 쉬었다가 갔지.”
“…그게 그거잖아요.”
“아, 그런가요?”
“허참, 이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거지? 정말이지 존경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네.”
이런 정신력이라면 아마 해내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
4층을 지나 5층으로 올라가는 길.
이번에는 강력한 눈보라가 몰아치는 황량한 설원이 펼쳐져 있었다.
“영하 40도다요! 이런 눈보라 속에서는 털복숭이 몰먼족도 얼어 죽을 거다요!”
“…해도 안 뜨는 블리자드라니. 여기서 몬스터와 싸우며 앞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하니 아주 막막하기 짝이 없네요.”
한치 앞을 분간하기 힘들 정도의 눈보라는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였다.
이곳을 지나갈 바엔 차라리 몬스터에게 둘러싸여 하루 종일 싸움만 하는 게 낫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이두박근호는 이제 무한궤도장치로 바퀴를 교체하였다.
“짜잔! 바퀴를 바꿀 수 있다요!”
“오호, 이게 바로 그 비장의 무기라던?”
“아아! 그건 아니다요! 그건 나중에 필요할 때 보여드리겠다요!”
“음, 그래? 이보다 더 대단한 기술이라니. 그나저나 빅토리아. 이곳에는 어떤 몬스터가 살죠? 아이스 골렘?”
빅토리아는 창밖을 바라보며 답했다.
“뱀파이어요. 저기 좀 봐요. 이미 우리가 왔다는 것을 알고 하나 둘 몰려들고 있네요.”
“…뱀파이어요?!”
태하가 기억하는 뱀파이어는 무지막지만 준보스로서 어지간한 S급 헌터들도 쭉쭉 나가떨어질 정도로 강력한 마법을 자랑했다.
허나 빅토리아가 말하는 뱀파이어는 뭔가 좀 달랐다.
피골이 상접한데다 제대로 된 옷도 걸치지 못해서 맨살이 다 보일 정도였다.
“…아니, 잠깐. 내가 본 뱀파이어는 귀족 느낌이었는데?”
“귀족이요? 이곳에 있는 뱀파이어들은 피를 빠는 건 고사하고 살아남는 게 힘든 놈들이에요. 사실 인간이 몰려든다고 해서 이길 수 있는 확률도 그리 높지 않아요. 너무 배가 고파서 어떻게든 몸부림이라도 치는 거죠. 실제 전투력으로 따진다면 원래의 고블린보다 훨씬 못할 걸요?”
어떻게 된 바벨탑이 가는 곳마다 이렇게 사연 많은 몬스터들만 있는 것일까.
허나 더욱 가관인 것은 이곳의 보스였다.
“이곳에는 누더기가 되어버린 좀비 키메라가 서식하고 있습니다. 전투력은 오우거에 비해 상당히 열등하지만 추위에 강해서 뱀파이어들을 먹으며 살아가죠. 뱀파이어들은 좀비 키메라에게 먹히지 않기 위해 돌아가면서 목숨을 바친다고 합니다. 어차피 리젠이 되면 살아날 테지만, 좀비 키메라에게 먹히는 순간이 너무 괴로워 순번제로 목숨을 내놓는 거죠.”
“…아니, 어떤 또라이가 던전을 이런 식으로 만들어 놓은 거지? 바벨탑은 군단을 훈련시키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면서요.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좀비 키메라를 욕할 수는 없다.
놈이 아무리 악랄해 보여도 나름대로는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짓이었으니까.
“100층을 정복하면 이런 말도 안되는 먹이사슬부터 뜯어고치는 게 어때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너무 모순되는 것들은 고쳐야 한다고 생각하던 참이에요.”
“그나저나 저 뱀파이어들은 다 어쩌죠? 죽일까요?”
“흠, 글쎄요. 죽여도 별반 얻을 수 있는 건 없을 겁니다. 원래는 하도 사람을 귀찮게 해서 보이면 그냥 죽여 버렸는데,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잖아요?”
저들이 불쌍하면 100층까지 한 방에 돌파하면 된다. 그럼 고통 받는 이들이 사라지고 던전도 제법 조화롭게 변하게 될 테니 말이다.
끼리리리릭….
무한궤도장치가 눈밭을 해치고 나아가는데, 그 옆을 뱀파이어들이 마치 좀비처럼 따라다녔다.
그 모습을 보는 것도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왜 차라리 죽였는지 알 것 같네요.”
“던전을 설계한 놈이 또라이라는 욕을 몇 번이나 한 지 몰라요.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 때마다 목을 치는데, 그리 좋은 기억은 아니었습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4층은 상당히 넓은 편이었기 때문에 그 끝까지 가는데 무려 한 달이나 걸렸다. 그렇게 한 달이나 가는 동안 뱀파이어들은 거의 대부분 얼어죽고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라오는 것을 보면 정말 간절함이 느껴지긴 했다.
“참기 힘드네요.”
“이제 거의 다 왔어요. 저기 봐요.”
빅토리아가 손가락으로 창밖을 가리켰다.
그러자, 눈보라를 뚫고 달려오는 누더기 좀비가 보였다.
-크어어어어억!
-…도망쳐! 잡히면 죽는다!
뱀파이어들은 혼비백산하며 도망쳤고, 뱀파이어의 팔과 다리를 손에 쥔 좀비가 태하 일행을 노려보고 있었다.
헌데 누더기 좀비의 미간에 익숙한 느낌의 돌이 박혀 있었다.
“…어? 파편조각의 일부분인 것 같은데.”
“저게 왜 여기 있지?”
“아니, 원래는 저런 게 달려있지 않았어요.”
“그렇다면 누군가 이상한 짓을 해두었다는 건가요?”
아무래도 바벨탑에 침입자가 있는 게 분명해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