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화염을 넘어(1)
86층은 말 그대로 사방팔방이 용암지대인 용암의 늪이었다.
땅이라곤 찾아볼 수 없으며, 온통 유황 냄새가 진동해서 생명체가 과연 살아남을 수 있나 싶었다.
태하는 생각과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에 약간 충격을 받았다.
“……아니, 이걸 우리가 통과할 수는 있는 건가?”
“내가 뭐라고 했어요? 아저씨, 여긴 생명체가 범접할 수 없는 곳이라니까요?”
“흠. 확실히 그건 그렇군. 이 위층에는 뭐가 산다고 했지?”
“골드 드래곤이요. 토 속성의 드래곤이죠. 금 속성을 가지고 있기도 하죠. 빛의 속성도 가지고 있고요.”
“다소 복합적인 존재로군. 그러니 레드 드래곤이 패배한 거야. 한 가지 속성만으로는 이길 수가 없으니.”
드래곤은 서로 속성이 다 달라서 누가 절대적으로 강하다곤 할 수 없기 때문에 어느 쪽이 승리를 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지금의 관계처럼 말이다.
태하는 에밀리의 능력을 이용해서 자신들이 가는 길에 화강암지대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용암을 식혀 줄 수 있겠어?”
“그건 어렵지 않죠.”
에밀리는 냉기의 브레스를 쏴서 용암지대를 식혀 주었다.
-흐아아아악!
드래곤은 폴리모프를 한 상태에서도 어느 정도 브레스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의 형태로 싸운다고 해도 결코 약한 존재가 아니었다.
에밀리의 활약으로 갈 길을 얻은 공격대는 차근차근 용암지대를 건너기 시작했다.
극한의 냉기로 식힌 것이기 때문에 화강암은 약간 따뜻한 정도로 식어 있었고, 그곳에서는 잠시 휴식을 취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허나 공격대는 이곳에서 쉬기보다는 차라리 86층을 클리어해 놓고 85층으로 다시 내려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이곳은 너무 더웠기 때문이다.
“후끈후끈하군. 그나저나 이놈의 빨간 용가리는 어디에 있는 거지?”
“……용암 아래에서 잠을 자고 있거나 이곳을 유영하고 있겠죠.”
“허어. 용암 안에서 산단 말이야? 생명체에게 그게 가능한 일인가?”
“레드 드래곤은 불에 대해서는 100% 내성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이 세상 그 어떤 열기에도 견딜 수 있죠. 아니, 오히려 불에서 힘을 얻기 때문에 용암이 흐르는 한, 레드 드래곤은 힘을 잃지 않아요.”
용암지대는 그 자체만으로도 위협이 될 텐데 그 안에서 유영하면서 살아가는 존재와 싸운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었다.
허나 공격대에게는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바짝 독이 오른 아르네시아는 언제든 레드 드래곤과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뒈졌어. 이놈!”
“하지만 적이 어디서 나올지 아무도 모르는 거잖아. 그럼 우리가 절대적으로 불리한 것 아닌가?”
“불리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리한 방향?”
“비를 내리면 되잖습니까?”
“아하!”
유시연은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돌연 이런 생각을 했다.
그녀는 드래곤에게 호흡이란 무엇인지 물었다.
“용족도 일단 호흡은 해야겠죠?”
“네, 누님! 용족도 호흡은 해야 합니다. 아가미를 갖지 않은 이상에야 주기적으로 호흡을 해 줘야 하죠.”
“후후, 그럼 정말로 게임은 싱겁게 끝나겠네요.”
“싱겁게?”
“비와 얼음을 이용하는 겁니다.”
유시연은 자신이 밟고 선 땅을 발로 두드리며 웃었다.
그러자 태하와 일행들이 무릎을 탁 쳤다.
“아하! 단단한 바위지대를 계속 만들자는 겁니까?!”
“네, 바로 그거죠! 용암이 식어서 빠르게 굳으면 그 위에 얼음을 뿌리고 배리어를 치는 겁니다. 제아무리 드래곤이 대단하다고 해도 대자연을 이길 수는 없죠.”
다소 잔인한 사냥 방식이었다.
드래곤을 질식사시킨다는 황당한 방법을 고안해 냈지만, 이것이 성공하기만 한다면 손 안 대고 코를 푸는 격이었다.
아르네시아는 아주 반색을 했다.
“좋습니다! 당장 비를 내리도록 할게요! 에밀리! 당신도 시작하시오!”
