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 최후의 보루를 부수다(2)
이 세상의 암적인 존재는 어디에서나 기생한다.
허나 그런 기생충과 같은 존재들은 아무리 소탕하고 제거해도 다시 살아나 활개를 치고 다닌다.
오래 전부터 열심히 사는 민초들을 수탈하며 쉽게 자신의 배를 불리는 놈들은 어떻게든 살아남아 그 명맥을 유지하지 않던가.
최근 동남아시아에서 활동하는 마약밀매조직 ‘캄꾼’은 태국을 중심으로 그 세력을 불리며 동북아시아로의 진출까지 노리는 대범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보통 마약을 제조하고 밀매하고 유통하는 삼단계를 모두 다 충족시킬 수 있는 조직은 그렇게까지 많지가 않아요. 약을 제조하는 것만 해도 쉽지 않은 일인데, 그걸 유통까지 하자면 엄청난 조직력이 필요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깜쿤은 인도차이나반도 전체를 아우르는 엄청난 조직력을 앞세워서 그걸 가능케 했죠. 최근에는 필로폰의 중독성 두 배에 달하는 항정신성 물질인 ‘블랙캡’을 제조해서 중국으로 반입시키고 있다고 하더군요.”
“블랙캡이라.”
태하는 100층 레이드 시작 일주일 전, 유시연에게서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활동소식을 자세히 전해 듣고 있었다.
듣다보니 정말 기가 막힌 일들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블랙캡이 어떻게 유통되느냐면, 일단 수산업자들과 청과업자들을 대거 섭외해서 식당이나 클럽 등에 뿌린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수산물과 청과물을 수출하는데 마약을 섞어서 밀반입시키고, 그것을 일본과 한국, 대만 등지에 뿌리는 거죠. 특히나 홍콩으로 상당히 많은 양의 마약이 들어가는데, 이제는 당국에서 손을 쓰기도 힘든 실정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답니다.”
“마약을 대놓고 수출시켜서 외화놀이를 제대로 하고 있겠군요?”
“그런 셈이죠. 헌데 문제는 이런 깜쿤을 이용해서 검은돈을 세탁하고 목돈을 만들어 굴리는 사람들이 바로 피에르뇽 가문이라는 겁니다.”
“빌어먹을 놈들 같으니….”
피에리뇽 가문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 곳이 없을 지경이다.
설마하니 금융권에서 불려놓은 이득을 암흑가로 풀어서 자신들만의 비자금 관리조직을 만들 줄이야, 태하는 아예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더욱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이 돈이 정계와 재계로 흘러들어서 아예 기업생태계와 정관계를 저놈들 입맛대로 바꾸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할 수 있어요.”
“정관계를 흔든다고요…? 일개 사업가들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건가요?”
“돈으로 안 되는 건 없잖아요. 정치인이 아무리 돈이 많아도 백억 대 비자금을 과연 거부할 수 있을까요? 관계 인사들은 어떻고요?”
“답이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네요.”
“우리가 진실을 파헤치지 않았다면 아마 이 세상은 아마 저놈들 손아귀에 떨어지고 말았겠죠. 지금도 한국과 미국 등지의 기업들이 하나 둘 저들의 기업사냥에 놀아나고 있다니까요.”
“…기업사냥까지?”
검은돈으로 기업을 사냥하는 일은 상당히 오래되어 온 범죄의 일종이다.
기업에 대한 공격적인 인수합병,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이득을 얻는 사람들은 80년대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명맥을 이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최근에는 범죄 집단이 공격적 인수합병에 직접 뛰어들어서 조직화 된 기업사냥이 이뤄지고 있었다.
그 배후에 피에르뇽 가문과 같은 엄청난 금융세력이 도사리고 있다면, 아마 살아남을 수 있는 기업은 얼마 없을 것이었다.
“그나마 지금은 동남아시아의 범죄조직만을 가지고 사업을 하고 있지만, 만약 미국이나 일본으로 진출해서 마피아나 야쿠자 같은 놈들까지 끼어들면 골치가 아파져요.”
“빌어먹을…. 그럼 무슨 좋은 방법이라도 없을까요?”
“안 그래도 청룡방에서 직접 나서기로 했어요.”
“청룡방이요? 이건 헌터 간의 싸움이 아니라 범죄자들의 싸움인데요?”
“왜, 예전에 태하 씨가 쓸어버렸던 아수라 길드의 예비헌터들 기억나요?”
“다구리 맞아 죽을 뻔했던 그때 만났던 놈들을 말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기억이 나죠.”
“그 친구들이 이번 작전에 나서겠다고 직접 자원했어요. 아예 바닥부터 범죄조직을 소탕하겠다고요.”
“…인생 밑바닥인 줄 알았는데. 그런 선의를 선뜻 던지겠다고요?”
