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헬스레이드-40화 (40/197)

040 꽃이 피다(2)

던전 29층.

태하의 주머니에서 작은 묘목과 고양이가 튀어나왔다.

“됐다. 놀아라.”

-꺄르르르!

신목과 마계화였다.

“애들아, 너무 멀리 가지는 마!”

-헤헤, 응!

“예쁘다!”

녀석들을 마치 엄마의 미소로 쳐다보는 희란.

태하는 아마 그녀가 당장 아이를 낳아도 엄마의 역할을 충분히, 그리고 훌륭히 해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 모습을 넋 놓고 지켜보는 태하의 시선을 느낀 희란이 웃으며 말했다.

“왜? 내 얼굴에 뭐 묻었어요?”

“……아니. 굳이 묻었다면 예쁨?”

“호호, 대장도 참! 사람이 싱겁다니까.”

주말에 나들이를 가자고 해서 결정한 곳이 바로 이곳 던전 29층이다.

사람들이 들으면 뭐 이런 사람들이 다 있냐고 하겠지만, 이들 두 사람에게는 지금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웃는 신목.

분홍색 몸통에 사람처럼 팔다리도 있고 머리카락처럼 늘어진 분홍색 가지와 꽃잎도 있다.

멀리서 보면 작은 소녀처럼 보이기도 했다.

“음……. 가지치기를 할 때가 된 것 같기도 한데. 아직 괜찮나?”

-꺄하하하!

“괜찮아요. 저 정도 길이가 딱 좋아.”

29층은 나무에 필요한 영양분이 다 있다.

이곳에서 잠시 뿌리를 내린 녀석은 15분간 영양분을 몸에 축적했다.

스르르릉…….

신비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저 신묘한 빛이 뿜어지면 초목이 우거지고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리라.

“……신묘하군.”

“아름답지 않아요? 힐링이 되는 것 같아.”

잠시 후, 나무는 다시 뿌리를 거두었다.

신목은 태하의 다리에 딱 매달려 장난을 쳤다.

“내가 그렇게도 좋아?”

-응!

“허 참.”

[신목 레벨: 2]

[친밀도: 102]

“친밀도가 벌써 100%를 넘었네. 무슨 신목이라는 게 강아지 같잖아?”

“……피이, 언니는? 홍이 언니는 난데?”

신목에게는 벌써 홍이라는 이름도 있다.

꽃잎이 분홍색이라서 이름이 홍이, 녀석도 제법 좋아하는 것 같다.

홍이는 희란의 품에 쏙 안겼다.

-헤헤, 사랑해!

“어머나……! 이게 정말 불여시가 따로 없네! 내가 정말 녹는다, 녹아!”

이런 딸이 있었다면 진짜 얼마나 행복했을까 싶기도 했다.

홍이는 심지어 간단한 인간의 언어까지 구사할 수 있으니 기분이 묘해질 때가 종종 있었다.

‘……이게 가족이라는 건가?’

퀘스트라는 것이 결국 사람 비슷한 식물을 키우는 것.

한마디로 얼떨결에 육아, 아니 육묘를 하게 된 것이었다.

허나 태하는 얼떨결에 맡은 그 퀘스트에서 사람 냄새가 무엇인지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마계화, 얘는 어디 있어?”

마계화는 매번 찾으러 다니는 게 일이다.

신목의 성향이 똥꼬발랄이라면 마계화는 중2병 걸린 소년 같았다.

한참을 찾아보니 연못 앞에 비친 자기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

“또 저러고 있네.”

새까만 퓨마처럼 생겼지만, 온몸 곳곳에 넝쿨이 자라나 마치 수풀 더미가 고양이로 변신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태하는 마계화의 뒷덜미를 잡고 쭉 들어 올렸다.

-캬하하악!

“밥 먹어, 인마. 시간 없어.”

-끄응…….

풀이 죽어 버린 마계화.

희란은 어떻게 알고 왔는지, 태하를 나무란다.

“애가 풀이 팍 죽어 버렸네. 이리 와, 아가! 누나한테 와, 까미!”

마계화의 이름은 까미다.

까맣고 예쁘다고 해서 까미라고 지은 건데, 녀석은 희란에게만큼은 애교가 철철 넘친다.

-그릉, 그릉!

“어머, 골골송도 불러 주네? 스윗해라!”

“……쟤는 참 사람을 가려.”

한참을 애교를 부리다가 그제야 뿌리를 내리는 마계화.

29층은 이 두 그루의 나무가 자라기에 가장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다.

이를테면 일종의 이유식이랄까.

여기서 양분을 채우면 무럭무럭 성장할 것이라고 퀘스트에 나왔다.

[마계화 레벨: 3]

[친밀도: 101]

나무지기 퀘스트의 장점이자 맹점은 나무의 성장이나 상태가 태하의 근육 상태와 비례한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나무가 울창해지면 태하도 득근하는 것이고, 시들면 근 손실이 온다는 뜻이다.

물론, 그건 희란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친밀도가 상승합니다]

“됐다. 이제 내려가자.”

이제 나무 두 그루 다 돌봐 줬으니 그만 돌아갈 생각이었다.

