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DNA 조작단(2)
이른 아침부터 자신을 찾아온 태하를 마주한 고상근.
그는 씁쓸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
“……결국 이렇게까지 타락을 하고 만 건가?”
“어떻게 하실래요? 저희들은 일단 연구소를 파괴해서 그 안에 갇혀 있는 사람들부터 구출해야 할 것 같은데요.”
은하는 평소에 이모를 무척이나 보고 싶어 했다.
비록 타락하긴 했어도 하늘에 있는 엄마를 닮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어쩌면 핏줄이 당기는 것인지도 모를 일. 허나, 고상근은 은하를 데리고 가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
“……우리 부녀는 빠지겠습니다. 아무래도 은하가 충격을 너무 많이 받을 것 같아서요.”
“이해합니다. 당연히 그렇겠지요. 아직 감수성 충만한 소녀인 것을요.”
“그럼 다녀와서 결과 알려 드리겠습니다.”
태하는 고상근과 은하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고 있었지만, 굳이 더 이상 동행을 종용하지는 않았다.
핏줄이 당기는 만큼 충격도 클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다만, 떠나는 태하에게 고상근은 한 가지 부탁을 했다.
“……부디, 우리 처제를 구원해 주세요. 놓치지 말고 반드시 구원해 주셨으면 합니다.”
“물론이죠. 더 이상 타락하지 않도록 책임지고 잡아 오겠습니다.”
더 이상 고상근은 끌어들이지 않기로 했다.
태하는 청룡방에도 이 사실을 알렸고, 곧이어 청룡방은 백두와 현무단에게도 동행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400명이나 되는 A급, S급 헌터들이 PK에 사용되는 장비들로 무장했다.
웅성, 웅성……!
이 많은 헌터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만 해도 보통 일이 아닌데, 그들이 전부 바벨탑 밖에서 PK를 벌인다는 것도 희귀한 일이었다.
백두의 수장 조현준은 스승 백선을 대신해서 공격대를 이끌기로 했다.
“헬창스는 이번 작전에서 오로지 한 사람, 선임 연구원인 조미나에게만 집중해 주십시오. 나머지는 우리 연합팀이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절대 놓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요청 사항이 있는데 말입니다.”
“요청 사항이요?”
“조미나를 되도록 죽이지 말고 생포해 주셨으면 합니다.”
“……생포요?”
“알아낼 것이 워낙 많잖습니까.”
“잡히면 엄청난 고통을 받으며 살아가게 될 텐데요?”
“그렇다고 이대로 헬파이어의 잔당들이 살아 있는 사람을 가지고 실험하는 걸 두고만 볼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조미나로서는 이제 죽는 것이 거의 유일한 구원이라고 했다.
그런 마지막 구원마저 앗아 가야 한다니, 너무 잔인한 일이 아닌가 싶었다.
허나, 지금까지 그녀가 죽인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못 할 짓도 아니었다.
“제가 책임지고 잡겠습니다.”
***
지금까지 헌터협회에서 단 한 번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PK를 위해 움직인 적은 없었다.
그야말로 살인, 법에 위반되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허나, 이번에는 달랐다.
국가에서는 사람 목숨을 거의 파리처럼 여기는 놈들을 소탕하는 데 있어 인권이라는 감수성을 대입시키지 말라고 요청해 왔다.
“……사실상 살인 면허가 떨어졌네요.”
정부의 요청 사항에는 ‘관련자 사살 가능’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필요하다면, 혹은 위험해 보이면 그냥 다 죽이라는 것이었다.
언뜻 본다면 정부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였지만, 그들이 이렇게 흥분하는 것에도 다 이유가 있었다.
가빈의 파노라마는 정부에도 제출되었기 때문이다.
“미성년자를, 그것도 아직 언어 수준도 채 다 발달하지 않은 아이를 고문한 것은 사실 인간 이하의 짓이긴 하죠. 정부의 눈이 뒤집힐 만도 합니다.”
