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헬스레이드-76화 (76/197)

076 제4장(2)

솨아아아…….

산들바람이 태하의 코를 간질이고 있었다.

‘……향기롭다.’

들판에 불어오는 바람에는 꽃 냄새와 풀밭의 향기, 그리고 따스한 바람의 촉촉한 숨결이 묻어났다.

아스라이 번지는 눈앞의 빛과 함께 눈을 뜬 태하.

그의 앞에는 다소 투박하지만 어쩐지 따스해 보이는 나무문이 바람에 나부껴 흔들리고 있었다.

끼익.

운명이 나를 이끈다는 말은 아마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이리라.

태하는 마치 자석처럼 이끌려 문을 열었다.

스아아아아!

강렬한 바람이 불어 태하를 밀어내려 했다.

허나, 그 바람은 따스하고 향기로워서 피부에 닿는 즉시 빙그레 미소를 짓게 만들었다.

“봄……. 그래, 봄이구나.”

어느새 계절은 봄으로 변해 있었던 것인가.

태하는 자신도 모르게 그 봄을 만끽하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바람을 즐기고 있던 태하에게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봄을 좋아하는 모양이군.”

“……누구?”

푸른색의 장발을 다소 투박하게 땋아서 늘어뜨린 남자.

그는 뒷짐을 진 채 서 있었지만, 그 뒷모습에서 강렬한 포스가 느껴졌다.

태하는 그에게서 뭔가 은은한 푸른빛의 오러 같은 것이 풍겨 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확실히 인간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것은 그의 몸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는 근육이 터질 것처럼 거대했는데, 그 근육의 결대로 아주 깨알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푸른색 오러는 바로 거기서부터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근육의 크기, 인간의 것이 아니다. 목소리는 이렇게 부드럽지만 확실하게 알 수 있어. 인간은 아닌 것 같아!’

이윽고 의문의 근육남이 뒤를 돌아보았다.

태하는 그의 얼굴을 확인하곤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자아냈다.

“아아……!”

귀공자의 미모.

그는 귀티가 좔좔 흐르는 아름다운 피부에 아주 유려한 곡선의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다.

남자라고 하기엔 너무 부드럽고 여자라고 하기엔 선이 너무 굵은 느낌이었다.

한마디로 그는 중성적인 미남, 그 표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나는 탑의 수호자 마이트라고 하네.”

“……마이트?”

“맞아. 힘과 위세, 그것을 뜻하는 마이트. 그게 바로 내 이름이지.”

과연 힘을 의인화시킨다면 딱 지금과 같은 모습이 아닐까 싶은 느낌이 팍팍 들었다.

무려 2m가 훌쩍 넘는 거대한 키에 터질 듯한 근육질.

그는 태하에게 악수를 건넸다.

“1번 탑의 2대 수호자 후보를 만나서 너무나도 반갑군.”

“2대 수호자요? 제가 말입니까?”

정원은 온통 꽃밭이었고 햇살은 적당히 따스해서 절로 잠이 올 것만 같았다.

마이트는 꽃밭의 오솔길을 걸었다.

태하는 마치 자석처럼 붙어서 그 뒤를 따라서 걸었다.

“이곳은 바벨탑에서도 오로지 탑의 수호자만이 들어올 수 있는 무한의 공간이야. 이곳에선 이 세상의 그 어떤 진리도 통하지 않지. 시간도, 공간도, 그리고 생명의 제약도 없어. 이곳에선 오로지 수호자 본인, 그것만이 존재하게 되지.”

“그럼 이 꽃들은 뭔가요? 꽃도 생명인데.”

당연한 질문이었지만 이런 질문에는 보통 두루뭉술하게 넘어가게 된다.

다소 철학적이지 않은가.

허나, 마이트는 달랐다.

“이건 나의 내면의 세계가 표현된 거야. 이곳은 오로지 탑의 수호자만이 존재하는 공간, 그 주변의 공간은 수호자를 대변하게 되지.”

“그렇다면 당신의 속마음은 이런 따스한 봄날의 정원인 건가요?”

“후후, 그렇다네.”

외유내강, 아마 그것을 흙으로 빚어서 인간을 만든다면 마이트처럼 생겼을 것이다.

그만큼 마이트는 외유내강을 잘 표현해 주고 있었다.

마이트는 태하를 이곳에 데려온 이유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다.

“자네는 이미 심장이 한 번 정지했었네. 하지만 그 심정지마저도 근육으로 이겨 냈지.”

“……근육은 죽음마저도 이겨 낼 수 있는 겁니까?”

“맞아. 근육은 모든 것을 이기지. 최소한 이곳 제1 바벨탑에서는 그래.”

“음!”

“사신은 인간의 심장이 멎었다가 다시 뛸 때, 이미 운명을 뛰어넘었다고 말하곤 했지. 그때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사람이 죽었다가 깨어나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운명을 벗어났다는 뜻이 아니겠어?”

“무슨 말씀인지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운이 억수로 좋다는 것만은 확실하네요.”

