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7 재활훈련(1)
이른 아침부터 덕림헬스가 시끌시끌하다.
TV에는 얼마 전 영국 프리미어 리그의 간판스타 ‘라이오넬 사우스체스터’의 부상 소식이 전해지고 있었다.
태하는 그래서 그런가 싶었다.
허나, 회원들은 라이오넬 사우스체스터에게는 관심도 없었다.
“……얼굴이면 얼굴, 몸매면 몸매. 뭐 하나 빠지는 게 없군. 설화에 나오는 엘프 아니야?”
“미스유니버스라잖아! 그럼 뭐, 말 다 했지.”
도대체 누굴 두고 하는 얘기일까?
태하는 웅성거림을 따라서 천천히 걸었다.
바로 그때, 그의 뇌리에 뭔가 섬광 같은 것이 번쩍거렸다.
끼이잉……!
마치 흩어진 조각을 찾았다는 듯, 그의 영혼이 공명하는 느낌이었다.
‘……엄청난 울림이다. 뭐야, 도대체?’
아마 태어나서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두꺼운 근육에 둘러싸여 이제까지 두근거림을 느끼지 못했던 심장마저 부르르 떨려 왔다.
그는 인파를 헤치고 카운터 상담 의자에 앉아 있는 한 여인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서는 그녀.
“정태하 씨?”
“누구십니까?”
“만나서 반가워요. 파워드 피스의 사무장 빅토리아 화이트입니다.”
흑발의 벽안, 마치 동서양의 오묘한 만남이라는 단어를 컴퓨터 알고리즘에 넣고 3D 프린터로 빚어낸 느낌이었다.
동양 미녀의 백옥 같은 피부와 서구적인 이목구비, 게다가 흑발과 벽안의 조화는 그야말로 신의 조각품 그 자체였다.
그녀는 176cm의 시원시원하고도 늘씬하게 뻗은 아름다운 신체를 자랑하듯 일어섰다.
“잠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네, 그러시죠.”
상당히 격식을 차리는 말투였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한국어를 원어민 아나운서만큼 발음한다는 점이었다.
태하는 그녀를 데리고 지하 휴게실로 향했다.
또각, 또각…….
묵직한 하이힐 구두 굽 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그녀는 휴게실로 가는 길에 이렇게 물었다.
“파이어볼이 말썽이죠?”
대뜸 파이어볼에 대해 물어 오는 그녀.
태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그러자 빅토리아는 정말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알아요. 아직 우리가 만난 지 얼마 안 되었다는 걸. 대답하기 곤란하다면 안 하셔도 됩니다.”
“흠…….”
“하지만 당신도 성좌의 신탁을 받았다면 느꼈을 겁니다. 영혼의 울림을요.”
계단을 내려가던 그녀가 우뚝 멈추어 섰다.
그러곤 자신보다 두 칸 아래에 있던 태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성좌의 스쿼드: 제2탑의 수호자]
[7명의 수호자 중 두 번째를 찾았습니다]
[패시브 ‘절대적인 공명’을 얻었습니다]
[제2탑의 수호자가 서판 조각 ‘믿음’의 특성을 개방했습니다]
빅토리아와 ‘절대적인 공명’을 통해 영혼의 소통을 한 태하.
그는 빅토리아의 서판 조각 ‘믿음’의 특성을 통해 그녀의 진심을 읽을 수 있었다.
“아마 서판 조각의 힘으로 제가 앞으로 거짓말을 한다면 미리 알아낼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한 가지만 약속드리죠. 저는 당신에게 무조건적인 믿음과 신뢰를 드릴 겁니다. 돌려받을 생각은 없어요. 그냥 그렇다는 것만 알려 드리는 겁니다.”
다소 딱딱하고 차가울 정도로 정중한 말투.
허나, 그녀를 신뢰할 수 있다는 것만큼은 바뀌지 않는 진실이었다.
***
덕림헬스 휴게실에 마주 앉은 두 사람.
키위 맛 프로틴 음료수를 손에 쥔 빅토리아가 말했다.
“파이어볼이 제2바벨탑에 화이트홀로 위해를 가하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아마 몇 년 안에 바벨탑이 무너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놈의 파이어볼은 어딜 가도 말썽이로군.”
1950년대에 대한민국에서 바벨탑의 존재 여부를 발견한 미국은 오대양 육대주 모든 국가의 설화와 민담을 추적하여 바벨탑을 찾아냈다.
