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이것은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1)
지금까지 인류가 풀지 못한 미스터리는 과연 몇 가지나 될까?
수도 없는 미스터리가 아직 지구에 산재해 있으나, 아직까지 그 겉껍데기만 핥고 있는 수준의 미스터리라고 한다면 단연 바벨탑이 될 것이다.
유시연은 이 지옥경이라는 것도 그런 부류 중에 하나라고 설명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던전에서 일어나는 무수히 많은 일들을 인간의 상식으로 풀어내려 무던히도 노력해 왔어요. 하지만 인간은 던전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어요. 왜냐, 이건 우리 차원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흠…….”
“물론, 청룡이라는 단체가 있었기에 어느 정도는 비밀을 캐낼 수도 있었겠죠. 또한 성좌들의 등장으로 인해 던전이 왜 생겼는지 정도는 알아낼 수 있었어요. 하지만 던전을 만든 장본인이 나타나지 않는 이상에야 미스터리를 완벽히 풀어낼 수는 없어요. 우리는 이걸 과연 무엇으로, 어떻게 만들었는지 모르니까요.”
“왜 만들었는지는 알아도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런 뜻이군요.”
“그런 거죠. 하지만 내 생각에 이 지옥경이라는 가짜 서판이 존재하는 한, 그 미스터리를 보다 쉽게 풀 수 있다고 봐요.”
지옥경이 정확하게 뭐 하는 물건인지는 알 수 없다.
허나 유시연이 지금까지 이 조각을 가지고 연구를 거듭한 결과,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서판 조각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이것은 서판 조각의 이미테이션이라고 할까요? 가짜 서판이라고 해도 될 것 같더군요.”
“이걸 왜 만들었을까요?”
“이건 그냥 내 생각인데, 누군가 신을 흉내 내고 싶어서 만든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네요.”
“……신을 흉내 낸다?”
인간이 신의 영역에 도전한 사례는 많다.
가까운 예로는 유전자 기술을 통해 복제 동물을 만들어 내고 줄기세포를 조작하여 전혀 새로운 종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또한, 인공장기를 만들어서 인간의 수명을 늘리는 데 이바지했으며 사람이 직접 수정을 통해 아이를 갖도록 해 주기도 했다.
이렇듯 불가능에 도전하는 인간이지만, 현실적으로 물질계를 초월하는 기술은 얻어 내지 못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신의 영역이 아니던가.
“지옥의 군단이 던전에서 수련을 해서 강해진다고 한들 과연 신의 군대를 이길 수 있었을까요? 아니요, 그건 절대로 아니었을 거예요. 그래서 그들은 서판 조각과 똑같이 생긴 물건을 만들어 내고 거기에 자신들의 정수를 쥐어짜서 담아 놓았던 거죠.”
“말 그대로 신을 흉내 낸 것이네요. 하지만 흉내를 낸다고 해서 이게 무슨 능력을 가질 수 있는 건데요?”
“모방은 창작의 어머니라고 하죠. 그 이유가 무엇이겠어요? 복제를 하다 보면 어느새 그 능력은 자신의 것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지옥경을 계속해서 만들어 내다 보면 언젠가는 서판의 능력에 한 발자국 다가설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로군요.”
“그런 셈이죠. 하지만 이들은 지옥경을 새로 만들어 내기보다는 이 지옥경에 힘을 실어 주는 실험 같은 것을 했어요. 뭐랄까, 지옥경 자체의 레벨업을 시켰다고 해야 할까요?”
“레벨업이라……. 그게 가능한가요? 이걸 어떻게 레벨업을 시킨다는 거죠?”
그녀는 태하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이내 빙그레 웃었다. 거의 반달처럼 휘어지는 눈웃음, 그리고 새빨간 입술과 어울리는 순백색의 피부까지.
뭇 남자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 그녀의 웃음 뒤에 한 가지 당부의 말이 있었다.
“오늘 우리가 나눈 대화, 밖에서 발설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요?”
“그러기를 원하신다면야 당연히 그래야죠.”
“그렇다면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보여 주지 않은 물건을 당신에게 보여 줄게요.”
