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 차기 그림리퍼!(1)
그림리퍼의 이야기는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설마하니 바벨탑의 흑막이라는 별명이 바벨탑으로 영혼을 인도하는 자라서 그런 것이었다니,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바벨탑이 무너지면 안 되는 이유는 비단 지옥의 군대가 쳐들어오기 때문만은 아니야.”
“명계와 지상의 경계가 무너지면 안 되기 때문에…?”
“역시, 머리 좋은데? 맞아. 경계가 무너지면 모든 것은 붕괴되게 되어 있어. 그리고 말이야, 명계라고 해서 죄다 무슨 우중충하고 귀신들만 사는 건 아니야. 거기도 영혼, 즉 사람이 사는 곳이라서 그냥 평범한 땅과 같아.”
“아니, 그럼 거기 살던 놈들이 왜 지상으로 굳이 올라오려고 했던 건데요?”
“욕심.”
“욕심? 무슨 욕심 때문에 전쟁까지 불사한다는 건데요?”
“이 땅을 밟고 살아갈 수 있다는 욕심. 개똥 밭에서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 알아?”
“잘 알죠. 어른들이 입이 닳도록 하던 말인데.”
“그래. 명계에는 희로애락이 없어. 그리고 고통도 없고 쾌락도 없지. 고통이라는 건 말이야, 때론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중요한 통각이야. 고통 없이는 쾌락도 없어. 아이러니하지만 그게 세상 이치란 말이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통각이라. 아니, 그럼 제가 사신이 된다면 그걸 느끼지 못하게 될 수도 있잖아요?”
그림리퍼는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아니, 그렇지는 않아. 몇 가지 규칙만 지킨다면 인간과 비슷한 삶을 영원히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거지.”
“몇 가지 규칙이라? 그게 뭔데요?”
“인간들의 눈에 함부로 띄지 말 것. 중립을 지킬 것. 명계의 일에 간섭하지 말 것. 그리고 경계를 무너뜨리지 말 것. 이런 규칙들이 있지. 이것만 지킨다면 이 세상에서 인간으로 살아갈 수도 있어.”
“으음…. 하지만 가족들은 만날 수 없겠네요? 명계의 일에 간섭할 수 없으니.”
“그건 어쩔 수 없어. 불명의 숙명이랄까.”
“…….”
“사신이라는 존재는 반드시 필요해. 그게 반드시 네가 될 필요는 없지만, 나는 너만큼 사신에 어울리는 사람도 드물다고 생각한다.”
용팔은 생전 처음 듣는 얘기, 이것이 칭찬이라고 해도 그렇게까지 달갑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런 그에게 그림리퍼는 거부할 수 없는 숙명과 같은 얘기를 해주었다.
“자, 이렇게 생각해보자. 너, 마이트의 후계자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냐?”
“한적한 곳에서 헬스장이나 차리고 살겠다고 했는데요?”
“그래, 한적한 곳. 바벨탑이 딱이지. 안 그러냐?”
“…네? 그럼 헌터님은 죽을 때까지 바벨탑을 벗어날 수 없다는 건가요?”
“벗어나지 못하는 게 아니라 함께 살아가게 되는 거지. 영원히 말이야.”
“허어….”
“놀랍지? 나도 놀라워. 왜 지하군단이 이따위 말도 안 되는 짓을 해서는 사람 여럿 고생시키느냐는 말이야.”
“아니, 그렇다면 헌터님이 거부할 경우에는? 그럼 어떻게 되는 건데요?”
“거부할 수 없을 걸? 단순히 던전을 통합한다고, 무너지지 않게 경계한다고 끝날까? 아니, 바벨탑은 생겨난 그 순간부터 누구 마음대로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야. 그냥 그렇게 존재하도록 내버려 둘 뿐인 거지.”
“끄응….”
“우리가 너희들을 선택한 것에 대해서는 백 번 욕을 먹어도 할 말은 없다. 하지만 그래도 최소한 기회는 주잖아? 너희들 말고도 사람은 또 태어나고, 그 사람들 사이에서 완벽한 자질을 가진 사람들은 있겠지. 우리는 또 그들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면 돼. 단, 그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에 그게 문제인 거지.”
“흠….”
성좌들은 오로지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 태하와 용팔에게 다가왔다.
허나 그들이 함부로 찔러보듯이 이들에게 다가온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태하와 용팔이 애초에 누구보다 이타적인 사람들임을 알았기에 다가온 것이었다.
