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0 비취 석판(2)
던전을 내려갔다가 리젠 타이밍에 맞춰서 50층으로 올라온 태하.
과연 데스워리어는 태하를 어떻게 맞이해 줄까?
거대한 검은 성채를 바라보는 일행의 표정에는 긴장감이 역력했다.
끼이이익…….
태하가 등장하자, 검은 성채의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대장이 등장할 걸 이미 알고 있었나 봐……!”
성문이 열리고 그 안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자, 블랙 나이트들이 도처에 널려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만약 지금 당장 전투가 시작된다면 유혈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크르르릉!
분명 인간의 형상과 비슷하긴 했어도 그 안에서 들리는 으르렁거림은 지옥에서 온 사자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잘못하면 아주 다 씹어 먹겠다고 달려들 판이네요.”
긴장감이 계속되는 가운데, 태하는 내성으로 향했다.
다행히도 내성으로 가는 동안 태하를 공격한다거나 함정을 파 놓은 기미 같은 것은 없었다.
붉은 융단이 깔린 내성으로 들어서자, 거대한 악마 검사가 태하를 맞이했다.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기다려? 왜?”
-따라와라.
데스워리어는 태하를 데리고 내성 안쪽의 쪽문으로 향했다.
예배당 뒤편으로 밀실로 향하는 계단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지하의 고문 시설과는 또 다른 공간이 있었다.
성의 벽과 벽 사이의 공간을 조금 확장해서 만든 것 같은 이곳은 겉에서 봤을 때와는 다르게 제법 넓었다.
10평 남짓으로 폭이 엄청나게 넓다곤 할 수 없었으나 높이는 족히 8m는 될 법했다.
-선물이다.
“선물? 갑자기 웬 선물?”
-성주가 바뀐 것에 대한 축하의 의미다.
이곳은 벽돌로 만들어진 작은 가벽들로 둘러싸인 공간에 불과했다.
굳이 특징을 찾자면 지나치게 축축한 공기와 젓갈이 약간 상한 것 같은 냄새가 난달까.
“……이걸 선물로 준다고? 이걸로 뭘 어쩌게?”
-벽돌을 자세히 봐라.
태하는 데스워리어의 말처럼 가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태하.
가만히 벽을 바라보자, 그 벽의 무늬가 일반적인 것과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순간, 태하는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유, 유골?!”
-그렇다. 블랙 나이트의 유골이다. 이걸로 언데드를 생산할 수 있을 것이다.
데스워리어는 악마형 몬스터이기 때문에 그 표정이 웃고 있는지 아닌지 확실치 않았다.
허나, 적어도 데스워리어가 지금 상당히 상냥한 태도로 태하를 대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이 정도 양이면 거의 수천 마리는 만들 수 있겠는데?”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몬스터가 사람에게 선물을 주다니. 아직 그 사례가 한 번도 보고된 바가 없는 일이었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자면 바벨탑 안으로 들어간 사람을 몬스터가 공격하는 것은 일종의 방어기제이며 우리 몸 안으로 병균이 들어왔을 때 면역 체계가 반응하는 것과 같은 일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지금 데스워리어는 자기 몸 안으로 들어온 병균에게 선물을 주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진실이다. 최소한 이놈은 내게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아. 공격할 마음이 아예 없는 거야. 아니, 그걸 뛰어넘어서 어쩌면 내게 충성을 바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
군림이라는 스킬 하나가 이렇게까지 엄청난 결과를 만들어 내다니. 태하는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그는 데스워리어의 옆구리를 주먹으로 툭툭 쳤다.
“야, 그럼 이제 내가 여기 대장인 거냐?”
-그렇다. 대장으로 모시겠다.
“모신다…….”
-이곳은 이제 대장의 것이다. 어떻게 하든 대장 마음이다.
이제 50층은 태하에게 있어선 아지트나 다름이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50층 데스워리어의 성은 태하에게는 가장 안전한 장소라는 소리와 같았다.
그는 이곳에 비취 석판을 숨겨놓기로 했다.
“데스워리어, 내가 너를 앞으로 뭐라고 불러야 하지?”
-편한 대로.
“좋아, 그럼 앞글자를 따서 ‘데스’라고 부르지 뭐.”
-좋다.
“데스, 하나만 묻자. 이 성안에 물건을 숨긴다고 쳤을 때, 가장 안전한 곳은 어디야?”
-적당한 곳이 있다. 따라와라.
데스는 태하 일행을 데리고 예배당 밖으로 나갔다.
상당히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의 성벽을 따라서 천천히 걷던 데스는 왼쪽 네 번째 망루로 향했다.
