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4 심안의 헬창(2)
신메타의 효율은 대단했다.
“오른쪽이요!”
“허업!”
서걱!
“이번엔 왼쪽, 그다음은 오른쪽이요!”
“오케이!”
한나는 몬스터의 공격 방향을 귀신같이 알아맞혔다.
심지어 지금까지 28층에 이르는 동안 한나는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몬스터의 공격을 방어하는 데 성공했다.
“……그야말로 신(神)메타의 탄생이네요.”
“그러게 말여. 허 참, 무당도 울고 가것어!”
태하는 몬스터의 말을 알아듣고 한나는 기억의 파편과 사념의 조각을 바탕으로 몬스터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그러니까, 태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면 한나는 몬스터의 모든 공격을 파악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몬스터의 심리를 꿰뚫는 것은 앞으로 마주치게 될 고층의 몬스터를 상대하는 데 아주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겁니다. 그들은 공격 패턴이 일정하지 않은 데다 아직 뚜렷한 공략법도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죠.”
잠시 후, 태하 일행은 29층에 닿았다.
29층은 대략 여의도 면적의 절반 정도 되는데, 이곳은 그야말로 꽃이 만개하여 화원에 온 느낌이 들었다.
일행은 바짝 긴장한 모습이었다.
“이게 그 마계화인가 하는 건가요?”
“맞아요. 정신 지배를 한다고 들었어요.”
“……정신 지배라면 사람이 막 미쳐서 날뛰거나 하는 걸 말하는 거 아니에요?”
“맞아요. 대부분 여길 불태워서 지나가곤 하죠.”
“그럼 불태우면 되는 건가요?”
마탄사수 임혁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불길을 만드는 건 안 빡센데, 진화는 빡세. 여차하면 다 같이 숯불구이 되는 겨.”
“으음.”
정신을 지배당한다는 건 육신을 속박당하는 것보다 훨씬 더 무서운 일이다.
신유성은 이곳을 불태우는 대신에 새로운 대안을 제시했다.
“아시다시피 우리 김 코치는 심안을 가졌습니다. 뭐가 진짜이고 가짜인지 알아볼 수 있기에 정신착란에 걸리지 않을 테죠.”
“그렇죠! 심안은 저놈의 기억을 읽어 낼 수 있으니까요!”
“만약 정 코치와 김 코치가 연결되고, 다시 정 코치와 용팔 코치가 연결된다면 적에게 조종당하지 않을 수 있어요.”
“……그야말로 태하 씨가 대장이네요.”
“그렇죠. 태하 코치가 허브입니다. 정신 바짝 차리고 달려 나간다면 이길 수 있어요!”
다시 사냥이 시작되었다.
꽃밭을 가로질러 나아가는 태하의 파티원들, 그들은 서로의 감각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 그들에게 이내 공격이 몰려들었다.
첫 번째는 자이언트 호넷이었다.
부우우웅……!
자이언트 호넷의 눈은 빨갛게 물들어 있었고 이미 이성을 잃어서 매우 공격적이었다.
‘찔리면 죽는다!’
잘못하면 이 자리에서 맹독에 당해 사망할 수도 있었다.
허나 신기하게도 굳이 한나가 알려 주지 않아도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서 적의 공격에 대처했다.
태하가 정면을 방어하면 한나가 날개에 중력을 과부하 시켜서 속력을 감소시켰고, 곧바로 용팔이 화살로 놈들의 얇은 허리를 꿰뚫어버렸다.
퍼억!
“나이스! 방금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마치 짠 것처럼 잘 움직였네요?”
“생각이 연결된 겁니다.”
“아하! 그래서 태하 씨가 허브라고 했던 거구나!”
“그래요. 한나 코치를 통해 정 코치의 생각이 모두에게 전달되고 있는 거죠.”
그야말로 하나의 유기체처럼 굳이 누가 시키거나 가르쳐 주지 않아도 체계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이들은 29층까지 올라오면서 서로에 대한 신뢰가 쌓였고 그것이 시너지를 증폭시켜 한나의 심안이 빛을 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허나 그들의 콤비 플레이에도 불구하고 던전 돌파는 쉽지가 않았다.
부우우웅!
“자이언트 킬러비?!”
“이거, 정말 뚫고 갈 수나 있을까요? 게다가 마계화가 이놈들의 벌집인 것 같은데.”
“……극한의 난이도네, 정말.”
“그래도 갑니다! 내가 앞장설게요!”
태하는 방패를 들고 돌진했다.
날아드는 자이언트 킬러비를 주먹으로 쳐 내자, 사방에 녹색 피가 낭자했다.
-끼에에엑……!
