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헬스레이드-102화 (102/197)

102 헬창이 헬창을 만났을 때(2)

길고 긴 꿈을 꾼 소녀.

그녀는 자신의 이름도, 심지어는 과거도 기억하지 못한 채 잠들어 있었다.

과연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을까.

소녀는 서서히 눈을 떴다.

“……으후, 으후!”

어디선가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온 힘을 다해 근육을 쥐어짜는 강렬한 신음이 들려왔다.

17년 인생에 있어서 이렇게 이질적인 소리는 또 처음이었다.

‘힘을 줬다 풀었다, 줬다 풀었다 반복하는 건가?’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 걸까.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주변의 광경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찾아오는 신선한 충격.

“스콰아아아앗!”

“으후, 으후!”

“롸잇, 베이비! 이지, 브로!”

“원 모얼 셋!”

그녀는 그 자리에 그만 꽁꽁 얼어붙고 말았다.

뭐랄까, 핏속 깊은 곳에서부터 불같은 것이 울컥 차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쇳덩이 앞으로 다가갔다.

사람들은 쇠질에 매진하고 있어서 그런지 누가 옆에 다가와도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머리를 빡빡 밀어 버린 중년 남자에게 말을 걸어 본다.

“……저거, 뭐 하는 거야?”

“헤이, 버디! 일어났어? 나는 보현 관장이라고 해.”

“저게 다 뭐 하는 거냐니까……?”

“뭐긴! 영혼을 단련하는 거지.”

“영혼……?”

“너, 아까 자고 일어났을 때 쇠질하는 모습을 보곤 뭔가 전율이 일지 않았어?”

“……전율?”

“헬창의 DNA를 받아들인 네게 쇠질은 본능적인 울림을 전한 거지.”

보현 관장은 소녀의 팔을 잡아서 확인시켜 주었다.

팔뚝에 난 솜털이 마치 정전기라도 만난 듯 바짝 일어서 있었던 것이다.

“온몸에 닭살이 쫙 돋고 막 가슴이 터질 듯이 뛰고!”

“……!”

“당장 뭐라도 들고 소리 지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고!”

“……맞아.”

“그게 바로 헬창의 DNA라는 거다. 남들은 이놈의 쇳덩이를 왜 들고 지랄이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 굳이 고생을 사서 하는 거잖아? 하지만 그들은 몰라. 이 쇠질이라는 게 얼마나 매력적인지. 또 얼마나 보람찬 일인지 말이야.”

헬스는 단순히 몸을 만드는 일이 아니다.

인생의 전환점, 혹은 인생의 목적과 동기를 부여해 주는 영혼의 조율 같은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단어, 마치 오케스트라와 같은 것이 바로 헬스라는 것이다.

“어떻게 하는 건지 궁금하지 않아?”

“……궁금해.”

“한번 해 볼래?”

“응!”

***

어린 소녀의 쇠질.

차근차근 기본부터 천천히 다지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는 어쩐지 모를 강렬한 희열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 그럴 줄 알았지.”

“대장은 저 소녀가 쇠질에 반응할지 어떻게 알았어요? 그렇게 악독하게 사람을 죽이려고 했다면서요.”

“이용광의 피는 악독해. 하지만 나와 란돌 씨의 피에는 헬창의 DNA가 살아 숨 쉬고 있지. 그리고 캐나다 대회에 참가한 선수들도 그래. 그들의 피에도 헬창의 본능이 내재되어 있잖아.”

“아하! 그러니까 헬창의 DNA가 하나로 뜻을 모아 소녀를 구원한 거네?”

“그런 셈이지.”

“……어쩐지 감동적이다!”

아마도 소녀는 무수히 많은 헌터들의 DNA를 흡수했을 것이다.

어쩌면 몬스터의 DNA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했을지도 모른다.

허나 그 모든 의지를 뛰어넘는 건, 바로 진성 헬창들의 진한 쇠질 충동이었던 것이다.

태하는 자신의 DNA 안에 녹아든 마이트의 쇠질 본능이 소녀를 변화시킬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고, 그것이 지금 현실로 다가온 것이었다.

[패시브 스킬: 점진적 과부하]

[지금부터 스킬 ‘점진적 과부하’가 적용됩니다]

소녀는 아무리 운동을 해도 지치지 않았다.

오히려 운동을 하면 할수록 희열이 느껴져 안면에 미소가 완연했다.

“이두로 올려! 셧 업 엔 커어어얼!”

“으웃!”

“오케이, 베이비! 굿걸, 롸잇 웨잇 이지!”

