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 잔재(2)
전투는 결국 샤이언의 승리로 끝이 났다.
그는 고래에게 연달아 전격의 브레스를 날린 후, 그 아가리를 열어 뇌전 계열 마법을 연거푸 쏟아 내어 고래를 전기구이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샤이언은 심장을 가져다가 태하에게 주었다.
“대장, 이걸 흡수해 보는 것이 어때?”
“흡수? 나보고 이걸 흡수하라고?”
“약탈이라는 스킬을 쓰면 몬스터의 기억을 읽을 수 있다면서. 그럼 저놈의 기억도 읽을 수 있는 거 아니야?”
“아하! 그래, 그런 방법이 있었지!”
너무나도 당연해서 잠시 잊고 있었지만, 태하는 상대방의 기억을 읽는 힘을 갖고 있었다.
그는 웜급 드래곤의 몸통만 한 고래의 심장을 앞에 두고 깊은 심호흡을 했다.
“후우, 그럼 간다!”
태하는 와이어를 뻗어서 저 거대한 심장에 꽂아 버렸다.
퍼억!
그러자 그의 몸으로 엄청난 양의 에너지가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 엄청나다!’
만약 일전에 태하가 점진적 과부하를 거듭하며 적을 포식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그는 온몸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허나 이제 그는 거의 무한에 가까운 흡입 능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제아무리 많은 양의 에너지가 몰려와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스스스스스!
엄청난 에너지, 그 속을 부유하던 기억의 조각들이 태하의 뇌리에 쑤셔 박히는 느낌이 들었다.
태하는 놈의 기억 속에 들어 있는 기억이 1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적어도 수만 명의 기억, 그런 것들이 놈의 기억 속에 내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순식간에 머리가 복잡해져 정신착란에 걸릴 수도 있었다.
허나 태하는 강력한 정신 계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자였기 때문에 착란에서 가볍게 피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후우우!”
“됐어요? 어때요? 기억이 선명한가요?”
“그렇기는 한데, 기억이 너무나도 많아요. 이 중에서 과연 어떤 사람의 기억이 진짜인지 알아맞히기가 힘들 것 같네요.”
“흠. 그럼 어쩌죠?”
“일단 이걸 가지고 시연 누님을 찾아가 보는 것이 나을 것 같아요.”
유시연이라면 이 뒤죽박죽인 기억을 짜깁기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기억을 갈무리하고 현장에서 빠져나온 태하와 일행들.
그들은 이제 다시 예전의 모습을 되찾은 타이만을 바라보며 흡족하게 웃었다.
“헬창 드래곤즈가 이렇게 한 건 하는군.”
“헤헤, 이게 다 형님 덕분 아니겠습니까?! 헬창 포에버!”
그동안 꽁꽁 얼어 있던 태국이 다시 녹아내리자, 주변은 녹음과 생명으로 가득 찼다.
비행기를 타고 다시 한국으로 향하기 위해 공항을 찾은 태하와 일행들에게 태국 정부의 관계자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태하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과연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군요.”
“그동안 얼음 속에 갇혀 있던 터라 다들 몸이 정상이 아닐 겁니다. 충분히 치료하고 피해를 복구하는 데 전력을 다해 주세요. 그게 바로 저희들에게 보답하는 길입니다.”
“역시, 인성도 좋은 사람들!”
태국 왕가에서는 왕족 전용기를 태하 일행에게 내어 주었는데, 이는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지금까지 왕족 전용기는 국가수반 이외에는 탑승한 전례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태국에서 한국으로 귀국한 태하 일행은 카메라 세례를 받았다.
찰칵, 찰칵!
“헌터 드림팀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집중되고 있습니다! 한 말씀 해 주시죠!”
“드림팀이요?”
“오대양 육대주에 흩어져 있던 헌터들이 모여 인류를 절멸 사태에서 구해 낸 것에 대해서 사람들이 붙여 준 별명입니다. 혹시 모르고 계셨습니까?”
“네, 당연히…….”
“아무튼 간에 여러분들은 인류의 영웅입니다! 이에 대해서 한 말씀만 부탁드립니다!”
태하는 마이크를 받아서 빅토리아에게 넘겨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아주 간단명료하게 기자단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우리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고, 비단 우리만의 힘으로 사태를 해결한 것도 아닙니다. 헬창스와 합동 공격대도 후방에서 충분한 지원을 해 주었고, 각 지역의 헌터협회서도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해야 할 일을 했고, 앞으로도 해야 할 일을 할 것입니다.”
“아아! 역시! 듣던 대로 인성까지 훌륭하시군요! 항간에는 전율의 마녀께서 정치에 입문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 돌고 있던데, 그에 대해서는 하실 말씀이 없으십니까?”
