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1 균열(1)
66층으로 올라간 헬창스.
그 어떤 공격도 없는 몬스터들, 아무래도 현영태가 긁어모았던 몬스터들을 한 방에 정리하는 바람에 ‘군림’ 효과가 적용된 것으로 보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것은 라이먼트가 태하의 하수인이 되어 버렸다는 것.
-으하하! 70층까지 내가 확 쓸어버릴까?! 시켜만 달라니까?! 내가 이 근방의 골목대장이라는 거 아니야! 대장, 이제 대장 자리를 가져갔으니까 내가 행동대장인가?! 그런가?!
“……귀 따가워 죽겠네. 저 새끼 좀 닥치게 할 수 있는 방법 없나?”
-대장! 내가 부대장이지, 그렇지?! 데스워리어 이 새끼! 씁! 형님이 70층까지 친히 납신다는데 빠릿빠릿하게 못 움직이지?! 내가 내려가서 확 족쳐야…….
윤정은 씁쓸한 눈으로 놈을 바라보았다.
“헬창 헌터씨, 내가 저런 느낌이었어요?”
“아니요. 윤정 씨는 저런 느낌이 절대로 아니었죠. 윤정 씨는 같이 있으면 힘이 솟는데 저놈은…… 짜증이 솟구치죠.”
라이먼트는 태하의 주변을 맴돌며 마치 위성처럼 그를 경호하고 있었다.
태하는 몇 번이고 라이먼트에게 65층으로 돌아가라고 말했으나, 그는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자신이 곧 죽어도 부대장이라는 것이었다.
“머리가 지끈거리네요.”
“그래도 저만한 보디가드도 없어요.”
“……그건 맞죠.”
66층을 지나 67층으로 향했으나 역시 태하를 막아서는 몬스터를 찾아볼 수는 없었다.
도대체 몇 층까지 몬스터를 긁어 왔었을까?
68층으로 올라간 태하는 간간이 으르렁거리기만 하는 몬스터들을 뒤로한 채 69층으로 올라갔다.
이번에도 몬스터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봐, 썩은 슬라임.”
-썩은 슬라임! 대답하라고 하시잖냐!
“아니, 너 말이야, 너.”
라이먼트는 썩은 슬라임이라는 소리에 폭소를 터뜨렸다.
-푸하하하! 내가 썩은 슬라임이라고?! 음, 나쁘지 않은 이름인데? 그게 바로 애정이 있는 누구에게만 붙여 주는 별명이라는 거지?! 대장이 지어 준 별명이라니, 데스워리어 이 새끼! 너는 별명도 없지?! 나는 있다 이거야!
“……이 새끼는 한 마디를 하면 열 마디를 하네.”
-크크, 내가 원래 좀 정이 많아서 그래!
“아무튼 간에 뭐 좀 물어보자. 지난번 현영태 사건 당시, 도대체 몇 층까지 몬스터가 쳐들어온 것이었지?”
-그야 당연히 이곳 69층이었지.
“그럼 70층에는 몬스터가 있겠네?”
-아니, 없어.
태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개 콧구멍 후비는 소리야? 70층에 왜 몬스터가 없어? 방금 전에는 69층까지만 몬스터를 긁어 왔다면서.”
-맞아. 69층까지 긁어 온 거.
“아니, 그럼 앞뒤가 안 맞잖아. 너 이 새끼, 진짜…….”
-무슨 소리지? 70층에는 원래 몬스터가 없었어.
태하는 물론이고 태하와 함께 있던 헬창스 전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수라 길드는 분명 70층에서 퇴각하여 내려왔다고 했는데, 그렇게 되면 아수라 길드는 그곳에서 도대체 뭘 했다는 것일까?
“몬스터가 없으면 뭐가 있는데?”
-균열이 있지.
“……균열이라고?”
-바벨탑에 균열이 생기고 있었잖아. 그래서 71층부터는 몬스터가 훨씬 더 강력해진 거고.
“그럼 보스는?”
-균열과 함께 산화해 버렸대. 또 모르지, 공간이 복구되면 다시 생길지.
도대체 아수라가 여기서 뭘 한 것인지는 올라가 보면 알 일이었다.
태하와 일행들은 70층으로 거침없이 올라섰다.
쿠그그그극……!
70층 입구에서부터 심상치 않은 진동과 공기의 기류가 느껴진다.
“……공기의 흐름부터 심상치 않은디? 이거, 올라가도 괜찮은 겨?”
“단순한 화이트홀이 아니라 던전의 균열이에요. 강력한 마력이 쏟아져 나오고 있네요.”
