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 누군가에게는 축제, 누군가에게는 재앙(2)
이른 아침, 백선의 집으로 두 명의 복면인이 찾아왔다.
손님에게 차를 대접하는 백선.
“흠…. 그러니까, 피에리뇽 가문에서 가장 많은 지원금을 내놓고 있다는 뜻인가?”
“그런 셈입니다.”
마치 음성변조기를 쓴 듯한 저음, 그런 남자들이 쏟아내는 말은 가히 충격적이라 할만 했다.
피에리뇽 가문은 프랑스 3대 부호 중 하나로서, 그 명맥이 무려 1600년이나 이어진 뼈대 있는 집안이다.
원래는 소작농으로 시작하여 가난하게 살았으나 십자군원정에서 돈과 작위를 얻어 부르주아 대열에 들어섰다. 그리고 17세기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금융업을 시작, 지금의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 제국주의의 주축이었으며 근대사회 자본주의 권력자 중 단연 으뜸으로 손꼽히는 피에리뇽 가문은 단순히 프랑스의 귀족주의만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가문이다.
그들은 프랑스의 울타리를 벗어나 서유럽의 최강자 중 한 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피에리뇽 가문이 탑을 무너뜨리려 하고 있다? 허참.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돈으로나 권력으로나 그들을 밀어낼 수 있는 가문이나 집단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심지어 유럽연합도 피에리뇽 가문의 입김 한 번이면 수장급 인사들의 모가지가 줄줄이 달아날 정도이니까요.”
“뭔가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겠군.”
백선은 고민에 빠질 수밖에는 없었다.
지금 태하는 빙하기를 끝내고 던전 100층 돌파를 압두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힘을 실어줄 수 없다면, 아마도 작음의 이 사태는 어지간해선 종식되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는 신중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조력자들을 모으는 것이 좋겠군.”
“피에리뇽 가문이 움직였다면 그 파트너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겁니다. 게다가 피에리뇽 가문에게 반기를 들 정도로 깡다구 좋은 사람들이 과연 있을지 의문입니다만.”
흑룡단주 황희석의 말에 백선도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두 사람의 관점은 완전히 달랐다.
“우리에게는 최후의 보루가 남아있어.”
“최후의 보루라니요?”
“제네시스.”
“…설마하니 코어시장 전체를 움직이시려는 겁니까?”
제네시스는 단순히 바벨탑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처음 이 땅에 제네시스라는 조직이 만들어졌을 때, 헌터협회는 물론이고 최고권위를 가진 레이드 집단이 한 뜻으로 뭉쳐 힘을 실어주었다.
그때에 가장 많은 힘을 실어준 집단이 바로 청룡, 그러니까 지금의 청룡방인 것이다.
청룡방이 제네시스에게 힘을 실어줌으로서 그들은 코어시장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고, 심지어는 가격담합이나 카르텔 조직과 같은 사건들을 해결하면서 힘을 키워갈 수 있었다.
“제네시스가 카르텔, 트러스트 조직 등을 와해시키면서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누가 뭐라고 해도 제네시스 금융의 조직이었지. 지금 제네시스 금융은 어떤 입지를 갖고 있는가? 한 번 생각해보시게.”
“흠…. 코어거래시장을 운영하는 집단이 제네시스이고 거래, 결제, 심지어는 선물과 펀드시장까지도 제어하는 곳이 바로 제네시스이지요.”
“그래, 실질적인 코어시장의 중앙은행 역할을 하고 있지. 그래서 코어장외거래시스템을 제네시스라고 부르기도 하지.”
“설마하니 그런 제네시스 전체를 움직이실 생각인 겁니까?”
“달리 방법이 있겠나?”
제네시스는 한 번 움직이기 시작하면 단순히 코어시장 뿐만이 아니라 그 나비효과가 주변 전체로 퍼져나갈 것이 분명했다.
그들의 움직임 한 번으로 인플레이션이 가속화 된다거나 디플레이션의 악몽이 재현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이는 극약처방이라는 뜻.
허나 백선은 지금 이대로 시간이 조금만 더 흘렀다간 피에리뇽 가문의 횡포로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우리가 가만히 있기엔 사태가 너무 심각하다. 당장 제네시스의 이사회를 소집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시게. 단, 은밀하게 움직여야하네.”
