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준비(1)
청주국제공항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태하.
얼마 전, 백선은 미국의 파워드 피스와 태하가 손을 잡았다는 소식을 듣곤 직접 공격대 편성을 해 주었다.
헬창스 단독으로는 파워드 피스와의 기 싸움에 밀릴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오늘은 그 유명한 파워드 피스가 한국에 오는 날이다.
그들을 마중하는 태하의 곁에는 란돌도 있었다.
“음, 그러니까 그 비취 석판만 있다면 레이드펀드를 완벽히 침몰시킬 수도 있다는 뜻이네요?”
“그런 셈이죠.”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바벨탑에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요?”
“그에 대해서는 밸런스를 맞출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야지요.”
잠시 후, 공항의 출구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헬창인 태하와 란돌마저도 압도할 정도로 거대한 덩치의 사내들, 그리고 탄탄한 몸매의 여성들까지.
바로 미국 최고의 길드 파워드 피스였다.
란돌은 고개까지 가로저으며 탄성을 내질렀다.
“워허우! 이야, 정말 몸이 장난 아니네요.”
“헬창스까진 아니더라도 일반인들 중에는 거의 톱 안에 들겠는데요?”
헬창의 종특은 근육에 관해선 인정이 좀 박한 편이다.
그들이 인정하는 근육맨은 진짜배기인 것이다.
태하는 파워드 피스의 선두에서 걸어 나오고 있는 빅토리아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빅토리아!”
“나와 계셨군요. 굳이 마중까지 하실 필요는 없는데요.”
“나와야죠. 동료끼리 매정하게 굴 수는 없잖아요?”
란돌도 빅토리아에게 인사를 건넸다.
허나, 그는 굳이 얘기를 나누기보다는 자신의 존재감만 알렸다.
이윽고 공항 앞에 대기하고 있는 버스를 향해 걸어가는 길.
빅토리아는 파워드 피스의 제1공격대장 제임스 디콜트를 소개해 주었다.
“인사하세요. 우리 측 공격대장을 맡을 제임스 디콜트 씨입니다.”
“그렇군요. 청룡방 측 공격대장 정태하입니다.”
파워드 피스는 청룡방과의 제휴를 통해 대규모 공격대를 조성하기로 했는데, 이는 지금까지 전례를 찾아볼 수 없었던 거대한 동맹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백선에게서 공격대장 자리를 받은 태하는 제임스 디콜트와 동등한 입장에 선 것이었다.
허나, 제임스 디콜트는 다소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헬창……이시죠?”
“뭐, 그런 셈이죠.”
“참 나, 세월도 좋아졌죠. 짐에서 쇠질이나 하고 있는 헌터라니. 그런 근육 덩어리가 던전에서 불편하지는 않으신가요?”
제임스 디콜트도 몸이 보통 수준은 아니었다.
그런 그가 헬창을 깔본다는 건 뭔가 앞뒤가 안 맞는 일이 아닌가 싶었다.
‘이걸 이해하려고 하면 안 돼. 기 싸움에서 절대 질 수 없다.’
앞뒤가 맞을 리가 없다.
어쨌든 지금은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 서로 힘겨루기를 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태하는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아쳤다.
“근육 덩어리 덕분에 그쪽보다는 몸빵을 잘 치죠.”
“……뭐요?”
“보아하니 운동깨나 하신 것 같은데 이따가 우리 짐에서 운동 한판 어떠십니까? 운동 레벨이 안 맞을 것 같으면 그만두시고요.”
도발에는 도발로 맞불을 놓는 것이 최선이다.
평소와 같으면 비이성적인 일을 중재할 만도 했지만, 오늘따라 빅토리아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두 사람이 무슨 얘기를 하든 그저 가만히 두고만 보고 있었다.
이것이 기 싸움이라는 것을 그녀도 잘 아는 것이었다.
다만 선만 지켜 주었으면 했다.
-수컷들의 영역 싸움에는 신경 쓰지 않을게요. 다만 불화만 일으키지 마세요.
***
청룡방에서 준비한 숙소로 이동하자, 그 입구에는 백선과 그 측근들이 태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장 먼저 버스에서 내린 태하는 백선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셨습니까?”
“그래, 인솔은 잘했고?”
“뭐, 그럭저럭.”
태하의 표정에서 뭔가 사건이 있었음을 읽어 낸 백선은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이겼나?”
“음. 아직은 한 번씩 주고받았을 뿐입니다.”
“사내들이 만났으면 거친 인사는 반드시 필요한 법이지.”
