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5 제4장(1)
새끼 이무기가 죽은 후, 그 뒤로 거대한 공간이 태하의 눈에 들어왔다.
휘이이잉……!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그곳에는 마이너스 에너지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일행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화이트홀?!”
“이곳으로 채굴한 라이프스톤을 가져다 나르고 있었나 봐요.”
“그럼, 그 엄청난 라이프스톤들은 전부 어미 이무기가 먹어 치웠던 것일까요?”
“그야 모르죠. 일단 지금은 어미 이무기를 죽이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갱도를 지나 동굴의 끝이라고 생각되는 지역에 도달했던 태하 일행은 그 뒤로 깊이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의 공터가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 공터에는 이무기의 어미로 보이는 화이트 드래곤이 날개를 접은 채 도사리고 있었다.
-……크르르르릉!
으르렁거림 하나만으로도 사람이 쇼크로 죽을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몸집, 그리고 꽤나 먼 거리에서도 강렬한 마력이 느껴질 정도의 힘을 갖추고 있었다.
만약 이런 드래곤을 마주한다면 천하의 아수라 길드라도 전멸하고 말 것이었다.
-감히 내 아이를 죽이다니! 용서하지 않겠다!
어미 이무기의 이마에는 보라색 보석이 박혀 있었는데, 그것이 한 번 반짝이자 거대한 냉풍이 사방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마치 남극 한복판에 서 있는 것처럼 살을 에는 듯한 강력한 눈바람이 일행들을 강타한 것이었다.
우드드득!
냉풍이 불어닥치는 그곳에는 어김없이 얼음이 얼고 있었다.
희란은 당장 배리어를 쳤다.
허나, 그녀의 배리어마저도 이 엄청난 냉기를 다 막아 내기는 힘들어 보였다.
“……엄청나요! 아무리 대천사의 스태프라도 10초를 버티기 힘들 거예요!”
“이런 빌어먹을, 저렇게까지 강력한 힘을 갖게 되었을 줄이야!”
태하는 드래곤의 힘이 강력하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바로 앞에서 일렁이고 있는 화이트홀에 시선을 고정했다.
“화이트홀, 바로 저것 때문에 몬스터가 더 강력해지는 겁니다!”
“이런 지미럴! 그럼 워쪄? 이대로 도망을 치는 게 맞다는 거여?”
용팔은 가만히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가 마치 잠꼬대를 하듯 읊조렸다.
“공간 조율 버프!”
“……아하! 맞다, 공간 조율 버프! 그걸 이용하면 되겠네요!”
태하는 망설임 없이 화이트홀로 스트랩을 뻗었다.
그러자 공간의 일렁임이 태하의 손을 타고 흡수되기 시작했다.
슈가가가각!
공간의 일렁임은 이내 멈추었고 화이트홀은 태하의 몸속으로 완전하게 스며들었다.
[화이트홀 효과]
[공간 조율 버프가 형성됩니다]
[앞으로 30분간 전투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합니다]
화이트홀을 집어삼키자, 태하의 몸에서는 그야말로 미칠 듯한 힘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이 힘을 동료들에게 나눠 주었다.
그러자 배리어는 드래곤의 냉기를 버틸 수 있게 되었다.
“……된다!”
“이렇게 되면 판은 뒤집힌 셈인가요?”
“그렇죠. 화이트홀이 사라져 드래곤의 힘이 약해졌을 테니까요!”
이론상으로는 화이트홀이 생길 때 몬스터의 힘은 3~4배 정도 강력해진다.
그와 반대로 태하의 일행은 그만큼 더 강력해졌으므로 이제 드래곤이 아무리 강해 봤자 태하의 일행을 이기기는 힘들어졌다.
태하는 배리어를 등에 업고 드래곤을 향해 돌진했다.
“제가 몸빵 칩니다! 다들 공격하세요!”
“오케이!”
원딜들은 드래곤을 한 방에 죽여 버릴 계획을 세웠고 근딜들은 드래곤의 발을 묶고 역린을 들춰낼 수 있도록 작전을 구상했다.
“전술 32번!”
“좋았어. 박사님!”
이런 포메이션이 가능했던 것은 윤정이 상황에 맞는 전술을 짜 두었고 그것을 팀원들이 완벽하게 숙지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전술 지시가 내려지자 팀원들은 자신들의 포지션 스케줄을 상기해 가며 움직였다.
용족의 가슴에는 공통적으로 역린이 존재하고 근딜들은 그것을 검으로 잘라서 원딜이 한 방에 심장을 관통시킬 수 있도록 활약할 것이다.
스스스, 팟!
근딜들은 태하의 뒤를 따라서 달렸고, 태하는 놈의 안면에 주먹을 날렸다.
