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DNA 조작단(1)
제1바벨탑으로 불리는 서울 강남의 던전.
오늘 처음으로 만난 빅토리아와 란돌은 태하와 함께 70층으로 향했다.
헌데 오늘따라 던전이 무척이나 허전해 보인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그 무지막지한 보스를 잡았다고요?”
“네, 그랬었죠. 헌데 지금은 아무것도 없네요.”
정말이지 70층은 텅텅 비어서 이게 던전이 맞는가 싶을 정도였다.
원래 70층은 그레이트웜의 구역으로서 인간이 땅을 밟자마자 사망하는 이른바 ‘공허의 땅’으로 알려져 있었다.
헌데 지금은 그 어떤 움직임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빅토리아는 던전에서의 이상 현상을 한 단어로 풀이했다.
“균열. 그렇게밖에는 설명이 안 되는군요.”
“던전이 불안정해서 몬스터 리젠이 안 되는 건가요?”
“이를테면 출혈과 같다고 할까요? 이 안에서 화이트홀 실험과 몬스터 DNA 합성 등 너무 많은 실험을 자행하다 보니 탑의 에너지가 자꾸 손실되어 리젠이 불가능해진 거죠. 언젠가는 탑에 리젠 주기가 불안정해지고 그 주기가 깨져 아예 리젠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시점이 올지도 모릅니다.”
“그럼 어떻게 되는데요?”
“던전에 아무나 진입하게 될 것이고, 결국 던전이 무너지기를 바라는 놈들이 원하는 대로 되겠죠.”
탑을 수호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곳이 인간에게 이로운 곳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차원을 무너뜨릴 수 있는 악마 군단의 귀환, 그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80층부터는 우리가 다 함께 힘을 합치는 수밖에는 없겠어요.”
“힘을 합친다고요?”
“대규모 레이드. 고민해 봐야 할 때가 아닌가 싶은데요.”
지금까지 헬스하운드는 꾸준히 소규모 레이드만을 고집해 왔었다.
허나, 누구나 그러하듯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만 고집하며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규모 레이드를 시작한다면 조율할 게 많을 건데요.”
“그 모든 건 제가 알아서 합니다. 여러분들은 그저 할지 말지, 결단만 내려 주면 되는 거죠.”
확실히 빅토리아는 리더십이 있는 사람이다.
허나, 모든 것에는 순서라는 게 있는 법이었다.
란돌은 자신이 왜 혼자서 탑을 오르는지 설명해 주었다.
“있잖아요. 나 역시 사람이 많은 게 더 좋아요. 의외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군대가 오히려 체질에 맞았어요. 사람과 떨어질 일이 별로 없잖아요? 심지어 동료애도 고취시킬 수 있고요. 저는 그런 타입의 사람이에요.”
“알아요. 사교성이 제법 좋다고 들었어요.”
“한데 그런 제가 던전을 굳이 혼자 오르는 이유는 바로 불협화음이라는 것에 있어요.”
“불협화음……?”
“모든 사람들이 헬창스처럼 헬스라는 하나의 관심사를 통해서 함께 강력해진다면 몰라도, 그런 집단은 쉽게 찾아볼 수 없죠.”
“으음…….”
“일단은 집단 간의 교류를 통해서 점차 알아 가는 기간이 필요해요. 그렇지 않고서는 서로 이해관계도 상충할 것이고 합도 잘 맞지 않을 것이고.”
“뭐, 그건 저도 인정하는 부분이에요.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서로 의견이 잘 맞지 않는다.
태하는 이래선 절대 대규모 레이드는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두 사람만 모였는데도 이러니, 100명이 넘는 공격대가 조직되면 과연 어떻게 되겠는가?
그는 절충안을 내놓았다.
“불협화음이 문제인 것도 맞고 시간이 문제인 것도 공감합니다.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일정 기간 동안 약간 거리를 두고 서로를 알아 가는 시간을 갖는 겁니다. 일종의 커리큘럼에 따라서 연수 같은 것도 좀 받고요. 정기적으로 스쿼드를 짜서 레이드도 좀 하고요.”
“불협화음이 문제인데 그게 가능하겠어요?”
“불협화음이 무서워서 레이드를 할 수 없다면 던전 공략은 어떻게 할 건데요? 어차피 바벨탑은 혼자서 100층을 돌파할 수 없어요. 애초에 그렇게 설계가 되어 있으니까요.”
바벨탑의 본질은 군대를 훈련하는 데 있다.
군대는 제아무리 강력한 힘을 가진 개인이 있다고 해도 애초에 그가 집단에 섞이지 못하면 형성되지 못한다.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조직을 유연하게 다룰 수 있는 능력이 갖춰져야 군대라는 집단이 유지될 수 있는 법인 것이다.
바벨탑은 그것을 위해서 지어졌고 실제로 협동이 가장 중요시되는 공간이다.