“그나저나 이번 통합 공격대를 편성해 주시다니, 솔직히 좀 놀랐습니다.”
“놀랄 거 뭐 있나? 80층을 돌파하자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인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사실 백선도 약간은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길드가 업계 최고로 추앙받는 것에 대해 자존심이 상한 것도 있었다.
그런 마음이 공격대 조직으로 터져 나온 것이었다.
잠시 후, 미국의 헌터들이 버스에서 내려 백선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반갑습니다!”
“그래, 먼 타국까지 와 줘서 고맙네. 약소하게나마 호텔을 마련해 두었으니 이곳에서 여독을 좀 푸시게.”
“감사합니다!”
미국인들임에도 불구하고 동양의 예를 갖추는 걸 봐서 파워드 피스는 백선이라는 전설의 헌터를 존경해 마지않는 것으로 보였다.
경쟁은 경쟁이고 전설은 전설이라는 식이었다.
‘음, 아주 좀생이들은 아니로군.’
만약 저들이 좀생이였다면 지금의 그림은 절대로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처음부터 기 싸움을 좀 세게 걸었다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그래도 남자다움에 점수를 주는 태하다.
잠시 후, 호텔에 짐을 풀고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파워드 피스.
그들은 태하에게 웃으며 말했다.
“한국의 덩어리들은 또 얼마나 운동하는 척을 하는지 한번 볼까?”
“갑시다. 그 헬스장이라는 곳이 어디인지.”
아직 여독도 채 풀리지 않은 사람들이 운동부터 하자고 나오는 걸 보니 아까 태하가 했던 도발이 어지간히도 마음에 남은 모양이었다.
태하는 웃으며 그들의 도전을 받아 주었다.
“뭐, 그럼 갑시다.”
“그나저나 우리를 감당할 수 있는 체육관이 있나 모르겠네.”
“얼마나 무게를 치는지는 몰라도 있을 만큼은 다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죠.”
다시 버스에 오른 그들은 태하를 따라서 덕림헬스로 향했다.
***
덕림헬스의 고립관에는 12시 전후로 사람이 별로 없다.
고립관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직장인들이고, 그렇지 않다고 해도 헬창스가 돌아오는 시간에 맞춰서 같이 운동하기를 바라기 때문이었다.
파워드 피스의 헌터들은 고립관으로 들어서자, 뭔가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쇠질의 욕구를 느끼는 듯했다.
“……뭔가 진짜의 냄새가 나는군.”
“그럼 운동 시작해 볼까요? 아쉽게도 청룡방의 헌터들은 오늘 나오지 못했으니 우리끼리 합시다. 괜찮죠?”
“뭐, 얼마든지!”
방금 전에 PT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용팔은 우락부락한 파워드 피스를 보곤 살짝 위축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허나, 그는 금세 자신의 위치를 자각했다.
“……양키들이 한국 헬창을 우습게 보네. 감히 헬스인들의 성지인 고립관까지 쳐들어오고 말이야.”
“용팔 씨가 보여 주세요. 우리의 허들이 얼마나 높은지.”
“후후, 그럴까요?”
파워드 피스는 한 번도 용팔이라는 헌터를 보지 못했었다.
당연히 그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능력이 있는지 알 턱이 없었다.
용팔은 스트랩 없이 400kg이나 나가는 바벨을 들고 섰다.
“으후……!”
“……뭐야, 저거 구조물을 고여 두는 기둥 아니었어?”
“자, 그럼 시작합시다!”
400kg의 무식한 바벨로 데드리프트를 시작하는 용팔.
치팅 하나 없이 정석으로만 데드리프트를 해서 무려 12개를 반복했다.
쿠우웅!
“호우! 라잇, 웨잇!”
“너무 가벼웠네요. 그냥 시작부터 500kg으로 갈까요?”
“그럴까요?”
태하는 리프트 위에 바벨을 얹고 그 위로 차곡차곡 중량을 얹기 시작했다.
100kg이라고 적힌 엄청난 무게의 원판을 양쪽에 2개씩 끼운 후, 거기에 50kg 원판을 하나씩 붙여 놓았다.
그걸 보며 미국의 헬창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잠깐! 봉 무게가 족히 100kg은 나갈 것 같은데, 저걸 무게에 포함하지 않는 건가?”
“……한국에는 봉 무게를 조상님이 들어 준다고 하던데, 그게 진짜였나?”
1RM이 700kg을 넘긴 용팔은 아주 가볍게 바벨을 들었다.
“흣차!”
“…….”
“자, 갑시다!”
