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네 번째 수호자(1)
스릉!
데스워리어의 대검을 뽑아 든 태하는 검의 손잡이를 스트랩에 잘 감았다.
대검은 데스워리어의 특성 스킬을 증폭시켜 주며, 특유의 동물적인 감각을 자아내는 패시브를 부여한다.
[패시브: 몬스터의 육감]
[효과: 오감, 육감이 발달합니다]
[주변의 사물이 보다 입체적으로 보입니다]
[시각이 닿지 않는 곳까지 관찰할 수 있습니다]
[동물적인 감각이 당신에게 스며듭니다]
태하가 발을 내딛자, 연구실 불이 꺼졌다.
사방은 온통 어둠으로 물들었지만 태하는 이곳을 마치 대낮처럼 훤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검의 손잡이를 비스듬하게 내려잡은 태하는 살금살금 걸어 주변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일단 그의 감각에 걸리는 것들은 모두 고블린이었다.
‘전생에 고블린이랑 못 살아서 한이라도 맺혔나? 왜 이렇게 고블린에 집착을 하는 거지?’
무한의 소환술사는 특이하게도 엄청난 수의 고블린만을 고집한다.
어쩌면 스킬이 고블린 소환 하나라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으나, 하여간 이놈의 소환술사는 고블린으로 시작해 고블린으로 끝을 맺는다.
연구소는 대략 500평 남짓 되었는데, 이곳에는 거대한 수족관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태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수족관 안을 들여다보았다.
움찔!
수조 안의 생명체는 태하가 다가오자마자 꿈틀거리며 반응을 보였다.
“……사람?”
생긴 건 인간의 태아가 분명했다.
허나, 등에는 수많은 돌기가 돋아나 있었고 손과 발에는 날카로운 톱니 모양의 발톱이 돋아나 있었다.
게다가 꼬리는 뾰족한 촉수처럼 생겼고 턱까지 내려오는 엄니가 툭 불거져 나와 마치 오크를 연상케 했다.
사람은 사람인데 사람이 아닌 것 같은 생김새.
게다가 이놈들은 후각이 어찌나 예민한지, 수조 안에서도 태하의 냄새를 맡고 반응할 정도였다.
끔찍한 혼종, 그것을 개량하는 중임이 분명했다.
“도대체 이걸 누가…….”
“헬파이어.”
“……!”
타앙!
말을 뱉음과 동시에 불이 켜지며 태하의 앞에 나타난 한 남자.
태하는 이 남자의 정체에 대해서 어쩐지 알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한의 소환술사!”
“내게 그런 별명이 있었던가? 아무튼 간에 소환술사인 것은 분명하지만 말이야. 우선 내 소개를 하지.”
태하는 극도의 경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만약 저놈이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는 날에는 댕강 목을 날려 버릴 생각이었던 것이다.
허나, 무한의 소환술사는 별 대수롭지 않게 자신의 소개를 이어 나갔다.
“내 이름은 로드리고 데 자이브. 스페인 태생이지.”
“……왜 이렇게 해괴한 짓을 일삼고 다니는 거지? 같은 인간으로서 양심에 가책이라는 걸 아예 못 느끼는 족속인가?”
로드리고는 황당하다는 듯 피식 웃고 말았다.
“내가? 내가 뭘? 몬스터 소굴을 찾아서 폭파시킨 것도 황당한 짓이라면 황당한 짓이겠군.”
“몬스터의 소굴을 찾아? 이거, 네가 한 짓 아니야?”
“연구소 지상을 폭파시키고 지하만 남겨 둔 건 내가 한 게 맞아. 여기서 소환에 필요한 DNA를 취하려고 말이지.”
태하는 상대방이 거짓을 말하고 있는지 아닌지 석판을 통해 알 수 있다.
적어도 이 남자는 거짓부렁을 늘어놓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럼 뭐야. 사고를 치고 다니는 게 아니었어?”
“사고?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군. 나는 금성탑의 의뢰를 받아서 외계로부터 이어지는 화이트홀을 찾으러 샌드타워를 뒤지고 다녔다. 바깥에서 내가 무슨 사고를 쳤다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만약 따지고 싶거든 금성탑을 찾아가 보는 걸 추천한다.”
“금성탑에서 의뢰를……?”
“아무튼 간에 나는 여기 있는 DNA를 긁어모은 후 폭파시킬 생각이다. 넌?”
“……네 최종 목적은 뭐야?”
“목적? 별거 없어. 나는 정의를 추구할 뿐이다.”