망루에는 경계를 서는 몬스터들이 몇몇 보였다.
그중에는 이블아이의 마이너 버전이라 할 수 있는 데스벳도 있었다.
-끼리리릭?
녀석은 태하를 보자마자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날개를 펄럭거리며 부산을 떨었다.
-이히히히!
“뭐야, 적대감을 표시하는 건가?”
데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주인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이제 인지한 거다. 필요하다면 이제 정탐꾼으로 써도 된다.
“오호, 정탐꾼?”
-데스벳은 밤에도 낮처럼 볼 수 있고 몸집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어서 염탐이나 정탐으로는 그만이다. 심지어는 투명한 물체나 마기의 흐름도 읽을 수 있다.
“괜찮은 녀석인데? 이따가 몇 마리 챙겨야겠어.”
-많이 데려가도 된다. 데스벳은 둥지에서 원하는 만큼 찍어 낼 수 있으니까.
데스가 손가락으로 첨탑 아래쪽을 가리켰는데, 그곳에는 마치 팝콘처럼 생긴 동굴이 위치해 있었다.
팝콘 둥지는 1초에도 몇 마리씩 데스벳을 툭툭 뱉어내고 있었는데, 블랙 나이트들은 팝콘 둥지에 사람의 유골로 보이는 것을 계속 집어넣었다.
“사람의 뼈로 만들어지는 건가?”
-그렇다. 이곳이 아닌 이계에서 쏟아지는 유골로 만들고 있지.
“……이계?”
네 번째 망루는 아파트 15층 높이인데, 그 중간쯤 도달하니 벽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는 게 보인다.
공간의 일그러짐 현상이었다.
“화이트홀……?”
-비슷하다. 이걸 통하면 성 어느 곳이든 자유롭게 갈 수 있다.
데스는 거리낌 없이 아지랑이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꿀렁!
마치 유명한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장면처럼 벽 안으로 사람(?)이 들어가니, 일행은 이걸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싶은 표정이 되었다.
“……꼭 들어가야 할까요?”
“찝찝하긴 하죠. 하지만 최소한 비취 석판을 숨길 한 사람은 들어가야 할 것 같기는 한데요.”
태하는 찝찝해하는 동료들을 뒤로한 채 아지랑이 속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그러자 그의 귓가로 시원한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휘이이잉……!
잔잔한 바람이 잦아들 때쯤, 그의 주변은 전혀 다른 공간으로 바뀌어 있었다.
잠깐 눈을 감았다 뜬 태하는 붉은색 벽돌로 된 작은 방 안에 있었다.
“……뭐지?”
-밀실이다. 이곳은 오로지 성채의 주인만이 들어올 수 있는 곳이지. 이젠 대장만이 들어올 수 있다.
“그럼 50층을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깨부술 수 있는 놈이 쳐들어와도 괜찮다는 거네?”
-물론이다. 성이 부서져도 여긴 멀쩡하다. 다만 연결 고리가 사라질 뿐이지.
“오호……?”
이것으로 결정되었다.
앞으로 이곳은 비취 석판과 같이 중요한 물건을 두는 창고로 사용될 것이다.
다시 창고를 빠져나와 망루에 닿은 태하.
꿀렁!
일행은 걱정하는 표정으로 일관하고 있다가 태하가 나타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못 살아! 가잔다고 그냥 덜컥 따라가면 어떻게 해요?!”
“데스는 이제 우리 편이 확실합니다. 비취 석판은 아공간 밀실에 잘 보관해 뒀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아공간 밀실이요?”
“그게…….”
태하가 밀실에 대해 설명하자, 고상근은 아주 만족스러운 듯이 웃었다.
“당신만의 절대영역이라면 안심이죠!”
“그럼 이제 고상근 씨도 한시름 놓겠네요?”
“……그런 셈이죠. 물론, 아직 내 걱정은 절반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딸이 아내의 능력을 이어받았으니, 그걸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거든요.”
“꿈을 통제한다…….”
그는 고상근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러곤 싱긋이 웃었다.
“괜찮을 겁니다. 우리가 합심해서 도와줄게요.”
“……정말입니까?!”
“사람은 저마다 다 사연이 있고, 그 사연 때문에 서로 의지하면서 사는 법 아니겠습니까?”
태하의 말에 동료들도 공감했다.
친구들과 어울려서 한창 뛰어놀 나이에 이렇게 고립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닌가.
“그래요, 우리가 도울게요!”
“최선을 다해서 해결해 보자고요!”
고상근은 고개를 푹 숙였다.