마치 딸을 대하듯 다정하게 소녀를 대해 주는 보현 관장.

그는 소녀를 보현파의 품에 온전히 품어 또 다른 새싹을 키워 보고 싶었던 것이다.

또한, 소녀의 상처 입은 마음을 쇠질로써 안아 주고 있었다.

그런 보현의 마음이 소녀의 마음을 움직인 것인지도 몰랐다.

[파생 스킬: 개파조사 - 신입 받아라!]

[새로운 애제자가 탄생하면 개파조사의 축복이 내려집니다]

[점진적 과부하가 X 2로 증가합니다]

태하는 소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옆에 사람이 오건 말건 신경도 쓰지 않고 바벨컬을 익히고 있었다.

“팔꿈치가 벌어지면 좋지 않아. 단순히 올린다는 느낌 말고 호를 그리듯,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올라가야지.”

“……이렇게?”

“음, 그렇지! 다만 팔꿈치가 너무 밀리지 않도록 조심해.”

굳이 긴말이 필요 없었다.

이제 태하와 소녀는 같은 피를 나누었기에 마치 부녀지간과도 같았던 것이다.

짧은 지도가 끝나고 잠시 쉬는 시간.

태하는 그녀에게 직접 만든 헬창포션을 건네주었다.

“마셔. BCAA 대용으로도 좋아.”

“…….”

여전히 말은 없지만 태하가 준 보충제를 잘 받아 마시는 걸 보면 경계심은 많이 풀린 모양이었다.

이제야 그는 소녀에게 말다운 말을 걸어 본다.

“이름이 뭐야?”

“……몰라.”

“나이는?”

“잘은 모르는데 주변에서 열일곱 살이래.”

“주변에서? 누가?”

소녀는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사방을 훑어보았다.

“……목 잘린 귀신, 팔 잘린 귀신, 총 맞은 귀신, 그런 귀신들이 그래.”

“귀, 귀신을 보는구나.”

“응.”

아마도 영매라서 귀기를 받아들이는 어떤 실험을 당했다, 태하는 그리 짐작했다.

만약 이용광의 키메라를 만든다면 방법은 오로지 그것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나저나 나는 왜 죽이려고 한 거야?”

“……던전의 마귀가 시켰어. 더 강해질 수 있다고.”

“강해져? 그래서 뭘 어쩌려고?”

“복수할 거야. 헬파이어……!”

자세한 사정은 잘 몰라도 그녀의 복수심은 진짜였다.

마치 태하가 과거 아수라 길드를 부숴 버리겠다고 이를 갈았을 때처럼 말이다.

“그럼 아직도 던전의 마귀가 네 안에 있어?”

“아니……. 마이트가 몰아냈어.”

“아하! 마이트……!”

“지금은 내 안에 마이트가 있어.”

마이트는 따뜻한 성좌다.

이 사연 많은 소녀를 보았으니 아마도 그냥 넘어갈 수 없었던 것이 분명했다.

‘……마이트, 당신은 정말.’

같은 점진적 과부하를 가진 사이로서, 또는 피를 나눈 사이로서 이제 태하는 소녀를 지나칠 수 없었다.

“같이 해 보자. 그 복수.”

“……같이?”

“나도 놈들에게 빚이 좀 있어. 그걸 반드시 갚아 줘야 할 것 같거든.”

소녀는 태하의 접근이 좀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싫어…….”

“어째서?”

“사람은 악독하잖아.”

“너도 사람인데? 나도 그렇지만.”

“……악독해.”

이 아이를 어쩌면 좋을까.

바로 그때, 곁을 지나던 한 회원이 던지듯 말했다.

“그럴 땐 애니멀 테라피가 좋아.”

“애니멀 테라피……?”

“상처를 치유해 주는 거지. 마음의 상처부터 어루만져 줘. 그게 우선이야.”

태하는 무릎을 쳤다.

“그럼 딱 좋은 녀석이 있지!”

***

늦은 밤, 무덤가를 돌아다니는 소녀가 있었다.

보현 관장이 아름답게 빛나는 사람이 되라고 ‘가빈’이라는 이름을 붙여 준 그녀.

가빈은 무덤가를 돌아다니며 연신 미소를 짓고 있었다.

-크헬헬!

그녀의 옆에는 메이지 2호가 함께 하고 있다.

예전에 던전에서 서판 조각과 함께 묻혀 있었던 메이지 2호는 주로 병력을 담당하는 시신 조달 담당이었기에 싸움에 나설 기회가 별로 없었다.