유시연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싱크대 아래 서랍을 열었다. 그러곤 그 안으로 팔을 쑤욱 집어넣더니 이내 수트케이스를 하나 꺼내 왔다.
수트케이스는 푸른색으로 빛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코어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합금인 것 같았다.
“케이스 자체만 해도 수억은 하겠는데요?”
“중요한 물건을 담고 있으니까요. 핵폭탄을 맞아도 이 케이스 안의 물건은 부서지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그녀가 케이스에 손을 얹자, 수트케이스가 열렸다.
타다닥!
이윽고 케이스 안의 모습이 훤히 드러났고, 그녀는 웃는 얼굴로 곰팡이가 잔뜩 핀 책을 꺼내어 놓았다.
의문의 문자들로 가득 찬 오래된 책은 한눈에 보기에도 뭔가 좀 불길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이게 뭔 줄 알아요?”
“글쎄요. 엄청나게 오래된 책 같은데요?”
“마계 군단장 데이몬의 일기장이에요.”
“……마계 군단장?! 그런 존재의 일기장을 어떻게 가지고 계신 건데요?”
“샌드타워에서 나오는 물건은 때론 경매에 부쳐지곤 하잖아요?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씩은 샌드옥션에 나가는데, 운이 좋아 이걸 10억에 살 수 있었죠. 그때는 이게 새까만 타르 같은 것에 싸여 있어서 사 가는 사람이 없었거든요. 다만, 감정 등급이 물음표로 되어 있었기에 10억이라는 가격이 붙은 거고요.”
이른바 랜덤 등급의 아이템은 수억 원에 거래되곤 하나, 사실 희귀 등급 이상의 아이템이 나오는 것은 1%의 확률도 채 되지 않는다.
다만, 이것이 한 방 제대로 터지면 지금처럼 엄청난 물건이 나오기도 하는 것이었다.
“아무튼 이 데이몬의 일기장을 해석해 보면 지옥경이 무슨 역할을 했었는지 알 수 있어요.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성장했는지도요.”
“……기연이네요, 기연. 아무리 옥션을 자주 다닌다고 해도 이런 아이템을 얻을 확률은 그야말로 로또에 맞을 확률보다 낮잖아요?”
“천운이 따른 거죠. 어쩌면 운명인지도 모르고요. 아무튼 간에 데이몬의 일기장에 보면 지옥경은 피를 먹고 자라난다고 되어 있어요.”
“피를 먹고 자란다……. 어쩐지 살인을 조장하는 말 같은데.”
“지옥경이 피를 먹고 자라는 데엔 다 이유가 있어요.”
그녀는 데이몬의 일기장을 펼친 후, 중간쯤에 꽂혀 있던 책갈피를 들어서 ‘피의 굶주림’이라는 페이지를 폈다.
피의 굶주림이라는 장에는 지옥의 군대가 몬스터에게 잔인하게 학살당하면서 흘린 피가 지옥경에 흡수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었다.
“마치 피는 지옥경을 키우는 거름과도 같고 지옥경은 마족 군단이 심어 놓은 씨앗과도 같았죠. 한마디로 지옥경이라는 씨앗에 피라는 거름을 뿌려 주니, 마침내 그것이 레벨업하면서 싹을 틔운 거죠.”
“……어차피 바벨탑은 리젠이 되니까 지옥경은 끝도 없이 피를 먹을 것이고, 군사들과 함께 레벨업을 하니 일석이조의 효과를 누린 거네요?”
“빙고.”
“허 참, 신박한 아이디어로 군사들을 훈련시켰네요. 그런데 이런 지옥경을 왜 하필이면 제게 맡기시려는 겁니까?”
유시연은 자리에서 스륵 일어나더니, 태하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러곤 탁자 위에 걸터앉은 후, 그의 왼쪽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태하의 가슴이 부르르 떨려 오기 시작했다.
드드드르륵……!
“봐요. 공명이 느껴져요?”
“……제 안에 지옥경이 들어 있었다는 걸 알고 계셨어요?”
“지옥경도 서판과 같이 서로 공명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당신이 지옥경을 손에 넣었을 때에도 금방 알아챌 수 있었죠.”
