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 잔재(1)
태국의 심장부인 방콕과 제조업의 중심지인 촌부리, 최대 휴양지 파타야를 아우르는 타이만 일대에서 냉동원이 발견되었다.
이곳이 얼어붙으면서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와 함께 사실상 동남아시아를 이끌어 주던 주요 무역 거점이 한순간에 날아가 버린 셈이었다.
허나 천만다행히도 바닷가가 얼어붙고 항만, 공장지대만 파괴되었을 뿐이지 사람은 그렇게까지 많이 다치지 않았다.
어쨌거나 인명 피해만 없다면 어떻게 해서든 재해는 복구가 가능했기 때문에 이는 불행 중 다행이라 할 것이다.
과거에는 타이만이라 불렸을 얼음 대륙을 밟고 선 동료들은 GPS 수신기를 가지고 냉동원을 찾아다녔다.
“몰먼호가 밖으로 나오니까 너무 좋다요!”
“그래, 총총. 너를 데리고 나오니 나도 좋구나.”
총총은 몰먼호를 개조해서 수륙양용으로 만들었는데, 영하 100도 이하의 강추위 속에서도 버틸 수 있으며 산소만 있다면 우주로도 나갈 수 있을 정도로 튼튼했다.
그렇게 개조된 몰먼호를 몰고 나온 총총은 탑의 수호자들에게 있어서는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주고 있었다.
거기에 덤으로 아리사라는 팬도 1명 더 확보하기도 했다.
그녀는 운전대를 잡은 총총의 볼에 자신의 볼을 얹고 위아래로 질척거리며 비볐다.
“으으응, 으으응, 으으응……!”
“누, 누님! 그렇게 격하게 비비면 운전하기 힘들다요!”
“귀여워! 너무 귀여워!”
도대체 몰먼들에게는 어떤 매력이 있기에 여자들이 몰먼만 보면 환장하는 것일까.
태하도 몰먼이 제법 귀엽다는 생각이 들기는 해도 이렇게 정신줄을 놓을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몰먼을 봐도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여자도 있었다.
“흠, 이 근방인 것 같은데. 총총, GPS 수신기는 확실한 거죠?”
“물론이다요! 대장 누님!”
태하가 대장 나리라면 빅토리아는 엄청난 카리스마를 가진 대장 누님이다.
총총에게 있어서 빅토리아와 태하는 같은 서열이지만, 어쩐지 녀석은 빅토리아에게 무한한 신뢰감을 느끼고 있었다.
“앗! 여기서 1km 앞에 냉동원으로 예상되는 뭔가가 있는 것 같다요!”
“음, 크기로 봐선 거의 항공모함급이 되는 것 같은데요?”
레이더에 포착되는 물체는 그 즉시 크기를 가늠할 수 있는데, 지금 이들의 앞에 있는 물체는 최소 항공모항급은 되어 보였다.
그렇다는 건 해양 생물 중에서도 크기가 상당히 큰 편에 속한다는 뜻이었다.
“수중 전투는 우리 전문이 아닌데. 큰일 났네요.”
“앗! 대장 나리! 드래곤을 부르면 어떠냐요!”
“아, 그렇지! 아르네시아가 있었지!”
드래곤들이 폐관수련을 한다고 헬스장에 처박혀 있다기에 태하는 녀석들을 소환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태하는 녀석들이 과연 얼마나 몸을 키웠을지 은근히 기대도 되었다.
“우리가 드래곤을 못 본 지 한 달은 되었죠?”
“조금 더 되었을 건데. 거의 40일쯤 되지 않았어요?”
“점진적 과부하를 적용받았다면 지금쯤 지역대회에서 입상할 정도는 되겠는데요?”
그는 팔찌를 이용해서 4명의 드래곤들을 소환했다.
퍼엉!
그러자 몰라보게 다부져진 드래곤들이 태하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우으으으! 헬창 포에버!”
“스테로이드 마인드!”
아주 만족스러운 모습이었다. 태하는 새삼 아르네시아와 드래곤들이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헬창 드래곤즈! 나는 제군들이 자랑스럽다!”
“감사합니다, 대사형!”
“하하! 이렇게 기쁜 순간이 다 있다니!”
드래곤이 운동을 한다니, 어째 뭔가 좀 더 큰 기쁨 같은 게 느껴진다.
태하는 이제 이들의 보디를 한번 체크해 보기로 했다.
“여긴 온도 유지가 되니까 다들 몸 한 번씩만 봐 볼까?”
“넵!”
아주 자신 있게 옷을 벗는 드래곤들. 에밀리는 탱크톱을 입고 있었지만 그 근육들이 얼마나 자리를 잡았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음, 몇몇 빈 곳이 많이 보이긴 하지만, 이 정도면 훌륭하다. 조금 더 정진하도록.”
“넵!”
“자, 그럼 헬창 드래곤즈. 너희들의 능력을 보여 줘.”
“으하하하, 가자!”