태하는 그걸 강조한 것이다.
“협동은 필수 불가결입니다.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도 안 되고요.”
“흠…….”
“다만, 우리에게 시간은 제한적입니다. 그걸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 일률적인 커리큘럼뿐입니다. 어때요? 시간을 단축시키되, 당신의 말처럼 서서히 융화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는 거죠.”
빅토리아는 이성적으로 태하의 방안이 가장 현실적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는 없었다.
그에 반해 란돌은 뭔가 좀 떨떠름한 느낌이 들었다.
“……나쁘지는 않네요. 물론, 그다지 좋아 보이는 방법도 아니지만요.”
“그럼 새로운 의견을 한번 내 보실래요?”
“아니요, 그런 뜻은 아니고요. 당신의 뜻대로 할게요.”
어딘가 좀 꽁해져 있는 듯하지만, 그래도 주변의 의견을 아주 무시하는 태도는 아니었다.
태하는 이 정도 성향이라면 충분히 단체와 융화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럼 커리큘럼이 완성될 때까지 유전자 박스에 대해서 조사해 보자고요.”
***
잔잔하게 물결치는 호수공원 앞.
희란은 함께 걷고 있던 가빈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예전에 실험실에서 있었던 일, 우리에게 얘기해 줄 수 있겠니?”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데.”
“그럼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사람은 때론 떠올리기 싫은 기억을 억지로 떠올리면 괴로운 나머지 평정심을 잃게 되거든.”
그 어떤 것보다도 사람이 먼저인 희란은 굳이 가빈에게 안 좋은 기억을 꺼내려 하지는 않았다.
허나, 가빈은 괴로움보다 더 강렬한 집념을 가진 아이였다.
“그게 복수에 도움이 되는 거야?”
“음, 그게 말이야…….”
“만약 도움이 된다면 할래. 다 말해 줄게.”
평소에는 말도 잘 안 하는 가빈이 헬스 이외의 것에 적극적인 경우는 단 하나뿐이었다.
그것은 바로 복수에 관한 것이었다.
“……헬파이어를 쓸어버릴 수 있다면 나는 영혼이라도 팔 수 있어!”
“하지만 너무 극단적인 태도는 좋지 않아. 흥분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해 보자. 최대한 천천히.”
“후우, 알겠어…….”
보현 관장이 가빈을 양녀로 삼아 품어 주었다면 희란은 가빈에게 사람으로서, 그리고 하나의 인격체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었다.
매번 급격한 감정 변화를 겪으며 어려워하는 가빈에게 희란은 차분함을 가르쳐 주었다.
“심호흡 좀 해 봐. 어때? 이제 좀 괜찮아?”
“……그런 것 같아.”
“사실, 이모는 네가 어떤 환경에서 자라 왔고 도대체 얼마나 고통을 받았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어. 그런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으니까.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해. 너무 조급하게, 또는 너무 서두른다면 네 앞길은 생각보다 힘들어질 것이라는 점.”
“그럼 어떡해?”
“지금처럼 천천히 생각해 봐. 아주 천천히.”
“천천히…….”
차분하게 가라앉기 시작하는 가빈의 눈동자.
감정을 다스리는 것은 앞으로 다시는 폭주하지 않도록 막아 주는 방어막 역할을 해 줄 것이었다.
그녀는 이내 눈을 떴다.
“……이젠 정말 괜찮아.”
“어때? 아직도 분노가 끓어올라?”
“분노는 끓어올라. 하지만 눈알이 뒤집힐 것 같지는 않아.”
“그래. 그렇게 마음을 가라앉히는 거야.”
가빈은 뭔가 대단한 결심을 한 듯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해 볼게!”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 말이야?”
“나와 같은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또 있다고 들었어. 그 사람들, 구해 주고 싶어.”
“좋아, 그럼 차근차근 시작해 보자!”
희란은 가빈을 집으로 데리고 갔다.
집에는 침대 위에 가만히 누워서 자고 있는 까미가 있었다.
까미는 희란이 오자, 그녀의 허벅지에 얼굴을 마구 비벼 댔다.
-그르르릉!
“누나 왔어! 까미야, 오늘은 어떤 친구의 기억을 읽어 낼 거야. 그걸 네 기억의 공간 속에 저장할 수 있겠어?”
-갸르릉!
마계화는 단순히 정신 지배 마법만 사용하는 건 아니다.
정신 계열, 혹은 염력 계열 마법들을 구사하는데, 그 레벨이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까미는 가빈에게 얇은 넝쿨을 뻗어 주었다.
“잡으라는 뜻이야. 그럼 너와 까미가 연결될 거야.”
“알겠어. 해 볼게……!”
다시는 자신과 같은 희생자가 나오지 않도록 가빈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이윽고 넝쿨을 잡는 가빈.
끼이이잉!