“청와대에서는 그냥 깔끔하게 폭격을 하자고 하는데, 백선 어르신께서 말렸다고 하더군요. 폭격을 하면 건질 게 하나도 없어서 수사에 도움이 안 될 거라고요.”
“역시…….”
“정보를 다 토설하게 만든 다음 죽이라는 겁니다.”
“……무서운 분이시네요.”
백선은 분명 버드나무 가지처럼 부드러운 사람이지만, 한번 돌아서면 오뉴월의 서리보다 더 매서운 사람이기도 했다.
해서 헌터들은 후배들에게 조언한다.
차라리 대통령에게 찍히는 게 낫지, 백선에게 찍히면 답이 없다고 말이다.
“아무튼 우리 목적지는 어디라고요?”
“충북 진천이요. 혹시 진천 출신 계세요?”
전술장갑차를 타고 진천으로 달리는 길, 태하의 질문을 받은 탑승자들은 거의 대부분 손을 들지 않았다.
오로지 한 사람만 빼고 말이다.
“우리 처가가 진천인디?”
“아아, 혁수 형님!”
충청도 토박이, 뼛속까지 대전 남자 임혁수는 처가도 충청도다.
그는 진천이라는 말에 반색을 보이면서도 씁쓸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크흐! 진천이 물 좋고 공기 좋고! 사람도 좋아! 제길, 그런데 그런 진천에 연구소를 만들어? 이런 지미, 우라질 새끼들!”
태하는 USB에서 받아 낸 좌표를 위성 지도에 입력시켰고, 그 위치를 찾아냈다.
그는 그 위치를 간단히 일축했다.
“형님, 진천에 유명한 타일 공장이 있어요?”
“있지! 중동으로 수출까지 한다더만.”
“오호, 잘 아세요?”
“잘은 몰러. 워낙 유명하니께 기냥 알음알음 알고 있는 거지.”
“아무튼 그럼 위치나 지형은 잘 아시는 거죠?”
“알지. 처가 근처에 있으니까. 내가 그 근방 저격 포인트까지 알어! 그런데 뭔 타일 공장에 실험실이랴?”
“타일 공장이 사실은 진짜 타일 공장이 아니었던 거죠.”
“……그게 뭔 개 쑥 뜯어 먹는 소리여?”
“사실은 위장 기업이었던 거죠.”
“엄마나, 그 자리에 30년을 넘게 있었는디……?!”
“30년 동안 위장한 건지, 아니면 최근에 위장을 했는지는 몰라요. 다만 페이퍼컴퍼니인 것은 확실하다는 것만 알고 있죠.”
“그나저나 왜 하필 타일 공장이여? 이유가 뭐랴?”
“그건 형님이 더 잘 아실 것 같은데. 형님, 회계사잖아요?”
그제야 현실을 자각하는 임혁수.
그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 이마를 탁 쳤다.
“……내 정신 좀 봐. 이래서 무슨 회계를 봐 준다 그러나 몰러.”
“진짜 왜 타일 공장인가요? 이유가 있을까요?”
현실을 자각한 임혁수는 역시 일반인과는 확실히 다른 뭔가가 있었다.
“페이퍼컴퍼니를 세워서 뭘 할 것인지가 관건 아니것어? 사실, 타일 공장 같은 회사가 돈 빼돌리긴 최고거든. 원자재 가격 후려칠 수 있지, 타일 단가 후려칠 수 있지, 심지어는 미장이, 타일쟁이들 하청 원가까지 후려친다니께?”
“아하, 그러니까 일석이조라 이거군요! 위장도 하고 자금 세탁도 하고?”
“그런 거 아니것어?”
역시, 경력이 오래돼서 그런지 자금 세탁 쪽을 툭 건드리기만 해도 바로 견적이 나온다.
이게 바로 경력직이 월급을 더 많이 받는 이유가 아닌가 싶었다.
