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0 대장의 그녀(2)
을지로에서 밥을 먹기도 전에 봉변을 당한 태하는 근처 옷집에서 대충 옷을 샀다.
그건 희란 역시 마찬가지.
“땡땡아, 혹시 씻을 곳은 없지?”
“음, 그러게요. 일단 모텔이라도 잡을까요?”
“괜찮겠어? 사람들이 오해할 텐데.”
“오해……. 뭐, 하고 싶음 하라지.”
‘그래서 뭐?’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는 희란.
“다 큰 처자가 겁도 없네?”
“다 크다 못해서 이젠 이모 소리를 들을 판인데, 뭐.”
태하는 여전히 능글맞았다.
허나 희란도 이젠 태하에게 지지 않는다.
“예전에는 합숙까지 하던 사이에 무슨 내외? 혹시 부끄러워서 그래요?”
“……어쭈? 이젠 제법 터는데, 이거!”
손으로 짹짹 흉내를 내는 태하.
희란은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나도 이젠 진짜 어른이 다 되어서 말이죠.”
그녀는 태하의 손을 잡고 을지로 인근의 모텔로 향했고, 자연스럽게 지갑을 꺼내 들었다.
“방 하나 주세요.”
카드를 꺼내려던 희란의 손을 태하가 막았다.
“씁! 계산은 내가 한다.”
상의에서 꺼낸 태하의 지갑에는 지폐가 가득했다.
심지어 지갑도 최고급 와이번 가죽으로 만들어진 고급품이었다.
굳이 헌터 생활을 통해 얻은 소득이 아니라도 수입이 상당히 좋아진 태하에게 이 정도는 별것 아니었다.
희란은 그걸 보며 복잡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
“……성공했네, 우리 대장.”
“네 덕분이지.”
프런트에서 카드키를 받아든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둘 사이에는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잘 지냈지?”
“나야…… 늘 똑같지, 뭐.”
“이야, 그나저나 넌 더 예뻐졌다? 이제 시집만 가면 되겠어!”
예전에는 이렇게 하면 희란은 태하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맞을래요?’라고 말하곤 했었다.
허나 이제는 애써 웃을 수도 없어졌다.
“……그러게. 아주 다들 나를 못 치워서 안달이에요. 특히 우리 부모님은 더욱 그렇고.”
“그랬구나. 미안, 일부러 한 소리는 아니야.”
희란의 심경은 상당히 복잡했다.
오랜만에 태하를 만나서 좋기는 한데, 지금 이 만남이 과연 옳은 것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 태하도 비슷한 입장이었을 터.
그런 어색한 기류는 방으로 들어가서도 계속되었다.
“먼저 씻어. 기다릴게.”
“응, 알겠어.”
샤워 부스로 들어가는 희란.
뿌연 유리벽 너머로 물줄기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돌연 멈추는 물소리.
“이제 꿈은 다 이뤘어?”
“……응?”
“성공한 헌터가 되고 싶다면서. 꿈은 다 이루었냐고.”
태하는 잠시 유리벽에 기대어 앉았다.
과연 자신의 꿈은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 것일까?
“글쎄……. 인간의 욕심이라는 게 끝이 없는 거잖아.”
“그래도 목표라는 게 있을 거 아니야?”
태하의 목표는 무엇일까.
강해지는 것, 던전에서 성공해서 돈을 버는 것?
둘 다 아니었다.
“100층.”
“100층?”
“인간 최초로 100층을 돌파할 거야.”
태하의 이상은 터무니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높았다.
허나 희란은 태하가 그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대장은 할 수 있을 거야. 왜냐면 대장은 될 때까지 도전하는 사람이니까.”
태하에게 후퇴란 없다.
죽으면 죽었지 목표를 잃어버린다거나 신념을 저버리는 짓은 절대로 하지 않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번에는 태하가 물었다.
“희란이 너는? 넌 지금 행복하니?”
“……행복.”
“늑대는 굶어 죽기보다 치열하게 싸우다 죽는 게 차라리 행복한 동물이야. 난 네게 그런 야생성이 있다고 믿어.”
“…….”
“아무리 네가 안락한 생활을 해도 결국 헌터는 헌터야. 아까 트롤 사건만 봐도 알 수 있잖아. 말보다 몸이 먼저 나갔던 것. 그게 과연 우연일까?”
희란이 심란한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은 여기가 아니라는 정체성의 혼란 때문이었다.
희란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렇지만 나는 이미 대장을 한번 버렸어. 그때 나는 헌터라는 이상도 함께 버린 거야.”
“그땐 내가 죽을 위기에 있었으니 그랬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희란은 태하가 다치지 않기를 바랐다.