정말 거짓말 같게도 대한민국에서 바벨탑이 우뚝 솟아나 수도 서울의 남부 지역을 초토화시켰을 때, 나머지 6개의 탑도 함께 솟아올랐다.
제2바벨탑은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에 위치해 있는데, 이곳에서는 C급 이상의 코어만 생산되며 하층에서는 코어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이렇듯, 한국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주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있었다.
바로 레이드펀드 파이어볼이 입주해 있다는 것.
“지금까지 알아낸 정보를 공유해 주신다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빅토리아가 과연 어떤 사람인지는 몰라도 그녀 역시 탑의 수호자로서 살아가고 있다.
만약 그렇다면 태하는 그녀에게 모든 것을 오픈해도 괜찮겠다 싶었다.
여기에도 한 가지 조건은 있었다.
“우리는 이제 같은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겁니까?”
“아마 마이트에게 들으셨겠지만, 우리 탑의 수호자는 7명이 모여야 비로소 진가를 발휘하게 됩니다. 단순히 100층만 정복한다고 끝이 아니라는 소리입니다. 절대적 신뢰, 우리에겐 그런 것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절대적 신뢰라……. 뭐, 그렇다면야 100% 오픈하지 못할 이유는 없죠.”
그녀는 태하에게 손을 내밀었다.
“절대적인 공명, 그것으로 서로 공명하는 것은 어떨까 싶습니다만.”
“절대적인 공명을 어떻게 사용하는 건데요?”
“저도 잘은 모릅니다. 하지만 보통의 능력은 아니라는 느낌이 드는군요.”
오늘 처음 만난 그녀.
허나, 태하는 탑의 수호자들이 패시브 스킬까지 내려 주었다면 오히려 힘을 합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손을 잡는 태하.
파앗!
두 가지 색의 물감을 한데 넣고 섞는 듯, 태하와 그녀의 영혼이 서로 뒤섞이기 시작했다.
파란색은 흰색과 섞이고 흰색은 파란색과 섞여서 이제 두 색은 서로 같은 색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다만, 파란색은 흰색이 섞인 파란색이었고 흰색은 파란색이 섞인 흰색이었다.
두 색은 섞였지만, 여전히 자신의 색은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느낌이 이상한데요?”
“이제는 서로의 생각이 통하는 것 같습니다. 굳이 오픈하고 싶지 않다면 감출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서로가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되는 것은 공유할 수 있겠군요.”
두 사람은 이제 텔레파시가 통하기 시작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고 매개체가 없이도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아주 느릿느릿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흠……. 지금까지 아주 많은 일이 있었나 봅니다. 그리고 공간 조율 버프라니, 신기한 능력도 생겼습니다.”
“그나저나 무한의 소환사는 대체 누굽니까?”
두 사람은 1개의 대화방에 들어가 있는 형국이다.
이곳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지식들을 쭉 늘어놓는데, 방금 빅토리아의 말처럼 감추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감출 수도 있다.
허나, 빅토리아는 자신이 아는 것이라면 아무것도 감추지 않았다.
“존재하는 것만 압니다. 사실, 오늘 당신을 굳이 찾아온 이유도 저 무한의 소환사가 요즘 샌드타워 일대를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샌드타워라……. 그렇다면 제가 일전에 본 그 고블린들도 무한의 소환사에게서 나온 것일지도 모르겠군요.”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빅토리아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더 이상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조만간 파워드 피스를 통해 청룡방과의 공조를 요청하겠습니다. 일단 제2바벨탑의 화이트홀 사태를 최대한 막아 내면서 제1바벨탑 100층을 돌파하는 것으로 합시다.”
“공조라니. 같이 돌파를 해 보자는 겁니까?”
“가능하다면 말입니다. 그러니 그때까지 당신은 대사형의 오러를 최대한 끌어 올려놓아야 합니다.”
“안 그래도 구독자 수가 계속 증가하고 있어요.”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그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지금보다 훨씬 더 주목을 받을 필요가 있단 말입니다. 앞으로는 내가 당신을 돕겠습니다.”
“흠…….”
“그나저나 정체기는 돌파하셨습니까?”
이제 생각이 통하니 정체기에 대해서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다만, 정체기를 돌파했다는 건 본인만이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태하는 빙그레 웃었다.