미국 헬창들은 그저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제아무리 각성을 했다고 해도 힘으로 헬창스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지게차처럼 리프트를 하는 용팔.
그는 600kg이 조금 넘는 무게를 아주 가볍게 들어 10개를 채웠다.
쿠우우웅!
아까보다 훨씬 더 강력한 진동이 헬스장에 울려 퍼졌다.
태하는 용팔의 리프팅을 아주 크게 칭찬했다.
“좋아요! 자세도 완벽했어요! 대단한데요?”
“뭘요. 몸풀기 1톤부터 시작하는 헌터님에 비한다면 별거 아니죠.”
덩치로 본다면 태하는 용팔의 족히 1.5배는 되어 보인다.
그런 용팔의 1RM에 달하는 무게로 몸을 푼다면 말 다한 것이다.
미국 헬창들은 시선을 밖으로 돌렸다.
“험험! 남자라면 무릇 체력이지! 민첩함으로 해 봅시다! 외줄 타기 같은 건 없어요?”
“후후, 없을 리가 없죠.”
수컷들의 자존심 싸움은 밖에서도 계속되었다.
헬스장 밖에는 사다리차가 한 대 있었는데, 태하는 그것을 최대한 올려서 아파트 15층 높이까지 올렸다.
그 위에 밧줄을 묶고 아주 스무스하게 내려오는 태하.
쉬이이익……!
밧줄을 한두 번 타 본 솜씨가 아니었다.
“우리는 이게 기본입니다. 몸풀기부터 좀 시작해 볼까요?”
“……이걸 인간이 맨손으로 탄다고요?”
“당연하죠. 우리 헬스장에서 이 정도 못 타면 헬창 소리 못 듣습니다.”
“헬창은 헬스에 인생을 갈아 넣은 사람들 아니었어요? 그런데 무슨 외줄 타기를…….”
“말이 많네요. 일단 시작해 봅시다.”
신체적으로는 도저히 태하를 이길 수 없다는 걸 저들은 아마 절감했을 것이다.
***
한바탕 힘겨루기가 끝난 후.
태하는 아주 개운한 얼굴로 휴게실에 앉았다.
“후후, 속이 다 시원하군!”
“남자들이란 정말 이해하기 힘든 생명체들이로군요.”
그의 곁으로 다가와 앉는 빅토리아.
보충제를 한 모금 마시며 태하가 말했다.
“생태계의 한 부분인 것입니다. 약육강식, 그런 논리가 적용되어야 도태될 사람은 도태될 것 아닙니까?”
“뭐, 아무튼 이긴 건 축하드려요.”
“별말씀을요.”
빅토리아는 어쩐 일로 태하가 마시는 음료수를 집어서 맛을 보았다.
그러곤 인상을 확 찡그리는 그녀.
“……이걸 왜 마신다고요?”
“헬창이니까요.”
“뭐, 아무튼 간에 그레이엄 가문과 얘기가 잘되어서 다행이네요. 굳이 내가 나서지 않아도 일을 처리해 주시다니, 대단하십니다.”
“대단할 거 뭐 있나요? 그저 좋은 물건을 팔겠다고 한 것뿐입니다.”
“한때 그레이엄 가문은 파이어볼에게서 투자를 받은 적이 있어요. 지금은 관계를 손절했지만, 한때는 동료였다는 소리죠.”
“……그래요?”
전혀 몰랐던 사실이다.
태하는 왜 그녀가 이런 사실을 이제야 말해 주나 싶었다.
허나, 그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파이어볼과 손을 잡았었기 때문에 아마 헬파이어를 묻어 버리는 데 조금 더 적극적일 겁니다. 그래서 당신이 그레이엄 가문과 손잡는 걸 가만히 두고 보고 있었죠.”
“흠…….”
“미안해요. 당신에게는 모든 것을 다 오픈하기로 했는데.”
“괜찮습니다. 괜히 섣부르게 정보를 주었다면 내가 그들과 거리를 두었을지도 모르죠.”
“그리 이해해 주시니 고맙네요. 아무튼 작전은 언제쯤 시작할 건가요?”
“일단 은청석 판로부터 잡아 놓고 시장에 큰 충격을 가할 겁니다. 그게 3주 뒤입니다.”
“그래요. 3주 동안 우리는 공격대를 잘 조합하고 있으면 되겠네요.”
두 사람이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한나가 다급하게 달려왔다.
“내가 못 살아! 태하 씨, 잠깐 나와 봐요!”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지금 위에서 싸움 났어요!”
“……싸움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