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 몰먼 테크놀로지(2)
고영수와 이주현은 각각 조사관과 의사로서 살아왔고, 자신의 직업에 맞게끔 최선을 다해왔다.
그들은 20년 이상 각자 왕성한 활동을 유지해왔으며 해당 직군에서는 단연 최고의 입지를 다지고 있었다.
바벨탑의 마녀는 그 두 사람의 능력을 높이 산 것이었다.
“던전에서는 매년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요. 성좌는 당신들을 구조를 담당하는 바벨탑의 구원자로 삼으려는 것 같더군요.”
“바벨탑의 구원자라!”
“생명은 누구에게나 소중해요. 피치 못할 사정에 의해 사람이 죽을 위기에 놓인다면 기꺼이 구해줄 수 있는 존재를 만들려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런 존재가 있다면 확실히 든든하긴 하겠군요. 하지만 그렇게 아무나 구해준다면 사람들은 경각심을 잃게 되지 않을까요?”
“그럴 지도 모르죠. 그래서 특단의 조치를 취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야겠지요. 사망 직전까지 간 사람들의 경우엔 뚜렷한 수치화를 통해 다음 층으로 갈 수 있는 제한을 만든다든지, 뭐 그런 것들 말입니다.”
“하긴, 그런 제한만 있다면야. 큰 문제는 없어지겠죠.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자고요.”
새로운 것에 도전한다는 것은 헌터에게 있어서는 가장 큰 덕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태하는 그런 두 사람의 도전에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주었다.
“자기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 할 수 있다는 건 너무나도 큰 축복인 것이죠. 두 사람이 이 세계를 구하는 자리에 도달할 때까지 최선을 다한다면, 아마 위인전기에 이름이 올라가지 않을까요?”
“이야, 의사로서 위인전기에 올라가는 게 흔한 일은 아닌데? 하하, 나쁘지 않겠네요. 다만 걱정되는 것이 하나 있다면, 우리 역시 불멸의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지, 그게 걱정이네요.”
이주현의 얘기를 옆에서 듣고 있던 빅토리아는 자신이 아는 선에서 최대한 설명을 해주었다.
“초월적인 존재가 되는 건 맞아요.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자신이 원할 때 소멸을 선택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소멸을 선택하게 된다면, 신성한 영혼들이 모여 사는 그곳으로 갈 수 있게 된다고 하더군요.”
“신성한 영혼들이 모여 사는 곳이 어디인데요?”
“글쎄요. 지금 마이트와 그림리퍼가 있는 곳이 아닐까요?”
마이트와 그림리퍼는 후계자를 지정해놓고 영면에 접어들었다.
지금까지 버텨온 그들에게 주는 휴가가 이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부럽다는 생각보다는 앞으로의 일에 최선을 다해야한다는 부담감이 들었다.
“우리도 최선을 다해서 그곳에 입성해봅시다!”
“자, 그럼 우선 10층을 향해 가보는 것으로 하시죠. 아예 새로운 시도조차 해보지 못한 채 낙오할 수는 없잖아요?”
그동안 고영수는 강해지는 것에만 목표를 두고 있었다.
허나 이제는 그에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생긴 셈이었다.
***
우르르릉, 콰아앙!
번개가 내리치고 귓전을 왕왕 울리는 천둥이 태하와 그 일행의 앞을 가로막았다.
“…역시, 훈련과 실제에는 많은 차이가 있군요.”
“당연하죠. 실전과 괴리감이 너무 크다보니 실전에 투입되자마자 사망하는 사례가 상당히 많아요. 이곳은 그런 던전이에요.”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 생존실력은 너무나도 큰 도움이 된다.
허나 일반적인 생존법과 이곳에서의 생존법에는 큰 차이가 있다.
콰아앙!
번개가 내리치자, 1층에 존재하는 작은 오두막에 불이 붙었다.
아마 저 안에 사람이 들어가 있었다면 십중팔구 흔적도 없이 산화했거나 중상을 입었을 것이었다.
“세이프하우스가 번개에 맞아 타버렸네…? 아니 그렇다면 사실상 세이프하우스란 존재하지 않는 셈이잖아요?”
“맞아요. 보통의 자연계에서는 천둥번개가 칠 때에 건물 안으로 대피해서 목숨을 보존하게 되죠. 하지만 여긴 달라요. 낙뢰가 워낙 미친 듯이 치다보니까 오두막쯤은 뚫고 들어가버리는 거죠.”
