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5 영끌(1)
2차 조사에 나선 귀영.
쿵, 쿵, 쿵!
미친 듯이 쉘터를 공격하는 언데드 무리가 보였다.
고영수와 귀영들은 그 숫자는 얼마 되지 않지만, 저것들이 모이면 충분히 위협이 될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위험 수치: 15]
[고위험 상태]
연구진이 만들어 놓은 던전의 이상 수치 관리기도 위험 수준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마도 저것은 던전의 불안정성, 그리고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진동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나치게 공격적이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번처럼 골드라는 헌터가 나타나 주지 않는 이상에야 웨이브는 또 일어날 겁니다.”
“흠……. 하지만 그는 아직까지 나타나고 있지 않아. 이번에는 우리가 해결을 봐야 한다.”
자신의 몸이 부서지는 것도 모른 채 미친 듯이 쉘터를 두드리던 언데드.
그러다가 놈들은 별안간 행동을 멈추었다.
끼릭, 끼릭.
뼈마디가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어디론가 어기적어기적 걸어가는 언데드들을 고영수와 귀영은 바짝 따라갔다.
“……놈들이 행동을 멈췄어요!”
“가만, 던전의 진동도 이제는 느껴지지 않아.”
“허어! 그러고 보니 정말로 그러네요?”
“그나저나 저것들이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거지?”
언데드를 추격하고 있던 바로 그때였다.
드르르륵.
고영수의 환두대도가 떨려 오기 시작했다.
순간, 고영수는 불안을 직감했다.
“……환두대도가 떨려 온다.”
“그렇다는 것은……!”
귀영의 환두대도는 거대한 위협이나 강력한 존재의 등장을 알려 주는 ‘에고소드’다.
환두대도가 진동했다는 것은 보통의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도대체 어디에……?”
어딘가에 있을 위협에 대비하고 있던 귀영의 바로 머리 위로 화이트홀이 형성되었다.
고오오오오!
일렁이는 공간의 왜곡 너머로 뭔가 거대한 물체가 떨어져 내렸다.
-쿠오오오오!
“……오우거?!”
육중한 도끼를 휘두르는 오우거, 잘못하면 제아무리 귀영이라도 중상을 입을 수도 있었다.
순간, 고영수는 바닥을 힘차게 굴러 도약했다.
스릉!
도약과 함께 섬광과 같은 발도가 이뤄졌다.
거대한 환두대도를 마치 벼락같이 휘두르는 참격.
서걱, 푸하아아악!
그야말로 깔끔한 일격으로 오우거의 머리가 떨어졌다.
팟!
“화이트홀이 사라졌습니다!”
“……추가 화이트홀은?”
“없습니다. 그리고 위험 수치가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제는 평시입니다.”
그제야 긴장이 좀 풀리는 것 같았다.
환두대도에 묻은 오우거의 피를 닦아 내고 다시 무기를 갈무리하는 고영수는 조금 더 위로 올라가 보기로 결정했다.
“이상 수치 관리기를 가지고 고층으로 올라간다.”
“이상 현상을 추적하시려는 겁니까?”
“머리 위로 오우거가 떨어져 내렸어.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귀영은 그 즉시 채비를 했다.
던전 등반에 필요한 장비는 물론이고 이상 수치 관리기까지 가동이 가능한 상태로 준비해 두었다.
드르르르륵!
헌데 귀영의 환두대도가 다시 떨려 왔다.
“……화이트홀?!”
“아니, 이번에는 달라. 나쁜 기운이 아니다.”
에고소드와 공명하는 고영수는 환두대도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는 강력한 존재의 등장을 알려 주는 것이었다.
그는 직감했다.
‘……골드다! 환두대도가 가리키는 사람, 그가 바로 골드야!’
잠시 후, 1층의 입구로 너덜너덜한 옷을 입은 남자와 그 동료들이 내려왔다.
육중하고 단단한 근육질의 일행.
“보디빌더?”
“아니, 아니야. 저 사람이 바로 골드다.”
“……골드요? 의문의 헌터 골드?!”
“맞아.”
“아하! 그렇다면 그 사람들 아닌가요? 헬창 헌터!”
“헬창 헌터? 그게 뭔가?”
“단장님은 모르시겠군요. 헬창 헌터라고 요즘 헬창들의 신적인 존재입니다. 설마하니 그런 헬창 헌터가 골드였다니!”
***
마계화의 밑에서 발견된 ‘서판: 죽음’이라는 것은 실로 놀라운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것은 단순히 사악한 힘을 가진 물건이 아니었던 것이다.
[윤용팔]
[수명: 25/91]
“용팔 씨는 장수하시겠네요. 91세라니.”