“이거나 먹어라!”
-감히 미천한 인간 따위가?!
드래곤은 급한 김에 손을 휘둘렀다.
부우웅!
손을 휘젓는 것만으로 신영이 휘청거릴 정도로 강력한 바람이 불어왔다.
허나, 태하는 그것을 힘으로 이겨 냈다.
“으으으, 코어의 힘으로 버틴다!”
-……뭐, 뭐지?
덕분에 드래곤의 왼쪽 가슴이 노출되었고 원딜들은 포지션 스케줄대로 태하보다 앞으로 나아가는 포지션을 만들어 냈다.
그렇게 위치가 잡히는 동안 원딜들은 자신의 힘을 하나로 모아서 드래곤의 심장을 꿰뚫어 버릴 작업을 하고 있었다.
마탄을 하나로 압축시키고 용팔의 화살촉에 그것을 매달아서 한 방에 폭발력을 집중시키는 것이었다.
이것은 한나의 중력, 증폭 마법의 버프를 받는 한편, 배리어 마법까지 부여받아서 그 어떤 공격에도 버틸 수 있게 될 것이다.
영수는 카본파이버로 드래곤의 역린을 고정시켰고, 그것을 태하를 비롯한 원딜들에게 전달해 주었다.
“당겨야 합니다!”
“오케이, 셋에 당깁시다! 하나, 둘, 셋!”
태하와 일행들은 다른 비늘과 결이 반대로 된 역린을 들춰냈다.
그러자 그 안에서 차가운 불길에 휩싸인 어미 이무기의 코어가 보였다.
원딜들은 이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다.
“쏩시다!”
“그려, 간다고!”
용팔과 혁수는 최대한 신중하게 조준한 후, 일격필살을 날렸다.
피융!
묵직한 파공성과 함께 쏘아져 나간 화살은 중력의 가속도와 증폭을 받아서 거의 빛의 속도로 날아갔다.
그리고 드래곤의 약점을 파고드는 화살.
끼기기긱!
허나, 드래곤의 심장에는 배리어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뚫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근딜들은 태하에게 마무리를 맡겼다.
“대장! 끝을 냅시다!”
“오케이!”
태하는 어미 이무기의 심장에 스트랩을 날렸다.
그러자 둘 사이에 강력한 힘의 충돌이 생기면서 서서히 배리어가 얇아지기 시작했다.
[스킬: 캔슬레이션]
[방어막이 중화됩니다]
캔슬레이션으로 방어막이 중화되면서 빈틈이 보였고, 태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반대편 손으로 스트랩을 뻗었다.
“포식 한번 해 보자!”
태하는 냉기의 불길이 일렁이는 놈의 심장을 단숨에 꿰뚫었다.
퍼어억!
그러자 도저히 인간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힘이 쏟아져 나왔다.
-크아아앙……!
“허억! 힘이 너무 강력해요! 이대로는 과부하가 될 겁니다!”
“대장, 메이지! 메이지를 불러요!”
“아 참, 메이지!”
태하는 인벤토리에서 뼈의 공을 꺼내어 바닥에 던졌다.
퍼엉!
이윽고 나타난 메이지.
-크헬헬!
“메이지, 이놈의 에너지를 같이 흡수해야 해!”
-크헬!
메이지는 앞뒤 가리지 않고 태하의 지시에 따라서 어미 이무기의 에너지를 받아 냈다.
허나, 메이지의 마력에도 금방 한계가 나타났다.
-크, 크헬?
크게 당황하는 메이지.
도무지 그 끝을 알 수 없는 에너지로 인하여 태하와 메이지는 동반 폭발할 위기에 놓이고 말았다.
바로 그때였다.
퍼엉!
-짜잔!
“홍이?”
-헤헤, 사랑해!
홍이는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여 이무기의 심장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끼기기기긱!
허나, 홍이의 얼굴은 금세 빨개졌고, 이제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으이이이익!
“홍아! 이제 그만! 더 이상은 무리야!”
-……지킬 거야!
자신이 폭발하더라도 반드시 태하만큼은 지키겠다는 홍이의 굳은 의지가 표출되는 순간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파앗!
태하 일행의 곁으로 거대한 표범 1마리가 나타났다.
“까미!”
-크르르릉!
까미는 점점 크기가 줄어드는 이무기의 심장을 이빨로 깨물어 버렸다.
우득!
그러자 그 옆으로 심장 안에 가득 차 있던 혈액이 빠지면서 이무기가 서서히 힘을 잃어 갔다.
-원통하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같이 죽자!
놈은 태하에게로 한꺼번에 마이너스 에너지를 밀어 넣었다.
그러자 일시적으로 태하의 기억이 끊어졌다.
삐이이이-.
블랙아웃이 찾아온 것이었다.
