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6 정체기라니, 내가 정체기라니!(2)
샌드타워를 찾은 태하.
웅성, 웅성……!
‘안전제일’이라는 표어가 붙은 안전모를 쓴 탐험가들이 샌드타워 앞에 모여 있었다.
높이 18m, 넓이 8m의 직사각형 물체.
저 안에선 365일 쓰레기가 하치 되며 매일 새로운 물건이 쏟아져 나온다.
태하는 샌드타워를 통제하고 있는 샌드타워 관리 기구 ‘스위퍼’의 관계자들을 만났다.
“수고하십니다. 청룡방 특무관 정태하입니다.”
“아아! 드디어 오셨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스위퍼의 샌드타워 관리국장 강선우입니다.”
“저 안에 고블린이 출몰하고 있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저놈의 고블린 때문에 탐험가들이 일도 못 하고, 아주 죽을 맛입니다.”
샌드타워는 공인된 수집가, 모험가, 탐험가만이 출입할 수 있다.
바벨탑과는 다르게 이곳은 철저하게 생존만을 위한 기술이 필요하기에 이상 현상, 자연현상에 정통한 자들만이 투입되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생존 기술을 익힌 사람들도 이곳에서 살아 나올 확률은 50%에 불과하다.
바벨탑으로 들어가도 3층 이내에선 생존 확률이 90%가 넘는 것과는 확실히 대조되는 생존율이다.
“가뜩이나 생존하기 힘든 샌드타워 안에서 몬스터까지 상대해야 하니, 사람들이 얼마나 괴로운지 모릅니다.”
“흠……. 그 몬스터는 지금 어느 지역에 있죠?”
“다행히도 입구 근처에 진을 치고 있어서 처치가 그렇게까지 어려울 것 같지는 않습니다.”
태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그렇게 간단한 문제면 샌드타워 가드들이 알아서 처리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 가드가 다 죽어서 말입니다.”
“가드가 전멸했다는 말입니까……?”
“애석하게도 그리되었습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샌드타워의 가드는 헌터 중에서도 정예만 골라서 기용하게 되는데, 그들의 전투력은 기본 A등급 이상은 된다.
헌데 그런 일류 용병들이 이곳에서 떼죽음을 맞이했다는 건 사실 이해가 잘 안 되는 일이었다.
“정말 고블린만 있는 게 맞아요?”
“네! 고블린만 있습니다.”
“그런 고블린에게 100명이 넘는 가드가 쓸렸다는 건 사실 이해가 잘 안 되는 일이긴 한데…….”
“아마 직접 보시면 이해가 될 겁니다.”
태하는 스위퍼의 관계자들과 함께 샌드타워 안으로 들어갔다.
샌드타워는 바벨탑과 마찬가지로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른 곳이다.
겉으로는 직사각형의 공간처럼 보이지만, 저 안에는 3년에 한 번씩 공간이 변하는 ‘무한의 공간’이 펼쳐져 있다.
솨아아아……!
샌드타워 안으로 들어가는 포털을 지나자마자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지금은 세컨드 시즌입니다. 앞으로 넉 달 후에 서드 시즌이 시작됩니다.”
그랜드캐니언의 무려 240배나 되는 엄청난 크기의 협곡이 펼쳐지는 퍼스트 시즌이 끝나면 곧바로 해변과 군도로 이뤄진 세컨드 시즌이 시작된다.
스위퍼는 나침의와 지도를 꺼냈다.
이곳에서는 코어 기반의 전자 기기조차도 먹통이 되기 때문에 오로지 나침반에 의지해서 탐험할 수밖에는 없다.
“여기서 서북쪽, 제71번 해안가에 고블린들이 위치해 있습니다. 걸어서 30분쯤 가면 될 겁니다.”
도대체 끝이 어디인지도 모를 정도로 넓은 푸른 모래사장이 넓게 펼쳐져 있었고, 해변 곳곳에는 인간이 꽂아 놓은 것으로 보이는 이정표가 박혀 있었다.
태하가 이정표를 신기하게 바라보자, 강선우가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아, 저거요? 드롭 포인트입니다. 시즌마다 총 31,213개의 드롭 포인트로 물건이 무작위로 쏟아집니다.”
“물건은 블루샌드와 함께 쏟아져 들어오는 것 아니었나요?”