허나 마계화가 태하의 어깨에 앞발을 척 걸쳤다.

-그르릉…….

골골거리는 소리를 내더니 새까만 열매를 슬쩍 건네는 마계화.

태하는 실소를 흘렸다.

“뭐야, 보은하는 거냐?”

-…….

놈은 대답 없이 다시 연못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마계화의 열매에는 류신이나 발린같이 근육 회복에 좋은 물질이 풍부했기에 보충제로 먹으면 그야말로 압권이다.

“거봐요, 까미가 속이 깊지?”

“음, 그러네. 제법 돌보는 맛이 있어.”

안 그래 보여도 마계화는 은근히 츤데레다.

한바탕 육아를 끝내니 시간이 제법 흘러 있었다.

태하는 손뼉을 치며 녀석들을 불렀다.

“가자, 홍아! 까미야, 얼른 이리로 와!”

그러자 온몸에 은빛 나비를 매단 신목이 달려왔다.

-꺄하하하!

“뭐야, 페어리 아니야? 훠이, 저리 가! 우리 이제 내려가야 해.”

순간, 페어리의 몸이 반짝이는 듯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떨어지는 작은 번개.

콰직!

“……으윽, 뭐 하는 거야!”

-가자……! 같이!

“뭐? 같이 내려가자고?”

-응!

“안 돼. 몬스터는 던전을 나갈 수 없어.”

신목은 스르르 미소를 지었다.

녀석은 태하의 팔에 매달리더니 이내 눈을 감았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파앗!

“허억!”

29층에서 순식간에 28층으로 내려온 태하.

놀랍게도 그는 점멸을 경험한 것이었다.

뒤늦게 까미를 안고 내려온 희란은 깜짝 놀라 홍이에게 물었다.

“뭐야, 이거 지금 홍이가 한 거야?”

-헤헷, 응!

“어머, 대단해! 우리 홍이는 천재야!”

-히히, 사랑해!

뭔가 엄청난 능력을 발견한 것 같은 느낌이다.

바벨탑을 나온 태하는 인근 주차장으로 향했다.

태하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텔레포트. 그게 몬스터 강화 사건의 전말이었던 건가?”

“텔레포트?”

“아수라 길드가 일전에 와이번을 강화시킨 적이 있었어. 헤츨링을 잡아다 먹이로 준 거지.”

“……그게 가능해요?!”

“흠! 그것과 관련이 있는 걸까?”

태하의 어깨에 앉은 신목.

페어리들과 놀고 있는 이 작은 묘목이 이번 사건의 핵심이었던 것일까?

부아아앙!

태하를 마중하러 나온 스포츠카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자, 이제 그만 들어가자.”

-응!

신목은 언제 만든 것인지 옆구리에 무슨 주머니 같은 것도 차고 있었다.

그 주머니가 열리더니 페어리들이 들어갔다.

신기한 것은 주머니는 손톱보다 작은데 페어리는 사람 손바닥만 하다는 것이다.

“뭐지? 몸을 접은 건가?”

-우응?! 헤헷!

신목은 태하의 손가락에 주머니를 씌워 주었다.

그러자 느껴지는 엄청난 청량감.

“……허억! 뭐야, 이거!”

“왜 그래?!”

“이것 좀 봐!”

주머니를 벌려 보니 그 안에는 작은 숲이 조성되어 있었다.

신목은 환하게 웃으며 자랑하듯 웃었다.

-히힛!

“허 참, 알다가도 모를 녀석이네.”

“……대단해! 우리 홍이는 못 하는 게 없네?”

신목은 공간을 조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일까.

잠시 후, 태하의 스포츠카가 도착했다.

부아앙!

“알아서 오니 편하네.”

“그러게요.”

29층 공략에 대한 보수로 길드의 아지트는 물론이고 바벨탑 인근에 집도 받았다.

이 스포츠카는 그때 보너스로 받은 것이다.

태하가 다가서자 문이 열리고 중앙제어장치의 신경삭을 알아서 연결했다.

-오후 날씨가 좋습니다. 어디로 모실까요?

“집으로 가자.”

-목적지를 집으로 설정합니다.

바벨탑에서 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집으로 가는 길.

태하는 도착한 메시지부터 확인했다.

“새로운 메시지가 있었나?”

-필터링 된 메시지 79건이 있습니다. 들으시겠습니까?

“길드들이 보낸 메시지인가?”

-네, 그렇습니다.

“그럼 됐어. 읽어 줄 필요 없어.”

-삭제할까요?

“응.”

-메시지를 삭제합니다…….

태하는 태풍의 핵이다.

길드들은 섭외 1순위의 태하를 붙잡기 위해서 하루에도 수백 번씩 연락을 해 왔던 것이다.

“번호를 바꾸든가 해야지.”

-SNS 메시지도 포화 상태입니다. 비울까요?

“중요한 메시지가 있어?”

-없습니다. AI 분석에 의하면 영입 제안이 78%, 여성들의 호감 표시가 22%입니다.

순간, 희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머나, 인기남이시네? 인기 많아서 좋으시겠어요, 정태하 씨?”