“오오! 정말요?! 요즘은 유병장수 시대라던데, 설마 그런 건 아니겠죠?”
“거기까진 모르겠어요. 아무튼, 91세까진 산답니다.”
“그레이트하네. 사람의 수명을 알 수 있다니.”
서판을 해독하고 나니 인간의 수명이 머리 위에 홀로그램처럼 그려지기 시작했다.
물론 본인의 수명까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사람의 이름과 죽는 날, 실제 나이를 알 수 있었다.
한나는 생각에 잠겨 들었다.
“그럼 사악한 조각이 사실은 단순히 사악한 물건이 아니었다는 거네요……?”
“그러게요. 이게 사실은 수명을 알려 주는 물건이었다니.”
“그나저나 사악한 조각이 화이트홀을 일으키는 주범이었다는 건 도저히 믿을 수가 없네요.”
사악한 조각, 아니 서판이 사라지자마자 화이트홀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게다가 몬스터 역시 약해졌으며 1층에 드문드문 존재하던 언데드 역시 깔끔하게 사라지고 없었다.
이쯤 되니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어쩌면 누군가가 일부러 화이트홀을 일으키도록 해 놓은 건 아닐까요?”
“일부러? 누가 그런 미친…… 짓을?”
순간, 태하의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첫 번째 서판이 태하에게 왔을 때의 장면이었다.
“잠깐, 우리가 첫 번째 서판을 발견했을 때 말이에요. 언데드가 무덤을 차근차근 다지고 있었잖아요? 그렇다면 그것도 누군가의 지시에 의해 했다는 말이 되는 건가요?”
“마계화 아래에 서판을 묻어 둔 다음에 1층에서 언데드를 통해 두 번째 서판을 묻었다면?”
“누군가 몬스터를 강화시켜서 코어 가격을 올리려고 했던 것이네요!”
“범인은 아수라 길드가 확실하네요. 지금까지 모은 정보들이 아수라 길드를 범인이라고 지목하고 있어요!”
“그럼 화이트홀을 소환해서 몬스터를 강력하게 만든 다음, 던전을 통제하고 마이너스 코어까지 생산해서 에너지 시장을 완전히 지배하겠다?”
“……그런 것 같네요. 던전을 뚫겠다고 어쨌거나 헌터들은 또 나타날 것이고, 그들이 죽으면 마이너스 코어는 계속해서 생산할 수 있을 테니까요.”
“아주 개새끼들이네!”
“가만, 그럼 그 300명도 29층으로 올라갔다면 마이너스 코어가 되었겠네요?”
“……그런 셈이죠.”
“우와, 그럼 이참에 마이너스 코어까지 왕창 만들겠다는 심산이었던 건가요? 허 참, 말이 다 안 나오는 놈들이네, 이거!”
가만히 태하와 한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용팔은 불현듯 뭔가 떠올랐다는 듯이 말했다.
“……아니, 잠깐만요. 1층에도 언데드들이 돌아다니고 있었죠?”
“그랬었죠. 비록 숫자가 얼마 안 되긴 하지만.”
“그렇다는 건 아직도 서판은 존재하는 거고 암흑의 수정구도 어딘가에 묻혀 있다는 거 아닌가요?”
“……!”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사령술사를 잡아들일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몰라요!”
태하는 머리를 굴려 보았다.
이 기회에 사령술사도 잡고 아수라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타이밍 죽이네요. 마침 퍼즐을 맞추고 있었는데 히든 피스가 나왔어요.”
“히든 피스?”
“저 새끼들, 마이너스 코어를 자기들이 만들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거잖아요?”
“아아……!”
“빅엿을 먹여 줍시다!”
한껏 고무되는 헬스하운드.
한나는 그런 동료들에게 묘안을 제시했다.
“……아 참, 있잖아요! 태하 씨.”
“네?”
“혹시 기억 속에 등장하는 사람의 얼굴을 봐도 그 정보를 알 수 있을까요?”
“기억이요?”
“얼마 전에 사이코메트리로 사령술사의 얼굴을 봤다고 했잖아요. 그 사람의 얼굴을 당신이 본다면…….”
“아아!”
태하는 당장 그녀의 손을 잡았다.
끼이잉!
그녀의 기억과 하나가 되는 태하.
바로 그때, 그의 눈가에 희미한 이름이 보였다.
[남태현]
***
여의도 코어 거래소에서 마이너스 코어에 대한 경매가 시작되었다.
경매가 시작되기 직전, 여의도에서 마이너스 코어의 초전도체 연구 및 압축 에너지 이론 등이 발표되었다.
마이너스 코어는 테라 코어급의 에너지를 낼 수 있는 물건으로 최종 결론이 났는데, 지금까지 인류가 다뤄 왔던 그 어떤 에너지원보다 안정적이라는 것이 학자들의 설명이었다.