“잘 생각해봐. 너희들은 이타적인 사람들이야. 남을 위해서 기꺼이 스스로를 희생할 수 있지. 그런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거의 없어. 너희들처럼 유별난 사람들 빼곤 말이지.”
“…….”
“아참, 뭐 그렇다고 이게 아주 나쁜 것만은 아니야. 우리들처럼 할당된 기간을 다 채우면 원하는 곳으로 갈 수도 있어. 천국이라든지, 무릉도원이라든지, 너희들이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그럼 영원히 헬스도 할 수 있어요?”
“하하, 할 수 있지. 다만, 그러자면 육신이 있어야 하니까 영원불멸의 시간동안 이 땅에 머물러야….”
“그럼 할게요!”
순간, 그림리퍼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헬스를 위해서 불멸의 존재가 되겠다고요?”
“헬스만 할 수 있다면야, 불멸의 존재가 문제겠어요?!”
“미, 미쳤구나. 이놈, 단단히 미쳤어.”
“영원히 할 수도 있어요. 제게 무슨 문제가 터지지 않는 한, 제가 소멸되지 않는 한!”
“허어, 이런 미친…? 미친놈이 미친 소리를 하니 나까지 미쳐버릴 것 같네?”
“할게요! 저, 하겠습니다!”
***
스아아앗!
다시 시공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태하와 일행들이 공간이 움직인다는 것을 자각했을 때쯤, 용팔은 이미 바벨의 흑막 그 자체가 되어 있었다.
“…보통의 기운이 아닌데? 그 몇 초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헌터 님! 저, 영원히 헬스를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어요!”
“영원히 헬스를 해요?”
“그 누구에게도 구속받지 않고 평생 하루에 두 번씩, 꼬박꼬박 헬스를 할 수 있다고요!”
“…허어? 저, 정말요?!”
“헬스 헤븐! 저는 진정한 헬창으로 가는 길을 찾았다고요!”
“오오, 근렐루야! 그런 길이 있었다니. 그나저나 그런 길은 어떻게 찾은 건가요?”
용팔은 손가락을 들어 고영수와 블레이디를 가리켰다.
그러자, 그들의 손과 영혼에서 그림리퍼의 기운이 사라진 것을 알 수 있었다.
“저 둘을 대신해서 제가 사신이 되기로 했어요!”
“…사, 사신이 되었다고요?”
“그림리퍼, 바벨탑의 흑막. 그가 저를 선택했고, 저는 그의 후계자가 되기로 했죠!”
“허어! 그, 그럼 사신이 되었다는 거잖아요.”
“사신은 사신인데…. 뭐, 아무튼 그렇게 되었어요!”
“허참….”
흔히 헬창들을 두고 근육을 위해서라면 영혼도 팔아먹을 놈들이라고 말하곤 한다.
태하는 설마하니 진짜로 근육 때문에 영혼을 팔아먹는 사람이 생길 줄은 미처 몰랐다.
“…정말 별 일이 다 있네요.”
“헌터님도 언젠가는 영원히 헬스를 해보고 싶은 생각 없으신가요?”
“저야 당연히….”
“호르몬의 영향도 없어요. 근손실을 걱정할 필요도 없죠. 왜냐? 영원히 꼬박꼬박 헬스를 할 수 있는데요!”
“…헬스는 2인 1조가 기본인데, 그럼 파트너는요?”
“드롭세트에 대비해서 3인 1조로 영원히 헬스를 할 수 있어요! 마음만 먹는다면.”
“이야, 이거 고민되네.”
순간, 태하조차도 자칫 영혼을 팔아먹을 뻔했다.
허나 그는 가까스로 이성의 끈을 되찾았다.
“…아무튼 간에 헬스에 영혼을 팔아먹는 건 좀 그런데요.”
“영혼을 갈아 넣기도 하는데요, 뭘. 그리고 100년 이상 운동으로 근육을 다지면 어떻게 되는지도 너무 궁금했어요!”
“허어, 그건 나도 공감! 젠장, 나도 100년만 헬스 하고 싶다!”
“하면 되죠! 능력? 스킬? 그런 거 없이도 근육을 만들 수 있어요. 생사타통으로 신체가 늙지 않으니 호르몬도 왕성히 분비되겠죠. 그럼 내추럴로 어디까지 몸을 만들 수 있을지 실험할 수 있게 되기도 하는 것이에요.”
“…팔룸보이즘 없이?”
“네! 그런 거죠!”
“아, 젠장! 부럽다!”
헬창들의 소원, 그들의 종착역이 어딘지 아는 사람들이라면 용팔의 말은 악마의 속삭임보다 더 달콤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허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이들이 한심해서 더 이상은 못 봐주겠다고 생각할 것이었다.