허나 손이 얼얼했다. 그만큼 자이언트 킬러비의 껍질이 단단하다는 뜻이었다.
“껍질이 단단해요!”
“얼려서 잡자고!”
마탄사수는 냉동탄을 전방에 날렸다.
타앙!
원딜이 다시 근딜이 되며 태하와 용팔은 날아드는 벌들을 주먹으로 쳐 냈다.
쨍그랑!
마치 냉동 고기 깨지는 소리가 나면서 킬러비들은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코치들 굿잡!”
“바벨컬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오! 내려가면 나도 바벨컬 좀 알려 줘요!”
팔의 근력이 받쳐 주니 아무리 주먹을 휘둘러도 멀쩡했다.
허나 그들의 앞에는 또 다른 위험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이언트 앤트였다.
“……턱이 사람 2배는 될 것 같은데?”
“젠장, 산 넘어 산이로군!”
“이대로는 안 되겠어요! 일단 마계화까지 쭉 달린 다음에 코어를 섭취해서 판을 끝내는 것으로 하자고요!”
태하의 의견에 신유성은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럽시다! 남자답게 들이받아 보는 거죠, 뭐!”
용팔은 활을 등에 단단히 동여맸다.
“잡몹은 제가 처리합니다!”
“어어, 나도! 냉동탄으로 조져 줄 껴!”
헬스하운드에게 후퇴란 없다.
윷판에서도 빽도는 없다는 사람들이 바로 헬스하운드다.
이제 그런 정신은 주작단 멤버들에게도 옮겨 갔고, 신유성도 빽도 없는 상남자 메타를 구상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럼 갑니다!”
방패를 어깨에 붙이고 그대로 달리는 태하.
퍽, 퍽, 퍽!
걸리는 족족 놈들을 밀어내고 오로지 전진하는 것에만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러자 마계화의 바로 턱밑까지 당도할 수 있었다.
“……도착했어요!”
“그럼 시작합니다!”
거침없이 스트랩을 뻗어 마계화에 꽂아 넣는 태하.
스트랩이 연결되자, 태하의 정신으로 엄청난 양의 기억의 파편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끄아아아악!
‘……지금까지 마계화가 잡아먹은 사람들의 기억들인가?!’
사람을 짓누를 정도의 위력, 그리고 가공할 만한 원한까지.
태하는 지금 이 자리에서 머리가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바로 그때, 그의 손을 잡아 주는 사람이 있었다.
“태하 씨!”
“……허억! 한나 씨!”
“내가 못 살아! 정신 차려요!”
순간, 두 사람의 정신이 하모니를 이루었다.
순간, 태하는 한나의 목소리와 함께 강력한 정신력을 얻었다.
그리고 이내 시작되는 포식.
[스킬: 포식]
[먹이를 섭취합니다]
[A등급 코어 1개를 섭취하셨습니다]
태하의 포식과 함께 마계화는 순식간에 말라 버렸다.
-끼에에에에!
“잡았다!”
[특성 스킬: 채집]
[피식자의 생체 정보를 저장합니다]
[스킬: 포식 - 흡수]
[피식자를 흡수합니다]
[A급 코어의 흡수로 인해 근육이 성장합니다]
마계화가 시들어 버리자, 29층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조용해졌다.
“……29층을 돌파했어.”
“우와아! 헌터님, 우리가 해냈어요!”
“우오오오!”
고난과 역경을 헤치고 드디어 29층을 돌파한 것이다.
[아이템을 획득하셨습니다]
[아이템: 마계화의 이파리]
[아이템: 마계화의 씨앗]
임무용 아이템도 착실히 챙길 수 있었다.
허나 아이템은 또 있었다.
[아이템: 신목의 씨앗]
“신목의 씨앗?”
“그게 뭔데요?”
의문의 아이템이 떨어졌다.
그리고 상승하는 랭크.
[랭크가 상승합니다]
[랭크: E-골드]
[두 번째 특성 스킬을 습득하셨습니다]
[특성 스킬: 약탈]
[최상위 포식자는 약탈함으로써 모든 것을 잡아먹습니다. 당신은 절대적인 권위와 힘을 바탕으로 남의 것을 빼앗는 약탈자로 군림하게 되었습니다]
‘뭣이라, 약탈?!’
[스킬: 약탈]
[저장된 DNA에서 추출한 능력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스킬이 저장되었습니다]
[추출 대상 - 마계화: 싱크로 멘탈리즘]
‘……진심이냐? 약탈을 할 수 있다고?’
바로 그때였다.
끼이이잉!
어디선가 밝은 빛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빛의 출처는 다름 아닌 용팔.
“……어?! 이거 설마 각성인가요?!”