허나, 임혁수는 자신의 생각이 틀렸기를 바랐다.
“……이거 참. 우리 처제들도 저기 다니는데 말이여.”
“허어, 그래요?”
“동네에서는 유지 소리 듣는 공장이여. 당연히 동네 주민들이 공장 직원이 되는 게 수순 아니것어?”
“괜찮으시겠어요? 처제들이 있으면 어쩌시려고요.”
“그렇다고 그 험한 공장에 내 식구들 짱박아 놓을 수는 없잖여? 공장을 파괴시키든 불을 지르든 해야지, 안 그려?”
얼마나 소름 끼치는 일인가.
지역사회의 일원으로 가장해 이딴 실험실을 굴리고 있다니 말이다.
***
임혁수는 역시 자기 손바닥 꿰듯 공장 일대를 아주 속속들이 잘 알고 있었다.
과연 어디서부터 어떻게 치고 들어가는 게 좋을지, 그리고 퇴로는 어디고 저격은 어느 위치에서 하면 좋을지.
그는 그야말로 걸어 다니는 GPS라고 할 만했다.
-자, 그럼 작전 시작하는 겨?
“네, 그럼유!”
-쌈빡하게 땡겨 보자고!
임혁수는 특성 무기에 맞게 후방에서 저격 임무를 맡았고 나머지는 태하를 따라서 연구실 안으로 진입했다.
이 일대는 전부 통행금지가 시행 중이며 메이지의 스켈레톤 부대가 근방을 전부 에워싸고 있었다.
연구실은 총 500평 규모로 정사각형 건물에 따로 지하 주차장은 없었다.
구조가 아주 단순해서 치고 들어가기엔 안성맞춤이었다.
허나, 반대로 생각해 본다면 구조가 워낙 단순해서 퇴로도 확보하기 힘들다는 것이 단점이 있었다.
조준경을 통해 건물 안을 살피는 임혁수.
-일단…… 특별히 위험 요소는 없어 보이는디. 어째, 지금 들어갈 껴?
“네, 그래야죠.”
-알것어. 내가 뒤에서 적이 오나 안 오나 쫘 줄게.
기억자로 꺾어지는 복도, 태하는 방패를 들고 빠르게 진입해 들어갔다.
그 뒤를 바짝 따라붙는 파티원들.
임혁수는 꺾어진 복도를 따라서 우르르 달려 나오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뭐여, 사람이 쏟아져 나오는디? 공장 직원들 아닌가 싶기도 하네.
“그중에 적도 섞여 있을까요?”
-나도 그건 모르지.
사악한 자들은 민간인을 자주 방패막이로 삼곤 했다.
이번에도 그런 상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잠시 후, 무려 2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태하와 마주했다.
그들은 태하를 보자마자 소리쳤다.
“도망쳐유! 길 막고 서 있지 말고!”
“무, 무슨 일이신데요?”
“저어기 뒤에 괴물, 괴물 있슈!”
그 소리를 들은 임혁수는 곧장 조준경을 뒤로 돌렸다.
그러자 그곳에는 도저히 인간으로는 보이지 않는 생명체들이 천장에 거꾸로 매달린 채 달려오고 있었다.
사사사사삭……!
-이게 뭔 뒤로 자빠질 일이랴?! 사람들 뒤로 괴물이 쫓아오고 있잖여!
“제기랄, 키메라인가!”
-키메라인지, 카메라인지, 일단 쏴 죽이고 봐야것는디?!
임혁수는 허리케인 쌍권총을 합체시켜서 만든 저격총으로 키메라로 추정되는 물체를 쏴 버렸다.
타앙!
보통의 저격총이 갖는 유효사거리를 몇 배는 우습게 뛰어넘으며 원하는 만큼 멀리 탄환을 날릴 수 있는 허리케인 저격총.
유효사거리보다도 놀라운 것은 그 파괴력이었다.
