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헬창 드래곤즈(2)
펑!
“짜잔!”
격렬한 싸움이 펼쳐지기 직전에 모습을 드러낸 홍이는 이번에도 공간이동 마법을 통해서 아르네시아의 둥지에 있는 물을 끌어 올려 주었다.
아르네시아는 임혁수의 도움을 받아 물의 온도를 섭씨 100도까지 올렸다.
“아무리 혹한이라고 해도 온천까지 어쩌지는 못할 겁니다. 태하 형님, 이따가 온천욕 어떠십니까?”
“좋지! 오늘 다 같이 이곳에서 여독을 풀고 가자고!”
아직까지 이 전략이 통할지 안 통할지 알 수는 없으나, 어쩐지 시작부터 좋은 느낌이 들었다.
아르네시아는 싸움터가 될 곳에 물기둥 마법을 사용하였고, 임혁수는 물줄기의 용천 지점에 고온 계열의 마법을 부여해서 주변을 아주 뜨끈하게 만들어 주었다.
솨아아아아……!
“유황 냄새는 하나도 안 나는데 물은 엄청나게 따뜻하네요! 이야, 역시! 혁수 형님은 아주 그레이트합니다!”
“그나저나 화이트 드래곤은 어디서 나타나는 걸까요? 아르네시아! 화이트 드래곤의 레어는 어디에 위치해 있는 거지?”
주변에 온천을 만들어 협곡을 타고 흐르게 만들어 놓은 아르네시아는 주변을 둘러보며 거리를 재기 시작했다.
그런 그에게 후방에서 덜덜 떨고 있던 샤이언이 첨언했다.
“……이 멍청아! 넌 적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여기까지 올라온 거냐? 한심하긴!”
“너는 그럼 어디 있는 줄 알아?”
“당연하지! 비록 전투에서 패배하기는 했어도 나는 화이트 드래곤과 싸워 본 존재이니까.”
“진 게 자랑이다.”
“흥! 인간들과 함께하지 않았다면 이곳 입구도 밟아 보지 못했을 녀석이 허세는!”
태하는 또다시 서로 으르렁거리기 시작한 두 드래곤의 앞을 막아서며 싸움을 말렸다.
“그만! 지금은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니야. 샤이언, 그래서 화이트 드래곤의 레어가 어디 있다는 건데?”
“흥! 멍청한 건 이놈이나 저놈이나 똑같군!”
그는 손가락을 들어 바로 앞에 보이는 거대한 봉우리를 가리켰다.
어쩐지 강력한 소용돌이가 몰아친다 싶었던 봉우리에는 이 설원을 지배하는 웜급 드래곤이 서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이제 곧 그년이 날아오겠지. 후후, 과연 그년의 공격을 막아 낼 수 있을까? 제아무리 나를 이겨 먹었던 너지만 말이야.”
“일단 해 봐야지. 생각은 최선을 다한 이후에 해도 늦지 않아.”
태하는 설원의 주인이 날아올 때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고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휘이이이잉……!
설원을 휩쓸고 지나가던 바람이 더욱 격렬하게 굽이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주변은 어두운 밤으로 변해 버렸고, 눈보라는 시간이 지날수록 짙어졌다.
순간, 샤이언의 얼굴이 한껏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온다!”
“뭐? 이렇게 벌써 반응을 한다고?”
“화이트 드래곤은 원래 온순한 편이지만, 누군가 시비를 건다면 수백 배로 갚아 주는 족속들이지. 지금의 행동으로 봐선 아마도 화가 많이 난 것 같아.”
“흠. 드래곤이 화가 나면 곤란한데.”
가뜩이나 저런 괴물을 어떻게 이기나 싶었는데, 만약 화가 나서 눈이라도 돌아가면 그대로 끝이었다.
잠시 후, 하늘을 뒤덮었던 어둠이 사라지고 어느새 태하의 앞에는 육중한 덩치의 순백색 드래곤이 서 있었다.
-크르르르릉……!
붉은 눈동자에 눈처럼 하얀 비늘, 그리고 전체적으로 상당히 균형이 잘 잡힌 몸매가 특징이었다.
인간이 드래곤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낄 일은 그리 많지가 않은데, 지금 그 얼마 안 되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허나 화이트 드래곤은 그 아름다움 속에 혹한의 냉철함을 갖고 있었다.
-……겁도 없구나. 이곳이 어디인 줄 알고 한낱 인간 따위가 쳐들어온단 말이냐!
