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 재개발(1)
쿠르르르릉!
천지가 개벽하고 우주의 시공간마저 뒤틀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허나 이 소리는 바깥으로 퍼져나가지 못한 채 바벨탑 안쪽을 마구 울려댈 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희란과 동료들은 태하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겨? 우리 대장이 설마하니 거시기해서 거시기 되는 겨?!”
“거시기해서 거시기 되지는 않을 거예요. 아마.”
“끄응. 참말로 겁나게 거시기하네.”
기다림은 생각보다 길었다.
태하 본인에게야 물약 몇 번 마시고 신룡의 심장이라 불리는 칠색의 불을 삼켰을 뿐이었겠지만, 기다리는 사람들은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물약을 한 번 마실 때마다 동료들은 칠주야를 기다렸고, 다시 신룡의 심장을 먹을 때에는 한 달을 기다렸다.
근 80일을 기다린다는 건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지만, 동료들은 태하에게 뭔가 좋은 소식이 있겠거니 짐작하며 기다릴 수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돌연 던전에 암운이 드리워져 왔다.
파앗!
“…엇?”
“뭐여, 하나도 안 보이잖여! 희란이, 불 좀 켜줘!”
“네, 오라버니!”
희란은 동료들을 위해서 금색의 구체를 만들어 공중으로 띄워보냈다.
그러자, 암운이 드리워졌던 던전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동료들은 던전의 풍경을 목격하곤 깜짝 놀랄 수밖에는 없었다.
[…aswdfasg=sdfdfds32432344W$#%^%^…]
[리부트 진행 중…]
[던전이 재구성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엉? 이게 뭐야? 던전을 재구성 중이라고?”
“…이거, 컴퓨터에서 나오는 그 뭐시기 아니여?”
“CMOS요?”
“아, 그려! 씨모스! 대학에서 쬐끔씩 만지작거렸던 것 같기도 한디. 그게 왜 여기서 켜지는 거랴?”
“그러게요. 허참, 이걸 뭐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네. 윤정 씨! 이거, 도대체 뭘까요?”
공학박사 윤정은 가만히 리부트의 수식들을 살펴보았다. 그리곤 이내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운영체제를 재구성한다는…. 그런 뜻 같은데요?”
“허어,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C언어라는 건, 이를 테면 컴퓨터와 인간이 대화를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언어라고 볼 수 있어요. 시스템의 언어를 구성해서 컴퓨터에게 명령을 내린다는 뜻이죠. 지금의 구성도 그래요. 마구잡이식 언어가 복잡하게 꼬여서 흘러가는 것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상당히 세밀한 구성이 잡혀 있고 그것은 마치 운영체제를 재구성하려는 움직임과 같다는 느낌을 주네요.”
“그럼 뭐야, 던전의 언어라는 건가요?”
“이계의 언어로 구성된 일종의 바벨탑 운영체제인 거죠.”
복잡한 말은 잘 못 알아듣기에 다들 자세한 건 알 수가 없었다.
허나 한 가지 확실한 건, 던전이 재부팅처럼 초기화에 들어갔다는 점이었다.
잠시 후, 던전에 이런 문구가 떠다니기 시작했다.
[부팅 마스터키를 입력해주십시오]
“이건 또 무슨 소리람?”
“누군가 부팅을 완료시키기 위해 일종의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하나봐요. 보통은 이런 걸 관리자나 엔지니어가 하는데, 던전에 그런 사람이 존재했던가?”
“…으음? 그런 사람이 있기는 하죠. 바벨탑의 수호자.”
“태하 씨요?”
던전을 관리하고 조율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한 사람, 바벨탑의 수호자뿐일 것이다.
재부팅과 함께 적막이 흐르던 바벨탑에 뜬금없이 아공간이 생겨났다.
스스스스…!
“어?!”
“태하 씨에요! 확실합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림리퍼의 후예인 용팔은 그의 접근을 한 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이윽고 잠시 후, 아공간에서 정말로 태하가 튀어나왔다.
파앗!
“허억! 진짜로 여기까지 한 번에 내려왔네?”
“대장! 괜찮아요?!”
“하하, 다들 많이 기다렸죠?! 보시다시피 저는 멀쩡합니다!”
“아니 무슨 장로들 만나는데 50일이나 걸려요?”