가빈과 까미 사이에 정신의 벽이 허물어지면서 서로의 마음은 하나가 되어 갔다.
이제 둘의 마음은 하나로 이어졌으므로 가빈의 DNA 속에 저장되어 있던 사람들의 기억이 까미에게로 쏟아져 들어왔다.
-크르릉……!
녀석의 얼굴이 약간 일그러지는 듯했다.
워낙 강렬하고 선명한 기억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오니 정신 계열 마법사인 까미마저도 힘들어지는 것이었다.
허나, 마계화의 두뇌 용량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넓다.
까미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지식을 집어넣고 그것으로 연구를 해서 데이터를 뽑아낸다고 해도 그걸 다 기록할 수 있을 정도로 용량이 컸다.
그러나 기억을 공유하기에 까미는 그녀의 감정까지 끌어안아야만 했다.
-캬오오오……!
발톱을 세우고 날뛰려 으르렁거리는 까미.
희란은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괜찮아, 까미야. 누나가 있잖아.”
까미의 정신적 지주, 실질적으로는 주인이자 가족인 희란이 옆에 있으니 금세 진정이 되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드디어 복사를 끝낸 까미는 희란에게 까만 구슬을 하나 건네주었다.
-그르릉!
“이게 바로 그 기억이 담긴 구슬이구나!”
마계화의 구슬은 기억을 복사한 샘플로서 일시적으로나마 기억의 파노라마를 볼 수 있다.
희란은 가빈에게 물었다.
“이걸 정말 우리가 다 같이 봐도 될까?”
“……응, 괜찮아. 나는 여기서 조금만 자고 있을게.”
“그래, 그러렴.”
“스켈이랑 같이 자도 될까?”
“물론이지.”
가빈은 주머니에서 뼈로 이뤄진 구체를 꺼내어 바닥에 던졌다.
그러자 스켈이 튀어나왔다.
-스케엘!
“스켈, 같이 자자…….”
-……스켈?
이제 스켈은 가빈의 감정까지 이해하는 진짜 친구가 되었다.
둘은 태하의 집에서 잠시 잠을 청해 보기로 했다.
희란은 이불을 덮어 주며 까미에게 둘을 지켜 달라고 부탁했다.
“이 아이들을 좀 지켜 줘.”
-그르릉!
***
헬창스와 빅토리아, 란돌은 한자리에 모여서 가빈의 기억에서 꺼내 온 파노라마를 살펴보았다.
그녀의 기억은 끔찍하기 이를 데 없었다.
“……겨우 여섯 살에 잡혀 와서 10년 넘게 실험을 당한 건가? 그것도 영혼이 깨질 것 같은 고통을 매일매일 겪으면서?”
“미친 새끼들! 인간보다 못한 것들, 다 쓸어버려야 해!”
란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실제로 유전자 박스를 스스로에게 실험해 본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엄청나게 고통스럽죠. 그나마 나는 근육을 키우는 목적으로 주사를 맞은 것이라서 저것보다 한참이나 고통이 덜했을 겁니다. 저 엄청난 걸 겨우 여섯 살 때부터 맞아 왔다니…….”
키메라가 되는 과정은 생살이 찢어지고 뼈가 갈라지는 고통의 연속이다.
그런 고통의 연속을 10년이나 겪었으니, 가빈의 정신이 멀쩡한 것만 해도 천운이라 할 수 있다.
기억의 파노라마는 다음으로 넘어갔다.
이번에는 가빈에게 잡아먹힌 연구소 직원들의 기억이었다.
그들은 헬파이어의 하수인들이며 위에서 내려오는 연구를 완수하지 못하면 온 가족이 몰살을 당하는 엄청난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무려 수백 명의 아이들을 잡아다가 실험하였으며, 그중에서 제대로 된 영력을 가진 영매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렇게 아이들의 피로 다져진 것이 바로 유전자 박스라는 기술인 것이다.
“……인간이 과연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지 잘 보여 주는 전형적인 예네요.”
“능력 복제를 통해서 던전을 통제하려는 야욕을 가진 헬파이어와 그들을 돕는 하수인들의 조합이라니. 역겨워서 토악질이 나오려고 해요.”
파이어볼이 던전의 난이도를 높이고 마이너스 코어를 매입해서 던전을 통제하려고 했다면 헬파이어는 상위 랭커들을 무한으로 증식시켜 던전을 통제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들의 목적은 오로지 하나, 던전을 장악하고 무너뜨리는 것뿐이었다.
기억의 파노라마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 기억들을 차근차근 따라가다 보니 자연스레 한 가지 사실이 밝혀졌다.
“……한국에만 실험실이 6개?”
“많기도 하네.”
능력 복제 실험실은 전 세계 도처에 널려 있었다.
헌데 그 위치가 태하의 눈에 많이 익어 보였다.
“잠깐, 여기 어디서 많이 본 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