“……알겠어요.”
홍이의 도움을 받아서 초당 100ml의 강력한 비를 만들어 내는 아르네시아, 그런 그의 옆에 서서 동료들을 수증기로부터 보호해 주는 희란이 있었다.
“앱솔루트 배리어!”
희란이 증기를 효과적으로 막아 내며 동료들을 보호하는 동안, 아르네시아는 폭우를 내려 땅을 단단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런 후, 샤이언은 드래곤의 배리어를 펼쳐서 땅에 결계를 쳤다.
그 위에 다시 얼음을 깔기 시작하는 에밀리.
“……이게 과연 올바른 방법일까요?”
“복수를 하는 거요! 동방예의지국에서 복수란 당연한 것이지! 그것이 예의자 범절인 것이야!”
“음. 하지만 성리학에서도 익사는 좀…….”
“아무튼 하시구려!”
선비의 기질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잔악한 짓을 즐기는 것을 보면 아르네시아의 성격도 보통은 아닌 셈이었다.
잠시 후, 땅에서 묵직한 진동이 울려온다.
쿠웅, 쿠웅!
“레드 드래곤이 발버둥을 치고 있는 모양입니다!”
“경계는 좀 어때? 배리어는 튼튼한 것 같아?”
“네, 형님! 샤이언 저 작자가 아무래도 일을 제대로 한 것 같아요!”
드래곤의 결계는 같은 동족끼리도 깨기 힘든 것인데, 그 앞뒤로 두툼한 판을 덧댔으니 오죽 단단하겠는가?
레드 드래곤의 두드림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더욱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쿵, 쿵쿵, 쿵쿵쿵!
고통에 몸부림을 치는 듯한 드래곤, 아무래도 태하는 이렇게 잔인한 방식으로 죽이는 것은 너무 비인간적인 것이 아닌가 싶었다.
“숨을 오래 참으면 마법을 사용하기도 힘들지?”
“아무리 드래곤이라고 해도 하루 이상 숨을 참으면 정신이 혼미해집니다. 그건 수중에서 싸워 본 제가 가장 잘 압니다.”
“그렇군. 아니, 그나저나 드래곤은 하루 종일 숨을 참을 수 있어?”
“폐가 크기 때문으로 압니다. 나이를 먹으면 더 오래 참을 수도 있죠.”
“아하! 폐활량이 그렇게 좋기 때문에 브레스 같은 것도 쏠 수 있는 것이로구나!”
덩치가 큰 만큼 드래곤은 숨을 오래 참을 수 있었다.
지금 땅이 흔들리는 것은 아무래도 고통 때문이 아니라 성질을 부리는 것임이 분명했다.
“다혈질이라서 지금 저렇게 발버둥을 치는 것이로군?”
“아마 그럴 겁니다. 드래곤이 숨 막혀 죽는다고 해도 저렇게 미친 듯이 발광을 하지는 않습니다. 폐의 세포가 하나둘 사라지면서 서서히 죽어 가겠죠.”
“기진맥진, 그렇게 죽는 것이로구나? 인간이랑은 또 다르네.”
“신체 구조가 다르니까요.”
무려 24시간이나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라니.
태하는 이렇게 된 김에 이곳에서 레드 드래곤이 죽을 때까지 휴식이나 취하기로 했다.
***
땅이 딱딱하게 굳은 지 열 시간쯤 지났을 무렵이었다.
쿵, 쿵, 쿵……!
아까보다 훨씬 더 묵직한 펀치가 땅을 두드리고 있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지반이 상당히 두툼해졌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날뛰는 것을 보면 저놈의 성질도 정말 어지간한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골드 드래곤의 성질은 좀 어때?”
“상당히 부드럽고 신중한 편입니다. 희생정신이 강하고 물욕이 없다고 하죠.”
“물욕이 없다?”
“드래곤은 기본적으로 탐욕스러운 성정을 가졌습니다. 우리가 웜급 드래곤이라서 그렇지, 늙은 원로들을 보면 기본적으로 반짝거리거나 값진 것을 밝히죠. 왜 그런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아르네시아의 말에 따르자면 드래곤은 돈을 밝힌다는 것이었다.
초월적인 존재인 드래곤이 도대체 돈을 밝혀서 뭘 어쩌겠다는 것인지, 태하는 사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억겁과도 같은 세월을 사는 존재가 돈을 가져서 뭘 어쩌겠다는 것일까?
“특이한 종족이네.”