“하지만 제가 지옥경을 온전히 컨트롤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잖아요?”
“이 세상에서 당신보다 이 물건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도 없죠. 최소한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안전하다고 생각되는데, 제 생각이 틀렸나요?”
저 수트케이스와 태하 중에 누가 더 맷집이 좋으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태하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건 태하 본인도 인정하는 바일 것이다.
“음. 그건 그렇긴 하지만요.”
“지옥경은 100층에 도달한 자만이 깨부술 수 있다고 해요. 그러니 당신이 가지고 있다가 100층을 돌파하면 부숴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할게요.”
어쩐지 막중한 임무감이 샘솟은 느낌이 든다.
헌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들었다.
과연 이 가짜 서판은 어떤 능력이 있는 것일까?
“그럼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물을게요. 이게 도대체 어떤 능력을 갖고 있는 건가요? 서판 조각과 같은 기능이 있나요?”
“일기에 보면 지옥경의 능력은 여러 가지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누군가를 죽이는 데 사용된다고 해요.”
“살인을 위한 도구다……?”
“오로지 파괴, 그것만이 지옥경의 능력인 거죠. 그러니 이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없애야 하는 물건이 맞아요.”
유시연은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태하는 그녀의 마음에 깊이 공감하며 이것을 언젠가는 파괴시키겠노라 다짐했다.
“좋습니다. 제가 책임지고 지옥경을 파괴할게요.”
“그럼 안심하고 남은 지옥경을 당신에게 넘길게요.”
“그런데 지옥경 조각은 몇 개나 갖고 계시나요?”
그녀는 이번에도 빙그레 웃었다.
“당신이 가지지 못한 나머지 모두요.”
***
다음 날, 레이드의 최종 점검이 있었다.
포션부터 장비, 인원, 심지어는 전략과 전술까지 전체적으로 점검함으로써 레이드의 성공률을 높이겠다는 것이었다.
청룡무고 앞으로 트레일러 12대 분량의 물건이 도착했다.
“레이드 중간에 물자를 보급하는 서포터가 이번 레이드의 관건이라고 할 겁니다.”
“보급 서포터는 얼마나 구하셨나요?”
레이드의 공격대장들이 유시연에게 묻자, 그녀는 손가락 5개를 펼쳤다.
“5인. 최정예 보급 서포터 5인을 고용해 두었습니다. 그들의 등급은 S등급으로, 아공간 주머니를 가지고 있죠.”
“……허어! 팩킹 능력자!”
팩킹 능력자는 등급에 따라서 주머니, 혹은 자신의 신체 안에 깃든 아공간에 제한적으로 물건을 담을 수 있다.
E등급을 기준으로 한다면 대략 15평 정도의 적재 공간을 갖게 되는데, S급의 팩킹 능력자들은 거의 무한에 가까운 적재 공간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다만, 물건을 담고 꺼내는 데 엄청난 양의 마력이 소모되기 때문에 트레일러 12대 분량의 물자를 꾸준히 계속 보급해 주는 것은 보통의 일은 아닐 것이었다.
“수완도 좋으시네요. 거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 대규모 레이드에서 일할 팩킹 능력자를 구하다니.”
“운이 좋았죠. 그리고 마력 포션도 빵빵하게 지급한다는 조건도 내걸었고요.”
“아무튼 간에 보급 서포터가 5인이나 된다니. 사실 이 정도만 해도 100층 돌파는 불가능하지 않겠는데요?”
서포터의 차이가 곧 클리어 층수의 차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니, 이 수준이면 그야말로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유시연은 마지막으로 공격대의 포지션을 점검했다.
“총공격대장은 정태하 씨이고 헬스하운드는 그 직속 공격대가 될 겁니다. 헬스하운드에 추가로 인원이 3명 배치된다고 들었는데, 맞나요?”
“네, 맞습니다. 보고서에 나온 그대로입니다.”
그녀는 보고서를 검토해 보곤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까지 의문의 노인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이 노인은 어떤 능력을 갖고 있나요?”
“탱킹이요.”
“탱킹?”
“후후, 아마 보면 깜짝 놀라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