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 헬창의 신기술(2)
슬그머니 웃는 란돌.
“저는 냉기의 화신이 성좌인 사람입니다. 애초에 방호복은 필요하지 않았어요. 다만, 적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 입었던 것뿐이죠.”
“아하! 그랬었지! 잠시 잊고 있었네요!”
“흠, 그런데 말입니다. 막상 옷을 벗어 보니 이곳은 단순히 춥기만 한 게 아닌 것 같아요.”
“단순히 춥기만 한 게 아니라고요? 그럼 어떤 특수한 능력 같은 것이 있어요?”
“일종의 파동을 통해서 냉기를 전달하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웨이브를 만들면 어떠한 물체가 가로막고 있다고 하더라도 능히 뚫고 지나갈 수 있죠.”
“아하! 한마디로 냉기가 침투하기에 더 좋은 방법이라는 건가요?”
“바로 그겁니다. 단순히 추위만을 무기로 한 것이 아니라 방한까지도 신경을 써서 아예 침투까지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흐음. 안 그래도 버거운 상대가 머리까지 좋다?”
“아무래도 이번 싸움이 고비가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드네요.”
란돌은 어지간해선 긴장을 잘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그의 표정이 이렇게까지 굳었다는 것은 사태가 꽤나 심각하다는 뜻이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탑의 수호자들이 뒤로 물러서는 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갑시다. 전진만이 답입니다.”
“오케이!”
냉동의 근원이 어디인지 본격적으로 찾아나서는 일행들.
태하는 데스벳을 소환했다.
-끼릿!
“오호, 데스벳은 추위를 타지 않는 건가?”
-끼리릿!
의외로 데스벳은 추위에 강했고 이번 임무를 수행하는 데 최적화된 신체를 갖고 있었다.
태하는 녀석들을 지하실 곳곳으로 보내 시야도 확보할 겸 정찰을 시켰다.
정찰 결과에 따라서 작전을 어떻게 진행할지 결정될 것이었기에 데스벳들은 아주 신중하게 움직였다.
총 55마리의 데스벳이 지하실 곳곳으로 퍼져 나가 태하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음. 보니까 근처에 일단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고, 발전실에서 강력한 한기가 느껴지고 있다고 하네요.”
“발전실이라면 건물의 내부 발전을 담당하는 곳인가요?”
“그런 것 같습니다.”
“발전실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방법은 없나요?”
“음, 한 가지 방법이 있기는 하죠.”
태하는 팔찌로 이블아이를 소환했다.
이블아이는 캔슬레이션을 사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물을 투과해서 관찰할 수 있는 능력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이 작전에 최적화된 친구라고 할 수 있었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녀석이 추위를 견딜 수 있느냐, 바로 그것이었다.
“이블아이가 소환될 겁니다. 소환되는 즉시 란돌 씨가 내성 마법을 걸어 주세요!”
“오케이!”
파앗!
이블아이가 소환되어 태하의 앞에 거대한 눈을 끔뻑이며 둥둥 떠 있었다. 그러자 란돌은 황급히 냉동 내성 마법을 걸어서 이블아이를 지켜 주었다.
-크헉!
요상한 소리를 내며 공중을 부유하고 있는 녀석에게 태하는 발전실을 가리키며 말했다.
“발전실이라고 쓰인 곳 있지? 그 안을 좀 투시하고 와.”
-크헉, 크헉!
겉보기에는 참 흉측하게 생겼지만, 태하에게 충성하고 행동에 거침이 없으니 이 얼마나 대단한 인력이란 말인가.
이블아이는 느릿느릿 떠가더니, 이내 거대한 눈동자에서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크허어어억!
그러자 태하의 시점에서 보이는 공간 한쪽에 이블아이의 투시 시선이 투영되어 출력되기 시작했다.
“아, 보입니다!”
“안쪽은 좀 어때요?”
“이걸 단체 대화방에 띄울게요.”
태하는 곧바로 절대적 공명 대화방으로 접속하였다. 그러자 상황이 모두에게 생중계되었다.
상황을 판단하는 능력은 역시 빅토리아가 가장 빨랐다.
“맞습니다. 이곳에 어떤 존재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 확실해요.”
“흠, 그렇다면 저놈을 어떻게 처리할까요?”
“일단은 이블아이를 저 안쪽으로 들여보내서 과연 적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확실히 알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그럼 데스벳과 이블아이를 저 안쪽으로 보내 볼게요.”
이블아이는 마법 능력도 대단하지만, 그 신체 능력만으로도 어지간한 몬스터는 그냥 씹어 먹을 정도는 된다.