해서 여전히 레벨 1의 모습 그대로였지만, 그래도 최소한 치한이나 강도쯤은 한 트럭이 몰려와도 가볍게 막아 낼 수 있었다.

“……여기서 좀비랑 스켈레톤을 만들어 낸다고?”

-크헬!

“그럼 그 영혼들은?”

-크에헬? 크헬…….

“그것까진 미처 생각하지 못했구나.”

가빈은 밤마다 연고 없는 시신을 찾아다니며 병력을 조달하는 메이지 2호가 불쌍했다.

그녀는 메이지 2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크헬?

“앞으로는 그럼 괴물의 시신을 파내는 건 어때? 아니면 악인의 시신이나.”

-크헤엘!

메이지 2호가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기뻐하는 녀석을 보는 가빈의 표정도 환하게 밝아졌다.

“악인은 내가 구별할 수 있어. 그러니까 메이지 2호……. 아니, 너도 이름이 있어야 할 텐데?”

-크헬?

“그래, 스켈은 어때?”

-스켈, 스켈!

“그래, 스켈! 앞으로는 우리 같이 악인들을 언데드로 만들자, 스켈.”

-스켈켈!

어느새 둘은 따뜻한 마음을 나누고 있었다.

어쩌면 완벽한 단짝, 그 이상이 되었는지도 몰랐다.

한편,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태하와 동료들.

“……내가 못 살지. 애니멀 테라피를 하라고 그랬더니 스켈레톤을 붙여 놔요?”

“그래도 좋은 친구가 된 것 같지 않아요?”

“뭐, 그렇기는 한데…….”

“어쩌면 저 둘의 처지가 비슷한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메이지 2호, 아니 스켈을 붙여 준 거죠.”

아마 스켈이 없었다면 가빈은 그저 영혼 없이 쇠질 본능에만 이끌려 이곳에 남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허나, 스켈이라는 친구가 생겼기에 어딘가에 정붙일 곳이 생긴 것이었다.

가빈은 스켈을 데리고 잠자리에도 함께 들었다.

스켈레톤에게 이불을 덮어 준다는 게 좀 이질적이긴 했지만 스켈도 제법 만족하는 눈치였다.

“잘 자, 스켈.”

-스켈……!

서로 부둥켜안고 잠이 든 둘.

태하에게 면박을 주었던 한나도 그 모습을 보곤 마음을 바꾸었다.

“……뭐, 나쁘지는 않네요.”

“앞으로 저 소녀가 폭주한다거나 살인을 일삼는 일은 없을 겁니다. 스켈의 정신은 기본적으로 주인과 이어져 있기 때문이죠. 나의 정신, 그러니까 궁극적으로는 마이트의 정신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앞으로는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게 될 겁니다.”

“그나저나 이제 학교에 다녀야 할 텐데. 호적도 없으니 어째요?”

한나의 질문에 윤정은 평소와는 다르게 아주 진지하게 답해 주었다.

“일단 경찰과 검찰에 물어봤는데, 아무래도 케이스가 특이하다 보니 진짜 부모를 찾을 때까지는 임시 호적에 이름을 올리고 있어야 할 것 같대요.”

“임시 호적이라니…….”

가족을 찾지 못해 진짜 이름도 모른 채 살아가야 하는 가빈.

허나, 그런 그녀에게도 이제는 가족이 생길 모양이었다.

걱정하는 헬창스에게 보현 관장이 체육관 문을 박차며 말했다.

콰앙!

“으하하! 가빈이는 이제 우리 헬스장 식구다!”

“관장님……?”

“내가 알아보니까 임시 호적보다는 입양으로 호적을 갖는 게 낫다고 하더라고! 의료보험도 그렇고 학교도 그렇고! 그래서 내 호적에 올려 버렸어!”

“……관장님 호적에 가빈이를요?”

“오늘 아침에 물어보니까 가빈이도 좋다고 하더라고. 안씨 성도 나쁘지 않다나? 아무튼 그래서 이제부터 가빈이의 성씨는 안씨다. 안가빈! 어때, 예쁘지?!”

역시 호탕하기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보현이다.

이제 가빈의 호적 문제는 해결이 되었으니, 그녀의 과거부터 청소해 볼 시간이었다.

“가빈이를 가두었던 연구소는 어떻게 되었대요?”

“파괴된 것 같아요. 가빈이가 나오면서 아예 깡그리 쓸어버린 것 같더라고요. 하지만 DNA를 빨아들이면서 그 기억을 고스란히 흡수했어요. 잘하면 헬파이어가 지금 무슨 일을 꾸미는지 알아낼 수도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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