만약 태하가 서판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면 절대 로드리고의 말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허나,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로드리고는 지금 거짓을 고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느껴지고 있었다.
‘히어로……를 꿈꾸는 건가?’
로드리고는 태하의 왼쪽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나저나 너, 희한한 능력을 갖고 있군. 왼쪽 가슴에 뭔가를 품고 있어.”
“왼쪽 가슴?”
“그거, 뭐지? 내가 가진 것과 비슷한 물건 같은데.”
“……그게 무슨 소리야? 물건이라니.”
자신의 상의를 살짝 젖혀서 왼쪽 가슴을 보여 주는 로드리고.
그의 가슴에는 상형문자와 함께 더하기가 빽빽하게 그려진 뭔가가 희미하게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서판 조각?!”
“서판 조각? 이게 서판 조각이라는 것인가?”
“너, 도대체 정체가 뭐야?!”
서판 조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선한 일을 하며 악을 증오하는 인간.
태하가 생각하기에 그런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았다.
허나, 로드리고는 아직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깨닫고 있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나는 어려서부터 바벨탑에서 자라 왔다. 조금 커서는 생계를 위해서 샌드타워를 드나들었고. 그러다가 어떤 목소리를 들었고, 지금 그 목소리가 이끄는 대로 수행하며 지내고 있을 뿐이지.”
“……성좌!”
“성좌라니?”
태하는 로드리고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태하의 손을 마주 잡는 로드리고.
끼이잉!
“……헛!”
“절대적인 공명이 발동하는군. 그래, 너는 탑의 수호자였던 거야!”
“이, 이게 뭐지? 뭔가…… 알 수 없는 끈으로 서로를 연결하는 것 같은 느낌이로군.”
“영혼이 서로 연결되었다고나 할까.”
너무나도 뜻밖의 일이었다.
이런 곳에서 네 번째 탑의 수호자를 만나게 될 줄이야.
***
로드리고를 밖으로 데리고 나온 태하는 박찬수 총경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러자 그는 안도감과 함께 약간의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뭐, 다 좋습니다. 하지만 폭파는 어떻게 시킨 겁니까?”
“응축된 에너지. 나는 에너지의 근간인 마정석에 깃든 힘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어. 폭파도 그중에 하나일 뿐.”
“흠, 그렇다면 일전에 몬스터가 사람을 잡아먹었을 때에는 왜 거기 계셨던 겁니까?”
“샌드타워에서 이계와 통하는 문이 있었던 흔적을 찾았다. 그래서 그곳으로 들어갔더니 무슨 희한한 방 안으로 통하더군. 내가 도착했을 때엔 이미 사람이 먹히고 없더군.”
“그래서 그냥 나오셨습니까?”
“일단 여기가 뭐 하는 곳인지는 알아야 하니까. 그래서 나가 보니 도시더군. 그 이후에는 놈들을 찾아서 이곳저곳을 뒤지고 다녔는데, 그렇게 도착한 곳이 바로 여기. 울산이라는 도시였다.”
“……그렇군요.”
“못 믿겠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데, 내가 생각하기에 이런 시설이 1~2개는 아닌 것 같았다.”
“1~2개가 아니라고요……?”
“자잘한 부화실은 물론이고, 이미 잡아먹힌 인간들의 DNA를 이용해서 그 사람의 인생을 대신 살아가고 있을지도 몰라.”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잘 봐.”
로드리고는 순식간에 모습을 바꾸었다.
그는 심지어 아주 단아한 모습의 여성으로 스스로를 바꾸었다.
스읏!
찰랑거리는 긴 생머리에 아담한 이목구비.
절대 남자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내 특성은 융화, 그리고 합이라는 계열의 능력을 갖고 있지. 또한 출이라는 능력도 갖고 있고.”
“융화라……. 그럼 아까 말씀하셨던 DNA 수집에서 나온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여성의 것이란 말입니까?”
“그래. 목소리까지 정확하게 흉내 낼 수 있어. 그런데 나의 융화 스킬을 그대로 본뜬 놈들이 지금 이곳 대한민국을 배회하고 있다는 거지.”
“다, 당신의 스킬을 저놈들은 어떻게 취해 낸 것일까요?”
“글쎄. 내 고향에서는 워낙 가난한 나머지 수혈로 피를 뽑아서 파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거든. 그때 내 피도 함께 팔린 건 아닌가 싶기도 한데.”