스스로 초전도에 도달할 수 있으며 안정화만 가능하다면 굳이 냉매 및 냉각기의 필요도 없었다.
무엇보다 전력 손실이 거의 제로에 가까웠으며 한번 발전을 시작하면 반영구적인 에너지 창출이 가능했다.
한마디로 완벽한 에너지원이라는 뜻이었다.
-마이너스 코어 공개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코어의 경매 시작가는 100원입니다.
“100원?”
경매에 참여한 이용광의 측근들이 일제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코어는 최소 천만 원부터 경매에 들어가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용광은 실소를 흘렸다.
“후후, 그만큼 물건에 자신이 있다는 거가? 하기사, 나 같아도 굳이 가격을 올리려고 발버둥 치는 일 따윈 하지 않을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100원은 너무 거만한 거 아닙니까?”
“거만할 만하지 않나. 우리가 만든 작품 아이가.”
잠시 후, 경매가 시작되었다.
경매가는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갔다.
“만 원!”
“백만 원!”
“천만 원!”
-네, 경매 가격이 너무 가파르게 오르는군요! 여기서 잠깐 쉬었다가 갈까요?
“아닙니다! 그냥 하시죠!”
-좋습니다! 그럼 계속하겠습니다! 천만 원! 더 없으십니까?
이용광이 손을 번쩍 들었다.
“1억!”
-1억! 1억 나왔습니다!
“10억!”
-10억입니다! 10억! 더 없으십니까?!
처음 테라 코어가 경매에 나왔을 때, 그 가격은 개당 100억까지 올라갔었다.
하물며 마이너스 코어의 가격이 10억에서 멈출 리가 없었다.
“20억!”
-20억! 더 없으십니까?! 마이너스 코어의 입찰, 20억까지 올라갔습니다! 이번 입찰에서 가장 높은 가격을 부르는 사람에게 마이너스 코어가 돌아갑니다!
경매 총액 6조. 과연 이 정도 돈을 지불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이용광은 곧장 손을 들었다.
“30억!”
-역시 아수라 길드입니다! 개당 30억!
아수라 길드의 입장에서는 앞으로 마이너스 코어를 계속해서 생산해야 하니 가격을 최대한 올려놓는 것이 이득이었다.
수량이 추가로 풀릴 경우, 당연히 코어의 가격은 내려갈 것이고 그대로 평준화가 될 것이다.
‘적어도 50억, 그 정도는 되어야 한다!’
50억이 목표다. 단, 모든 물량을 아수라 길드가 먹어 치운다는 것이 전제였다.
이용광이 30억을 부르자, 사방에서 입찰자들이 몰려든다.
“35억!”
-35억! 35억 나왔습니다!
“40억!”
-역대 최고 금액입니다! 40억! 더 없으십니까?
이제 목표치에 거의 근접했다.
이용광은 이 정도면 이제 더 이상 따라올 사람이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대한민국에서 이용광보다 돈이 많은 사람은 없을 테니 말이다.
허나 뜻밖의 경쟁자가 있었다.
“60억!”
-아아! 제네시스의 윤정경 한국 지부 본부장님께서 손을 드셨습니다! 그것도 60억! 압도적입니다!
제네시스는 분명 국가와 연관이 되어 있으나, 그들도 공식적으로는 사단법인이다.
공공 기관은 절대 아니라는 소리였다.
“……윤정경!”
“미안하지만, 마이너스 코어는 우리가 가지고 갑니다.”
제아무리 아수라 길드가 돈이 많아도 제네시스를 이길 수는 없다.
이용광은 입술을 짓깨물었다.
“……65억!”
-65억! 엄청납니다!
허나 윤정경도 지지 않았다.
“70억!”
-허억! 70억입니다!
“80억!”
-뭐, 뭐라고요? 80억?! 이용광 길드장님, 죄송하지만 계좌에 남은 잔액만큼만 입찰이 가능합니다.
“주면 되잖아. 담보라도 잡아.”
-담보라…….
“안 되나? 네, 아니오. 얼른 대답이나 해.”
반드시 코어를 가지고 와야 하는 이용광으로선 전 재산을 다 털더라도 반드시 입찰에 성공해야만 했다.
게다가 돈은 앞으로 더 벌면 그만이었다.
‘한 달이면 복구 가능하다. 일단은 물량을 회수하는 것이 급선무다!’
바로 그때였다.
“90억!”
-90억! 제네시스의 윤정경 님! 90억 부르셨습니다! 그럼, 여기서…….
이용광은 입술을 짓깨물었다.
“……100억!”
한계를 넘어서, 진정 영혼까지 끌어모은 천문학적인 가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