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9 지겨운 스폰서(1)
주변의 소음으로 인해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왁자지껄한 대회의 백 스테이지.
이곳은 확실히 아시아의 대회라든지 올림피아와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서로를 경쟁자로서 의식하는 게 아니라 서로 펌핑도 도와주고 보충제가 괜찮으면 나눠 먹기도 했다.
“헤이, 챔프! 칼로리바, 괜찮아요?”
“고맙습니다만, 저는 괜찮습니다.”
“흠, 안색이 별로 안 좋은데? 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
“……하하, 그럼요!”
대회의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이자 작년도 미스터 올림피아인 태하를 견제하려는 사람들이 많을 줄 알았는데, 막상 태하가 참가를 해 보니 그렇지는 않았다.
아니, 경쟁자로 의식은 해도 지나친 경계심은 없다는 느낌이었다.
오히려 태하가 참가하지 못할까 봐 많이 걱정하는 모습이었다.
‘참, 사람들은 좋은데. 왜 하필이면 슈퍼 엠톨 같은 걸…….’
그야말로 옥에 티라면 슈퍼 엠톨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잠시 후, 대회 준비를 알리는 방송이 울려 퍼졌다.
-잠시 후, 15분 후에 쇼의 막을 올리겠습니다. 선수들은 준비해 주십시오.
준비 방송이 울려 퍼지자, 각 선수의 코치진들은 근육을 마사지하고 혈액이 더욱 잘 몰릴 수 있도록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다.
그중에는 태하도 얼굴을 아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알베르트 파르카토? 저 사람은 이탈리아의 F1 그랑프리 선수 코치 아니었나? 저런 거물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IFBB가 분명 메이저 단체이긴 해도 F1 역시 엄청난 역사와 전통을 가진 모터스포츠다.
누가 더 인지도가 높은지 굳이 따지긴 힘들어도 F1은 누구에게나 꿈의 무대인 곳이었다.
도대체 그런 F1에서 왜 이곳 IFBB까지 온 것일까?
그것도 계열도 다른 무대인데 말이다.
란돌은 슬그머니 태하의 곁으로 오더니 읊조리듯 말했다.
“……태하 씨도 봤죠? 알베르트 파르카토. 보통 인물은 아니잖아요? 연봉만 해도 수십억은 될 텐데.”
“아니, 저런 사람이 왜……?”
“스폰서 때문이겠죠. 지금 케어를 받고 있는 저 선수의 스폰서가 캐나다의 다국적 투자 기업인 씨월드 컴퍼니 아닙니까?”
“아하! 대기업에서 돈을 막 퍼 줘서 여기까지 온 거군요.”
“쉿! 누가 듣겠어요! 목소리 낮춰서 말하자고요.”
태하는 란돌의 어깨를 잡았다.
[절대적인 공명]
[세 번째 탑의 수호자와 공명하셨습니다]
지금까지는 빅토리아와 태하 둘뿐이었던 ‘공명의 방’에 란돌이 초대되었다.
‘……어? 이거 뭔가요?’
‘탑의 수호자들끼리는 절대적인 공명을 통해 생각을 공유할 수 있어요. 이를테면 SNS의 메신저 기능이랄까요?’
‘허, 신기하네요.’
‘아무튼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대기업 스폰서를 받는 선수들이라 이거죠?’
‘그런 셈이죠.’
기업은 여러 가지 목적으로 스포츠에 투자를 한다.
가장 흔한 목적은 다름 아닌 광고 효과.
허나, 의문인 건 다국적 투자 기업에서 왜 엉뚱하게 보디빌딩에 후원을 하느냐, 바로 그것이었다.
‘요즘 제약이 핫해서 그쪽으로 투자라도 했나?’
‘글쎄요. 그건 더 조사를 해 봐야 알겠죠? TOP10 안에 들면 스폰서와 접선이 되잖아요. 그때 한번 제대로 조사를 해 보자고요.’
이제 곧 스테이지로 올라가려는 태하와 란돌.
그런 그들에게 텔레파시가 전해졌다.
-내가 알아서 조사할 테니까 두 사람은 오늘 대회의 스폰서들과의 만남을 성사시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주세요.
‘……누, 누굽니까?’
-제 소개는 나중에 할게요. 일단 우리는 같은 동료라는 것만 알아 두세요.
빅토리아는 역시 최고의 실행력을 가진 사람이다.
란돌은 얼떨결에 그녀의 말처럼 무대 위로 올라갔다.
***
스테이지 위로 올라선 태하.
방금 전 펌핑으로 인해 수분을 더 뺐더니 이제는 서 있을 힘도 없었다.
끼이이잉……!
귓전을 갉아먹는 이명까지 들려왔다.
이래선 포징은커녕 제대로 숨 쉬는 것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어지럽다……. 이러다가 쓰러질 것 같은데?’
아마 태어나서 이렇게 극심한 빈사 상태는 처음이었을 것이다.
