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9 비취 석판(1)
데스워리어의 성은 대략 3만 평 규모로 조성되어 있는데, 그중에서 내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3천 평 남짓으로 그다지 넓지는 않았다.
그나마도 피로 얼룩진 제단을 뺀다면 채 1천 평도 되지 않을 것이었다.
“자, 그럼 찾아봅시다. 비취 석판은 어디에 있습니까?”
“제가 알기론 피의 제단 아래에 비취 석판이 잠들어 있다고 했습니다.”
“석판이 잠들어 있어요?”
“일단 그곳으로 가는 길부터 찾아볼까요?”
태하와 일행들은 우선 이곳에 있는 시신들부터 밖으로 옮긴 후, 던전에 잘 매장해 주기로 했다.
이미 신원을 확인할 수 없을 만큼 많이 부패하여 어차피 밖으로 데리고 나가 봤자 가족을 찾기 힘들다는 생각에서였다.
이곳에 공동묘지를 만들어 놓고 나름대로 비석까지 세워 준 태하는 언데드들에게 물로 깔끔하게 제단을 청소하도록 시켰다.
대략 네 시간쯤 지나고 나니 예배당이 아주 깔끔해졌다.
끼잉!
다시 기억을 각성하는 태하.
“……여긴 대성당이었네요. 원래는 사람들이 살던 곳이었죠.”
“아니, 그걸 어떻게 아세요?”
“뱀파이어의 기억에 그렇게 나와 있네요.”
“아하!”
파티는 태하의 특성을 익히 알고 있기에 당연하다는 눈치였지만, 고상근은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적응을 하지 못했다.
“사람이 어떻게 뱀파이어의 기억을……?”
“아무튼, 제단 아래에 길이 있다는 거죠? 그럼 지하로 통하는 거겠네요?”
“아마도 그럴 겁니다.”
말하는 투로 미뤄 보아 아마 고상근도 자기 눈으로 석판을 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고상근은 도대체 이런 정보를 어디서 얻은 것일까?
아직까지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지만, 진실이 무엇인지 알아내기는 힘들었다.
다만, 태하의 파티에는 남들에겐 없는 뭔가가 있었다.
바로 심안.
끼잉!
“엇?!”
“왜 그러십니까?”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까 전투가 너무 힘들었나 보죠. 신경 쓸 것 없어요.”
고상근이 묻자, 한나는 특유의 까칠함으로 마무리했다.
그러곤 이내 슬그머니 태하의 손을 잡는 그녀.
그러자 두 사람의 정신이 이어졌다.
-태하 씨, 아무래도 고상근이라는 사람. 이 던전을 탐험한 적이 있는 것 같아요. 제단에서 고상근 씨의 사념이 느껴졌어요.
-……심안에 고상근 씨가 담겼다고요?
놀라운 사실이었다.
애초에 고상근은 비취 석판을 찾아 나선 전적이 있었고, 심지어는 이 제단 아래까지 탐사한 경험이 있었던 것이다.
‘모든 것은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었군. 도대체 이 사람, 정체가 뭐지?’
***
제단 아래로 사람의 피가 계곡처럼 흐르고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던 것인지 감을 잡을 수조차 없었다.
“……악취미로군. 왜 굳이 이렇게까지 사람을 죽인 걸까요?”
“자세한 건 알 수 없지만, 누군가의 부활을 기다리는 것 같기는 했습니다.”
“부활을 기다리다니요?”
태하의 질문에 고상근은 별로 대수롭지 않게 답했지만, 데스워리어의 성에 대해 세세한 정보를 알 만한 사람은 없었다.
허나, 고상근은 이게 정말 별게 아니라는 듯이 설명을 이어 나갔다.
“제단의 구조를 보면 사람의 피를 지하로 최대한 빠르게 모을 수 있게 되어 있어요. 뭐랄까, 피의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한 설계라고나 할까요?”
그의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제단 아래에 있는 거대한 밀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밀실의 모습은 지상과는 아예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참혹했다.
“우욱……!”
“……부취가 장난 아닌데. 도대체 사람을 얼마나 죽인 거야?”
일행들은 전부 입과 코부터 막았다.
부취가 하도 심해서 그것을 삼키는 순간 구토가 밀려올 것 같았던 것이다.
허나, 고상근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태연하게 길을 걸었다.
이런 냄새에 상당히 익숙한 것 같았다.
“장의사이신가……?”
“아아, 그건 아닙니다. 이런 제단을 많이 봐 와서 그래요.”
“제단을 많이 봐 왔다고요?”