태하는 이블아이에게 문을 부수고 들어가라고 지시했다.
“문을 부숴 버려.”
-크허엇!
쿠우웅!
이블아이의 박치기 한 방에 발전실의 두툼한 철문이 부서져서 그 안으로 데스벳과 함께 들어갔다.
녀석은 들어가자마자 레이더를 돌리듯 파장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스르릉, 스르릉……!
파장은 숨겨진 존재의 유무까지 파악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 이블아이에게만 있는 특수한 스킬이었다.
[액티브 스킬 : 이블아이의 레이더]
[은둔, 불투명 계열 스킬을 무력화시킵니다]
[반경 3km 이내에 있는 모든 생명체의 위치와 특성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한 10초쯤 레이더를 돌리던 이블아이의 더듬이가 좌우로 살짝 떨렸다.
그러자 녀석은 데스벳들을 이끌고 파장이 느껴지는 곳으로 곧장 달려갔다.
-크허어엇!
-끼리잇!
발전실 중앙 엔진에 뭔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이블아이뿐만이 아니었다.
강력한 파장을 사용하는 데스벳 역시 이곳 발전실 중앙 엔진에 수상한 생명체가 도사리고 있음을 깨달은 것이었다.
“저쪽이 확실하네요!”
“그런데 적이 나타났는데도 저 녀석은 왜 가만히 있는 거죠?”
“흠, 글쎄요. 일단 놈을 쳐부수러 한번 가 보자고요.”
태하 일행이 발전실로 향하는 동안에도 데스벳과 이블아이는 적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경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중앙 제어장치 바로 앞에 있는 엔진으로 가까이 다가서는 태하, 그런 태하의 앞을 이블아이가 막아섰다.
-크헛!
“응? 왜 그래?”
-크허어엇!
“……뭐? 여기서 더 가까이 가면 안 된다고?”
-크헉!
동료들은 이블아이가 왜 그러는 것인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바로 그때, 발전실 중앙 엔진에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끼기기긱!
“……뭔가 있어요! 전투태세를!”
“아니, 잠깐만요! 그런 종류가 아닌 것 같은데요?!”
태하는 엔진에 가까이 다가섰고, 바짝 긴장한 이블아이가 시퍼렇게 눈을 부릅뜬 채로 그 뒤를 지키고 있었다.
다시 한 발자국 다가서는 태하.
퍼엉!
엔진의 볼록한 기관실이 터지면서 순간적으로 강력한 마법구체가 튀어나왔다.
이블아이는 캔슬레이션으로 마법구체의 쇄도를 막아 냈다.
-크허어어어!
“나이스 샷! 덕분에 살았어!”
이블아이의 슈퍼세이버 덕분에 피해를 입지 않은 탑의 수호자들은 마법구체를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엄청난 냉기가 피어오르는 마법구체.
란돌은 가만히 구체를 바라보더니 이내 그 구체를 손으로 잡고 반으로 쪼개 버렸다.
콰직.
“어……?”
“아까부터 좀 수상했습니다. 이거, 겉의 껍질은 중요한 게 아니었어요.”
껍질이 벗겨진 마법구체는 조각이 난 서판의 형태로 되어 있었다.
순간, 태하와 동료들은 이것이 다름 아닌 서판 조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태하 씨!”
“알겠어요! 흡수할게요!”
일행들이 모아 놓았던 서판 조각은 태하가 보관하고 있었는데, 아직 완성하려면 한없이 많은 조각들이 필요했다.
그 광활한 힘을 가진 서판 조각의 일부분을 꺼내 놓자, 의문의 서판 조각이 달라붙었다.
슈가가각!
[서판 조각 : 힘]
[모든 것을 아우르는 힘, 허나 모든 것을 파멸에 이르게 만드는 힘]
[모순과 역설의 힘]
***
서판 조각 ‘힘’이 사라지자, 필리핀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도대체 이 서판은 언제, 어떻게 설치된 것일까.
그에 대한 대답은 에이사 타워의 전력이 복구되고 손실되었던 데이터가 수복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 목적지로 떠나는 일행들.
“아무튼 서판 조각은 얻었네요. 힘의 장에는 무슨 힘이 있대요?”
“음, 글쎄요. 그건 아직 알려 주지 않았어요. 앞으로 우리가 천천히 분석을 해 봐야 할 문제가 아닌가 싶은데요.”
란돌은 눈을 돌려 빅토리아를 쳐다보았다.
“그럼 여기서 제일 머리가 좋은 사람이 서판을 가지고 다니는 건 어때요?”