“…엉? 나는 한 5분 남짓 걸렸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시간이 서로 상이하게 흐를 수도 있어요. 바벨탑은 초월의 영역이니까요.”
“하긴. 그럴 수도 있겠네요.”
태하는 동료들과 한 번씩 하이파이브를 나눈 후, 탑을 내려갈 준비를 했다.
그는 간단명료하게 목표를 밝혔다.
“아래로 내려가서 다 같이 거하게 한 잔 땡기고 푹 자보자고요!”
“한 잔? 오호, 이젠 술을 마셔도 되는 건가요?”
“성좌의 금주령은 이제 해제되었어요. 그런 말이 있죠. 디로딩과 치팅은 확실히 해야 한다고요. 우리는 지금까지 디로딩과 치팅을 제대로 하지 않아왔어요. 정체기를 돌파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이런 식의 화끈한 회식이 아닐까 싶은데요?”
“아니, 그럼 던전은 어쩌고요? 이대로 그냥 두고 떠나요?”
“으음. 아니죠. 한 잔 하고 돌아와서 마무리 하면 됩니다. 마스터키만 입력해두고 나중에 재개발을 하는 거죠.”
“재개발이요?”
“리모델링이라고나 할까요?”
***
그날 밤, 태하는 동료들과 처음으로 걸판진 술자리를 가졌다.
“으하하, 마셔!”
“마셔라, 마셔라! 술이 들어간다, 쭉, 쭉쭉쭉!”
맥주잔에 퍼마시고 바가지에 퍼마시고 심지어는 양동이에다가 퍼마시는 이 비상식적인 음주행태.
내일은 따위는 없는 사람들처럼 태하 일행들은 미친 듯이 술을 퍼마시기 바빴다.
“뭐여, 양주 한 병 더 안 넣는겨?!”
“넣습니다! 자, 양주 한 병 더!”
양동이에 맥주와 양주를 있는 대로 넣고 섞으니 오묘한 위스키 향이 훅 올라왔다.
태하는 다시 한 번 위장 안으로 술을 있는 대로 때려부었다.
꿀꺽, 꿀꺽!
“크흐, 죽인다! 마셔, 더 마셔요!”
“오늘 갈때까지 가는 거야!”
처음으로 갖는 술자리, 어쩌면 이런 술자리는 다신 갖기 힘들지도 모른다.
나름의 이유 때문에 필멸이라는 인간의 특권을 포기한 사람들이 있지 않던가.
“그나저나 이제 우리는 또 언제 보는겨?”
“언제 보긴요! 다음 던전도 공략해야지요!”
“탑의 수호자가 되면 마무리 되는 것 아니었남?”
“그것도 제 1 던전에서의 얘기죠. 다른 던전으로 건너가면 100층 돌파 이전과 비슷한 정도의 능력만 남게 된데요. 그러니 여전히 더욱 강해져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고, 돌파의 과정도 계속되어야 한다는 거죠.”
“허참, 복잡하구먼. 뭐, 그래도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혀. 안 그려?!”
“아이, 그럼요!”
“자자, 마셔!”
계속되는 무식한 술자리, 그런 술자리에 빡빡이 보현관장이 찾아왔다.
그는 무려 돼지 한 마리를 통째로 잡아서 구운 후, 그것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쿠우웅!
“헬창의 회식이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우와, 돼지다! 진짜 통돼지네?!”
“먹고 마시고, 그리고 푹 쉬었다가 다시 시작해야 하잖아? 그럼 뭐, 최소한 이 정도는 준비해야하지 않겠어?”
“역시, 개파조사는 뭔가 달라도 다르네요!”
“그럼 나도 오늘 한 잔 제대로 해볼까? 요즘 콜레스테롤 관리한다고 술도 끊었었거든.”
제자들은 보현관장이 술을 마셨다는 것에 의아함을 느꼈다.
“아니, 관장님도 술이라는 것을 마셨었어요?”
“허, 그럼 내가 어떻게 이런 살크업을 할 수 있었겠어?”
“아아! 하긴, 그건 그러네요.”
“사람이라는 건 말이지, 적당히 즐기며 살 줄 알아야해. 안 그러냐?”
“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이들의 술자리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취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 술자리에 참석한 보현은 태하에게 정중이 술을 따라주었다.