허나 그것은 어쩌면 태하가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여겼던 것인지도 모른다.
“……난 대장을 못 믿은 거야.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한 거지.”
“괜찮아. 그때의 나는 죽어도 이상할 게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달라. 네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 주고 싶어. 궁금하지 않아? 우리가 수년 동안 밤이면 밤마다 별을 헤아리며 꿈꾸었던 그 100층이라는 세상 말이야.”
“……100층!”
“그리고 잘 생각해 봐. 네가 처음 던전에 올랐을 때, 과연 무엇을 좇고 있었는지.”
바벨탑 100층에는 은하수로 만든 것 같은 천장과 드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다고 했다.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이지만, 태하와 희란은 그 절경을 눈에 담고 싶었기에 던전을 오른 것이다.
희란은 그제야 자신이 꿈꾸던 세상이 무엇인지 기억해 냈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
“그래! 바로 그거야!”
절로 주먹이 꽉 쥐어진다.
인간의 꿈, 그것은 한 인물을 움직이는 가장 큰 원동력이 되곤 하는 것이다.
“땡땡아, 우리 다시 올라가자.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끝을 보는 거야. 우리는 결국 이런 운명인 거야. 이러려고 태어난 거라니까?”
“……운명이라.”
“가자! 땡땡아, 100층으로 가는 거야!”
그녀의 실루엣이 고개를 끄덕였다.
***
흥이 오른 보현 관장이 부지런히 움직였다.
“흐으음……! 너와 나의 연결 고립!
쓱삭쓱삭!
연신 헬스장 바닥도 쓸고 닦고, 원판도 새로 배열해 놓고, 아주 열심이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에 올드스쿨 및 고급자 전용관인 ‘고수동굴’을 개관했기 때문이다.
그건 태하 역시 마찬가지다.
“고수동굴이 개관하면 은둔 고수들이 더 많이 찾아오겠죠?”
“그렇겠지! 근육의 새로운 길이 열릴지도 모르겠어.”
“……근육의 새로운 길이라!”
“아 참, 그나저나 조만간 무슨 손님이 온다고 하지 않았어?”
“네, 그랬었지요.”
“누구야? 선수 후보?”
“음……. 일단 여자예요.”
“……여자?”
묘하게 기대가 된다.
마치 아들이 여자 친구와 함께 집에 인사를 오는 느낌이랄까.
보현 관장이 태하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흐흐, 제법인데? 헬스장으로 여자까지 끌어들이고 말이야!”
“아마 관장님도 좋아하실 겁니다.”
“그래, 그래!”
깔끔하게 단장이 마무리되었다.
과연 오늘은 고수동굴에 얼마나 사람이 꽉꽉 들어찰까?
두 사람은 카운터에 앉아서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다잡고 있었다.
“이럴 때 코치들이 연수를 떠났으니 원. 너무 바쁘면 어쩌지?”
“바쁘면 좋지요! 자고로 쇠질은 사람이 많아야 할 맛이 나지 않겠어요?”
“크흐흐, 그래! 바로 그런 자세야!”
퍼스널 트레이너 세미나 및 연수를 떠난 용팔과 한나를 대신해 두 사람의 몫까지 열심히 쇠질을 가르칠 참이었다.
그런데…….
“……이상하네? 저녁 6시부터는 피크 타임인데.”
“관장님,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요?”
허리케인이 지나가지 않는 이상에야 운동을 거를 헬창들이 아니다.
6시가 막 지났는데도 출석 인원이 하나도 없었다.
딩동!
-관장님! 오늘 못 나갈 것 같아요! PT는 다음 주부터 다시 받을게요!
-오늘은 못 나갑니다. 죄송합니다. PT 수업은 하루 미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문자메시지가 줄줄이 도착했다.
심지어 PT까지 취소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태하야, 오늘 무슨 날이야? 혹시 우리가 날짜를 잘못 알았나?”
“아니요, 그럴 리가 없는데.”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런 와중에 한 부녀가 손을 잡고 들어왔다.
“저…….”
“요, 베이비 요! 헬스장 등록하러 오셨습니까?!”
“네, 그렇습니다만…….”
상당히 수척해 보이는 얼굴, 그리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까지.
픽하면 쓰러질 것 같아 걱정이 되기까지 했다.
‘흠, 심각하군. 하지만 뭐…….’
만약 아프다면 치료를 하면 된다.
헬스는 만병통치약이니까.
“자, 어떻게 도와 드릴까? 몸짱? 아니면 건강?”