“우리는 당신을 화나게 하고 싶지 않다. 다만 친구가 되고 싶을 뿐.”
-너는 바퀴벌레와도 친구를 하며 지내나?
“…뚫린 입이라고 말을 함부로 하는군.”
-너의 그 잘난 입, 내가 확 찢어발겨주도록 하지.
“뭐, 아무튼 간에 당신과의 승부가 참으로 기대가 되는군.”
-흥! 기대? 아직도 그따위 더러운 감정을 믿어? 역시, 인간을 믿을 수 없는 이유는 분명했어. 너무나도 감성적이라는 사실 말이야.
인간이 감성적인 것은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사건과 사고가 일어나는 것이고, 심지어는 종족 번식마저도 가능해지는 것이 아닐까?
화이트 드래곤의 입장이 어떻든 간에 태하의 목표는 오로지 하나였다.
“어쨌든 간에 이번 싸움에서는 우리가 반드시 승리한다.”
-덤벼라, 얼마든지!
방패를 손으로 꽉 쥐고 화이트 드래곤과 정면으로 맞서는 태하.
그런 그를 지원하기 위해서 2명의 드래곤이 앞으로 나섰다.
“자, 가자!”
태하의 부름을 받아 앞으로 나온 아르네시아는 뜨겁게 달궈진 물을 화이트 드래곤에게 발사했다.
쿠오오오오……!
그러나 그걸 맞은 장본인은 정말이지 아무런 이상도 없는 것 같았다.
마치 처음부터 열에는 타격을 받지 않는 드래곤처럼 말이다.
-한심하기 짝이 없군. 졸려서 하품이 나올 지경이야.
“효과가 없네……?”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는 유시연.
그녀는 뭔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는 듯 무릎을 쳤다.
“그래요! 물의 양이 너무 적은 겁니다. 이대로는 저 암컷 드래곤의 덩치만 불려 주는 셈이라고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공격 방법은 오로지 하나뿐인데요.”
뒤에서 태하와 유시연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아리사가 앞으로 나왔다.
그녀는 태하에게 팔찌와 반지를 보여 주며 말했다.
“연금술로 돌파가 가능할 것 같지 않아요?”
“……아하! 그렇지! 내가 왜 그걸 몰랐을까?!”
아리사에게는 그 어떤 물질로도 살아서 움직이는 생명체를 만드는 능력이 있었다.
태하는 그녀가 이번 작전의 핵심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럼 해 봅시다!”
“좋아요! 마탄사수 씨!”
임혁수는 뜻밖에 자신의 이름이 불려서 약간 당황하긴 했으나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어이, 그려! 무슨 일이여?”
“제가 만드는 슬라임에 화 속성을 부여해 주실 수 있나요? 라바드래곤을 만들어 보려고 해요!”
“허어, 용암으로 드래곤을 만든다?! 머리가 상당히 비상하시네.”
“별말씀을요!”
만약 이 상황에서 라바드래곤이 만들어진다면 상황은 그대로 끝이다.
아리사의 무시무시한 힘을 익히 알고 있는 동료들은 이대로 싸움은 마무리될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화이트 드래곤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인간들이 또 한바탕 귀여움을 떨려는 모양이네. 그나저나 아르네시아와 샤이언, 당신들은 어째서 인간의 편에 붙은 거죠? 층은 또 어떻게 넘어왔고?
-그야 시간이 지나면 차차 알게 될 것이오.
“……인간이나 드래곤이나 무지한 것은 죄가 되는 법이지. 백발마녀, 너도 곧 우리처럼 될 거야. 이제 얼마 안 남았어.”
샤이언은 씁쓸한 듯이 말하고 있었지만, 그 얼굴의 이면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아주 오래전에 맛본 패배의 쓴맛을 오늘 설욕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있었던 것이다.
아리사는 그 기대감에 힘을 실어 주었다.
“자, 갑니다!”
비취 석판은 은은한 쪽빛의 마력을 뿜어내더니, 이내 지반 깊숙이 잠들어 있던 용암을 지면 위로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쿠그그그극!
당연히 천지는 진동했고 이곳에는 원래 없었던 용암 화산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화이트 드래곤은 진심으로 당황했다.
-……뭐, 뭐지?
“앗! 비취 석판이 이번에는 나와라 뚝딱! 이런 느낌으로 소환을 안 해 주네요?”
-나, 나와라 뚝딱?
순백색의 드래곤이 당황할 새도 없이 비취 석판은 화산에서 용암을 끌어내어 이내 드래곤의 형상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고오오오……!