“…알겠습니다. 어르신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차가 식기 전에 대담은 끝났다.
파앗!
흑룡단은 이내 신영을 감추었고 백선은 가만히 앉아 다도를 이어갔다.
***
같은 시각, 멀먼호가 베트남 연해의 빙하를 뚫고 들어가고 있었다.
끼이이이잉!
“우헤헤헤! 달린다요!”“우와, 빙하가 도대체 얼마나 깊은 거야? 도대체 파도, 파도 끝이 없네.”
얼음의 두께는 보통 온도와 관련이 있지만, 지금의 이 두께는 단순히 표면 위의 온도가 낮아졌다는 것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태하는 온도계를 확인했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영하 100도를 육박하는군. 수온이 이렇게까지 낮을 수가 있는 건가?”
“이걸 보통의 자연현상과 같이 생각하면 안 돼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작은 섬만한 괴물이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인 것이니까요.”
“아아, 하긴.”
지금은 세상 자체가 넌센스인 시기다.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이 어처구니없게도 괴물들이었다니, 황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몰먼호는 아래로 계속 내려가다가 일순간 드릴을 멈추었다.
“으잇! 과부하가 걸렸다요! 젠장!”
“과부하? 몰먼호도 과부하 같은 것이 걸리나?”
“얼음이 너무 단단하다요! 얼마나 추우면 마정석 합금으로 만든 굴삭기가 말을 듣지 않을 정도다요!”
“대단한 맹추위로군.”
윤정은 여러 가지 자료를 바탕으로 생각을 해보았다.
과연 지금의 이 사태가 일어난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바다 안에서 냉기를 뿜어낸다고 해도 바다와 표면 전제가 이렇게 춥다는 건 말이 안 돼요. 아예 해가 안 뜬다는 생각이 든다고나 할까?”
“…아하! 그래! 밖에는 바람이 많이 불고 사방전체가 다 눈보라천지잖아요. 그러니 해가 뜨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거죠!”
“암흑 속에서 제트기류가 계속해서 빙하 주변을 맴돌면서 강력한 냉방효과를 만들어내고 있는 거예요. 이거, 단순히 괴물의 냉기가 바다를 냉각시킨 게 아니라는 뜻이죠.”
“그럼 또 다른 뭔가가 있다는 거예요?”
“마법이나 결계와 같은 것이 발동되고 있다고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네요.”
실제로 베트남 연해의 이 거대한 물체만 처치하면 동남아 빙하기의 절반 이상이 해결될 것으로 보였다.
한마디로 이곳이 빙하기의 핵심이라 할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마법으로 이뤄진 일종의 제트기류 막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 냉동막만 어떻게 하면 나머지는 알아서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음, 하지만 그 결계가 어디서 형성되는지 어떻게 알아볼 수 있죠?”
“이블아이를 데리고 공중으로 올라갈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요? 이블아이는 초음파만 쓸 수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오호, 하긴?!”
이블아이는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눈을 가지고 있다.
만약 녀석들 데리고 하늘을 날 수만 있다면, 이 사태는 어떻게든 종식이 될 것이었다.
태하는 드래곤들을 소환했다.
퍼엉!
“짜잔! 헬창 드래곤즈 왔어요!”
“너희들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어서 불렀다.”
“부탁이요? 하하, 형님! 부탁은 무슨, 그냥 분부만 내려주십시오!”
태하는 손가락을 들어서 냉동기류가 빠르게 지나가고 있는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위로 나를 데려다 줄 수 있겠어?”
“물론입니다!”
“잘못하면 드래곤인 너희들도 마칠 수 있는데?”
“이런 거 저런 거 다 생각하면서 어떻게 임무를 수행합니까? 헬스에는 이런 명언이 있죠. 강해지려면 목숨을 걸어라! 목숨을 걸지 않으면서 뭔가를 얻으려 한다는 건 사실 한심한 생각 아닙니까?”
“…이열, 제법인데?”
“헤헤, 이게 다 형님을 닮은 덕분 아니겠어요?”
“좋아! 그럼 한 번 해보자. 에밀리! 나에게 냉동의 결계를 씌워줘. 이블아이에게도.”