“아, 아니야! 저거, 아무것도 아니야! 일단 지워 버려!”

-SNS 메시지를 삭제합니다…….

헬창 헌터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각종 회사의 앰배서더를 맡게 되었는데, 만약 그게 아니었다면 SNS는 진즉에 접었을 것이다.

메시지를 거의 다 정리했을 무렵, 아파트가 보인다.

강남 일대에 남은 몇 안 되는 아파트이지만, 시설 하나는 여전히 최고다.

차에서 내려 아파트 정문으로 들어가자, 태하의 스포츠카는 알아서 자기 자리를 찾아서 돌아갔다.

이제 막 집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아파트 경비업체에서 태하에게 쪽지를 한 통 전해 주었다.

“정태하 씨 되시죠?”

“네, 그렇습니다만.”

“청룡방에서 주고 갔습니다.”

쪽지에는 ‘나 좀 보세.’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바로 백선이었다.

***

여의도 ‘청금타워’의 옥상은 35층 위에 있다.

청금타워 옥상은 평소에는 굳게 잠겨 있다가 특별한 날에만 열린다.

태하는 긴장된 표정으로 옥상 문 앞에 섰다.

“내가 천하의 백선을 마주하게 될 줄이야……!”

옥상 문을 열자, 시원한 바람이 태하의 얼굴을 때렸다.

솨아아아!

‘……도향(塗香)?’

향나무 가루로 만든 향료인 도향은 부정을 없애고 영혼을 정화한다고 알려져 있다.

일반인에게서는 좀처럼 맡기 힘든 묵직한 향이었다.

저 멀리에는 구부정한 모습의 노인이 서 있었다.

향기는 그곳에서부터 나는 것이었다.

“잘 왔네.”

“……어르신이 바로.”

“그래, 내가 백선일세.”

숨결에서부터 도향이 진하게 났다.

백선은 분명 태하보다 키가 30cm 이상 작았지만, 그림자는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다.

그 강렬한 존재감으로 인해 도저히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의 압박감마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마치 아득한 대자연을 마주한 공포감이랄까.

‘이 정도면 기세로 사람도 죽이겠어!’

진짜 고수라는 느낌이 물씬 풍겨 왔다.

“자네의 활약상은 익히 들었네. 제법 대단한 일을 했더군.”

“과찬이십니다. 그냥 재주 몇 번 부렸을 뿐입니다.”

“그나저나 선물은 마음에 드는가?”

“과분할 정도로 좋습니다. 넘칠 정도로 마음에 들고요.”

“허허, 다행이로군. 이제 앞으로 자네는 큰일을 하게 될 거야. 큰일 할 사람에게 걸맞은 선물을 주는 게 당연하지.”

태하의 몸에 손을 대는 백선은 차례대로 몸의 세 곳을 짚었다.

“이제 곧 레이드를 떠난다면서. 그에 앞서 선물을 하나 주도록 하지.”

태하의 몸 안에 뭔가 형언할 수 없는 기운이 빨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두근!

“허, 허억……!”

“먼 과거에는 이것을 벌모세수라고 부르기도 했다지.”

“아아! 저번에 본 적이 있습니다!”

“음, 그래?”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더니, 이내 몸 안에 3개의 무형의 공간이 생겼다.

공허하지만 강렬한 느낌.

태하는 이것이 보통의 기운이 아님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끼이이잉!

뭔가에 공명하는 태하의 기운.

“으음……!”

순간, 백선의 눈이 잠시 커지는 듯했다.

잠시 생각에 잠겼지만, 백선은 이내 다시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태하의 머리, 가슴, 배를 가리켰다.

“머리로는 더 높은 이상을 생각하고 가슴으로는 대의를 품으며, 단전에는 청룡의 기백을 담고 살아가시게.”

“……뭔가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것 같습니다! 몸 안에 힘도 넘치고요!”

“육신의 힘은 그저 껍데기가 만들어 낸 허상에 불과하다네. 중요한 것은 자네 안의 야수를 깨우는 일.”

“아아……!”

“이 험한 세상을 헤치고 나갈 수 있는 힘, 그것은 바로 야수가 되는 길뿐이라는 것을 명심하시게.”

“해서, 제게 야수의 능력을 심어 주신 겁니까?”

백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길을 뚫어 준 것뿐이야. 지금 자네 안의 힘은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고.”

“원래부터 있었다는 것…….”

“왜, 흔히 선천지기라고 하잖나. 자네는 스스로 타고난 힘을 각성한 것뿐이야.”

그는 태하의 손목에 청색 팔찌를 채워 주었다.

팔찌 안에는 한글로 ‘청룡방’이라는 글귀가 각인된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었다.

“자네에게 우리 방의 일원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줄까 하네. 어떤가?”

“그래 주신다면야 영광이지요!”

“그래, 앞으로는 청룡의 기백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하게.”

“감사합니다!”

“앞으로의 활약을 기대하겠네.”

이내 웃으며 뒤로 한 발짝 물러서는 백선.

바로 그때, 그의 신영이 바람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파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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