사방을 불태워 버릴 듯한 용암의 드래곤이 튀오나오자, 주변은 마그마가 내뿜는 연기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쿠오오오오!
-……괴물?!
“허어, 정말로 괴물을 소환해 버렸네. 그나저나 비취 석판이 이번에는 제법 화려하게 소환 의식을 치렀네요.”
“그러게 말이에요. 우리도 조심해야 할 것 같아요!”
화염이 날아든다면 실버 드래곤이 보호를 해 주겠으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서포터들은 배리어를 준비하고 있었다.
아리사는 탄생한 라바드래곤에게 명령을 내렸다.
“화이트 드래곤을 없애세요!”
-쿠오오오!
라바드래곤이 지나가는 길은 용암의 발자국이 남았고, 혹한의 땅은 어느새 축축한 물길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백색의 드래곤은 하늘을 날아 이곳에서 일단 피신하려 했다.
-……말도 안 된다! 인간이 이런 능력을 쓸 리가 없어. 일단 피신하자!
“으음! 안 돼요! 우리는 갈 길이 멀단 말이에요! 브레스를 쏴 버려요!”
쿠그그그극!
그녀의 명령 한마디에 라바드래곤은 용암에 꼬리를 담근 채 가슴을 한껏 부풀렸다.
마치 곧 터질 듯이 부푼 풍선처럼 되어 버린 라바드래곤의 가슴은 이내 엄청난 양의 용암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쿠오오오오!
-……이런! 신이시여!
화이트 드래곤이 날아가는 속도는 그야말로 초음속에 비견될 정도였으나 라바드래곤의 힘은 그것을 뛰어넘고도 남았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비취 석판이 샤이언의 브레스를 흉내 내어 용암의 브레스를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전격의 브레스는 드래곤들이 사용하는 브레스 중에서 속도로는 그야말로 단연 압권이었고, 그것을 용암에 접목시키니 시너지가 발생한 것이었다.
치이이이익!
-크아아앙……!
“지금입니다! 태하 씨, 어서 싸움을 끝내세요!”
태하는 곧장 와이어를 뻗은 후, 화이트 드래곤의 비늘에 연결했다. 그러곤 이내 그녀의 역린을 향해 날았다.
***
85층의 끝을 향해 가는 길.
백발의 소녀가 태하에게 물었다.
“아저씨, 그나저나 우리가 86층의 레드 드래곤을 없애야 하는 이유가 도대체 뭔가요?”
“몰라서 물어? 100층을 돌파해서 이 세상을 되살려야지.”
“하지만 굳이 그런 다혈질의 드래곤을 만날 이유가…….”
화이트 드래곤 에밀리는 레드 드래곤과의 싸움이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는지 다음 층으로 올라가기를 꺼려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녀는 태하의 와이어에 역린을 관통당해 사망하였고, 태하의 권속이 되어 버렸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상층부로 올라가길 꺼려한다는 것은 그만큼 트라우마가 크다는 뜻이었다.
“무슨 드래곤이 얼마나 성질이 더럽다고 그래? 샤이언보다 더러워?”
“샤이언은 단순히 싸가지가 없는 것이지만, 그 붉은 망나니는 다혈질에 성질이 더럽죠. 한번 화가 나면 눈이 돌아가 버려요. 물론 평소에도 괴팍한 건 마찬가지이지만요.”
에밀리는 드래곤 중에서도 상당히 소심한 편에 속한다.
비록 인간을 대할 때에는 그 위용을 드러내고 싶어 하지만, 그 본성은 숨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아르네시아는 웃으며 말했다.
“그래 봤자 샤워 한 번 하고 나면 깔끔하게 사망할 놈을 뭘 그렇게 무서워하시는 거요?”
“……껄끄러워. 나는 그 미치광이를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 나의 역린을 들춰내고 자신의 긴 꼬리를 가지고……. 아무튼 나는 싫어요.”
평생에 씻을 수도 없는 상처를 받은 그녀는 눈을 질끈 감을 정도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여성 헌터들이 따뜻하게 안아 주었다.
“또라이 같은 용가리!”
“그래요. 그놈이 나빴네요.”
“흑……!”
아르네시아는 그 모습을 보곤 이마에 핏대를 세웠다.
“빌어먹을 화염 도마뱀 같으니! 내가 놈을 용서하지 않겠어! 형님, 어서 가시죠! 에밀리의 복수를 해야 합니다!”
“의욕이 넘치네. 뭐, 좋아. 지체하지 말고 얼른 올라가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