“허나 유일하게 골드 드래곤만이 돈을 밝히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심지어 레어의 크기도 가장 작죠. 덩치는 두 번째로 큰데도 자기 몸 하나 누일 정도만 되면 큰 욕심 없이 살아간다는 것 같았어요.”
“저 밑에서 죽어 가는 놈이랑은 아예 상극인 셈이네?”
“완전한 상극이죠. 아마 지략에서 레드 드래곤이 밀리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도 듭니다만.”
성질이 더럽긴 하나, 레드 드래곤은 기본적으로 머리가 그렇게까지 좋은 편은 아니었다.
사실 용암지대에 산다는 것은 어쩌면 위험을 기저에 깔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언제든 자신의 머리 위로 단단한 뚜껑이 생길 수도 있는 일이었으니까.
허나 레드 드래곤은 워낙 오만했기 때문에 자신이 역습을 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골드 드래곤은 다르다는 소리였다.
“쉽지 않겠군. 오히려 전투력이 뛰어난 놈보다 머리가 좋은 놈을 상대하는 것이 훨씬 더 까다로운 법이니까.”
“현자와 싸워야 한다……. 제갈량과 맞붙어야 한다는 건가요?”
“허어, 제갈량도 알아?”
“말씀드렸잖아요. 한반도에서 수천 년을 살았다고요. 모를 리가 없죠.”
“하긴, 옆 나라 얘기를 아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
“아무튼 간에 머리가 그렇게 좋은 놈을 어떻게 상대할 생각이신가요?”
“음. 그건 일단 저 빨간 도마뱀을 잡고 얘기해 보자고.”
이곳에서 골드 드래곤을 상대해 본 이는 레드 드래곤뿐이다. 그러니 레드 드래곤을 잡으면 답이 나올 것이라, 태하는 그리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땅은 어느새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더 이상의 울림도 들려오지 않았다.
“끝났나?”
“이렇게 되면 어떻게 생사를 확인해야 하는 겁니까? 이걸 손으로 깨서 알아봐야 하나요?”
“흠.”
드래곤을 사냥해도 놈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희란은 다음 층으로 그냥 올라가자고 제안했다.
“일단 그냥 통과를 해 보는 건 어때요?”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기는 한데.”
그녀의 제안에 유시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하면 우리가 후퇴할 때 문제가 될 수도 있어요. 우리는 공략이 가능한 층에서만 안전하게 이동이 가능하잖아요. 그런데 만약 위층에서 생명에 위협을 받아 후퇴를 하게 된다면? 그럼 사면초가에 몰리는 거잖아요?”
“하긴, 그건 그러네요.”
“제 생각에는 하루 정도 더 기다렸다가 저 녀석의 시체를 확인하고 하트까지 수거한 후에 올라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그럼 하루 더 자고 땅을 파 보는 것으로 하자고요. 그런데 땅은 뭘로 파죠?”
500명의 인원이 곡괭이를 가지고 땅을 판다고 해도 수십 미터나 되는 땅을 파낸다는 것은 사실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순간, 태하의 눈동자가 누군가에게 향했다.
“총총! 몰먼호를 몰 수 있어?”
“앗! 나리, 당연히 몰 수 있다요!”
이 험난한 여정에는 당연히 몰먼족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태하는 총총에게 당장 의뢰를 할 수 있었다.
총총은 홍이와 함께 몰먼시티로 달려갔다.
하루가 지나고 총총과 홍이는 몰먼호를 몰고 돌아왔다.
퍼엉!
“짜잔! 홍이 등장!”
“좋았어, 홍아!”
“헤헷, 이따가 나랑 실컷 놀아 줘야 해! 알겠지?”
“물론이지!”
사랑스러운 홍이가 돌아간 후, 총총은 몰먼호의 조종석에 앉았다. 태하는 유시연과 드래곤 3인방을 데리고 총총의 옆에 앉아서 전방을 주시했다.
“자, 가 보자!”
“알겠다요! 몰먼호, 출발이다요!”
위이이이잉!
땅을 파기 시작하는 총총과 태하.
아직 드래곤은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일단 용암 안쪽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최대한 넓게 땅을 파 내려갔다.
쿠웅, 쿠웅……!
“엇!”
“……뭐야, 아직 안 죽었나?!”
지반이 약해지자, 곧바로 행동을 개시하는 레드 드래곤.
-크르르르릉……!
어디선가 용의 으르렁거림이 들려오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