끼기기긱!
방탄유리에 부딪친 총탄은 그야말로 허리케인처럼 회전하며 순식간에 그 표면을 긁어먹으며 침투해 들어갔다.
이윽고 팔 4개에 다리 2개 달린 민머리 괴물의 머리를 뚫고 지나갔다.
퍼어억!
-끼헤에엑!
마치 지옥에서 온 것 같은 착각이 드는 회색빛 피부와 지독하게 일그러진 얼굴.
일행들은 이 비주얼이 너무나도 익숙했다.
“71층에서 본 그 몬스터들 아니야?!”
“제기랄, 이게 지금 왜 여기에 있는 건데요!”
“……그 엄청났던 마물들이 전부 키메라였다는 말인가, 그럼?”
지옥에 있어야 할 것 같은 모습의 몬스터들이 떼를 지어 나타나니 당황할 수밖에는 없었다.
허나, 훨씬 더 당황스러운 것은 마물이 죽을 때에 녹색 산성 물질을 사방에 뿌리며 죽는다는 점이었다.
치이이이익……!
“……으윽! 냄새 고약하네!”
“냄새만 고약한 게 아니라 산성이 엄청나게 강하잖아요?! 얼마나 강하면 바닥이 푹 꺼질 정도겠어요?!”
차라리 불과 함께 폭발을 일으키는 게 훨씬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까다로운 놈들이었다.
그런 놈들이 도대체 몇 마리인지 셀 수도 없이 줄을 지어 나온다는 건 너무나도 끔찍한 일이었다.
“순백의 배리어!”
희란의 특성 스킬이 파티를 지켜 줌으로써 일단 산성 물질에 대해 어느 정도 대항할 힘은 생겼다.
허나, 문제는 깨진 건물 사이로 괴물들이 쏟아져 나가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뒤에 있는 놈들이 밖으로 나가잖여!
“제기랄! 근딜은 바로 앞에 있는 놈들, 원딜은 밖으로 기어 나가는 놈들을 잡아 족칩시다!”
태하의 방패진 왼쪽으로 여의봉을 든 유신성이 튀어 나갔다.
그는 구름을 타고 마치 스케이트보드를 몰듯 유려하게 몬스터들 사이를 비집고 다녔다.
“와자자잣!”
여의봉은 유신성이 원하는 대로 크기를 조절할 수 있으며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뱀처럼 휘어지기도 했다.
빠각!
유신성의 여의봉에 맞은 몬스터들은 그 즉시 곤죽이 되어 버렸다.
곤죽이 된다는 건 즉, 사방으로 액체를 퍼뜨린다는 뜻.
허나, 유신성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파앗!
마치 환영처럼 대미지를 입은 유신성의 신형은 곧바로 사라지고 바로 뒤로 그가 순간이동 하여 나타났기 때문이다.
[스킬: 분신술]
[스킬 레벨에 따라서 시전자와 똑같은 능력의 분신을 다수 생성합니다]
[현재 레벨 15]
분신술로 15명의 유신성이 생겨나더니, 이내 앞으로 나아가며 적들을 때려죽이기 시작했다.
“아뵤!”
빠각!
정글러가 열다섯이나 되니 밖으로 빠져나가는 적들의 숫자도 확실히 줄어들고 있었다.
“이야, 신박한 스킬이네, 저거!”
정말이지 대박이라는 말밖에는 나오지 않는다.
허나, 진짜 신박은 지금부터였다.
[패시브: 유성격]
[강타 스킬 ‘유성격’이 일정 확률로 발동됩니다]
[확률 계산: 환영 1개당 1.5%]
“강타가 그냥 나간다고? 이렇게 봉만 휘둘러도……?”
“말이 1.5%지, 그냥 때릴 때마다 강타가 터지는 거잖아요?”
“……이 정도면 근딜계의 밸런스 붕괴 아니야?”
유신성은 그야말로 ‘사기캐’가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