“그렇기는 한데, 그것은 대부분 고물이고 제대로 된 물건은 이 드롭 포인트를 통해 떨어지죠. 드롭 포인트도 각 포인트마다 드롭 스코어가 책정되는데, 지형이 험준할수록 보통 스코어가 높게 책정됩니다. 그래서 레어, 유니크 아이템을 얻으려면 에베레스트보다 험준한 산맥을 서너 개쯤 건너야 할 때도 있죠. 게다가 스위칭 시즌에 맞물려서 샌드타워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그대로 우주의 미아가 되어 버리기도 하고요.”
“……아니, 그런데도 아이템을 얻으려고 달려든단 말입니까? 게다가 샌드타워 라이선스를 얻으려면 최소 10년 이상은 공부를 해야 한다고 하던데요.”
“맞습니다. 10년 이상을 공부해야 하고 생존 훈련도 같이 받아야 하죠. 하지만 아이템을 얻었을 때의 쾌감 때문에 끊지를 못하는 겁니다. 뭐랄까, 던전을 오르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나 할까요?”
“하긴…… 던전을 오르는 것도 미친 짓이긴 마찬가지죠.”
인간은 비단 돈 때문에 바벨탑이나 샌드타워를 오르는 게 아니다.
마치 뭔가에 홀린 듯, 살짝 미친 상태로 맹목적인 목표를 좇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헤어 나올 수 없는 마력과도 같은 것, 그게 바로 탑들이 가진 매력이었다.
스코어 1~5점대의 손쉬운 포인트를 지나 30분쯤 걸었을 무렵이었다.
-키헤헤!
“……음, 이 비열한 웃음소리. 어쩐지 익숙한데, 이거?”
저 멀리 땅이 새까맣게 보인다.
태하는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 웃음소리가 더욱 진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침내 바로 앞에서 고블린과 마주했을 때, 태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지평선이 까맣게 보였던 것은 고블린이 그만큼 빽빽하게 운집해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건 고블린 몇 마리 수준이 아니잖아요……?”
“몇 마리요? 누가 그럽니까? 겨우 몇 마리 수준이었다면 가드가 몰살을 당하는 일도 없었겠지요.”
태하는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어쩐지 뭔가 이상하다 싶었더니 유시연이 잘못된 정보를 전달해 준 것이었다.
‘이 여자, 일부러 귓속말까지 하고 내 혼을 쏙 빼놓은 것이었구나!’
유시연이 괜히 마인드헌터라고 불리는 게 아니다.
그녀는 사람을 가지고 노는 데 아주 이골이 난 각성자였던 것이다.
“……이걸 혼자서 쓸어버리라고 한 거야?”
“호, 혼자 오신 겁니까? 당연히 안 됩니다. 이건 레이드의 신이 온다고 해도 불가능한 규모입니다.”
태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유시연이 정말 태하를 엿 먹이겠다고 혼자 이곳에 보낸 것일까?
‘뭐지? 도대체 뭐 때문에 나 혼자 이곳에 보낸 거지?’
아직까지 답은 찾을 수 없었다.
허나, 이것도 부딪쳐 보면 알게 될 일이었다.
“지금부터 샌드타워에 대한 수사를 시작하겠습니다. 특무관 권한으로 이곳을 잠시 폐쇄시킬 수 있습니까?”
“네, 지금도 폐쇄가 되긴 했습니다만.”
“여러분들을 포함해 저 말고는 그 어떤 누구도 들어와선 안 됩니다. 그래 주실 수 있습니까?”
“……혼자서 저걸 다 쓸어버리시게요?”
“가능합니다. 제가 청소해 놓고 다시 연락드릴 테니 잠깐만 나가 주시지요.”
뭔가 좀 찝찝하긴 해도 강선우는 어차피 고블린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말짱 꽝이니 일단 태하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좋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인명 피해가 일어나면 곤란합니다.”
“그야 당연하죠.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강선우는 관계자들을 모두 데리고 샌드타워를 나섰다.
이제 이 넓은 공간에 남은 사람이라곤 태하 1명뿐이었다.
메이지를 소환하는 태하.
“메이지!”
-크헬헬!
“지금부터 저 고블린들과 싸울 거야. 우리 쪽 병력을 소환할 수 있지?”
-크헤엘!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메이지.
태하는 오늘 이곳에서 해답을 찾을 것이었다.
“모을 수 있는 한 최대로 모아.”
-크헬!
스스스스!
메이지의 소환 의식에 따라 수천 마리의 스켈레톤과 500마리의 블랙 나이트가 소환되었다.
거기에 블랙스카우트 400마리, 골렘도 300마리 소환되었다.
“자, 그럼 시작해 보자고.”
-크헤엘!