“…이봐요, 두 사람. 그런 잡담은 아무래도 좋아요. 이제는 블랙 드래곤을 무찔러야 하지 않겠어요?”
“무찔러요? 이미 그녀는 우리의 동료가 되어 있는데요.”
용팔이 손가락을 튕기자, 블레이디는 잠깐 사라졌다가 다시 일행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그림리퍼의 화신을 담았던 심장을 꺼내어 사신의 숨결만 취한 뒤에 태하에게 그것을 전해주었다. 그런 후, 시간을 한 바퀴 돌려서 블레이디를 바벨탑의 일원으로 만들어 낸 것이었다.
블레이디는 다소 홀가분하다는 듯이 물었다.
“결국 사신을 따르기로 한 건가요?”
“물론!”
“다들 기뻐하겠네요. 웜급 드래곤들도, 나머지 장로급 드래곤들도.”
“장로급? 에이션츠 드래곤 말인가요?”
“네, 맞아요. 이제는 탑의 수호자들만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다면, 우리 용족은 자유가 될 수도 있겠죠.”
“운명을 받아들인다니?”
일행들의 질문에 블레이디는 뭐라고 한 마디 해주려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
“아무튼 간에 89층으로 올라가자고요. 그리고 사신께서는 바벨탑이 완전히 정복될 때까지는 아직 사신의 힘을 극히 일부분 밖에 사용할 수 없다는 걸 명심하시고 신중히 행동하도록 하세요. 아셨죠?”
용팔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 정도야!”
“이제 그럼 올라가자고요.”
***
89층에 올라서자, 이번에는 푸르른 녹음이 태하와 동료들을 반겼다.
사방에 생명의 향기가 가득했고 울창한 숲 중앙에는 거대한 나무가 우뚝 솟아 있었다.
“그야말로 아름다운 숲 그 자체네. 여기에 무슨 드래곤이 산다는 거지?”
“형님! 그린 드래곤의 구역이 들어왔습니다!”
“아하, 그린 드래곤! 이름만으로도 아주 녹음이 푸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구먼!”
이제 7대 드래곤 중 마지막인 그린 드래곤만 남았다.
이곳에서 웜급 드래곤은 마지막이고 90층에는 이들 드래곤의 바로 윗 단계인 첫 번째 고룡급 드래곤이 모습을 나타낼 것이다.
“보스로 가기 위한 마지막 관문인 셈이로군.”
“네, 그런 셈이죠! 그런데 형님, 그린 드래곤은 지독히도 싸움을 싫어한다고 들었습니다. 블레이디도 그린 드래곤과는 싸우지 않고 구역을 나눴다고 하는데, 과연 싸움이 성사될 수 있을지도 의문입니다.”
“흠. 만약 싸우지 않고 그냥 지나가면 어떻게 되는 거지?”
“글쎄요. 그것도 클리어로 인정해주는 것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태하와 아르네시아가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걷고 있던 바로 그때였다.
어디선가 바람에 나무가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블레이디는 눈빛을 반짝였다.
“…와요.”
“벌써 시작인가? 아니, 그나저나 그린 드래곤은 싸움을 싫어한다면서?”
“싸운다고는 말 한 적 없는데요.”
“음? 그렇다면 뭐가 온다는 건데?”
잠시 후, 태하의 앞에 귀가 뾰족한 소녀가 사뿐히 날아와 섰다.
그녀는 순백의 피부에 녹색 머리를 가진 특이한 모습이었다.
“…위그드라실의 씨앗을 품어 부화시켰군요. 세계수의 아버지시여!”
“누, 누구?”
“그 팔찌, 세계수의 집!”
“응…?”
바로 그때였다.
퍼엉!
“…으엉? 짜잔? 아닌데, 이건! 내가 원해서 나온 게 아닌데?”
놀랍게도 소환도 하지 않았는데 홍이가 툭 하고 튀어나왔다.
헌데 홍이의 모습이 놀라웠다.
“성체…?”
“위그드라실이 꽃을 피울 때가 된 것이겠죠.”
“…뭐야, 우리 홍이가 이제는 다 큰 어른이 되었다는 거야?”
“씨는 싹이 되고 싹은 나무가 됩니다. 세상의 순리, 그대로 돌아가는 것뿐인 거죠.”
순간, 홍이의 눈이 순백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스스스스스!
“…호, 홍아?”
“아빠, 엄마! 나, 이제 알 것 같아! 탑과 탑을 이어주는 진정한 뿌리, 그게 바로 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