혈액을 뽑아낸다고 해도 그것을 정상적으로 유통할 수 있는 기관은 한정되어 있다.
보통은 국가가 직접 관여하거나 국가와 협력 관계에 있는 특수 기관만이 혈액을 채취, 공급할 수 있다.
만약 이 말이 사실이라면 스페인 정부와 결탁해서 혈액의 샘플을 빼돌렸다는 말이 된다.
우드드득!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로드리고.
그는 한시라도 빨리 이러한 부화 시설을 파괴시키고 몬스터를 세상 밖으로 꺼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대로 며칠만 더 지난다면 아마 대한민국은 물론이고 이웃 국가 전부가 괴물로 변하게 될 것이다. 심지어 우리는 그놈들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도 모른 채 살아가게 될 거야. 한마디로 인류는 멸종하고 그 자리를 괴물들이 차지하게 된다는 뜻이지.”
“……아니, 도대체 왜 그런 짓을 저지른다는 겁니까?”
“그야 나도 모르지.”
아직까지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파이어볼의 실체.
태하는 어쩌면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단순히 탑의 붕괴가 아니라 세상의 멸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악마의 군대, 그걸 깨우려는 집단이 있어. 아마 그들이 세상의 종말을 불러오려는 것은 아닐까?”
“세상의 종말이라. 흠, 그렇게 생각하니 이해가 좀 가는군. 만약 종말이 목적이라면 지금의 이 행동은 아주 적절하다고 볼 수 있지 않겠어?”
박찬수 총경은 이제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는 최대한 빨리 헌터협회를 모으고 이 사태를 진화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했다.
“청룡방과 헌터협회를 소집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죠.”
“저희들은 전국을 다 뒤져서라도 그놈들의 소굴을 찾겠습니다. 로드리고 헌터님께서 우리를 좀 도와주실 수 없겠습니까?”
로드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 될 것 없지.”
무뚝뚝하고 앞뒤가 좀 없는 사람이긴 해도 로드리고는 분명 선한 사람이다.
태하는 그걸 느낄 수 있었다.
***
청룡방을 비롯한 대한민국의 모든 길드는 헌터협회에 가입되어 있다.
이들은 던전에서 발생하는 분쟁뿐만 아니라 몬스터와 관련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역할을 하는데, 재난 상황이 발생했을 때엔 아주 신속한 대처로 상황을 종결시키기도 한다.
“……인간으로 위장하는 몬스터요?”
“지금 이 땅 위를 활보하고 있답니다. 처음에는 모텔에서 살인 사건을 일으켰습니다만, 앞으로는 또 어디서 사고를 치고 다니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거죠.”
“차라리 언데드 웨이브가 낫겠는데요? 언데드는 최소한 인간과 구별하는 건 가능하잖습니까.”
언데드 사태는 태하의 활약으로 일단락이 되었었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다르다.
과연 어디에 얼마나 퍼져 있을지 모를 몬스터를 찾아서 격멸한다는 건 사실상 말이 안 되는 일이 아니던가.
태하는 로드리고라는 헌터가 이 사태를 해결해 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로드리고라는 헌터가 구별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가 함께한다면 경찰과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흠, 그렇다면 일단 그 가이드라인이 만들어질 때까지 우리는 최대한 병력을 동원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 두세.”
“군대에도 협조를 부탁할까요?”
“물론이지. 청룡방 특무관은 지금 당장 군대에 협조를 요청해 주시게.”
“예, 방주님!”
“나머지는 어서 길드로 돌아가서 1군부터 3군까지, 아니 예비군과 상비군 전부를 긁어모으게. 1명이라도 손이 모자란 시점이니 말이야.”
“예, 사부님!”
헌터협회가 일치단결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모두 백선의 제자들이기 때문이다.
백선은 제자들에게 ‘청룡’의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지금 비상일세.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한다는 뜻이지. 지금부터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지휘 체계를 통일하자고.”
“그럼 사부님의 통제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좋아, 그럼 청룡방에 중앙통제본부를 세우고 각 택티션과 부길드장, 참모를 보내도록.”
“사부님께서 중앙통제본부를 이끄시는 겁니까?”
“흠, 그러고 싶지는 않은데. 적당한 참모 후보라도 있나?”
“유시연 이사는 어떠십니까?”
“마인드헌터라면 믿을 만하지.”
유시연도 백선의 제자이며 이들에게는 사매가 된다.
사매를 믿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 헌터협회의 길드장들은 유시연에게 자신들의 목숨을 맡
겨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