“하하, 그래. 자네는 운이 좋아. 그래서 이곳 무한의 공간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고. 여긴 사실 영혼도, 그렇다고 육신도 들어올 수 없는 곳이야. 그 중간에 머무르는 존재, 즉 초월체만이 들어올 수 있지.”

“그럼 제가 초월체가 되었다는 건가요?”

고개를 끄덕이는 마이트.

그는 손을 한 번 휘 내저었고, 그의 앞으로 꽃잎이 모여들더니 동그란 원을 그리며 공간의 일렁임을 만들어 냈다.

그 일렁임이 점점 커지자, 그 안은 마치 영화관처럼 주마등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저게 보이나? 악신 아무스트가 운명의 서판을 훔쳐 가는 순간이야. 나는 저 때 자네처럼 미친 듯이 운동에 몰입해 있었지. 그때는 내가 인간계의 일곱 수장 중 1명이었거든.”

“운명의 서판? 그게 뭡니까?”

“이 세상의 운명이 적혀 있는 서판일세. 저 안의 내용을 수정하는 순간, 세상의 운명이 바뀌게 되지. 수명도, 시간도, 공간도, 심지어는 사건의 결말, 운명까지도 말이야.”

“그런 서판이 있다면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겠군요.”

“그래서 아무스트가 서판을 훔친 거야. 잘하면 신도 죽일 수 있거든.”

“……!”

“허나, 아무스트는 서판을 제대로 고칠 시간이 별로 없었어. 그래서 서판 중간에 아무렇게나 글귀를 휘갈겼지. 자신이 7개의 군대를 키우고 이 세상을 독차지할 수 있도록 말이야.”

마이트가 손을 다시 내젓자, 이번에는 인간 시절의 마이트가 나왔다.

그는 정말 무식할 정도로 운동을 하고 있었다.

“몇 kg이지……? 바위를 들고 프레스를 하고 계셨네요!”

“나는 인간들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어. 아무스트가 서판을 훔칠 때, 인간계에는 7개의 악의 군대가 창궐했었거든. 그래서 죽음을 무릅쓰고 몸을 키우고 자신을 단련한 거야. 단련만이 살길이라고 판단한 거지.”

“어쩐지 차원이 다른 헬창의 품격이 느껴집니다.”

마이트는 다시 손을 내저었다.

이번에는 마이트가 서판에 자신의 이름이 새겨지는 걸 지켜보고 있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신들은 나를 비롯한 7명의 왕들을 아무스트의 아공간을 제압하고 통제할 인간으로 지정했어.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공격대를 편성했지.”

“레이드……?”

“그래. 아마도 바벨탑에서 이뤄졌던 최초의 레이드는 바로 이때가 아닌가 싶군.”

한물간 투사의 얘기도 이 정도면 정말 넋을 놓고 들을 정도였다.

태하는 그의 얘기에 점점 빠져들었다.

“당시, 바벨탑에는 지옥의 군대를 훈련시킬 변이한 인간들이 가득 차 있었어. 심지어는 인간의 왕족에게 충성하던 사람들까지 변이된 채로 말이야. 그들은 악의 군대와 끔찍한 혼종을 이뤄서 탑을 지키고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있었지. 나와 동료들은 그들을 해치우고 탑을 점령하여 이곳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었어. 100층을 돌파한 거지. 그것도 일곱 번을 말이야.”

“……100층을 일곱 번이나 돌파하셨다면 다른 대륙의 바벨탑도 돌파하셨다는 건가요?”

“물론.”

“허어!”

그야말로 레전드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존재가 있다는 것에 경악을 금치 못할 정도였다.

“100층에는 뭐가 있기에 탑을 통제할 수 있는 겁니까?”

“지하의 군대가 들어올 수 있는 출입구가 있어. 그리고 그것을 통해 던전을 폐쇄해서 다시는 악인들이 바벨탑을 악용할 수 없도록 할 수 있는 것이지. 하지만 우리에게 던전이 통제를 당하자, 아무스트는 곧바로 전쟁을 일으켜서 이 세상을 혼돈에 빠트렸어. 서판을 뺏고 뺏기는 동안 그것을 12개로 나눠서 절대 힘을 위시하는 세력을 구축했거든. 그 세력이 갈라져 서로 싸우는 동안 혼돈은 창궐했고, 아무스트는 자신의 아공간을 부수고 그 힘을 다시 회수하려고 했다네.”

“아하! 그래서 카이튼의 후예라는 것들이 자꾸 던전을 붕괴시키려고 하는 것이로군요!”

마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다시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악신의 무리가 패배하여 바벨탑 지하에 수감되는 모습이 나왔다.

“결국 신은 이겼고 아무스트를 따르던 카이튼과 같은 자칭 ‘마왕’들은 지하 감옥에 수감되었어. 그리고 바벨탑의 몬스터들은 카이튼을 지키는 조건으로 이곳 바벨탑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지.”

“그럼 마이트 님은…….”

“이 몬스터들을 아우르는 간수쯤 되는 존재가 되었다고나 할까?”

“아아……!”

“하지만 나도 인간의 경지를 넘어섰지만 결국 그 존재는 소멸될 위기에 놓이고 말았지. 아까도 말했지만, 서판이 조각나는 바람에 말이야.”