메이지가 선봉에 섰고, 엄청난 군세의 언데드 군단이 고블린들을 쓸어버릴 기세로 달려들었다.
맹렬한 돌진을 눈앞에서 목도한 고블린들은 깜짝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키헤에엑!
-크헬!
메이지는 명령을 받은 대로 고블린이라면 가리지 않고 죽였다.
푸하아악!
생명체를 관통하는 마법 구체를 날린 메이지는 한 방에 10마리의 고블린을 죽이곤 계속해서 전진했다.
그런 저돌적인 메이지의 기세에 잠시 눌렸던 고블린들은 어느 순간 정신을 바짝 차렸다.
-키헥! 키헤에에!
마치 뭔가에 한껏 고무된 듯, 아까와는 다르게 한껏 호전적인 모습으로 돌변해 버렸던 것이다.
태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좀 이상한데……. 내가 알던 고블린이랑은 어딘가 많이 다른 모습이잖아?”
지금까지 태하가 죽인 고블린의 숫자만 하더라도 몇 트럭은 될 것이다.
태하가 알고 있는 고블린의 특성은 잔악하면서도 겁이 많고 잔꾀를 부릴 줄 알면서도 전략 전술을 짤 정도의 머리는 되지 못했다.
고블린의 그런 특성을 생각하면 지금과 같은 고무는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순간, 태하의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아 참, 몬스터 도감!”
지금까지 태하와 동료들은 레벨업을 위해서 무던히도 도감을 채워 나갔다.
이곳에 저장한 정보라면 여기 있는 고블린과 다른 점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었다.
태하는 샌드타워의 고블린을 도감에 등록했다.
딩동!
[도감에 새로운 종의 고블린이 등록되었습니다]
[출신: 미상]
[거주 지역: 미상]
한마디로 모든 것이 미상인 새로운 고블린이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뭐지? 이게 갑자기 어디서 뚝 떨어진 거야?”
겉모습은 일반적인 그린, 블루 고블린과 비슷한데 뭔가 다른 점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싸웠다.
도대체 얼마나 싸웠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던 바로 그때였다.
쿠르르르릉……!
멀쩡하던 하늘에 비구름이 몰려들더니, 이내 하늘에서부터 구름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구름은 땅으로 내려와 둥근 원통으로 변하며 검은색 소용돌이를 만들어 냈다.
휘이이잉……!
-크헬에엑……!
“안 되겠다! 메이지, 이리로 와!”
-……크헬!
태하는 메이지를 데려다가 다시 팔찌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러자 소환되었던 몬스터들 역시 사라져 자취를 감추었다.
소용돌이는 그 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면서 고블린들을 깡그리 먹어 치워 버렸다.
그러곤 이내 검은색 소용돌이가 사라지면서 사방이 환해졌다.
“……뭐야, 이거?”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도 없을 만큼 빠르게 상황이 스치고 지나가 버렸다.
얼떨떨한 마음에 전투가 치러졌던 모래사장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본 태하.
그는 방금 용오름처럼 내려왔던 검은 기둥이 있던 자리를 올려다보았다.
팅……!
그런데 저 멀리 뭔가 빛이 반짝거리는 것이 보였다.
점점 눈에 힘을 주는 태하.
신체 능력이 극도로 발달한 태하는 정신만 집중하면 100m 앞에 있는 사람의 이목구비까지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다.
“……어엉? 사람?!”
빛이 반짝인 곳에는 빠르게 날아가는 인간이 보였다.
정확하게 성별이라든지 그 사람의 특징을 알아볼 수는 없으나, 그가 보기에 인간인 건 확실해 보였다.
이윽고 태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혹시 이곳에서 어떠한 단서라도 찾을 수 있을까 싶었던 것이다.
다시 메이지를 소환하는 태하.
-크헬!
“여기 사람이 있었던 것 같아. 그놈과 관련된 것이 있는지 찾아봐.”
-크헤엘!
메이지와 스켈레톤들은 일렬로 서서 뼈다귀로 바닥을 쿡쿡 쑤시면서 전진했다.
마치 경찰의 수색 작전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언데드 중에 경찰 출신이 있나?”
대략 두 시간쯤 지났을 무렵이었다.
스켈레톤 중 하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끼릭!
“오오, 뭔가 발견한 거야?”
부리나케 달려간 태하.
그는 땅속에서 작은 돌멩이를 발견했는데, 그 안에는 정체불명의 상형문자가 빼곡하게 박혀 있었다.
순간, 태하는 그 문자를 어디선가 많이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어! 저번에 제단에서 보았던 그 문자 아니야?!”
샌드타워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