“물론이죠.”
***
늦은 오후.
고립관의 스테로이드 마인드가 극에 달하고 있었다.
“……가자, 태하야!”
“흐어어업!”
데드리프트의 운동 모션이 몰라보게 달라진 태하.
보현 관장은 태하의 엉덩이를 소리가 나게 마구 때렸다.
짝짝짝!
“그래, 바로 이거지! 지면에서 무게를 들어 올릴 때, 수직 운동 중에 견갑의 전인이 후인으로 이어지는 리듬이 상당히 매끄러워졌잖아! 이거라고!”
이제 견갑을 후인 시키는 과정에서 온전한 수축, 오로지 광배근을 타깃으로 하는 아주 완벽한 모션이 완성되었다.
이것은 로우로우 혹은 원암 덤벨로우를 할 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개념인데, 마치 암스트레이트 풀다운을 해 주는 것처럼 후인에서 광배를 강하게 쥐어짜 내는 것이다.
보현 관장은 고개마저 절레절레 흔들며 손뼉을 쳤다.
짝짝짝!
“굿, 베리굿, 마이 보이!”
“이제야 광배에 진짜 자극이 오는 것 같아요!”
지금까지 태하는 한 가지 진리를 잊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운동의 목적이었다.
“이거 봐! 이러니까 내가 디로딩 기간을 가지라고 했던 거야. 척추를 바로 세우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고 근육에 의해 정립이 되게 만드는 것. 이런 것을 배우라는 의미였던 거야.”
무려 3t이 넘는 중량에서 850kg으로 중량을 줄인 태하.
허나, 디로딩 이후 무의식적으로 강화 버프를 주는 것을 배제하면서 근육의 미세 손상도는 훨씬 더 많이 올라갔다.
한마디로 운동의 길을 찾은 것이다.
웃통을 벗고 거울에 등을 비춰 보는 태하.
“……좋아!”
“그래, 이거지! 이야, 정말 디로딩하길 잘했다! 그치?”
“네, 관장님!”
“오케이, 계속 간다! 올림피아 2연패 달성해야지!”
데드리프트 이후 바벨로우, T바로우, 원암 덤벨로우로 이어지는 훈련.
이 모든 훈련에서도 태하는 스킬을 빼고 오로지 순수한 힘만으로 훈련에 임했다.
무게를 평균 4.5배, 더러는 6배까지 덜어내면서 강화 스킬 없이 신체 스스로의 힘만을 이용한 것이다.
운동이 끝나고 보충제를 챙겨 먹는 태하.
헌데 어쩐지 근력은 더욱 상승한 것 같았고 근육의 강도 역시 상상 이상이었다.
‘확실히 더 강력해졌다!’
[파생 스킬: 멸치로 살 바엔 차라리 죽음을 택한다! - 바디프레임]
[강력한 근육은 강력한 프레임에서 나옵니다]
[디폴트 스텟 및 스킬 포인트가 증가합니다]
지금까지 태하는 스킬에 의해 스텟이 증가함으로써 몸이 강력해져 왔다.
허나, 이제는 보너스가 아닌 신체 그 자체가 성장함으로써 이전보다 훨씬 더 강력해진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다만, 이러한 성장은 스킬을 이용한 성장에 비해 다소 더딜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성장 이후의 기반은 훨씬 더 단단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운동을 마치고 잠시 쉬는 시간.
별안간 고립관의 문이 벌컥 열렸다.
콰앙!
의사 가운을 입은 이주현이었다.
“……대장, 드디어 됐어요!”
“뭐가 돼요?”
“엄마나, 세상에! 내가 무한의 기관단총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고요!”
“오오! 축하해요!”
“이게 대체 무슨 일이다니! 대사형, 정말 고맙습니다! 진료 도중에 갑자기 스텟이 상승해서 보니까 퀘스트 아이템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더라고요!”
“하하, 그렇다고 진료 도중에 뛰쳐나오면 어떻게 해요?”
“……허엇! 맞다, 진료! 그럼 이따가 봐요! 이만 갑니다!”
아주 기분 좋은 성장이다.
한껏 성공을 만끽하고 있는데, 태하에게 텔레파시가 전해졌다.
끼이잉!
-이제 곧 대사형의 오러를 강화할 기회가 올 겁니다. 그들의 마음도 잘 다독여 주세요.
바로 빅토리아의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