‘……이런 씨부랄!’
흐릿해지는 의식, 그 너머로 뭔가 작은 서판 같은 것이 보인다.
‘서판 조각……?’
[서판이 공명합니다]
[제4장: 공간]
[서판 제4장 ‘공간’을 해독할 수 있습니다]
[공간은 모든 것을 아우르며 모든 것은 공간 위에 있을 때 비로소 살아갈 수 있습니다]
***
격전이 치러지고 있는 던전 62층의 갱도 안.
이연화는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며 칼을 갈았다.
“……저 빌어먹을 새끼들을 죽일 수 있겠어.”
“부길드장님, 그런데 우리가 이 병력만으론 헬창스를 해치울 수 있을까요? 저놈들은 수백 명이 달려들어야 간신히 잠재울 수 있는 화이트 드래곤을 죽였잖습니까?”
“그럼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까? 보스는 잡혀갔고 우리는 추민우에게 추격을 당하고 있어. 그 개새끼, 우리에게 다 뒤집어씌워 놓고 자기만 쏙 빠져나가려는 거라고.”
추민우는 파이어볼에 이 모든 사건은 아수라 길드의 실책이며 그 실책을 바로잡는 길은 아수라 길드를 전부 희생시키는 것뿐이라고 역설했다.
그나마 감옥에 들어간 이용광은 정부의 보호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목숨을 건졌으나, 이연화와 그 잔당들은 빚을 지고 쫓기는 상황에 내몰리게 된 것이었다.
“정태하의 목을 가져간다면 모든 잘못은 용서될 거야.”
“사실, 그건 우리의 잘못도 아니잖습니까?”
“……우리의 잘못이건 아니건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우리가 임무에 실패했고, 그 대가를 반드시 치러야 한다는 거지.”
그저 명령에 따랐지만, 상대가 너무 강했던 게 문제였다.
아수라 길드의 잔당들은 그게 자신들의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파이어볼은 달랐던 것이다.
이연화는 이대로 태하의 숨통을 끊어 버리기로 했다.
한편.
그녀의 발밑에선 또 다른 존재들이 이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그는 바로 총총과 그 신하들이었다.
“총총! 나리가 당하게 생겼다요!”
“안다! 우리가 나리를 구해야 해!”
“하지만 나리를 죽이겠다고 설치는 저놈들도 강하다요.”
총총은 주먹으로 신하들의 머리를 한 대씩 쥐어박았다.
콩콩콩!
“총총은 은혜를 잊지 않는다! 우리 몰먼은 나리를 구한다!”
“……알겠다요! 가자요!”
몰먼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능력을 동원해서 땅굴을 파기 시작했다.
파바바바밧!
광부 종족이기도 하지만 원래 몰먼은 두더지에 가까운 휴머노이드 몬스터이다.
그들은 인간이 전력질주를 하는 것보다 족히 3배는 빠르게 땅을 팔 수 있었고, 총총과 그 신하들은 부족에서 가장 빠른 땅굴 파기 능력자였다.
“힘을 내! 저 인간들보다 빨라야 해!”
“알겠다요!”
앞발의 손톱이 다 닳아서 없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몰먼들은 온 힘을 다해서 땅을 팠다.
그렇게 땅을 파고 내려가서 드디어 희란의 바로 앞에 도달했다.
총총은 희란의 앞에 머리를 쏙 내놓았다.
“누나 나리!”
“……총총?!”
“뒤에 누가 온다요! 나리를 죽이려 한다요!”
“앗!”
희란은 당장 배리어를 쳐서 태하와 그 일행들을 보호했다.
그러자 마치 채찍처럼 날아든 이연화의 칼이 배리어를 강타했다.
까아앙!
이연화는 입술을 짓깨물었다.
“이런 빌어먹을 두더지 새끼들! 진작에 다 쓸어버렸어야 했는데!”
“이렇게 귀여운 아이들을 죽인다고? 아주 정신이 나갔군요!”
희란은 배리어를 유지한 채, 그대로 스태프를 휘둘렀다.
부웅!
그녀의 신체 능력은 이미 4배 이상 상승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연화가 그 공격을 피해 낼 수가 없었다.
퍼억!
“으허어억!”
이연화의 어금니가 혈액과 함께 마치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단 한 방에 블랙아웃이 찾아온 이연화에 아수라의 잔당들은 화들짝 놀라 그대로 후퇴했다.
“가자!”
지이이잉!
놈들은 작은 캡슐을 바닥에 던져 놓았는데, 그것이 공간의 왜곡 현상을 일으켰다.
“……화이트홀!”
“보스를 모셔라!”
이제는 아수라 길드의 보스가 되어 버린 이연화는 부하들의 손에 이끌려 던전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