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9 꽃이 피다(1)
여의도로 정산을 하러 가는 길.
태하는 충격적인 사실을 전해 들었다.
“마왕이라……. 그런 존재가 있었다는 건 꿈에도 몰랐는데.”
“이제 우리에게도 반드시 던전을 올라야 할 이유가 생겼어요.”
“흠! 그나저나 이걸 누구한테 어디까지 알려야 할까요?”
“아직은 아무도 믿지 마세요. 우리끼리만 알고 있자고요.”
“청룡방에도 알리지 마요?”
“네, 그렇게 하자고요.”
한나는 함구령을 내렸고, 헬스하운드는 그것을 충분히 이해했다.
여의도 코어 거래소에 당도한 일행은 간단한 서류를 작성하며 레이드 일정을 조율했다.
“다음 레이드 일정은 언제쯤 잡을 수 있을까요?”
“음, 한 2~3개월 뒤?”
“그나저나 근딜을 어떻게 다시 구하죠?”
스스로의 부족함에 개탄을 토해냈던 고영수의 복귀가 요원한 이상, 근딜을 다시 구해야만 한다.
허나, 태하는 3개월의 말미를 달라고 부탁했다.
“3개월, 그동안만이라도 좀 기다려 봅시다.”
“그런다고 떠난 사람이 다시 돌아올까요?”
“그 사람도 고민이 많겠죠. 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믿어요.”
“흠! 그래요. 기다려 보죠.”
헬스하운드는 태하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렇게 태하는 조선엽의 창구를 찾아갔다.
조선엽은 웃으며 태하의 가방을 스캐너에 집어넣었다.
“소식은 들었습니다! 남산에서 크게 한 건 하셨다면서요?”
“운이 좋았다고나 할까요?”
“운도 실력이라는 말이 있죠. 실력이 나쁘면 운도 따르지 않아요.”
잠시 후, 스캐너에서 아이템의 이름들이 출력되었다.
조선엽은 크게 손뼉을 쳤다.
“이야, 대박이네요!”
“대박이요?”
“마법사 계열 전용 장비가 나왔잖아요?”
“허어, 그래요?”
“수정구, 망토……. 이 정도면 거의 SS급 장비라고 해도 무방하겠네요.”
던전에서 범위 공격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중화기를 다룰 수 없기에 대량 살상이나 광범위 공격을 펼치려면 ‘마딜’, 그러니까 마법사가 필요한 것이다.
헌데, 마법사는 장비에서 상당히 많은 부분의 시너지를 끌어오기 때문에 제대로 위력을 내려면 장비가 좋아야 한다.
“축하드립니다! 앞으로 마딜만 구하시면 되겠네요.”
“하하, 그러게요?”
홍복이다.
이렇게 운이 좋기도 쉽지 않은데, 태하는 매직 찬스를 타고난 운명인 모양이었다.
이윽고 계속되는 스캔.
조선엽은 SS급 장비 이외에도 B급 코어, 몬스터의 부산물 등을 감별해 냈다.
“이블아이의 홍채, 데스워리어의 힘줄까지……! 이야, 족히 몇억은 나오겠네요.”
“그 정도인가요?”
“이블아이의 홍채는 가격이 상당히 비싸요. 잘 나오지도 않을뿐더러 공략도 힘드니까요.”
이 정도면 대박이 났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였다.
허나 아직 정산은 끝나지 않았다.
계속되는 스캔에 눈을 가늘게 뜨며 집중하던 조선엽은 불현듯 어느 한 점에 시선이 멈췄다.
“이건…… 새로운 종류의 코어인데?”
“코어요?”
“지금까지 발견된 코어는 총 다섯 종류잖아요? 마이너스 코어까지 해서. 하지만 이건 전혀 다른 종류의 코어인데요?”
가끔 새로운 종류의 코어가 발견되긴 한다.
허나, 거의 힘을 잃었거나 방전되어 더 이상 쓸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색이…… 에메랄드색이네요. 비취색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코어도 다 있어요?”
“일단 방사선상에는 그렇게 나와요. 그런데 이거, 생긴 것도 약간 특이하네요.”
“원래 코어는 동그랗게 생겼잖아요?”
“그래요. 원래는 약간 타원형에 가까운 원형으로 생겼죠. 하지만 이건…… 네모난데요?”
“……네모난 코어라고요?”
***
고영수가 헬스하운드를 나온 지 3개월이나 지났다.
퍼억!
-끄웩……!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는 고블린.
[특성 스킬: 채집]
[새로운 종의 고블린이 도감에 등록됩니다]
[몬스터명: 이고크족 고블린]
[고블린과 채집 현황: 14/???]
