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헬스레이드-85화 (85/197)

085 정체기라니, 내가 정체기라니!(1)

고립관 구석의 벤치프레스.

“후욱, 후욱!”

이 벤치프레스는 태하 전용으로, 전용 리프트를 통해 원판을 끼고 들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그는 압축 합금 원판이 무려 12장, 1.2t으로 벤치프레스를 밀고 있었다.

쿠웅!

벤치프레스를 내려놓고 잠시 휴식을 위해 앉은 태하.

“……심란해서 그런지 무게가 잘 늘지 않네.”

1,200kg의 벤치프레스를 거의 가지고 논다고 표현해도 될 정도로 강력한 근력을 가진 태하였다.

허나, 최근 들어 근력 상승은 물론이고 근육의 부피마저 잘 커지지 않는다.

그야말로 슬럼프가 찾아온 것이다.

지나가던 보현 관장이 태하에게 단백질 음료를 건네며 말했다.

“오늘은 그만 쉬어.”

“이제 7세트 했는데요?”

“이지, 맨……. 정체기가 온 거야.”

“정체기요?”

정체기.

헬창들에게는 근 손실만큼이나 끔찍한 단어다.

인간의 육체는 점진적 과부하를 진행해 오다가 어느 순간에는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벽에 부딪히고 만다.

더 이상의 성장도 없고 퇴보도 없이 정체하는 이 시점, 그것이 바로 정체기인 것이다.

“……저는 정말 열심히 운동했는데요?”

“알아. 너무 열심히 해서 문제지.”

“운동을 열심히 하는 것도 문제가 됩니까?”

“네겐 미안한 얘기지만,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지.”

“아아……!”

관장은 손가락으로 벤치프레스를 가리켰다.

“저것 좀 봐. 네가 벤치프레스를 하려면 이제 거중기가 필요해. 데드리프트 한 번 하려면 전용 리프트가 있어야 하지. 그래서 고안한 게 저거 아니야?”

“음…….”

“내가 지게차를 개조해서 저걸 만들었을 때, 어떤 생각을 했을 것 같아?”

보현 관장은 정말로 제자를 아끼는 사람이다.

직접 지게차를 가져다가 유압기를 손봐서 파워렉을 만들었을 정도다.

허나, 그는 제자들에게 이런 아낌없는 지원을 해 주다가도 불현듯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는 언젠가는 사고를 당하고 말아. 다시는 달릴 수 없게 될 수도 있다는 뜻이지.”

“……브레이크가 없는 자동차라.”

“데드리프트를 3톤 이상 치는 괴물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 하지만 너는 그걸 돌파하고 말았지. 하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상당히 크다는 걸 알아야 해. 3톤 이상의 무게로 점진적 과부하를 언제까지 적용할 수 있을 것 같아?”

“헛!”

“그 무게, 진심으로 네가 낼 수 있는 순수한 힘이야?”

태하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능력에 의해 강력해진 힘이 순전히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스킬의 버프를 받은 힘을 운동에 쓰는 건 옳지 않다는 건가요?”

“이를테면 의도치 않은 강제 반복이라고나 할까?”

타인의 힘, 혹은 치팅을 써서 강제로 반복을 유도하는 것.

때론 이러한 방법이 근육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허나, 보현 관장은 오히려 그것이 정체기를 불러올 수 있다고 경고한 것이다.

“중량에 대한 집착을 버려. 운동하는 데 스킬을 적용시키지 말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고 생각해봐.”

“처음부터 다시…….”

보현 관장은 태하에게 ‘디로딩’ 처방을 내렸다.

“내일부터 한 달간 디로딩 기간이다.”

“……한 달간 쉬라는 건가요?!”

“가벼운 유산소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마. 그게 내 처방이다.”

***

군산 산업단지 내 항구.

솨아아아!

금강과 서해가 만나는 이 지점에서는 따뜻하고도 짭짤한 바람이 불어온다.

태하는 쪽지에 적힌 컨테이너의 번호를 몇 번이고 되뇌었다.

“……B324…….”

“이 정보, 확실한 거죠?”

한나와 용팔은 태하가 청룡방에서 받아 온 쪽지를 몇 번이고 확인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주께서 주신 것이니 의심할 나위가 없을 겁니다.”

내항으로 들어가기 위해 잠시 대기하는 헬스하운드.

태하는 슬그머니 작은 턱 위로 올라갔다.

카프레이즈를 하려는 것이었다.

“……뭐 하세요?”