심지어 목숨이 경각에 달렸던 던전에서도 이런 일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조명 때문에 더 힘들어. 죽을 맛이로군.’
이게 바로 사람이 말라 죽는다는 기분인 것일까?
-참가 번호 119번, 포징하세요.
심사위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련해지는 마이크 소리.
태하는 이대로 정신줄을 놓는가 싶었다.
허나 바로 그때, 그의 심장이 다시 크게 뛰기 시작했다.
두근!
“흐어업!”
힘이 불끈 솟아오른다.
[패시브: 좀비의 맷집]
순식간에 장기의 기능이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부족했던 근매스도 채워졌고 몸매에 볼륨감이 급격하게 되살아났다.
‘빈사 상태는 처음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스킬이 제때 터져 줘서 다행이야!’
아무리 운동선수이고 다이어트의 고수라고 해도 지금의 태하처럼 극단적으로 단수를 하는 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일반인은 절대로 따라 해선 안 되는 금기, 태하는 그걸 넘어선 것이다.
대신 이제 크기로도 해 볼 만해졌다.
-참가 번호 119번 선수, 가운데로 이동하세요.
심사위원의 눈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태하는 건치 미소를 뽐내며 스테이지 중앙으로 이동했다.
그러자 경기의 해설위원들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역시! 미스터 올림피아는 다릅니다!
-부족한 근매스를 살인적인 데피니션으로 압살하다니요. 다이어트의 상태가 너무 많이 차이가 나서 정태하 선수 혼자서 쇼를 독차지하는 모습입니다.
-여러분, 왕의 귀환입니다!
다 죽어 가던 태하가 살아나자, 백 스테이지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용팔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오케이! 됐어! 아주 그레이트하게 터져 줬어!”
용팔도 좀비의 맷집이라는 스킬이 언제 어떻게 터지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태하를 극한으로 몰아붙인 것이었다.
만약 태하의 스킬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절대로 할 수 없었던 트레이닝과 전략이었다.
잠시 후, TOP10이 결정되었다.
-95번 선수, 119번 선수…….
란돌과 태하가 나란히 TOP10에 선정되었다.
세컨드가 없는 란돌은 태하와 악수를 하며 기쁨을 나누었다.
“됐네요!”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어요.”
두 사람이 TOP10에 들었다는 소식은 자연스럽게 빅토리아에게로 넘어갔다.
그녀는 두 사람에게 이번 대회의 스폰서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다.
-조사 결과가 나왔어요. 이번 대회의 스폰서들, 전부 폐쇄적 사모펀드로서 지금까지 수많은 자금 세탁과 포탈에 연루되어 온 것으로 보입니다.
‘자금 세탁? 돈세탁 같은 걸 말하는 겁니까?’
-어쩌면 이번 대회도 자금 세탁과 관련되어 있을지도 몰라요.
도대체 헬스대회가 자금 세탁과는 무슨 관련이 있다는 것인지, 이 방면으로는 아예 지식이 일천한 태하로선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다만, 란돌은 뭔가를 알고 있는 눈치였다.
‘자금 세탁까진 잘 모르겠는데, 이번 대회에 보디빌더들을 대거 끌어모은 목적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감이 옵니다.’
-그 목적이 뭔데요?
‘피. 보디빌더들의 DNA요.’
-……DNA?
‘아까 제가 DNA 박스라는 걸 말씀드렸던 거, 기억나시나요?’
-아아! 그 DNA 박스라는 것을 통해서 몸을 불려 왔다고 하셨었죠?
‘그래요. 제 생각에는 이 DNA박스라는 게 보통의 물건이 아닌 것 같아요. 내가 그것을 통해 효험을 봤다면, 당연히 다른 사람도 효험을 볼 수 있겠죠.’
-그럼 이 혈청으로 또 뭔가 이상한 걸 만들 것이라는 소리인가요?
‘그렇지 않겠어요?’
태하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다 보니 돌연 한 가지 기이했던 경험이 떠올랐다.
그것은 바로 70층과 71층에서의 레이드.
‘두 사람, 혹시 70층에 대해서 아시는 게 있어요?’
-제1바벨탑 말인가요?
‘네, 얼마 전에 우리 공격대가 돌파했었죠.’
-저도 직접 가 본 적은 없는데, 우리 길드 중에 재외 한국인이 있어서 들은 적은 있어요. 70층에는 원래 그레이트웜이 산다고 하던데요?
‘……그레이트웜이요? 이상한 거대 거미가 아니고요? 무슨 키메라 뭐시기였던 것 같은데.’
-키메라……?
‘모든 몬스터의 DNA를 다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아니요, 제가 알기론 그런 몬스터는 존재하지 않아요. 각 층의 몬스터는 왕래가 불가능하기 때문이죠.
‘……아아!’
태하의 말을 들은 란돌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가 사용했던 유전자 박스, 즉 DNA-POOL은 어쩌면 몬스터에게 실험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70층에서 공간이동 실험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어쩌면 그건 몬스터를 강화시키기 위한 프로젝트 아니었을까요?’