아직 균열이 어디에 일어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70층은 아주 넓은 황야가 펼쳐져 있는 모습이었는데, 그야말로 지평선 너머까지 황색의 땅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그 작은 바위 하나, 돌멩이조차 보이지 않았다.
“윤정 씨, 공간이 통째로 날아가 버린 건가? 원래 70층은 어떤 땅이라고 알려져 있습니까?”
“책에서는 생명체가 살기 힘든 땅이라고 하긴 했는데, 그건 어떤 독성 물질 때문이라고 들었어요.”
“……이건 독성 물질이고 뭐고, 아예 아무것도 없는데요?”
“내 생각에는 공간의 일그러짐 현상이라든지 어떠한 폭발로 인해 모든 것이 사라진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해요.”
“폭발로 인해 모든 것이 사라졌다……?”
“기류의 움직임으로 봐선 중심부로 갈수록 에너지의 이동이 급격해지는 것 같은데, 저 중앙부로 가 보면 뭔가 알 수 있지 않겠어요?”
“가 보기 전에는 알 수 있는 것이 없다. 뭐, 그런 거네요.”
“그런 셈이죠.”
바로 그때였다.
두근!
심장이 뛰며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저 앞에는 뭔가 심상치 않으나 영혼의 울림이 느껴지도록 만드는 것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갑시다!”
***
서울 남부구치소 안.
이용광은 감방에 홀로 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우적, 우적…….”
언제 어디서든 밥 하나는 정말 잘 먹는 이용광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입맛이 정말 좋다거나 지금 기분이 엄청 좋은 건 아니었다.
그는 어쨌거나 살아야 하기에 입으로 밥을 꾸역꾸역 밀어 넣고 있을 뿐이었다.
“……이게 콩밥이라는 건가.”
마치 모래알을 씹는 느낌이었지만 그는 기계적으로 수저질을 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감방의 창살 너머로 한 교도관이 다가왔다.
“길드장님, 있을 만하십니까?”
“……누고?”
“저 기억 안 나십니까? 안칠성 아닙니까.”
“……안칠성?”
“하하, 어떻게 같은 길드에서 3년을 넘게 일한 사람을 기억 못 하실 수가 있습니까?”
이용광은 이맛살을 구겼다.
그는 자기 휘하에 있는 사람은 절대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상하데이?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사람 얼굴하고 이름은 기똥차게 외운다 아이가.”
“제가 워낙 말단이라서 기억이 안 나시는 건 아니고요?”
“우리 길드 용역이 아니고서야 기억이 안 날 리가 있나.”
“그렇다면 더욱 실망이네요. 저를 기억 못 하신다니.”
“……뭐, 그렇다면 미안하데이. 아무튼 간에 밥 묵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고 안 하나. 좀 내버려 둬.”
“저 좀 봐 주세요! 정말로 기억 안 나세요?!”
이용광은 쇠창살을 흔들며 약간 흥분한 듯이 지껄이는 교도관 안칠성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러곤 자리에서 일어나 창살로 다가갔다.
비록 사람 손바닥 하나만큼도 안 되는 공간이었지만 그곳으로 바깥을 살필 수는 있었다.
“……참말로 사람을 귀찮게 하는기라. 이놈의 감방은 참으로 파이라…….”
바로 그때였다.
푸욱!
사람 머리카락보다도 얇은 침이 그의 눈을 뚫고 들어왔다.
순간, 몸이 굳어 버렸고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허나 그 순간, 이용광은 머리로 뭔가 뚜렷한 형상이 스치고 지나감을 느꼈다.
이를 악무는 이용광.
그는 쇠창살을 잡고 버티고 섰다.
무너질 것 같은 신형을 끝까지 부여잡고 있었던 것이다.
쿠그그극……!
창살에 힘을 주자, 그 안에 손자국이 생겼다.
아직 힘이 조금은 남아 있었던 것이다.
허나, 그의 남은 인생은 그리 길지 않았다.
“허, 허억! 너, 너, 이…….”
“다들 실망이 크다고 하십니다. 다만, 당신이라는 인간의 능력은 높이 사는바, 그 능력을 가지고 가겠습니다.”
“우웨에에엑!”
“조만간 헬창 헌터와 지옥에서 뵙도록 하죠. 신에게 용서를 비는 건 그때부터입니다. 그동안은 지옥에서 머물게 될 겁니다.”
침을 뽑자마자 사방으로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이용광.
교도관으로 보이는 남자는 침을 품속에 잘 갈무리한 후, 그대로 사라졌다.
파앗!
그것은 포털을 통해 이동한 공간이동도 아니었고 단거리 점멸과 같은 마법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귀신처럼 바람과 함께 흩어진 것이었다.
“우헉, 우헉…….”