“고맙다. 네 덕에 던전이 고쳐졌다면서? 잘못하면 사람들이 여럿 죽을 수도 있는 문제였는데, 네가 모두를 살린 거야.”
“별 말씀을요. 저는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아무쪼록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 세상을 지켜주고 헬스도 열심히 해주렴.”
“넵!”
“자, 그럼 한 잔 하자.”
아마도 보현관장과의 술자리는 아무리 가져도 모자랄 것이다.
불멸의 존재가 된 태하에게 보현관장의 인생은 그야말로 찰나와도 같은 것일 테니까.
“관장님, 부디 장수하십쇼!”
“하하! 그래, 백 살까지 살게!”
“아니요, 한 200살까지는 사셔야죠!”
“인마, 그랬다간 못 볼 꼴 다 봐야 하잖아! 나는 그냥 적당히 살다가 가면 그만이다. 너희들이 이만큼 성장한 것을 봤으니, 솔직히 미련도 없고 말이야.”
불멸자에게 가장 힘든 것은 소중한 사람들이 주변에서 하나 둘씩 떠나가는 것이라고 했던가.
태하는 괜시리 마음이 좋지 않다.
***
폭풍 같은 회식이 지나갔다.
아침부터 자리에서 일어난 태하는 천천히 산비탈을 걸으며 몸에서 술기운을 몰아내고 있었다.
“고통이라는 게 이렇게까지 고마운 일일 줄이야.”
명계, 혹은 천계에서의 삶과 다르게도 이 땅위에서 살아가자면 신체는 반드시 필요하다.
육신에 한계는 없어졌지만 여전히 신체의 모든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바, 태하는 숙취라는 것도 경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통은 있지만, 그렇다고 병사에 좌지우지 되지는 않는다…. 상당히 매력적인 육체이긴 하군.”
신체가 노화하는 것은 일종의 돌연변이, 혹은 질병이라고 말하는 학자들이 있다.
원래 신체는 세포의 증식과 사망이 지속적으로 일어남에 따라서 건강하게 유지되는데, 노화란 이런 순기능을 막아 서서히 죽게 만드는 병이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허나 이런 노화가 만약 존재하지 않는다면, 생명이 만약 무한한 것이라면, 지구는 금세 고갈되어 지금까지 유지되지 못했을 것이다.
“대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을 하고 있다니, 어쩐지 양심에 좀 찔리는 것 같기도 하고. 뭐, 아무튼 간에 나쁘지는 않아!”
산비탈을 천천히 걷다가 약수터가 나오자, 태하는 가지고 온 가방에서 물병을 꺼내어 10리터쯤 물을 받았다.
물을 받는 내내 한 바가지씩 약수를 섭취해주니 술기운이 확 달아나는 느낌이 들었다.
“크흐, 좋다!”
숙취에 대한 비밀은 아직도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아세트알데히드가 숙취를 일으키는 물질로 알려져 있지만, 이것이 왜 숙취를 만들어 내는 것인지는 밝혀진 바가 없다.
다만, 빠른 신체대사로 알코올을 밖으로 배출한다든지 고갈된 수분을 보충해서 증상을 완화할 수는 있다.
휴식과 배설, 이 두 가지로 숙취에 대항하는 것만이 유일한 답이었기에 태하는 하루 종일 수분을 보충해 줄 생각이었다.
약수를 마시며 천천히 산비탈을 내려오던 태하의 앞에 얼굴이 퉁퉁 부은 빅토리아가 서 있었다.
“…괜찮아요?”
“보시다시피 멀쩡하네요.”
“괴물.”
“하하, 괴물이라니요. 듣는 괴물 민망하게.”
“아무튼 간에 두 번째 던전을 공략해야 할 때가 왔어요. 총 회의를 시작해야 할 텐데, 언제가 좋을까요?”
태하는 그녀에게 일단 약수를 한 병 건네주었다.
“시원할 때 마셔요.”
“…고마워요.”
빅토리아도 어제 술을 한 말쯤은 마셨을 것이고, 원래 술을 입에 잘 대지 않는 성격이라 숙취가 아주 지독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온 것을 보면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녀가 물을 마시는 사이, 태하는 대략적인 날짜를 정했다.
“한 달 후, 던전을 리모델링하고 출발하도록 하죠.”
“아하, 그 재개발이라는 것이요?”
“네, 맞습니다. 침공에 대비하는 완벽한 대책이라고나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