-충분히 가능성 있어요.
‘그렇다면 오늘 저놈들이 노리는 혈, 반드시 빼돌려야 합니다.’
-아니, 그러지 말고 그 혈청이 어디로 가는지 알아보는 건 어때요?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하지만 방법이 없잖아요?’
뭔가 거대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음이 분명했다.
태하는 그런 음모의 전말을 밝혀내는 데 자신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제가 움직이는 CCTV를 좀 가지고 있는데. 어때요? 써 볼까요?’
-그런 게 있어요?
‘데스벳이라고. 아주 쓸 만한 CCTV죠.’
***
늦은 밤, 어느 답답한 실험실 안.
눈과 귀를 가린 한 소녀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이제 고작 열서너 살쯤 되었을까.
그녀는 손과 발까지 속박당한 채 입에는 재갈이 물려져 있었다.
“우우욱……!”
“준비 다 됐습니다. 시작하시죠.”
마치 십자가 형틀처럼 생긴 구속구에 온몸이 구속당한 그녀를 바라보는 흰색 가운의 남자들.
그들은 아주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합시다.”
“처음은 1250sp로 시작하겠습니다.”
“그걸로 되겠어요? 그래도 마귀의 클론인데.”
“능력만 갖다 붙인 거지 저 소녀가 이용광은 아니잖습니까? 그냥 보통의 평범한 영매일 뿐인데.”
“흠…….”
“이용광은 특이한 케이스입니다. 그는 귀능력자로 각성하였던 데다 엄청난 집념이 있었습니다. 보통의 인물은 그렇게까지 가혹하게 자신을 몰아붙이지는 않아요.”
“2500sp. 그렇게 시작해 보자고요.”
“……방금 제가 한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으신 겁니까?”
덩치가 아주 큰 남자는 다소 호리호리한 남자의 멱살을 쥐었다.
그의 눈에서는 안광이 번쩍여서 사람을 주눅 들게 만들었다.
“헬파이어에서 말이 많습니다. 우리의 능력이 시대를 따라가지 못한다고요. 심지어 놈들은 현영태까지 묵사발로 만들었습니다. 지금 이 속도론 그놈들이 스쿼드를 이룰 때까지 목표를 달성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 하지만 이 소녀의 목숨이…….”
“영매는 얼마든지 있어요. 실험용 쥐가 몇 마리 죽는다고 해서 문제 될 거 있어요? 없잖아요. 하지만 우리가 실험에서 뒤처지면 하나하나 목숨을 잃게 될 겁니다. 그래도 좋아요?”
“……죄송합니다.”
“그럼 시작하시죠. 3000sp로.”
키보드와 작은 액정 모니터가 달린 기계에는 촉수처럼 생긴 긴 호스들이 다발로 늘어서 있었다.
호스는 소녀의 몸에 사정없이 꽂혔는데, 하나하나 살갗을 뚫을 때마다 가녀린 그녀의 몸이 부르르 떨려 왔다.
보통의 주삿바늘을 꽂을 때와는 아예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뼈가 시린 고통이었다.
이윽고 그녀의 몸으로 강력한 압력의 공기가 주입되었다.
위이이잉!
“우우우웁!”
강력한 압력에는 예사롭지 않은 귀기가 담겨 있었다.
-끼에에에에!
“던전 71층에서 거둬들인 영혼이라서 더욱 강력하겠죠?”
“……물론입니다. 그래서 1250sp를 말씀드린 겁니다.”
“괜찮아요. 현영태를 향해 가는 그 길에 한계를 둔다는 건…….”
바로 그때였다.
소녀의 몸이 부르르 떨리더니, 이내 검은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으으으으……!”
검은빛은 어느새 사방으로 퍼져 나가더니 연구실 전체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 빛에는 강력한 마이너스 에너지가 담겨 있었다.
스스스스……!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영혼을 집어넣는 압력이 너무 강력했던 겁니다! 저 소녀, 각성했어요!”
“가, 각성이라고요?!”
마이너스 에너지는 순식간에 주변의 모든 생명체에게 스며들었다.
그러곤 이내 영기만 빨아먹고 그 껍데기는 처참하게 버려 버렸다.
푸하아아악!
사방에서 물 풍선 터지듯이 터지는 인간의 사지 육신.
그 조각조각은 마치 오뉴월의 꽃바람처럼 사방을 수놓았다.
이윽고 스스로 구속구를 해제한 그녀.
딸깍.
여전히 그녀의 주변으로는 검은 오러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빌어먹을 헬창 놈들!
“그놈만 죽이면 되는 거야……?”
-죽여라, 죽여라!
그녀는 좁아터진 실험실에서 나가기로 했다.
소녀는 숫자 패드에 비밀번호를 눌렀다. 그것도 아주 익숙한, 마치 자신의 직장을 드나들듯 말이다.
삐비비빅.
별안간 열리는 문.
그녀는 생명체를 잡아먹음으로써 DNA를 흡수하여 진화하고 있었다.
이제 그녀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