몰먼호의 해치를 열자, 바트의 드래곤 배리어를 몸에 입은 헬창 드래곤즈가 거침없이 출격했다.
다부진 근육을 뽐내며 하늘 높이 날아오른 그들은 일순간 폴리모프를 해제시켰다.
그러자 온몸에 핏줄이 바짝 선 근육 덩어리 드래곤이 그 위용을 드러냈다.
“어이쿠, 드래곤에게 복근이?”
“후후, 코어 근육을 아주 잘 단련했군!”
보디빌딩으로 등 근육과 코어 근육을 발달시키니 자연적으로 날갯짓이 빨라졌고, 드래곤들은 예전에 비해 족히 4배는 빠른 비행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들이 활강할 때마다 지면이 잔잔하게 흔들렸고, 심지어는 바람의 방향까지 일시적으로 바뀔 정도로 강력한 힘을 보여 주었다.
아르네시아는 바트의 도움을 받아서 얼음 속으로 들어갈 준비를 했다.
-바트, 얼음 좀 깨 줘! 아나볼릭하게!
-좋지, 아나볼릭 베이비!
완전 헬창화가 된 드래곤들은 그 추임새부터가 예사롭지 않았다.
바트가 불덩이를 쏘아 내자, 얼음은 순식간에 녹아 버렸다.
-크아아아앙!
화염의 브레스가 닿자마자 바닷물이 그 즉시 보이기 시작했고, 아르네시아는 그 속으로 거침없이 다이빙을 했다.
첨벙!
바트는 아르네시아가 다시 떠오를 수 있도록 녹은 얼음이 얼지 않게 잔잔한 화염 마법을 걸어 두었다.
아르네시아는 빠르게 유영하며 냉기를 뿜어내고 있는 근원을 찾아냈다.
-형님! 찾았습니다! 이놈, 고래인 것 같은데요?
“고래? 아니, 무슨 고래가 냉기를 뿜어내?”
-어떻게 할까요? 놈을 잡아먹어 버릴까요?
“괜찮겠어? 저놈은 그냥 고래도 아니고 냉동 고래 아니야.”
-흠, 그건 그렇습니다만.
“차라리 바트에게 넘겨 버려. 바트라면 그걸 녹여 먹을 수 있을 테니 말이야.”
태하의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에밀리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제가 가 볼게요!”
“에밀리 네가 말이야?”
“냉기의 고래라면 제가 먹어 치우는 편이 훨씬 나을 것 같아요. 그리고 저것들 먹어 치웠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잖아요.”
“확실히 그건 그렇군. 이놈을 잡아먹었을 때 바트의 심장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 노릇이고 말이야.”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확실한 사람이 가는 것이 좋지 않겠어요?”
“그래, 그럼 에밀리로 낙점!”
에밀리는 아르네시아가 있는 얼음 구멍으로 폴리모프를 해제한 채로 다이빙했다.
그녀는 냉 속성 드래곤이기 때문에 딱히 추위에 타격을 받지도 않았으며, 드래곤 특유의 심폐 지구력으로 인해 수영도 상당히 잘하는 편이었다.
바다 깊은 곳으로 들어간 그녀는 잠들어 있는 거대한 고래와 마주했다.
“좀 어때? 공격할 수 있을 것 같아?”
-우리 드래곤보다 족히 4배는 거대하네요. 이걸 온전히 다 집어삼킨다는 건 사실 말이 안 되는 일이고, 심장만 취해서 먹는 편이 훨씬 낫겠어요.
“그래, 그럼 일단 심장만 빼서 먹는 걸로…….”
바로 그때였다.
에밀리의 앞에 있던 거대한 고래가 감고 있던 눈을 뜬 것이었다.
-뿌우우우우!
-헛! 눈을 떴어요! 오라버니, 아무래도 전투를 준비해야 할 것 같아요!
“젠장, 결국 놈이 깨어나고 말았군! 모두 전투준비에 들어갑시다!”
몰먼호는 얼음 구멍이 있는 곳으로 빠르게 달려갔고, 태하와 일행들은 당장 잠수가 가능한 보디슈트로 갈아입었다.
혹한의 영하에서도 버틸 수 있는 옷이기에 얼음 아래를 흐르는 바다에서도 당연히 버틸 수 있을 것이었다.
태하와 일행들이 거침없이 잠수를 할 무렵, 냉기 면역을 부여받은 샤이언이 곧장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너희들은 밖으로 나가! 내가 전기 찜질로 놈들을 압도하겠어!
-괜찮겠어? 이 덩치의 고래를 상대하는 것이 쉽지 않을 텐데?
-물에서 가장 효율이 좋은 건 전기야. 너희들도 전기 통구이가 되고 싶지는 않겠지?
-하긴.
-대장! 이곳은 내가 맡을 테니 나머지는 퇴로를 확보하는 데 집중해 줘!
샤이언이 앞장섬으로써 탑의 수호자들은 일단 작전에 투입되지 않고 대기할 수밖에 없었다.