“밑바닥 인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밑바닥을 기는 놈들을 쓸어버리고 정신 차리며 사는 것임을 그들도 깨닫게 된 것이겠죠.”
아무리 능력이 한미해도 그들은 각성자도 섞여 있는 헌터집단이다.
인간의 신체능력쯤이야 가볍게 뛰어넘는 몬스터들을 상대하며 잔뼈가 굵은 그들이 만약 인간사냥에 나선다면 아주 손쉽게 범죄자들을 소탕할 수 있을 것이었다.
허나 그들이 정말로 죄를 뉘우치고 갱생하며 살 것인가, 그것이 의심될 뿐이었다.
“그들을 믿어도 되는 거겠죠?”
“한 번 믿어보자고요. 사람의 믿음이라는 건 살인자도 갱생시키는 법이잖아요?”
“흠.”
“한 번만 믿어보자고요.”
“좋습니다.”
***
며칠 후, 태하는 일행들과 함께 87층으로 향했다.
이제 곧 90층 진입을 앞두고 있는 가운데 골드 드래곤과 마주할 생각을 하니 감회가 새로워진다.
“우리가 드디어 골드 드래곤과 만나게 된다니.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골드 드래곤이 끝이 아니잖아요? 뭐랄까, 이제 시작이랄까?”
드래곤을 해치우는 것은 어쩌면 또 다른 시작에 불과할 뿐이었다.
제 2, 3의 탑을 클리어하자면 반드시 필요한 작은 여정이라고나 할까.
태하는 그 길고 긴 여정의 시작에서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었다.
그는 뒤를 따르는 드래곤들에게 물었다.
“얘들아, 이길 수 있지? 이번에 못 이기면 우리 모두 변사체가 되는 거다.”
“이길 수 있습니다! 형님, 저희들이 이번에 아주 제대로 벌크업을 했잖습니까? 골드 드래곤 따위야 전혀 무섭지도 않습니다!”
그야말로 산전수전 다 겪은 드래곤들이 엄청난 벌크업까지 했다면, 싸움은 해보나 마나였다.
허나 그래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는 없었다.
87층으로 진입한 태하와 동료들.
사방이 전부 사암으로 된 다소 황량한 모습의 바위산이 그들을 맞이했다.
산세는 상당히 험준했고 발을 한 번 잘못 디디면 그대로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비명횡사하기 딱 좋은 구조였다.
“이곳에서는 드래곤이라고 해도 날갯짓을 못하면 그대로 바위에 찔려 죽겠는데?”
“맞습니다. 이게 바로 골드 드래곤의 무서운 점이죠. 이놈은 지형의 특성뿐만 아니라, 아예 서식지 전체를 무기로 만드는 치밀함을 보입니다. 의외로 단순한 구석이 있다는데, 그게 정말인지는 솔직히 싸워봐야 알겠지요.”
아르네시아는 골드 드래곤과의 싸움에 대해 신중해 하는 모습이었지만, 바트는 그렇지 못했다.
바트는 저번 싸움에서 패배한 설욕을 하기 위해서 벌써부터 바짝 약이 올라 있었다.
“죽인다, 누런 도마뱀 새끼!”
“바트, 일단 진정해. 컴다운, 원래 헬스에서도 컴다운이 제일 중요하다는 거 몰라?”
“…컴다운.”
모든 것을 헬스에 빗대면 매번 쇠귀에 경 읽기처럼 말을 못 알아먹던 놈들도 정신을 차린다.
아마 헬창에게 헬스란 그런 성스러운 불경과 같은 존재가 아닐까 싶었다.
이윽고 일행들은 골드 드래곤의 둥지 중앙을 향해 걸어갔다.
산을 넘고 비탈을 오르는 것만으로도 하체운동을 따로 할 필요 없겠다 싶을 정도로 산세가 험준했다.
“굳이 이렇게까지 산비탈을 만들어놓은 것에는 다 이유가 있겠지? 이걸 무기로 쓴다고 가정했을 때, 단순히 누군가를 떠밀기 위해서만 이렇게 만든 건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맞아. 그 새끼, 이 복잡한 지형을 외워서 게릴라를 하려는 거야.”
“드래곤이 게릴라를 한다고…?”
안 그래도 드래곤은 몬스터 중 최강이라 불리는데, 그 좋은 머리로 게릴라까지 펼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잘못하면 전멸, 심지어는 드래곤들까지 이곳에서 살아나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허나 태하는 이번 레이드가 앞으로 헬창스에게 있어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에이션츠 급 드래곤들은 이런 꼼수를 더욱 잘 쓰겠지?”
“머리가 비상하니까. 당연히 치고 빠지는 전술을 다양하게 사용할 거야.”
“그렇다면 이쯤에서 우리의 전력에 대한 중간평가를 진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그렇지 않아?”
“하긴, 확실히 그건 그렇지.”
