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4 재앙(2)
수도방위사령부가 북한산 자락에 진입했을 무렵이었다.
정릉동 시가지에 나타난 라이먼트는 시민들에게 역병을 퍼트리고 있었다.
-쿠오오오오……!
자유자재로 모습을 바꾸는 액체형 몬스터인 라이먼트는 그 자체만으로도 강력한 공격력을 갖지만, 그보다 문제는 역병이 창궐하도록 한다는 점이었다.
허나, 이 와중에도 분명 활약하는 영웅들이 있었다.
“죽어라!”
쿠우웅!
태하의 주먹에 맞은 좀비들은 그야말로 피떡이 되어 사망하고 말았다.
좀비들을 뚫고 아이들을 무사히 인솔해서 나온 태하는 교문 앞에서 반대 방향을 바라보며 사격 자세를 잡고 있던 군인들에게 외쳤다.
“아이들이 나옵니다! 그 뒤로 좀비들이 뛰쳐나오고 있어요! 아이들을 구해 주세요!”
“아아, 헬창 헌터?!”
이제 태하가 헬창 헌터, 혹은 헌터 ‘골드’라는 것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군인들은 헬창 헌터의 등장을 반기는 한편, 아이들을 지켜 달라는 말에 바짝 긴장했다.
태하는 아이들과 교사들을 군인들의 품에 안겨 준 후, 군인들과 함께 싸울 준비를 했다.
허나, 부대장 이성균 중령은 태하를 만류했다.
“이제 괜찮습니다. 지금부터는 좀비들을 우리가 처리하겠습니다.”
“좀비들이 어린데도 말입니까?”
“어려요……?”
잠시 후, 교문을 뚫고 나온 좀비들은 그야말로 경악을 금치 못할 정도의 모습이었다.
처참하게 사지가 찢어진 아이들이 좀비로 돌변하여 진격하고 있었던 것이다.
-끼에에에엑……!
“아, 아이들입니다!”
“……젠장! 어쩔 수 없어! 사격해!”
언데드가 된 자는 인간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그럼에도 군인들은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나 군인들에게는 지킬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우리의 국민들을 위협하는 몬스터들이다! 사격 개시!”
“젠자아앙!”
두두두두!
군인들은 피눈물을 머금고 총탄을 발사했다.
가끔 어깨를 들썩이는 군인도 있었는데, 눈물을 참지 못해 흐느끼며 사격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태하도 괴롭기는 마찬가지였으나 현실적인 문제들이 너무 많았다.
태하는 바깥의 상황에 대해 물었다.
“좀 어떻습니까? 밖은 진정되어 가고 있습니까?”
“……지금까지 발생한 역병의 종류만 해도 마흔 가지가 넘습니다. 이대로라면 좀비 사태는 통제할 수가 없을 겁니다.”
“라이먼트를 빨리 사냥하는 것이 좋겠군요.”
“청룡방에서 나서 주신다면 좋겠습니다만.”
“안 그래도 백선 어르신을 찾아뵐 생각입니다. 어쩌면 헌터협회에서 이미 출동 준비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고요.”
“부탁드립니다. 이대로는 몬스터 사태를 진정시키기 어려울 겁니다.”
수도방위사령부는 넘쳐나는 감염자들 때문에 더 이상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이제 그들에게 유일한 희망은 헌터협회였던 것이다.
태하가 종로로 떠나려는데 무전이 들려왔다.
-여기는 솔개! 평창동으로 진입했던 병력이 전멸했다!
“……학생들을 구출하려고 보냈던 특공대 말인가?!”
-이제 특공대도 좀비다…….
도대체 답이 없었다.
탱크로 밀어 버리자니 생존자들이 문제였고, 특공대를 보내면 좀비들에게 감염되어 그대로 적군으로 돌변하고 말았다.
허나, 라이먼트는 생각보다 머리가 더 좋았다.
-수도권 동부 지역에서 새로운 역병이 창궐했다! 좀비들이 아수라 생명과학연구소를 습격하고 있다!
“뭐, 습격?!”
상황이 점점 안 좋아지고 있다.
***
덕림헬스 앞은 좀비로 가득 차 있었다.
도대체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계속 몰려드는 좀비 떼로 인해 헬스장의 헌터들은 사람을 닮은 몬스터를 죽이고 또 죽이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빠각!
아지트까지 가기엔 너무 거리가 멀어서 전용 무기를 가지고 오지 못한 헬창스는 맨손으로 좀비를 정리하고 있었다.
허나, 무기와 장비 없이 싸우려니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전투력은 일반인이랑 비슷하지만, 숫자가 너무 많아요!”