“이런 제단은 던전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내가 있었던 연구실에도 이렇게 생긴 제단과 시설이 존재하고 있었죠. 저는 그곳에서 강제 노역을 당했었고요.”
고상근이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건 태하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정말로 강제 노역을 당해 왔고, 이런 끔찍한 광경에 상당히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내가 아는 것만 20개가 넘어요. 던전에 있는 제단이 가장 크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거대할 줄은 솔직히 몰랐네요.”
“당신은 그럼 이곳저곳 끌려다니면서 노역을 한 겁니까?”
“네, 그런 셈이죠.”
“그럼 바깥으로 나가 탈출할 수 있는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을 텐데요?”
“솔직히 기회는 있었죠. 하지만 그때마다 아내와 딸이 눈에 밟혀서 그럴 수가 있어야죠.”
“으음, 그랬군요…….”
“그리고 제단과 제단을 오가는 동안 저는 바깥 공기를 쐰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아니, 그럼 어떻게 이동을 했던 겁니까?”
“모르겠어요. 자고 일어나면 이동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차로 옮겼는지 뭘로 옮겼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모든 것이 진실이었다.
너무 충격적이라서 이걸 도대체 어떻게 믿어야 할지 감조차 오지 않을 정도였다.
‘도대체 그 미친놈들이 원하는 게 뭐야? 왜 그런 짓을 한 거지?’
굳이 사람을 죽여서 제단을 피로 물들여야 할 이유가 뭘까?
아니, 그럴 이유가 있다고 해도 동족을 살해해서 제단을 쌓는 건 제정신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이윽고 거대한 지하 밀실을 둘러보는 일행들.
밀실에는 높이 20m의 거대한 비석이 8개 세워져 있었고, 그 안에는 상형문자들이 가득했다.
한나는 그 글자를 보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룬어……인 것 같기는 한데, 룬어와는 좀 다르네요.”
“또 다른 차원의 언어라는 겁니까?”
“그런 것 같아요. 일부 비슷한 면이 있기는 한데, 그게 룬어라고 얘기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태하는 비석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비석은 글귀를 전부 붉은색으로 해 두었는데, 그것은 마치 피로 글씨를 써 놓은 것 같은 모양새였다.
“피를 글로 써놓았다면 분명…….”
손으로 비석을 만지자, 놀랍게도 손에 피가 묻어났다.
일행들은 경악했다.
“이 글자들을 모두 피로 만든 건가……?!”
“비석에 홈을 파 놓고 그 안을 피로 물들인 거죠. 미친놈들, 왜 굳이 이런 짓을 한 거야?”
“아니, 그나저나 이런 미치광이들이 만든 신전에 비석이 어디에 있다는 건가요?”
고상근은 아무런 말 없이 비석들이 자리 잡은 곳 중앙으로 향했다.
비석들이 둥글게 원을 그리듯 서 있는 광장의 중심에는 피로 만든 연못이 있었는데, 그 안으로 거침없이 들어갔다.
“어, 어어……!”
“여기 있다고 들었습니다. 피로 만든 연못에 팔을 담그면…….”
이윽고 나오는 가로 30cm, 세로 50cm의 석판.
그야말로 깨알같이 룬어로 도배가 된 석판. 그 석판을 보자마자 태하는 본능적으로 그 안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맞아요. 이게 비취 석판 맞아요!”
***
비취 석판의 내용은 놀라웠다.
지금까지 인간이 발굴하고 사용해 왔으며, 이를 얻기 위해서라면 전쟁도 불사했던 물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공식들이 적혀 있었던 것이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비취 석판의 내용을 현실로 옮겨 놓으려면 ‘현자의 돌’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현자의 돌이라……. 어차피 비취 석판만 가지고는 연금술이 불가능했던 것이네요. 그렇죠?”
“그런 셈입니다. 소문에 의하면 현자의 돌이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현자의 돌을 가지고 있어도 정작 본인은 그게 어떤 가치를 지녔는지 알 수 없다고 하죠.”
“아니, 도대체 고상근 씨는 그 시설에 얼마나 있었기에 그런 정보들을 다 알고 있는 겁니까?”
“50년이요.”
“며, 몇 년이요?”
“물질계의 시간으로 50년을 그곳에 갇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밖에 나와서 흐른 시간을 계산해 보니 불과 5년밖에 지나 있지 않았죠.”
“그럼 그곳은 물질계와 시간이 반대로 흐른다는 겁니까?”
“글쎄요. 반대는 아닌 것 같고, 느리게 흐른다고 볼 수 있지요.”