태하는 그의 의견을 받아들여 퇴로를 확보하는 데 주력하기로 했다.
“오케이! 그럼 나머지는 여기서 스탠바이. 샤이언, 끝낼 수 있겠어?”
-물론!
드래곤은 누가 뭐래도 최고의 지성체다. 제아무리 샤이언이 성질이 괴팍해도 절대 승산이 없는 싸움에 나서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태하는 일단 샤이언의 전투 방식에 따르기로 한 것이다.
샤이언과 마주한 혹한의 고래는 붉은 눈을 번뜩이며 머리를 돌렸다. 그러곤 파랗던 몸통을 은은한 은청색으로 바꾸더니 아가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크하아아악!
-……뭔가 대단한 것이 오려는 모양인데?
“선제공격!”
-오케이!
태하의 지시에 따라서 샤이언은 뇌전의 브레스를 쏘아 냈다.
고래의 덩치가 워낙 크기 때문에 무슨 행동 하나를 해도 상당히 느렸고, 드래곤 중에서도 브레스가 가장 빠른 샤이언이 나서니 놈이 공격하기도 전에 뇌전의 기둥이 물살을 갈랐다.
슈가가가각!
주변으로 스파크가 튀면서 거대한 원의 파동이 생겼다.
요즘 다부진 몸을 만든다고 하루 종일 운동만 한 결과, 점진적 과부하가 드래곤의 능력치를 4배 이상 높인 것이었다.
쿠우우웅!
“……이런 무식한 브레스를 보았나?”
“점진적 과부하 효과라는 것이 정말 무섭기는 하네요. 이런 결과를 만들어 낼 줄이야!”
“다들 잘 보셨죠? 헬스라는 것이 이렇게 강력한 겁니다.”
“부정을 못 하겠네. 정말 대단하긴 해요.”
빅토리아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헬스가 사실 야만적이라고 생각했었다.
허나 그 야만적인 것이 오늘은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나중에 나도 헬스나 좀 해 볼까 봐요. 태하 씨, 트레이닝 가능해요?”
“헬창이 늘어난다는 건 우리에게 있어선 아주 큰 축복이죠! 속성으로 한 달 만에 괴물을 만들어 드립니다!”
“괴물까지는 필요 없고요.”
한나나 희란의 경우엔 어지간한 남성들조차도 한 수 접어줄 정도로 근육질 몸매를 자랑하고 있었기에 빅토리아처럼 여성향이 짙은 사람들은 자칫 거부감이 들 수도 있었다.
허나 태하는 그녀도 언젠가는 우락부락한 몸을 지향하게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다 그렇게 시작하지. 하지만 끝은 한결같아. 포기하거나, 아니면 괴물을 꿈꾸거나!’
전투는 계속되었다.
강력한 뇌전의 브레스를 맞은 고래는 눈을 찔끔거리더니, 이내 다시 가슴을 부풀리며 뭔가 내뱉을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드래곤들은 저것이 브레스와 같은 마법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브레스가 틀림없는 것 같은데?”
“아니, 우리는 듣도 보도 못 했던 생명체가 브레스를 쏘다니.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거야?”
빅토리아는 혼란스러워하는 드래곤들에게 가장 신빙성 있는 가설을 내어놓았다.
그것은 바로 드래곤 연구소에서 채취한 DNA를 통한 유전자 개량이었다.
“호주의 드래곤 연구소에서 자행한 하프 드래곤 프로젝트의 일환이 아닐까 싶어요. 아마 저 고래에게는 우리가 모르는 엄청난 능력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죠.”
“만약 그렇다면 드래곤뿐만 아니라 각성자들의 DNA도 숨어 있을지 모른다는 뜻 아닙니까?”
“그런 셈이죠. 각성자들의 DNA를 그렇게 많이 모아 놓았는데, 그걸 쓰지 않을 이유는 없으니까요.”
파이어볼의 연구소가 이렇게까지 미친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막대한 자금력 덕분이었다.
어쩌면, 태하는 그들을 무너뜨리기 위해 이제 돈으로 싸워야 할 시기가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해 왔던 경제적 투쟁은 어쩌면 시작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의 이 결과물이 나오기까지 도대체 얼마나 많은 돈을 썼겠어요? 우리는 그들의 자금줄을 끊어 버리겠다고 발버둥을 치고 있었지만, 결국엔 그게 불가능해졌었죠. 하지만 이번에는 다릅니다.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놈들이 자금줄을 끊어 버릴 겁니다.”
“우리 탑의 수호자들이 힘을 합친다면 충분히 할 수 있어요. 우리는 다양한 재능을 가졌고 집안의 배경도 상당히 좋은 편이잖아요? 모든 가문이 하나로 뭉쳐 힘을 합친다면, 파이어볼을 충분히 무너뜨릴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자면 파이어볼에 대한 정보를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모아야 합니다. 지금은 그저 수박 겉핥기에 불과한 수준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