“카프레이즈를…….”

“관장님 말씀 못 들었어요? 운동을 못 하게 될 수도 있다고요.”

“허엇, 맞다!”

틈새 운동은 헬창들에게는 습관과도 같은 것이다.

일반인들이 다리를 떨거나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것처럼 말이다.

심지어 장바구니를 들고 엘리베이터를 오를 때에도 덤벨컬을 하는 사람들에게 틈새 운동을 못 하게 되면 과연 어떤 증상이 생길까?

“음……. 아……. 후우…….”

안절부절못하며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쩔쩔매는 태하.

사실, 틈새 운동이라는 게 뭔가 엄청난 효과를 기대하기는 힘든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건 정신력과 관련이 있는 문제다.

운동을 생활화하며 보디빌딩에 대한 집착을 만들어 가는 단계라고나 할까.

이런 마인드를 갖게 됨으로써 몸이 좋아지는 것이다.

허나, 태하에게는 이제 이런 마인드를 버리고 한층 더 성숙해질 수 있는 단계가 필요한 것이었다.

“들어가세요. 청룡방에서 인가를 신청한 기록이 있군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 선생님은 몸이 몹시나 불편해 보이시는데, 괜찮으세요?”

누가 보아도 태하는 아주 불안정해 보였다.

용팔은 웃으며 태하의 앞을 가로막았다.

“변비가 있어서 그래요. 하하, 그레이트하게 비워 냈어야 했는데. 대장 앞이 꽉 막혔다고 하더라고요.”

“……으으! 그렇군요. 건투를 빕니다.”

졸지에 변비 환자가 되었지만, 태하는 지금 그런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오히려 엄한 생각이 머리를 지배했다.

“변비……? 그럼 괄약근 운동은 해도…….”

“어휴, 내가 못 살아! 중독에서 벗어나라는 거잖아요! 그걸 못 참겠어요?”

“……아아! 미안합니다!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람.”

아무래도 당분간 태하는 운동 중독에서 벗어나기는 힘들 것 같았다.

잠시 후, 세관의 안내를 받아서 용팔은 컨테이너 앞에 도착했다.

용팔은 몇 번이고 컨테이너의 번호를 확인했다.

“여기 맞는 것 같죠?”

“자, 그럼 한번 열어 볼까요?”

태하는 절단기 대신에 손으로 컨테이너 봉인을 뜯어 버렸다.

우득!

강철 와이어로 만든 봉인을 맨손으로 뜯는 사람은 아마 태하밖에는 없을 것이다.

이윽고 컨테이너의 문이 열렸다.

끼이익……!

그러자 그 안에서 모포로 몸을 돌돌 만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으으, 으으!”

“어휴! 거의 냉동 창고 수준인데?”

입구에 붙은 딱지에는 이것이 원래 냉동 수산물을 운반하는 컨테이너라고 되어 있었다.

그러니 냉매가 떨어지지 않도록 아주 만반의 준비를 다 해 둔 것이었다.

“밀항을 해도 하필이면 이런 컨테이너를 고르셨어요?”

“……저, 정 코치님?”

태하는 덜덜 떨고 있는 성미연에게로 다가갔다.

여전히 아름답고 매혹적이지만, 이제 그 얼굴에서는 표독스러움만 느껴질 뿐이었다.

그녀의 앞에 있던 상자에 대충 걸터앉은 태하가 물었다.

“이중간첩. 특사 암에게 붙어서 우리 정보를 캐내는 한편, 그들에게는 거짓 정보를 흘려서 수사에 혼선을 주었더군요. 배후가 누굽니까?”

“……지금 그게 중요해요? 어차피 판은 엎어졌는데.”

“당신의 입장에서는 판이 엎어졌겠지만, 나에게는 이게 절호의 찬스입니다. 무슨 방법을 동원하든 간에 당신의 입을 열어야 하죠.”

태하는 몸을 약간 수그렸고, 팔을 가랑이 사이로 슬그머니 집어넣었다.

그러자 한나가 그의 팔을 잡아 눌렀다.

자신도 모르게 컨센트레이션 컬 하려는 것을 제지한 것이다.

그녀는 성미연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중간첩인지 뭔지는 모르겠는데, 당신은 이제 금성탑에도 척살 대상 1호로 낙인찍혔어요. 아마 해외로 도피한다고 해도 거기서 죽고 말겠죠.”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요?”

“투항하세요. 그리고 파이어볼에 대한 정보를 토설하세요. 첩자들에 대한 정보까지도요.”