“……정말 고맙습니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그의 눈에서 진실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태하는 그 눈물에 어떤 마음이 담겨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럼 내려가서 살 집이랑 적당한 신분부터 좀 만들어 봅시다.”
“집이요……?”
“비취 석판이라는 것을 주셨으니 나도 선물을 좀 해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땅값이 비싼 곳은 평창동이다.
한남동이 부자 동네로 급부상하기 전까지 평창동은 ‘회장님들의 집성촌’이라고 불렸었다.
그만큼 서울에서 제일가는 부촌이었다는 소리다.
이제는 이 평창동을 중심으로 자본이 몰리기 시작했고, 아파트와 주택가가 밀집되었기에 부동산의 바로미터는 명실상부 평창동이었다.
태하는 평창동이 발달함과 동시에 최근 각광받기 시작한 정릉동에 아파트를 구했다.
“근처에 학교도 있고 상가에 파출소에, 북한산도 바로 앞에 있고. 이 정도면 제법 괜찮을 겁니다.”
“……이 아파트, 수억은 할 텐데. 이런 걸 받아도 되는 겁니까?”
“괜찮아요. 제가 드리고 싶어서 드리는 거니까요.”
“정말 감사합니다!”
수조 원을 가진 태하에게 몇억쯤이야 사실 돈도 아니었다.
허나, 고상근이 정말로 고맙게 생각하는 건, 그 마음 씀씀이였다.
태하는 부녀가 정착할 수 있도록 그야말로 최선을 다했다.
“그 몹쓸 일을 당하시기 전에는 원래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저는 원래 자동차 정비를 했습니다. 제 아내는 그 옆에서 어린이집을 운영했었고요.”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상당히 단란한 가정이었겠군요.”
“아이가 늦게 생기긴 했습니다만, 그래도 큰 걱정 없이 살았어요. 열심히 일했고, 저축도 했었지요. 그땐 정말 행복했었죠…….”
“……그랬군요.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제 영혼이라도 팔 수 있을 것 같네요.”
“비록 부인께서 살아 돌아오실 수는 없더라도 다시 평온한 삶을 살 수 있게 해 드리겠습니다.”
태하는 고상근 부녀에게 새로 만든 신분증과 등본을 건네주었다.
며칠 전, 영수가 지인을 통해 만들어 낸 것이었다.
“당분간 이 얼굴, 이 모습으로 살아가도록 하세요. 은하, 학교도 보내시고요.”
“……감사합니다!”
“그럼 학교 예비 소집 다녀오세요. 며칠 후에 뵙겠습니다.”
고상근 부녀에게 필요한 것을 좀 사 주고, 태하는 인근 부동산을 찾아갔다.
공인중개사를 찾아간 그는 작은 건물을 알아보았다.
“작은 건물이라. 요즘 꼬마 빌딩이 유행이긴 한데, 그걸로 보여 드릴까요?”
“아니요. 카센터를 할 겁니다. 괜찮은 매물이 있다면 오늘 계약하도록 하죠.”
“카센터라……. 그렇다면 파출소 옆에 작은 건물이 하나 있는데, 그걸로 보여 드릴까요?”
“그럽시다.”
공인중개사는 생각보다 괜찮은 건물을 가지고 있었다.
300평 남짓 되는 적당한 평수에 1층과 2층에 각각 사무실과 화장실이 있어서 은하가 학교에서 돌아와도 육아와 일을 어느 정도 병행할 수 있겠다 싶었다.
“얼마입니까?”
“건물에 주차장 딸려 있는 거 보이시죠? 그건 절삭하고…….”
“그냥 다 살게요. 얼마입니까?”
“음, 그것까지 다 산다고 한다면 35억 7천쯤 하는데. 사실, 주차장이 도로 지분까지 먹고 있긴 합니다만 땅주인이 그렇게 하자고 할지 모르겠네요.”
“땅주인이 누군데요?”
“어차피 계약하면 만나게 될 텐데, 지금 잠깐 보실래요?”
“그럽시다.”
“음, 그런데 사람이 좀 특이해요. 그건 감안하셔야 해요.”
“특이하다고요?”
사람이 특이하면 얼마나 특이할까.
공인중개사는 태하를 일단 차에 태웠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좀 특이합니다. 적응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괜찮아요. 제 주변에도 특이한 사람 많거든요.”
차를 달리는 공인중개사.
스치고 지나가는 풍경들을 바라보며 태하는 어느새 생각에 잠겨 들었다.
과연 메피스토의 보물 창고까지 어떻게 갈 것인가.
끝도 없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리고 약 30분 후.
“도착했습니다. 안에서 기다리고 계신다고 하네요.”
“……어? 여기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