단검으로 고블린을 훑듯이 사냥하며 지나가는 고영수는 순식간에 도감을 채워 나갔다.
[금일 사냥 개체 수: 165]
[경험치 가중치: 31%]
[보너스 획득까지 남은 도감 수: 12,034]
“흠, 31% 가중치라니. 꽤 짭짤한데?”
솔플의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짬짬이 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준비에 걸리는 시간이 없다는 것이 장점이다.
그렇게 몬스터를 잡다 보니 10층까지는 금방이었다.
쿠오오오!
저 멀리서 들리는 오우거의 고함 소리.
고영수는 그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스르르 검을 내려놓는 고영수.
체인으로 연결된 단검을 바라보는 고영수의 눈가가 파르르 떨려 왔다.
“정작 내가 맡은 무기를 다룰 힘도 쓸 수 없으면서, 단검만 휘두른다고 해서 뭐가 된다는 거야……?”
현실을 자각하고 나니 사냥할 마음이 싹 사라졌다.
허나, 바로 그때! 놀라운 광경이 목격되었다.
“……뭐지?”
환두대도가 없어도 위기를 감지할 수 있었다.
위기 감지 이후에 이어지는 엄청난 공격.
“배리어!”
지이잉!
순백의 배리어, 그것을 뒤집어쓴 채 스태프를 휘두르는 사람이 있었다.
빠각!
-쿠웨엑!
“후우, 근력이 강해지니 이런 것도 가능하네?”
놀랍게도 그녀는 바로 헬스하운드의 힐러, 희란이었다.
힐러가 휘두른 몽둥이찜질 한 방에 오우거는 영원히 깨어나지 않을 숙면에 들어가 버렸다.
턱이 빠져라 입을 떡 벌리는 고영수.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고영수 씨! 여기 계실 줄 알았어요.”
“히, 힐러가 이렇게 무지막지한 근딜을 보여 주다니!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래요. 말도 안 되죠. 하지만 무기에 저의 스텟을 맞추니 이 말도 안 되는 일이 말이 되더라고요.”
“무기에 스텟을 맞춘다……?”
그녀는 고영수에게 진심 어린 충고를 해 주었다.
“근육 안에 길이 있어요. 당신이 어떤 상처를 입었는지 알아요. 하지만 그 상처, 득근으로 이겨 낼 수 있다고요!”
“……득근이요?”
“운동하세요. 그럼 당신도 강해질 수 있습니다.”
“나도 강해질 수 있다는…….”
“그래요! 당신도 강해질 수 있어요!”
***
며칠 후.
덕림헬스로 고영수가 찾아왔다.
쿠웅!
무릎부터 꿇는 고영수.
“죄송합니다! 평생 한 길드 안에 속하겠다 약속해 놓고 혼자 도망을 쳤으니, 죽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고영수의 석고대죄.
한창 운동을 하고 있던 헬스하운드의 일원들은 그를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잘 오셨어요.”
“……면목 없습니다.”
“아니요. 사람이 너무 절망하면 그럴 수도 있어요. 일단 일어나세요.”
고영수는 태하의 손에 이끌려 자리에서 일어섰다.
허나 그는 이내 다시 무릎을 꿇었다.
쿵!
“제자로 받아 주십시오!”
“제자요?”
“당신에게 근육의 길이 어떤 것인지 배워 보고 싶습니다!”
“근육의 길이라!”
바로 그때, 고영수에게 변화가 찾아왔다.
끼이이잉!
금색으로 빛나는 고영수.
그런 그의 빛은 이내 먹색으로 짙어지더니 이내 성향과 특성이 변해 버렸다.
[검사 -> 귀수]
[전직하셨습니다]
“전직?”
“허어, 이것이 말로만 듣던 전직?!”
헌터 세계에 전설처럼 전해져 오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특성과 성향이 완전히 바뀌는 ‘전직’이라는 것이다.
전직이 되면 그 사람은 보다 강력해진다.
이전의 각성은 마치 도움닫기였다는 생각이 들 정도라고 했다.
허나, 전직을 하면 레벨이 1이 된다.
“레벨이…… 다운되어 버렸네.”
“허억! 어쩌면 좋나요?!”
고영수는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좋네요. 차라리 지금부터 차근차근 레벨을 올려서 근육의 길이 뭔지 제대로 배워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으음, 역시! 멘탈이 단단하시군요!”
“그럼 어떤 것부터 배우면 될까요? 러닝? 줄넘기?”
고영수는 무척이나 적극적이었다.
그의 간절함은 탑의 수호자마저 감동시켰다.