들으면 들을수록 놀라운 얘기들이다.
아무튼, 이제는 비취 석판을 어디에 숨겨놓을지 고민해야 할 때였다.
“비취 석판은 어디에 놓을까요?”
“50층이 가장 안전하기는 합니다. 태하 씨의 말대로라면 이제 이 50층은 당신의 요새나 다름이 없으니까요.”
“흠, 그건 그렇죠. 하지만 무작정 이곳에 숨겨놓는 것도 좀…….”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던 일행들.
희란은 재차 등반할 때 다시 고민하자는 의견을 냈다.
“어차피 대장은 진실을 볼 수 있는 눈이 있다고 했죠?”
“응, 그랬지.”
“그럼 일단 지금은 내려갔다가 리젠 시간에 맞춰서 다시 올라오는 게 어때요? 그때 데스워리어 군단을 시험해 보는 거죠. 거짓말을 하는지 안 하는지.”
“아하! 그럼 되겠군!”
일행은 이 방법을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허나, 고상근은 달랐다.
“비취 석판 자체가 세상으로 나가는 게 저는 좀 두렵습니다만.”
“현자의 돌이 없는데도요?”
“……그걸 누가 가지고 있는지 또 모르잖습니까. 그놈들, 당해 보지 않으면 얼마나 무서운 놈들인지 모릅니다.”
눈동자가 흔들리는 고상근.
아무래도 그는 50년의 세월 동안 실험실에 갇혀 있으면서 일종의 트라우마 같은 것이 생긴 모양이었다.
한나는 불현듯 좋은 방안을 내어놓았다.
“아아! 그래! 그 홍이라는 꼬마요.”
“우리 홍이요?”
“그래요, 홍이. 홍이에게는 무슨 아공간 같은 것이 있다면서요?”
“아 참, 그랬지! 당분간은 홍이한테 맡겨 볼까요?”
희란은 홍이가 어떤 능력이 있는지 일러 주었다.
그러자 고상근은 아까보다는 훨씬 나아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몬스터이긴 하지만, 그래도 정태하 씨와 하희란 씨가 키우는 것이라면 문제없겠지요.”
“자, 그럼 내려갑시다.”
이제 던전을 내려갈 때는 홍이의 도움을 받았다.
굳이 시간을 낭비하면서까지 그 먼 길을 걸어갈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짜잔!
분홍색의 머리카락, 그리고 순백색 얼굴의 홍이가 태하의 앞에 등장했다.
여전히 홍이는 초등학교 저학년 수준의 모습이었다.
“어머, 귀여워!”
“진짜 홍이 같은 딸만 낳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시집을 갈 텐데.”
한나는 홍이만 보면 그야말로 눈이 뒤집힌다.
그만큼 귀엽고 사랑스러우니, 당연한 반응 같기도 했다.
태하는 홍이에게 비취 석판을 건넸다.
“홍아, 이걸 좀 맡아 줘. 잃어버리면 안 되는 물건이거든.”
-응! 사랑해, 라고 말하면.
“응, 그래. 사랑해.”
-헤헷, 나도 사랑해!
홍이는 애초에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
굳이 대가를 바란다면 태하와 희란의 관심과 사랑 정도일 것이다.
아공간 주머니 안에 비취 석판을 집어넣은 홍이는 태하의 손을 잡았다.
-집에 가자!
“응, 그래. 집에 가자.”
일행은 익숙하다는 듯이 동그랗게 모여 서로 손을 맞잡았다.
허나, 고상근은 지금 이게 도대체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왜, 이렇게…….”
“엘리베이터 탄다고 생각하세요.”
“엘리베이터요?”
그는 얼떨결에 태하의 손을 잡았다.
-으으으응!
팟!
홍이가 힘을 한 번 주자, 주변의 풍경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바로 아지트로 돌아온 것이었다.
“홍이야, 고마워!”
-응!
“사랑해!”
-응, 사랑해!
홍이는 금방 다시 태하의 팔찌 안으로 들어갔다.
얼떨떨해하는 고상근.
허나, 그는 이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 느낌, 익숙해요.”
“익숙하다니요?”
“그놈들, 이런 공간이동을 연구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내가 제단을 옮겨 갈 때마다 잠결에 이런 느낌이 어렴풋이 들었었거든요. 그때는 그저 꿈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봐요.”
“허어, 그렇다면 이걸로 몬스터를 밖으로 데리고 나갔을 수도 있겠네요?”
“그런 셈이죠.”
태하는 그 연구소라는 놈들을 조금 더 파 볼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