이번에는 시티드 카프레이즈를 하려는 태하의 허벅지를 팔꿈치로 누르는 한나.

태하는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헛! 크흠! 그래요. 개똥밭에서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도 모릅니까?”

“투항을 한다면 내가 어디로 투항을 해야 한다는 건데요?”

“청룡방이죠.”

청룡방은 파이어볼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만약 그녀가 청룡방으로 투항한다면 군복을 바꿔 입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저더러 지금 정절을 버리라고 말하는 건가요?”

“그게 죽는 것보다는 낫다는 겁니다.”

“……만약 싫다면요?”

순간, 태하의 눈동자가 파랗게 빛났다.

스스스……!

이 세상 무엇이든 다 씹어 먹어 버릴 기세.

태하는 엄청난 살기를 뿜어내며 성미연을 노려보았다.

“내 손에 죽겠죠.”

“……당신이 사람을 죽일 수 있어요?”

“그래요. 사람은 못 죽이죠. 하지만 당신이 투항하지 않는다면 그 순간부터 몬스터가 되는 겁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눈빛, 그리고 결연한 말투.

성미연은 태하가 그 어느 때보다 진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약간은 허탈한 듯, 미소를 짓는 그녀.

“후훗……. 그렇게 꼬리를 쳐도 안 넘어오더니. 이제야 좀 안달이 나셨네요.”

“……?”

“좋아요. 당신의 말대로 해 줄게요. 다만,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게 있어요.”

“뭡니까.”

“나를 포섭한다고 해도 세 번째 재앙은 막을 수 없다는 거예요.”

“……세 번째 재앙?”

“나도 자세한 건 몰라요. 하지만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엄청난 놈이 올 것이라는 건 확실하죠.”

***

마력 구속기를 채워 청룡방으로 넘겨진 성미연.

이제 그녀는 청룡방에서 조사를 받으면서 지내게 될 것이다.

“고순도 엠톨에 대한 정보도 저 여자에게서 받아 낼 수 있겠죠?”

청금타워를 나서려는데 유시연이 태하에게 물은 것이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럴 겁니다.”

“좋아요. 아주 잘하셨어요. 이번 요청은 마무리된 것으로 하죠.”

유시연은 태하에게 몇 장의 서류로 이뤄진 문서를 건네주었다.

태하는 그것을 받아 펼치며 물었다.

“이게 뭡니까?”

“샌드타워의 요청서라고 할까요. 샌드타워에 고블린 몇 마리가 출몰했나 봐요. 가는 길에 좀 잡아 주시겠어요?”

“……샌드타워에 고블린이?”

“그것도 내부에 출몰했다나 봐요. 화이트홀이 간헐적으로 열리기 시작했다는데, 특무관께서 직접 가서 상황을 좀 살피고 몬스터도 좀 잡아 주세요.”

지금까지 샌드타워 내부에 몬스터가 출몰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것은 그야말로 이상 현상 그 자체였던 것이다.

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돌아가는 길에 샌드타워에 들렀다가 가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뭡니까?”

“이리 가까이…….”

유시연은 태하에게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그녀의 입에 귀를 가져다 대는 태하.

그러자 유시연의 달콤한 향기가 태하의 코를 찔렀다.

‘향이 진하네. 잘못하면 정신줄 놓겠는데?’

이게 바로 누님의 파워라는 것일까?

그녀는 태하에게 작게 속삭였다.

“……그 아이의 이모라는 여자.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어요? USB를 받았다면서요.”

태하는 대답 대신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둘만의 밀담.

“그 여자부터 찾아보는 게 좋겠어요. 70층 등반은 그 여자를 찾고 해도 늦지 않잖아요? 어차피 디로딩인가 뭔가 하는 기간이기도 하고요.”

“……알겠습니다.”

“아 참, 그리고…….”

그녀는 태하의 재킷 상의 안주머니로 손을 스윽 가져다 댔다.

화들짝 놀라는 태하.

그런 그에게 유시연은 반달처럼 휘어지는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아수라 컴퍼니에서 엠비엠을 인수하기로 했어요. 참고하시라고요.”

그녀가 넣어 둔 것은 USB였다.

그 안에 인수 안건이 들어 있는 것이었다.

태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요. 알고 있겠습니다.”

“그럼 살펴 가세요.”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너무 유혹적인 여자다.

그나저나 오늘따라 유난히도 부담스럽다는 느낌이 팍팍 든다.

‘뭐야, 오늘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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