“…그게 가능한가요?”
“그러니까 던전이에요. 바벨탑에서 일어나는 일을 일일이 이해하려고 들면 안 됩니다. 인간의 상식을 버리세요.”
제 2 바벨탑은 일반인들이 진입할 수 없는 구역으로 지정이 되어있는데, 이곳은 자연환경 자체가 일반적인 상식과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었다.
“극한의 상황을 이겨낼 수 있는 강인함, 그리고 능력. 자신의 능력에만 의존해야지 요행을 바라게 된다면 곧바로 사망할 수도 있어요.”
“그래요, 그건 확실히 그렇겠네요. 그나마 우리에게는 이두박근호가 있으니 다행입니다.”
이두박근호는 낙뢰에 맞아도 버틸 수 있고, 오히려 동력장치에 마력을 실어주어 출력이 올라가는 기능이 있었다.
이것은 몰먼족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고 몬스터의 전격계열 공격에 대비하다보니 그리 된 것이었다.
소가 뒷걸음질 치다가 쥐를 잡은 격이었지만, 어쨌든 제 2 바벨탑에는 아주 최적화 된 기능이라 할 수 있을 것이었다.
콰아앙…!
번개를 뚫고 2층으로 올라가는 길.
저 멀리에 희끄무레한 뭔가가 서 있는 것이 보인다.
“…뭐지? 인간의 형상처럼 보이는데.”
“레이스네요.”
“레이스요? 그게 뭔데요?”
“1층부터 100층까지 꾸준히 나타나는 일종의 유령형태의 몬스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공격하기보다는 주로 놀라게 하거나 자신의 원한 따위를 푸는 몬스터죠. 사람이 억울하게 죽으면 이곳에 남는다는 설이 있죠.”
“한마디로 구천을 떠도는 원귀라는 소리네요?”
“뭐, 그런 셈이랄까요?”
추적추적 비는 내리는데 사방은 어두컴컴하고, 천둥과 번개가 미친 듯이 내리치니 레이스의 모습은 그야말로 음산하기 그지 없었다.
아마 혼자서 바벨탑을 올랐다간 심장마비에 걸려죽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레이스는 희미하게 전조등 앞에서 모습을 내비치는 듯하다니, 이내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팟!
“…무, 무섭다요! 저거, 귀신이다요!”
“걱정할 것 없어. 귀신이 인간에게 해코지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총총은 몰먼이다요!”
“아, 그래. 몰먼도 포함해서 말이야.”
“휴우….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무섭다요!”
덩치는 커다래서 하는 짓은 영락없는 꼬맹이와 같았다. 허나 그만큼 몰먼족이 순수하기 때문에 이런 반응이 나오는 것이었다.
한나는 그런 총총을 안아주었다.
“이리와! 누나가 안아줄게!”
“고맙다요, 나리!”
“…귀여워!”
한쪽은 위안을 얻고 한 쪽은 귀여움을 얻고. 이런 경우를 두고 상부상조라고 하는 모양이다.
한 편, 뒤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용팔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잠깐 세워줄 수 있어요?”
“응? 사신 나리! 뭘 하시려고 그러시는 거냐요?!”
“저들의 원한을 풀어주고 더 이상 던전에 나타나지 못하게 하려는 거야.”
“귀, 귀신과 얘기를 해보겠다는 거냐요?! 그러다가 큰일 난다요!”
“아니야, 괜찮아. 사실, 나는 귀신을 인도하는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이건 내 일이라고도 할 수 있지.”
“…하긴, 그건 그렇다요.”
누가 뭐래도 용팔은 이제 사신이다.
사신이 구천을 떠도는 원귀를 멀리한다면, 이 세상은 아마 귀신 천지가 되어버릴 것이었다.
총총은 해치를 열어서 용팔을 밖으로 보내주었다.
저벅저벅 걸어서 레이스를 향해 가는 용팔, 그런 그의 주변으로 낙뢰가 떨어져내렸다.
콰앙!
허나 낙뢰는 용팔을 맞추지 못했고, 그는 당당히 앞으로 걸어갔다.
“이봐요, 잠깐만요.”
-…저승사자다!
“맞아요. 저승사자입니다.”
-소, 소멸을 시키려는 건가?! 싫어!
“소멸이라니. 지하세계로 가라는 것뿐입니다. 여긴 영혼이 살 만한 곳은 아니니까요.”
-…원통하다! 원통해서 이대로는 못 죽겠어!