“그래서 후계자를 찾은 것이로군요!”

“맞아. 그렇게 탄생한 후계자가 바로 자네, 헬창 헌터인 것이지.”

마이트가 손을 내젓자, 이번에는 거대한 낫을 든 그림리퍼가 보였다.

그는 그림리퍼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내 절친한 동료, 바벨탑을 감옥으로 만든 존재이지. 사람들은 그림리퍼를 사신, 혹은 흑막이라고 불렀어.”

“아하! 그렇다면 저 사람이 바로 바벨탑의 흑막?!”

“그래. 항상 인생은 고통이라고 말하고 다니던 인물이지. 지금은 나와 같이 탑을 수호하는 영령으로 남았지만 말이야. 여담이지만, 그림리퍼를 추종하는 세력도 있었어. 메피스토라고, 원래는 지옥의 공왕이 돼야 했을 악마였지.”

“아아, 그래서 사신의 숨결이 느껴지자마자 그렇게 쩔쩔맸던 것이군요!”

“하지만 그러면서도 메피스토는 언제나 마왕의 전성기를 그리워했어. 이중적인 놈이지.”

마이트가 다시 손을 내저었을 땐 공간의 일그러짐도 사라진 후였다.

그는 태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태하의 몸으로 뭔가 청량한 기운이 스며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의 능력은 내 성향에 따라 서판이 정해 주었다네. 아마 자네가 나의 후계자로 지목된 것도 성향이 비슷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

“……그렇군요. 하긴, 저도 누군가를 지키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그대가 나의 뒤를 따르겠다면, 아마 엄청난 시련이 뒤따를 거야. 하지만 만약 자네가 운명을 거부한다면 이 세상은 멸망하고 말 걸세. 얼마 전 좀비 사태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거든.”

“제가 100층까지 올라가서 이 탑을 지배하게 된다면 세상은 평화로워질까요?”

“적어도 멸망이라는 단어 따위는 절대 나오지 않겠지.”

태하는 결연한 의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2대 수호자가 될게요!”

“고맙다. 그대가 나의 뒤를 따라 주어서 말이야.”

마이트는 태하에게 중량 벨트를 선물로 주었다.

[인벤토리에 ‘탑의 수호자의 중량 벨트’가 저장됩니다]

중량 벨트에는 ‘마이트에서 마이트로’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근육의 진정한 힘을 일깨워 주기를 바라네.”

“진정한 힘이라!”

“앞으로 무수히 많은 싸움이 있을 거야. 카이튼의 심복들이 자네를 죽이려 끝도 없이 밀려들 것이거든. 자네는 이제부터 그걸 잘 이겨 내야 한다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명심하게. 첫째도 수련, 둘째도 수련일세. 득근만이 살길이라는 걸 잊지 마.”

“하지만 근육이 여기서 더 커질 수 있을까요?”

“근육이 커지지 않아도 득근은 멈추지 않아. 근질, 강도, 근육을 발전시켜야 할 방향성은 얼마든지 존재한다네.”

“……아하!”

“지금에 안주하지 마시게. 근육의 결, 근섬유 하나까지 모두 최고로 단련한다고 생각하시게.”

근섬유 하나까지 생각한다는 말.

태하는 거기에 감동을 받았다.

그는 태하에게 100층 그 이상의 비전을 주었다.

“자네는 내 뒤를 이었어. 이제 100층을 정복하면, 그다음은 나머지 6개의 탑을 차례대로 정복해야 한다네. 카이튼의 후예들은 분명 다른 곳도 노리고 있을 거야. 그곳들, 자네가 차례대로 정복해 주고 수호자들을 모아 주시게.”

“네, 알겠습니다!”

“명심해, 헬창은 죽지 않아.”

“아아……!”

이윽고 멀어지는 의식.

태하는 거기서 황홀경을 느꼈다.

‘역시, 헬창은 최고야!’

팟!

다시 눈을 떴을 때.

태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병원에 누워 있었다.

“헛!”

단숨에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태하.

그러자 곁에 있던 동료들이 화들짝 놀라며 그에게 시선을 집중시켰다.

“정 코치!”

“대장!”

“……다들 있었네.”

동료들은 태하가 정신을 차리자, 가슴을 쓸어내렸다.

“못 살아, 이 화상! 죽는 줄 알았잖아요!”

“내가 언제 죽는 거 봤어요? 헬창 네버다이, 몰라요?”

“……하여간 말은 잘하지.”

“그나저나 홍이랑 까미는…….”

“메이지랑 잘 치료받았어요. 당분간은 운신이 힘들 것 같기는 한데, 괜찮대요.”

“……다행이네.”

희란은 어느새 태하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그녀는 비록 아무 말도 없었지만, 그 눈동자 너머의 깊은 뜻을 태하는 잘 알 수 있었다.

“하여간 생환도 그레이트하시네요! 헬스 신이 보우하셨나, 정말 기적적으로 살아나셨어요. 심정지가 왔었거든요.”

“압니다. 탑의 수호자를 만나고 왔거든요.”

“……누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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