“보시다시피 몸짱 될 만한 입장은 아니고, 아이 데리고 다니면서 운동만 좀 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헬스장에는 애들이 들어오면 안 되는데! 다치면 큰일이잖습니까?”
“제가 사정이 좀 있어서…….”
“음, 그래요?”
태하가 관장을 스윽 쳐다보자, 보현 관장은 손으로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허가가 떨어졌으니 입관이다.
“그럼 서류 좀 작성해 주시겠어요?”
“네, 물론…….”
딸랑!
바로 그때, 문에서 또다시 인기척이 느껴진다.
태하는 이곳을 관장에게 맡겨 두기로 했다.
“관장님, 태그요!”
“오케이!”
그는 문을 열고 들어선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들어온 사람들은 손님이 아니었다.
뜻밖에도 그들은 경찰이었다.
“계십니까?! 강북경찰서 특별수사팀에서 나왔습니다.”
“아예, 수고하십니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죠?”
“북한산으로 몬스터와 연쇄살인마로 보이는 용의자가 도주했습니다. 때문에 강북구와 성북, 종로, 도봉구의 출입 통제가 걸렸는데, 문자 못 받으셨습니까?”
“네?!”
“안에 혹시 손님 없죠? 일단 문부터 닫고…….”
“아! 손님 있는데?”
“……손님이 있어요?”
“그렇습니다만…….”
경찰들은 일단 권총부터 뽑아 들었다.
철컥.
“……물러나 계세요.”
“네?”
“용의자가 안에 있는 것 같네요.”
권총을 뽑아 드는 경찰.
허나 그들의 발길은 이내 멈추고 말았다.
드르르르륵!
순간,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태하.
“……관장님!”
“왜? 무슨 일…….”
끼이이잉!
순식간에 헬스장이 눈 부신 빛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크으으윽!”
“……뭐야, 섬광탄?!”
눈이 멀어 버릴 것만 같은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폭발.
콰아아앙!
***
천리안의 본부 안.
“연구 시설이요?”
“귀영에서 조사를 좀 해 줬으면 좋겠는데.”
최근 의문의 과학자들이 해괴한 실험을 한다는 첩보가 있었고, 천리안이 고영수에게 조사를 요청한 것이었다.
고영수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아수라 길드에 대한 조사가 마무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좀 곤란합니다만.”
“사정은 잘 압니다. 하지만 우리 쪽도 사정이 좀 급해서 말이죠.”
“흐음…….”
이제 막 동료의 시신을 찾아서 묻어 주었다.
그나마 헌터 ‘골드’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마저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고영수는 이제 아수라의 여죄를 낱낱이 밝혀 동료의 원한을 풀어 줄 생각이었다.
‘어지간하면 거절을 해야겠어.’
최대한 정중하게 거절하고 돌아서려던 바로 그때였다.
공조과장 주현태가 다가와 말했다.
“만약 연구 시설과 아수라가 연관이 있다면요?”
“……주현태 과장?”
“아수라 이용광이 해괴한 실험을 한 흑막이라면 어쩌시겠습니까?”
이제는 이용광이라는 말만 나와도 주먹부터 꽉 말아 쥐는 고영수다.
그런 그의 앞에서 이용광이라는 이름을 함부로 올리는 것 자체가 결례였다.
“주 과장!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불쑥…….”
“확실한 제보가 있어서 그럽니다. 아수라 길드가 마이너스 코어를 처음 상용화시키는 이론을 설계하고 난 후, 바벨탑에서 몬스터를 빼낸 정황이 포착되었습니다.”
주변에 있던 모두가 놀랐다.
바벨탑에서 몬스터를 빼낸다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허나 주현태는 확신에 찬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를 위해서 입자가속기를 만드는 실험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놈들,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는 몰라도 또 한 번 사고를 치려는 겁니다.”
“이미 아수라 컴퍼니는 사분오열되지 않았나?”
“회사는 그렇게 되었지요. 하지만 과연 드러난 회사만 가지고 아수라가 거기까지 올라갈 수 있었을까요?”
“……뭐야, 그럼 뒷주머니가 있었다는 얘기야?”
“사모펀드, 혹은 페이퍼컴퍼니를 만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직 뒷주머니를 어떻게 찬 것인지는 미지수이나, 확실한 건 딴 주머니가 있다는 것입니다.”
“으으으음……!”
주현태의 얘기를 가만히 듣던 고영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아수라 길드를 조사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악수를 나누는 고영수와 주현태.
주현태는 고영수에게 한 가지 당부를 했다.
“최대한 조용히, 그리고 은밀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왕이면 아수라와 분명 한 번은 마주칠 사람과 연계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어요?”
“있죠. 헬창 헌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