[스킬: 득근의 길]
[탑의 수호자는 간절한 자를 후원합니다]
[‘점진적 과부하’와 ‘득근의 길’ 패시브가 고영수에게 적용됩니다]
너무나도 자주 감동하는 탑의 수호자 덕분에 고영수는 이제 운동하는 족족 득근의 길로 접어들게 될 것이다.
허나, 그 과정은 결코 녹록지 않을 것이다.
“……누가 득근의 길을 갈구한다고?!”
“예, 관장님! 접니다! 고영수!”
“좋아, 고영수! 자네는 내가 맡는다!”
보현 관장이 고영수를 단련시킨다면 아마 3개월 내로 몸이 완성될 것이다.
태하는 한나에게 3개월 뒤에 출발하자고 부탁했다.
“우리의 레이드 일정을 미룰 수 있을까요?”
“한번 해 볼게요. 기왕지사 출발하는 김에, 우리도 조금 더 단련하고요.”
***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듯 거친 숨을 몰아쉬는 고영수.
“허억, 허억!”
“자, 그럼 복압 넣고 다시 한번 갑시다!”
요즘 고영수가 집중하고 있는 것은 바로 바벨컬과 라잉 트라이셉스 익스텐션이다.
만약 팔을 키우는 데 딱 두 가지 운동만 해야 한다면, 단연 이 두 운동을 할 것이다.
고영수는 벨트를 질끈 동여매고 바벨컬 자세를 잡았다.
“후우웁!”
바벨컬은 손바닥이 바깥으로 향하게 한 상태에서 봉을 잡고 그대로 얼굴 부근까지 바벨을 올리는 동작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마치 원을 상형화한 듯, 호를 그리는 궤적을 따라 팔을 접어야 한다는 것이다.
“팔! 팔이 벌어져요!”
“으으으읍!”
바벨컬은 몸의 옆 부분에 상박을 고정한 상태로 진행된다.
어차피 봉을 잡는 간격은 팔의 생김새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에 첫 자세를 잡았다면 상박은 어지간해선 떨어뜨리지 않는 것이 좋다.
하지만 지금 고영수는 무려 60kg에 달하는 고중량의 바벨컬을 진행하고 있다.
인간이라면 이 정도 무게에서 자세와 통제를 완벽하게 하기 힘들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려면 엄청난 근력, 그리고 집중력과 의지가 필요하다.
“완벽한 자세, 딱 한 번이면 됩니다.”
“으허어어업!”
힘 412, 체력 215, 민첩 112의 스텟은 사실 인간에게선 기대하기 힘든 수치다.
그런데 고영수는 귀수로 전직하면서 민첩 스텟이 550까지 올라갔다.
이제 이 정도면 민첩은 문제가 되지 않으나, 힘이 문제였다.
헌데, 그런 문제를 바벨컬이 돌파해 줄 수 있었던 것이다.
[스킬: 귀수의 팔뚝]
[이두와 삼두는 체력을 폭발적으로 상승시켜 줍니다]
[단, 상승치는 중량에 비례합니다]
[상승치: 중량 x 5]
다소 극단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무식한 중량을 요구하는 수치다.
허나, 아직도 무게의 절반도 달성하지 못했으니, 고영수는 이를 악물고 훈련에 매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영수는 자신의 한계를 느꼈다.
목에선 피비린내가 올라왔고 귓가에는 이명까지 들려왔다.
허나 포기하지 않는다.
“중량 업!”
“오케이, 갑시다!”
고영수는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듯 중량을 높여 갔다.
이미 골격계가 근육의 팽창을 이기지 못할 정도까지 올라갔다.
잘못하면 뼈까지 부러질 지경이었다.
“후우, 후우……!”
“이제 그만 쉬었다가…….”
“아니요! 더 갑시다! 할 수 있어요!”
만약 점진적 과부하 패시브가 없었다면 고영수는 이미 팔이 부러졌거나 병원에 실려 갔을 것이다.
허나 고통스러운 것으로 따진다면 이미 까무러쳤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엄청난 집념이다!’
그런 고영수의 집념에 답해 준 이가 있었다.
바로 탑의 흑막.
딩동!
[패시브: 인연의 사슬 - 인생은 고통이야! 몰랐어?]
[인생의 쓴맛을 모르는 자는 인생의 단맛도 알지 못합니다]
[‘쓴맛을 즐기는 자, 그가 바로 일류다’]
순간, 고영수의 스텟 상승치가 폭발적으로 올라갔다.
그러면서 생기는 미토콘드리아의 폭발.
“오오오옷!”
“왜 그래요?”
“……힘이 넘치네요! 자, 그럼 갑시다!”
이날 고영수는 기어이 커트라인에 도달하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