간헐적으로 피를 토해 내는 이용광.
그는 죽기 1초 전, 손가락을 움직여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슥슥…….
허나, 그의 손은 뭔가를 완성하기도 전에 우뚝 멈추고 말았다.
그에게 허락된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이다.
이용광이 손가락으로 그린 것은 반쪽짜리 삼각형이었다.
원 안에 들어간 작은 삼각형, 그것을 그리다가 숨진 것이었다.
***
70층의 한가운데.
이곳에서는 지금까지 태하가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강력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직경 80미터의 거대한 구멍, 그곳에서는 끝도 없는 마력이 솟구치고 있었다.
“……이게 바로 던전의 균열?”
“아수라 길드는 이걸 뚫다가 퇴각한 걸까요?”
“모르죠. 이걸 뚫는 와중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지.”
“아무튼 이걸 회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로 그때였다.
태하의 심장이 또다시 두근거렸다.
쿠웅!
이번에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더니 그의 하복부를 향해 사정없이 날아드는 석판 하나.
퍼억!
“크허어억!”
“태하 씨!”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였다.
미처 그곳에서 물체가 튀어나왔다는 자각이 들기도 전이었다.
그의 복부는 순식간에 피로 물들었다.
“쿨럭, 쿨럭!”
“닥터!”
이주현은 당장 태하의 상처를 살피기 시작했다.
아마도 큰 절상이 났다고 생각했기에 그는 당장 수술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허나, 그는 태하의 복부를 만지곤 눈이 휘둥그레졌다.
“……상처가 없어요.”
“상처가 없다고요? 그런데 왜 피가…….”
태하의 하복부를 물들였던 피는 한순간 다시 흡수되더니 그의 복부에 룬어를 새기기 시작했다.
[지옥경: 4장 - 파괴]
복부에 글귀가 새겨지자, 그곳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치이이익!
단순히 열이 나는 정도가 아니라 살이 타는 냄새가 진하게 올라왔다.
“끄아아악!”
“뭐,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이게!”
“닥터! 뭔가 방법이 없어요?!”
“이런 초자연적인 현상에는 어쩔 도리가 없다고요!”
마치 몸 안의 백혈구가 세균과의 전투를 벌이는 듯, 태하의 몸속에서는 두 세력이 서로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지옥경, 그것이 과연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서판 조각들이 그것을 공격하여 완전히 굴복시키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허나, 굴복시키려 하면 할수록 지옥경은 강렬하게 저항하며 태하의 장기마저 녹여 버릴 기세였다.
바로 그때, 대천사의 구원자 스태프가 공명했다.
끼이이이잉!
“지팡이가 움직이는데요?!”
“한번 대 봅시다!”
희란은 당장 태하의 하복부에 구원자 스태프를 가져다 댔다.
그러자 놀랍게도 열이 잦아들며 지옥경이 그 힘을 잃기 시작했다.
[지옥경이 봉인되었습니다]
[패시브: 점진적 과부하 - 좀비의 맷집]
[지옥경에 대한 내성을 획득하셨습니다]
파앗!
눈을 번쩍 뜨는 태하.
그는 본능적으로 이 지옥경이라는 것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이 지옥경이라는 것이 공간의 균열을 만들어 낸 겁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예요?”
“파괴, 오로지 그것을 위해서 만들어진 가짜 서판이에요. 이거, 위험한 물건입니다!”
태하가 정신을 차리고 지옥경이 봉인되자, 던전을 지배했던 울림은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어째서 백선이 자신을 이곳으로 보냈고 마이트는 왜 자신을 선택했는지 말이다.
‘나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했던 것, 바로 이런 것을 일컫는 것이었을까?’
오로지 태하만이 지옥경을 흡수할 수 있고, 그것을 봉인할 수 있었기에 백선과 마이트는 태하를 이곳으로 보낸 것이었다.
희란은 태하를 와락 끌어안았다.
“대장! 죽는 줄 알았잖아요! 내가 아무거나 주워 먹지 말랬죠!”
“……내가 무슨 땅거지인 줄 알아? 그리고 이거, 내가 먹고 싶어서 먹은 거 아니야.”
“하여간…….”
살았다는 안도감이 찾아왔다.
허나, 그 안도감은 채 1초도 가지 못했다.
쿠그그그그……!
“뭐지? 땅이 또 흔들리는데요?”
“허어! 저기 봐요!”
파티가 서 있는 바로 땅 아래에서부터 뭔가 묵직한 기운이 느껴진다.
그러더니 이내 땅이 우뚝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쿠그그그극!
“따, 땅에서 산이 솟아나?!”
“다들 피해요!”
땅에서 솟아난 산의 정체는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