“제가 여기서 두뇌가 가장 뛰어나다는 말씀이신가요?”
“아닌가요?”
그녀는 오히려 눈을 돌려서 아리사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동료들은 의외라는 듯이 아리사에게 시선을 집중시켰다.
아리사는 볼을 부풀리며 말했다.
“……뭐예요? 내가 멍청하게 생겼다는 거예요?!”
“아, 아니. 그건 아니고요. 약간 의외라서 그러는 겁니다. 한없이 귀엽고 깜찍하기만 했지, 지능캐라는 생각은 안 들어서 말입니다.”
“헤헷, 그럼 귀엽다는 건 확실하다는 소리네요?”
“뭐, 그런 셈이죠.”
“험험! 그럼 됐어요! 아무튼 나도 머리는 나쁘지 않아요. MIT공대 수석 졸업에 NASA에서 10년째 근무 중이면 머리 나쁜 건 아닌 거죠?”
“……허어! 그런 엄청난 스펙을 가졌다고요? 그럼 왜 지금까지 말하지 않았어요?”
“안 물어봤잖아요.”
“음, 그건 그렇지.”
탑의 수호자라서 학벌이나 직업에 대해서는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었지만,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대단한 스펙의 소유자들이었다.
다만, 아리사가 이 중에서 유난히도 머리가 좋을 뿐이었다.
태하는 이쯤 되자, 모두의 직업이 궁금해졌다.
“나는 보디빌더, 아리사 씨는 연구원, 나머지는 직업이 어떻게 되세요?”
란돌은 슬쩍 웃으며 말했다.
“백수도 직업입니까?”
“당신이 스파이 출신이라는 건 알아요. 그럼 정보원?”
“아니요. 저는 피케스터 그룹의 총괄이사예요. 언젠가는 회장이 되겠죠.”
“……어엉? 그 자동차 재벌 피케스터 그룹이요?!”
“어라? 정말 몰랐던 겁니까? 이런, 괜히 말해 줬나?”
그저 건강에만 집착하는 스파이인 줄로만 알았지, 그가 재벌 4세라는 건 그야말로 까맣게 모르고 있던 사실이었다.
곧이어 빅토리아가 자신의 직업에 대해 말해 주었다.
“저는 약대를 졸업하고 제약회사를 5년 동안 다니다가 몬스터에 대해 공부하려고 수의대로 편입했어요. 지금은 몬스터 연구를 하고 있죠.”
“그럼 약사인 건가요?”
“뭐, 약국을 차리면 약사인 건 맞죠. 정확히는 의료 연구원이라고 하면 맞겠네요.”
스펙이 정말 대단하다.
그중에서도 정말이지 아예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이 바로 로드리고였다.
로드리고는 덤덤하게 자신의 직업을 밝혔다.
“두바이 A스타 호텔의 총주방장이야.”
“……어디요?”
“두바이 몰라? 우리 외가가 두바이 왕족이거든. 그래서 그 호텔의 경영을 맡아서 하다가 요리를 배워서 20년간 일했었지. 최근에는 총주방장을 맡아서 하고 있고.”
“아하! 그래서 항상 평대를 하는군요!”
“나도 왕족이니까. 뭐랄까, 일종의 불문율처럼 어려서부터 평대를 해 왔어. 같은 왕족에게는 아니었지만.”
이 중에서 가장 놀라운 신분이었다. 무려 왕족이라니 말이다.
동료들의 스펙을 듣고 놀라고만 있던 태하에게 빅토리아가 넌지시 물었다.
“이제 당신도 진실을 말해 줄 때가 되지 않았어요?”
“진실이요?”
“진짜 직업이요.”
동료들의 시선이 이번에는 태하에게로 쏠렸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태하도 숨겨진 직업이 있기는 했다.
“아아, 타이탄 콘체른 최대 주주 말인가요?”
“그래요. 회장님.”
동료들이 화들짝 놀라서 태하를 쳐다본다.
그중에서도 란돌이 가장 놀란 눈치였다.
“타이탄 컴퍼니면 코어는 물론이고 마정석부터 은청석까지 쥐고 시장을 흔드는 회사 아닙니까?! 우리 가문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고요.”
“아아, 그랬던가요?”
“이야! 친하게 지내야 할 사람이 여기 있었네! 말만 해요. 몸에 좋은 걸 마구 챙겨 줄 테니!”
이제야 다들 좀 더 친해진 느낌이 든다.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목적지 부근에 도착했다.
이번 작전지역은 바로 태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