“……제기랄! 이럴 때 활 한 자루만 있었어도!”
만약 용팔에게 활 한 자루만 있었어도 이미 이 근방의 좀비는 사라지고 없었을 것이다.
허나, 지금은 활은커녕 장난감 활도 구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좁은 입구를 활용해서 그나마 좀비를 정리하고 있기는 했으나, 수십만은 족히 될 법한 좀비를 어찌할 도리는 없었다.
“수도의 인구가 1,000만이라는데, 그중에 절반만 당했어도 500만이에요. 이러다가 정말 시체 때문에 다 죽게 생겼네요.”
“목숨을 걸고 무기를 가지러 가는 수밖에 없는 걸까요?”
“……무기라니.”
헬창스는 전용 무기를 가져올 수만 있다면 보스까지 한 방에 처치할 기회가 생길 것이라고 확신했다.
허나, 문제는 지금 이곳을 빠져나가면 덕림헬스를 지킬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고민보다는 일단 좀비를 해치우는 데 집중하는 헬창스.
바로 그때였다.
-크아아앙!
백두산 호랑이만큼이나 덩치가 큰 흑표범이 나타나 좀비들을 보이는 족족 베어나갔다.
서걱, 서걱!
녀석은 아주 날카로운 발톱과 칼날처럼 튀어나온 팔꿈치 뼈를 이용해서 좀비들을 도륙하고 다녔다.
특히나 인상적인 것은 꼬리의 힘이 워낙 좋아서 그것에 맞는 좀비는 한 방에 나자빠진다는 것이었다.
빠각!
-끄웨에에엑!
-크아아앙……!
한창 좀비와 싸우고 있던 희란은 녀석을 보곤 환호성을 질렀다.
“까미! 누나를 지켜 주려고 온 거야?!”
-그르릉…….
특유의 골골송을 내뱉으며 희란에게 다가와 얼굴을 비비적거리는 까미.
이 녀석이 마계화라는 것을 사람들이 알면 도대체 얼마나 놀랄까 싶었다.
그 뒤를 이어 태하가 모습을 드러냈다.
“으랏차차차!”
부웅!
거대한 대검이 지나간 자리에는 여지없이 핏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태하는 좀비들을 마구 도륙하면서 외쳤다.
“홍아! 무기를 나눠 줘!”
-응!
홍이는 헬창스에게 무기와 장비를 나눠 주었다.
각자의 특성 무기를 받은 동료들은 이제 얼굴에 자신감이 넘쳤다.
“……오오, 다 죽었어!”
허나, 오늘 특성 무기를 처음 받은 사람들은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허리케인 쌍권총]
[힘: 102/68]
[민첩: 116/311]
[체력: 55/112]
[제한 옵션: 착용 성향 - 마탄사수]
허리케인 쌍권총을 받았지만 사용할 수 없었던 임혁수는 그것을 가방에 잘 보관해 두었다.
“뭐, 지금은 못 써도 언젠가는 빛을 발하겠지!”
“그래요. 지금 당장은 쓸 수가 없어요. 하지만 우리의 동료가 된 이상, 그걸 쓸 수 있도록 도와 드릴게요!”
“고마워, 정 코치!”
유신성에게는 ‘유성환영의 여의봉’이, 이주현에게는 ‘무한의 기관단총’이 전달되었다.
윤정에게는 특이하게도 PDA와 전투 조끼가 지급되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무슨 의미지? 헬창 헌터씨! 이걸 어디에 쓰라는 건데요?”
“몰라요. 나는 그냥 퀘스트에서 받은 걸 지급하는 것뿐이니까요.”
“흠.”
“이제 우리도 무기를 받고 원군도 생겼으니 주동자를 잡으러 갑시다!”
“원군이요?”
태하의 옆에는 이미 소환 주문을 걸고 있는 메이지가 보인다.
녀석은 가디언들을 소환했다.
-크헬헬헬헬……!
마법진에서 모습을 드러낸 데스워리어와 뱀파이어가 태하의 앞에 고개를 숙였다.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대장!
“뱀파이어와 데스워리어는 이제 이곳을 방어하고 지나가는 일반인, 비감염자 및 생존자가 있다면 구출해서 보호한다.”
-넵!
태하는 데스워리어에게 대검을 건네주었다.
“네게 군대를 맡긴다.”
-대장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이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수천의 병력이 생긴 것이다.
***
청룡무고에는 카본파이버, 코어 기술이 집약된 전술 차량이 있다.
여기엔 총 24명이 탑승 가능하며 좌석을 조립하면 이 안에서 수술도 할 수 있었다.