“넵!”
태하는 이블아이를 소환한 후, 녀석의 머리 위에 올라탔다. 그런 후, 한 방에 결계를 씌워서 냉동기류로부터 보호를 받았다.
헬창 드래곤즈는 심호흡을 했다.
-후우, 자, 그럼 갑니다!
-렛츠고우우우우!
마치 1RM을 잰다는 생각으로 있는 힘껏 도약하는 드래곤들.
쐐에에에엥!
엄청난 칼바람이 드래곤들의 단단한 가죽을 강타하여 비늘이 벗겨질 것 같은 고통이 엄습해왔다.
-우와, 이거 완전 무식한 바람이네! 이런 바람은 에밀리도 만들어내기 힘들 것 같은데?
-나만 불가능하겠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마법으로도 이건 불가능해. 누군가 이변을 일으킨 게 분명하다고.
“이변…?”
드래곤들은 휘청거리면서도 꾸역꾸역 수직으로 올라가는 날갯짓을 반복했다.
원래 드래곤은 주로 활강을 하는 생명체들인데, 워낙 큰 몸집 덕분에 날갯짓 한 번으로도 힘이 많이 빠지기 때문이었다.
허나 헬창 드래곤즈는 달랐다.
그들은 워낙 꾸준한 등운동과 복근운동으로 코어근육과 등근육이 발달했기 때문에 아무리 날갯짓을 해도 지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이거, 자극이 색다른데?
-렛풀다운이랑은 확실히 달라! 대단해, 새로워!
“허어, 너희들도 이제 슬슬 미쳐가는구나.”
헬창인 태하가 보기에도 이놈들은 정상이 아니었다.
허나 드래곤들이 미쳐버렸기 때문에 이런 제트기류를 돌파할 수 있는 것이었다.
-크아아아앙!
-뚫었다!
-형님! 막을 벗어났어요!
제트기류를 벗어나 성층권 바로 아래까지 도달하자, 제트기류가 사라지고 평온하고 온화한 바람이 태하와 드래곤들의 볼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태하는 기다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온 듯, 나른하고 노곤노곤한 기분이 되어버렸다.
“살다보니 정말 별 일이 다 있구나. 설마하니 제트기류를 무기로 쓸 생각을 하는 미치광이들이 존재하다니 말이야.”
-어쨌거나 형님, 이제 상공으로 올라왔습니다. 사태는 대충 마무리가 되는 것이겠죠?
“그래, 한 번 해보자. 이블아이!”
-크허어억!
이블아이는 태하의 지시에 따라서 이 세상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천리안을 사용했다.
녀석의 눈으로 보는 이 세상의 흐름은 인간이 생각하는 것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마력의 흐름부터 시작해 뭔가 이질적인 것이 하나라도 보인다면 그 즉시 녀석의 눈에 담겨 마치 파장처럼 출력되었던 것이다.
태하는 녀석이 만들어내는 파장의 그래프를 분석하여 이질적인 것을 잡아냈다.
“하노이! 하노이에서 파장이 만들어지고 있다! 저것을 파괴하면 모든 것은 끝나게 되어 있어!”
-그럼 형님, 저희들의 브레스를 사용해서 그걸 파괴하면 어떨까요?
“가능하겠어?”
-물론이죠!
“좋아, 가자!”
올라오는 것은 정말이지 죽을 만큼 힘들었지만 제트기류를 타고 하강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 제트기류는 특이하게도 마치 냉동고에서 바람이 내려오듯 위에서 아래로 냉기가 흘러내려오고 있는 형국이었기 때문에 상승기류를 타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허나 그것을 반대로 표현한다면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건 식은 죽 먹기라는 뜻이었다.
-갑니다!
“가자, 아주 요절을 내버리자!”
-크아아아앙!
드래곤의 힘찬 포효와 함께 지상으로 내려가는 태하의 눈에 주변의 풍경이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마치 마하의 속도를 넘나드는 전투기를 탄 듯, 태하는 강력한 압박마저 느끼고 있었다.
“…압력이 상당히 높은데?”
-천천히 갈까요?!
“아니! 계속해! 이까짓 압력쯤이야 복압으로 견뎌내면 그뿐!”
-역시! 헬창은 위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