“정치에는 관심 없습니다. 그럴 이유도 없고요. 저는 제 소명을 다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으음!”
기자들은 더 이상 질문을 건네지 않았다.
인류를 이제 막 구하고 온 사람들에게서 엄청난 피로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
태하 일행이 공항을 빠져나왔을 무렵, 그들의 앞에는 검은색 승합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차량의 문이 열리자, 그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유시연이 보였다.
“여러분!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안 그래도 묻고 싶은 것이 많았는데, 참으로 잘되었습니다.”
“후후, 그래요? 나를 보고 싶었던 것이라고 이해해도 괜찮겠죠?”
“그럼요, 누님! 보고 싶어서 이렇게 날아왔잖아요.”
“어머나? 언제 이렇게 능글맞아졌데?”
“이무기를 먹어 치워서 그런가?”
청룡방에서는 태하 일행의 짐을 받아서 적재함에 실어 주었고, 덕분에 그들은 두 손 가볍게 차에 탈 수 있었다.
차를 타고 청룡무고로 향하는 길, 빅토리아는 유시연에게 마인드헌터의 능력을 좀 사용해 달라고 부탁했다.
“냉동원으로 생각되는 몬스터의 심장을 취하기는 했습니다만, 워낙 기억이 중구난방이라 어쩔 도리가 없다네요.”
“기억이 중구난방이다? 보통 그런 경우에는 정신착란이나 정신분열을 의심해 볼 수 있는데, 제가 진단을 좀 해 볼까요?”
“진단이요? 기억을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요?”
“후후, 모르셨나 본데 제 직업은 원래 정신과 의사였어요. 의사로 지금까지 20년을 넘게 일하고 있죠.”
“그런 줄은 미처 몰랐네요.”
빅토리아가 태하를 쳐다보았지만, 태하 역시 그녀가 정신과 의사인 줄은 몰랐었기에 어리둥절한 건 마찬가지였다.
유시연은 적당한 장소를 찾아서 정신과적 분석을 실시해 볼 요량이었다.
“태하 씨 속에 있는 그놈의 심연을 뚫고 들어가서 정신과적 분석을 해 볼 거예요. 제 생각에 아무리 몬스터라고 해도 거듭되는 실험으로 심신이 지치면 분열이 일어날 수 있다고 보거든요.”
“허어, 몬스터에게서도 분열이 관찰된 적이 있었던가요?”
“아주 드물지만 정신착란을 보이는 경우가 있었어요. 모든 케이스에서 외부적 요인이 발견되었죠. 선천적으로 정신적 질환을 갖고 태어나는 경우는 없는데, 100% 후천적 요인에 의해서 정신적인 질환을 앓게 되는 것 같더라고요.”
“실험이나 감금, 뭐 그런 것들로 말인가요?”
“그럼 셈이죠.”
“흐음…….”
“아무튼 간에 짐을 풀고 여독을 어느 정도 녹인 다음에 진료를 받도록 하자고요. 정신분석을 해야 다음 레이드에서도 성과를 기대할 수 있을 테니 말이에요.”
승합차는 태하 일행을 청룡무고 앞에 세워 주었고, 유시연은 며칠 후에 자신의 병원에서 보자며 명함을 건넸다.
명함 속에는 ‘유 정신의학 전문병원’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병원이라는 이름이 붙는 걸 보니 규모가 상당히 큰 모양인데요?”
“그러게요. 마인드헌터가 정신병원을 운영한다니, 의외이면서도 어쩜 찰떡같이 어울린다는 생각도 드네요.”
명함을 받고 청룡무고 안으로 들어가자, 헬창스가 태하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희란은 태하가 들어오자마자 울먹임을 참으며 달려왔다.
“흣!”
“땡땡이, 잘 있었어?”
“……죽는 줄 알았잖아요. 전화는 왜 안 하는 건데요?”
“하하, 전화가 터져야 하지.”
“그래도 위성전화는 할 수 있잖아요.”
“그것도 잘 안 터지더라고. 다음에는 조금 더 나은 물건을 가져가 볼게.”
“아니, 다음부터는 나를 데라고 가요. 차라리 생고생을 하는 게 낫겠어. 마음 졸이는 건 너무 힘들어요.”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
이어서 헬창스와 돌아가며 포옹을 나누는 태하.
이들의 끈끈한 유대감은 마치 가족, 혹은 오래된 친구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주 그레이트하게 해치우셨더라고요! 감동했습니다!”
“헬창이 한번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죠. 안 그래요?”
“하긴, 아나볼릭하게 밀어붙이는 게 또 헬창의 매력이죠!”