이는 비단 던전에서뿐만이 아니라 밖에서도 전투준비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한 백선의 마음이 깃들어 있는 것이었다.
이주현은 고상근의 상처를 치료한 후 항생제를 주사했다.
“특별한 이상은 없습니다만, 당장은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아니요, 가야 합니다.”
“왜 또 이런다니……. 고상근 씨, 의사로서 조언하는데, 더 이상 무리는 안 하는 게 좋아요.”
“그럼 딸이 납치를 당했는데 가만히 보고만 있을까요……?”
딸이 납치를 당했는데 가만히 누워서 병원 신세만 지고 있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이주현도 더 이상은 할 말이 없었다.
“그렇다면야…….”
“그리고 저도 파티에 도움이 될 겁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고상근은 왼손을 휙 내저었다.
그러자 그의 앞에 코브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샤아아아악!
“……뭐, 뭐야?! 배, 뱀?! 소환술을 쓰시는 건가요?!”
화들짝 놀란 파티원들이 우왕좌왕하자, 고상근은 다시 손을 내저어 코브라를 없애 버렸다.
“제이드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죽으면서 제게 능력을 전이시키고 갔죠. 우리는 친구였기 때문에 제이드는 어떻게든 저를 도와주고 싶었던 겁니다.”
“……환술사 제이드? 그럼 이게 그 유명한 환술이라는 겁니까?”
“네, 맞아요.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습니다만, 너무 실제와 같아서 사람을 현혹시킬 수 있는 능력이죠.”
“그럼 이 기술을 바탕으로 탈출을 감행한 겁니까?”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상근은 태하 일행에게 자신이 실험실을 어떻게 탈출했는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내가 있던 실험실은 ‘아카이브’라는 곳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을 끌어모아 세상을 지배한다는 엄청난 시설이죠. 그곳에는 재앙급 헌터부터 최악의 몬스터, 그리고 전설과 설화 속에 나오는 모든 것이 수집되어 있습니다. 비취 석판도 원래는 아카이브에 있었던 것이고 서판 조각도 같은 곳에 있었죠.”
“아카이브라. 어디서 들어 본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마 헌터업계에 있었으면 얼핏 들어 봤을 겁니다. 그놈들은 힘이 깃든 것이라면 물불을 안 가리고 수집하거든요.”
“흠…….”
“아카이브에서는 생체 실험도 상당히 많이 자행되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각성 능력을 전이시키는 실험도 자행되었죠.”
“유전의 영향 없이 말입니까?”
“네. 100명 중 1명만이 성공합니다만, 그래도 실험은 이뤄지고 있었습니다.”
“그 100명 중 1명이 당신이었군요.”
“그런 거죠.”
“음.”
“저는 제이드의 희생으로 환술을 얻었고, 우리는 탈출을 감행하던 도중에 이런 물건을 얻었습니다.”
그는 주머니에서 작은 구슬을 꺼냈다.
구슬 안에는 마치 안개, 혹은 구름과 같은 것이 부유하는 모습이 연출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신비한가 하면, 구슬에 눈을 가져다 대는 순간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였다.
“이게 뭡니까?”
“이름은 저도 몰라요. 하지만 제 딸이 꿈을 꾸고 제가 그 꿈을 환영으로 투영해 내면, 이 구슬이 그것을 현실로 옮겨 와 주었습니다. 실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으로 말입니다.”
“……살아 있는 생명체를 말입니까?”
“그 영혼이나 기억까지는 없어도 실존 인물을 만들어 낼 수도 있습니다. 물론 마력이 다하면 사라지겠지만요.”
“허어! 그렇다면 몬스터도…….”
“맞아요. 서울 시내에 출몰했던 몬스터 중 일부는 우리가 만들어 낸 겁니다. 당시 관장님과 태하 씨를 만났을 때 마주했던 대천사의 폭발도 마찬가지고요.”
실로 엄청난 능력이었다.
고상근은 아수라가 이 사실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다고 확신했다.
“아카이브는 아수라의 뒷배로 예상되는 어떤 조직에 의해서 돌아가고 있습니다. 하니, 아수라도 우리의 능력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것이고, 어떤 목적을 가지고 또다시 몬스터 사태를 만들어 낸 것이겠지요.”
“애만 불쌍하게 되었네요. 젠장, 빌어먹을 놈들!”
“……반드시 찾아 주십시오. 제 딸, 너무 불쌍하지 않습니까?”
태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수라 놈을 쳐 죽이고 따님을 구해 드리겠습니다. 제 대가리가 깨지는 한이 있더라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