천하의 성질머리 더러운 바트도 에이션츠 드래곤을 무서워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은 탑의 최상부에 위치한 진짜 ‘괴물’들이었으니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보니 어느 새 둥지의 중앙에 위치하게 되었다.
태하와 일행들은 마력감지기를 켜서 드래곤의 동향을 살폈다.
“흠, 아무것도 없다고 나오는데.”
“도대체 이 새끼, 어디에 숨어 있는 거야?”
바로 그때였다.
일행들이 수색에 한참일 때, 저 멀리에서부터 뭔가 날카로운 것이 날아들었다.
태하는 방패를 들어서 날카로운 것을 쳐냈다.
챙!
“허억!”
“…주먹이 덜덜 떨리네. 이 새끼, 어디에 숨어 있는 거야?”
암기를 날리는 수준이 보통이 아니었다. 다른 생명체도 아니고 드래곤이 작정하고 유격전을 펼치면서 때리는 비도술은 가히 암권이라 할만 했다.
드래곤들은 동시에 태하를 바라보았다.
“형님! 이제 본격적으로 싸움을 시작하시죠!”
“아니, 안 된다! 그건 저놈의 생각대로 움직여주는 꼴 밖에는 안 되는 거야.”
“어째서….”
“생각해봐. 너희들의 덩치는 벌크업을 해서 예전보다 훨씬 더 커졌지. 그런 비대해진 몸을 가지고 게릴라전을 상대한다는 건 너무 불리하지 않겠어?”
“하지만 이대로 계속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잖습니까?!”
“기다려. 인내심을 가져.”
태하는 고개를 돌려서 택티션 윤정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번 레이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그것을 용병술에 적용하려는 것이었다.
피융!
다시 한 번 암기가 날아들었다.
이번에는 한 방에 150개가 넘는 비도가 헬창스를 덮쳐왔다.
“엡솔루트 배리어!”
희란의 배리어가 헬창스 전체를 보호하자, 비도는 방어막에 튕겨져 나가버렸다.
허나 비도가 만든 충격은 방어막을 흔들고도 남을 정도였다.
까아아앙!
“…엄청난데요? 이정도면 거의 드래곤의 마법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예요. 비록 브레스 급은 아니지만, 그 바로 아래 정도의 파워랄까?”
“미친, 그런데 그걸 지금 저렇게 숨어서 날리고 있다고요?”
처음에는 일자로 날아들던 비도가 이제는 서서히 다양한 방향에서 날아들기 시작했다.
머리 위, 후방, 발 밑, 심지어는 사방팔방에서 예측불허 한 비도술이 계속되어 희란의 마력이 빠르게 고갈되고 있었다.
이제는 정말로 전술을 가다듬을 때가 되었다.
“윤정 씨!”
“…네, 됐어요. 헬창헌터 씨! 이제 드래곤들을 데리고 나가 싸우세요! 드래곤들은 폴리모프를 풀고!”
“본체로 싸우라고요? 그건 너무 위험한 선택이 아닌가 싶은데.”
“저놈의 전술에 우리가 휘말렸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예요. 어서 나가세요!”
“음, 오케이! 우리 택티션이 저리 말씀하셨다! 얘들아, 가자!”
드래곤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폴리모프를 풀고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크오오오오!
“…덩치가 엄청 커졌네? 이정도면 이제 헤비급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인데요?”
헬창 드래곤즈는 그동안 혹독한 훈련을 거치면서 마구 몸을 불려왔다. 심지어 점진적과부하와 대사형의 오러를 받으면서 근육량이 무려 48%까지 늘어났다.
거의 비정상에 가까울 정도로 몸을 불려놓으니, 그 스텟과 스킬이 이제는 어지간한 성룡을 넘어 에이션츠 급을 넘볼 정도가 된 것이었다.
-형님, 저희들만 믿으십시오!
“그런데 얘들아, 오늘은 미끼의 역할인 것 같은데 괜찮겠어?”
-하핫, 그런 게 무슨 상관입니까? 싸워서 이길 수만 있다면요.
“오호, 좋아. 그런 불도저의 모습. 우리 길드와 너무나도 찰떡이야!”
드래곤들은 이제 하나가 되었다.
문제는 지금부터 윤정이 과연 어떤 전략을 쓸 것인가.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그녀는 태하에게 이블아이를 소환해달라고 말했다.
“이블아이의 초음파를 운용해야해요!”
“초음파? 아하! 그걸로 놈의 위치를 잡으려는 것이군요!”
“아마 놈은 본능적으로 드래곤부터 해치우려 들 거예요. 아무래도 지금 놈이 보기엔 드래곤이 가장 강력한 전력으로 판단될 테니까요.”
“음, 좋아요!”
“헬창 드래곤즈! 사방으로 마법을 난사해요! 미친놈들처럼요!”
-오케이!
헬창 드래곤즈는 윤정의 말처럼 사방으로 브레스를 쏘며 미치광이처럼 날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