“뭐가 그렇게 원통한데요? 나에게 한 번 말해 봐요.”
-내 남편이 다른 년이랑 붙어먹었어! 조강지처가 병원에서 죽어가고 있는데, 그놈은 딴 년이랑 붙어먹느라 내 생각은 아예 조금도 하지 않았단 말이야!
“허어, 그건 진짜 좀 억울하겠네.”
-…원통해서 죽을 수가 없다니까?!
“남편은 지금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데요?”
-모르지. 1890년에 내가 죽었으니까….
“아이고, 100년도 더 된 일이네요.”
-100년…? 벌써 그렇게 되었나?
“아마 남편은 이미 죽어서 이 세상에 없을 겁니다. 그 사람은 이미 고인이 되어 세상에 없는데 부인께서 이렇게 구천을 떠도는 건 너무 억울한 일 아닌가요?”
-…그건 또 그러네.
“지하세계도 사람이 사는 곳이라고 들었어요. 여기서 이렇게 귀신의 모습으로 지내느니, 그곳에서 제대로 영혼선별을 받아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세요. 그리고 바람을 피우는 놈이 어떻게 남편이라고 할 수 있어요? 부인은 훨씬 더 좋은 남자와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다고요. 비록 시간이 그걸 허락하지는 않았지만 말이에요.”
-내가…? 정말 그럴 수 있었을까?
“이렇게 아름다우신데! 당연하죠!”
레이스는 그제야 환하게 웃었다.
그러자, 그녀의 공포스러웠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으로 변하였다.
-고마워! 내가 이렇게 자존감이 낮았던가 싶어. 사신이 이렇게 이해심이 깊은 존재였다니!
“그럼 같이 갈까요? 지하로요.”
-그래! 당신이 그렇게 원한다면야!
“고맙습니다. 정말 고마워요.”
그녀는 용팔과 함께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스스스, 팟!
태하와 일행들은 용팔이 돌아올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가 출발하기로 했다.
잠시 후, 용팔은 바람과 함께 다시 돌아왔다.
파앗!
그는 아까보다 훨씬 더 밝아진 표정이었다. 그리고 주변의 번개도 아까보다 확연히 줄어든 것을 알 수 있었다.
“저 왔어요!”
“이야, 대단하시네요! 벌써 구천을 떠도는 영혼을 인도해주다니!”
“방금 명계에 다녀오는 길인데, 새로운 사실을 알아냈어요. 우리가 바벨탑을 떠도는 영혼을 명계로 인도해 줄 때마다 이곳의 이상기후 현상이 조금씩 잦아질 것이라고 하더라고요.”
“허어, 그래요? 누가 그런 걸 알려줬습니까?”
“황천의 사신이 그러더라고요. 사신들은 숫자가 상당히 많은데, 저는 그중에서도 바벨탑과 명계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고요. 아무튼 황천을 오가는 사신이 말하길, 구천을 떠돌던 영혼 중에서 악귀가 된 자들이 던전으로 들어와 레이스가 되는 것이라더군요. 그 바람에 마이너스 에너지가 강해지고 던전 자체에도 이상현상이 벌어지게 되었던 거고요.”
“흠, 그렇군요!”
“이제부터 우리가 던전을 오르면서 영혼을 하나씩 차근치근 명계로 보내게 된다면, 제 2 바벨탑은 아마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이 되겠죠.”
“…괜찮은 것 같은데요?”
“몬스터를 해치우고 풍랑을 뚫는 동시에 영혼까지 챙긴다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보자고요.”
“오케이!”
나쁠 것 없는 일이다. 100층으로 가까이 갈수록 기후가 점점 더 좋아진다는 것이고, 그렇다는 건 돌파가능성을 조금 더 열어놓을 수 있게 된다는 뜻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이들이 귀신을 잡아서 명계로 보내야하는 이유가 또 있었다.
그것은 바로 사신의 능력이 점점 상승한다는 점이었다.
“귀신이 가졌던 마이너스 에너지를 제가 흡수함에 따라서 이상기후를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데요. 그렇게 된다면 던전을 마킹하는 것도 가능해진다는 뜻이겠죠?”
“…와우! 그런 능력이 생긴다면 앞으로 던전에 침입하는 놈들을 확 조져버릴 수 있을 테니, 잘 되었네요!”
상당히 괜찮은 특전이다.
제 2 바벨탑을 돌파해야 할 두 번째 이유가 생긴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