이주현은 태하와 그 일행들의 상태를 체크하고 건강에 이상이 있는지 파악해 두었다.
다행히도 별 이상은 없는 모양이었다.
“전체적으로 컨디션들은 좋네요. 극지를 다녀와서 건강이 상했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이네요.”
“앞으로 극지를 계속 가야 할 것 같은데, 그때마다 이렇게 진단을 받아야 할까요?”
“허어, 어쩐다냐. 그럼 별수 없죠. 다 같이 가는 수밖에.”
“그럼 육지는 누가 지켜요?”
“각 지역의 헌터협회가 다시 소생했잖아요. 그 사람들에게 부탁하면 되죠.”
“음, 그건 그러네요.”
“그리고 후방에서 기다리느라 아주 죽을 맛이었다고요. 사람이 펑펑 놀고먹는 것이 이렇게 힘든 줄은 미처 몰랐네요.”
“하하, 그랬습니까?”
“아무튼 다음 원정은 다 같이 가요. 전술 차량을 작전용 비행기에 실어서 가면 될 것이고요.”
“그나저나 비행기는 누가 몰아요?”
비행기라는 말에 윤정이 손을 번쩍 들었다.
“저요! 저, 미국에서 비행기 파일럿으로 일했던 적이 있어요!”
“허어, 역시 천재는 뭐가 달라도 다르네. 파일럿이라니, 대단하네요!”
“그래 봤자 5년 남짓 아르바이트로 한 건데요 뭐. 아무튼 작전용 비행기를 청룡방에서 구해준다니까 그걸 타고 다니면 되겠어요.”
“오케이! 그럼 다음 작전부터는 다 같이 움직여 보도록 하자고요.”
재회의 기쁨을 나누는 것도 잠시, 황유나에게서 온 소식이 전해졌다.
태하는 한나에게서 새로운 소식을 접했다.
“황금성녀께서 금성탑의 추악한 진실을 내부에 퍼뜨리고 수뇌부에게 저항하는 세력을 모으고 있다고 해요. 아무래도 그 과정에서 스폰서들을 잡아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요.”
“청룡방 특사들에게서는 별 소식이 없었나요?”
“영윤? 그런 이름을 쓰는 사람이 조만간 찾아온다고 했었던 같기는 해요.”
“영윤! 우리 쪽 사람이에요. 안 그래도 금성탑과 관련된 사람들에 대해 조사하라고 지시를 해 두었었는데, 벌써 뭔가 알아낸 모양이네요.”
“그럼 여독 좀 풀고 이틀 후에 영윤이라는 사람을 만나면 되겠어요.”
“그래요. 그럼 오늘은 가볍게 한잔하고 내일은 하루 쉬자고요.”
“한잔 좋죠!”
술이라고 해 봐야 맥주 500cc 한 잔이 전부였지만, 태하에게는 이렇게 목을 축이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치킨에 맥주를 한 잔 하는데, 빅토리아가 태하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트레이닝은 언제부터 시작합니까?”
“아하, 트레이닝! 그렇죠, 내가 직접 트레이닝을 해 드리기로 했었죠! 언제부터가 좋으세요? 나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생각하는데.”
헬창스는 신입 회원이 왔다는 소리에 먹던 치킨을 살며시 내려놓았다.
헬창들에게 뉴비는 그야말로 가슴이 두근거리는 먹잇감이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희란이 슬그머니 앞으로 나온다.
“험험! 원래 엄한 스승 밑에서 제대로 된 근육이 나오는 법이죠. 내가 맡을게요. 아주 인간 개조의 용광로에 첨벙 빠트려 주겠어!”
“미안하지만 나는 오리지널 헬창에게 운동을 배우고 싶네요. 카피본이 아니라 진짜 헬창 헌터를 느껴 보고 싶다고요.”
“나도 명색이 트레이너예요!”
“압니다. 아는데, 나는 태하 씨에게 배우기로 했다고요.”
“허 참, 싫으면 말아요!”
상극인 두 사람이 운동을 같이 하면 아마 극단적인 발전이 있을 것이었다.
어떻게든 하나라도 더 시켜서 사람을 괴롭히게 만들고 싶을 테니 말이다.
허나 애석하게도 두 사람의 결합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가만히 두 사람의 얘기를 듣고 있던 한나가 실소를 흘리며 말했다.
“못 살아, 뭐 그런 것을 가지고 싸워요? 어차피 헬스장에 가면 관장님부터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아, 맞다! 보현 관장님!”
빅토리아는 영문을 모르고 있었지만, 이 헬스장에는 전통이 존재한다.
민머리의 대종사에게 수련을 받아야만 한다는 전통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