이윽고 등급이 각인되었다.
[등급: F블랙]
“블랙……?”
드디어 용팔이 각성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던전에 진동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쿠르르르릉……!
“……이건 또 뭐지? 몬스터가 아직도 남아 있었던 건가?”
“설마요. 마계화는 29층의 보스잖아요.”
“그렇다면 이 진동은 도대체…….”
두근!
순간, 태하는 자신의 심연 속에서 뭔가 거대한 소용돌이가 몰아치는 것을 느꼈다.
강렬한 이끌림, 그것이 태하의 심연을 뒤흔들고 있었던 것이다.
끼이이이잉!
[서판이 공명합니다]
정체불명의 메시지와 함께 마계화가 죽어 있던 자리 아래에서 서판의 조각이 지면을 뚫고 올라왔다.
“허억!”
“……사악한 조각!”
“이게 왜 여기 있지?”
“그러니까요. 이게 왜 마계화 아래에……?”
“허어! 설마 이것 때문에 다들 삽이고 곡괭이를 들고 왔던 건가?!”
사악한 조각은 태하가 가지고 있던 그것과 일거에 합일해 버렸다.
휘리리리릭!
마치 큐브 조각이 맞아 가듯이 이리저리 돌아가던 서판 조각은 이내 하나의 조각으로 맞춰졌다.
[서판 9장: 죽음]
[9장 ‘죽음’을 해독할 수 있습니다]
[서판 ‘죽음’의 영향으로 언데드의 소환 상한이 해제됩니다]
“사, 상한이 없어져?!”
“그럼 이제 무한으로 언데드를 뽑을 수 있겠네요?!”
“그런 셈이죠!”
일이 쉽게 풀릴 것도 같았다.
기쁨에 겨워 얼싸안는 헬스하운드.
바로 그때였다.
끼잉!
“……헛!”
“한나 씨, 왜 그래요?”
“여기에 서판을 묻은 놈, 얼굴을 알았어요.”
“아아……!”
***
분노한 이용광이 폭발했다.
콰앙!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나? 코어를 매각해? 누구 마음대로!”
“정태하를 그때 못 죽인 건 정말 천추의 한입니다.”
“이 새끼 이거 뭐고? 300명을, 그것도 격렬한 레이드 후에 해치워?”
“이미 S급에 도달해 있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만.”
정태하. 이용광의 뇌리에 그 이름이 문신처럼 박혀 버렸다.
지금까지 제대로 얼굴 한번 보지 못했는데도 이렇게까지 지독하게 싸우고 있다니, 마치 형체가 없는 몬스터를 상대하는 기분이었다.
“3일 후에 매매가 시작됩니다. 그때까지 정태하를 죽이든 매매를 진행하든 해야 합니다.”
“결국, 돈으로 진화를 해야 한다, 그 말이가?”
“네, 그렇습니다.”
“……레버리지 거래, 진행시켜.”
“하지만 그건 신용도 문제로 거절될 겁니다.”
“뭐, 신용……?”
“최근에 우리가 워낙 부채비율을 높여 놔서 말입니다.”
“흐으으음!”
“레버리지를 끌어와도 결국엔 일정 수준 이상의 시드머니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선 경매장에서 받아 주지도 않을 겁니다.”
코어는 가격이 워낙 비싼 데다 인류에게 있었던 필수 불가결한 존재이기 때문에 종종 레버리지로 거래가 되곤 한다.
허나 문제는 그것도 신용도와 관련되어있다.
“돈을 어디서 끌어오나?”
“……결국,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카면 우얄라고. 여기서 포기해?”
반반 섞였던 표준어가 증발했다는 건 그만큼 이용광이 지금 흥분 상태라는 뜻이었다.
최연화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큰일이로군.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어.’
이용광은 결단을 내렸다.
“……주식, 턴다.”
“자회사의 주식들 말입니까? 하지만 그게 털리면 출자 구조에 문제가…….”
“별수 있나? 뾰족한 수 있으면 한번 말해 보든지.”
차라리 정태하를 끝까지 쫓아가 죽이자고 말하고 싶었다.
허나 던전 출입을 정지당한 이상,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우선은 시드머니 장전하고, 나중에 마이너스 코어 거하게 한번 털어서 니캉 내캉 시장 장악하면 되는 거 아이가?”
“이번만큼은 꼭 말리고 싶습니다만…….”
“그라믄, 더 좋은 방안이 있나?”
더 할 말이 없었다.
말 그대로 궁지에 몰리지 않았던가.
결국, 최연화는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네, 그리하시지요.”
“연화야, 우리도 살자꼬 하는 짓 아이가. 이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살아남자믄 때론 도박도 해야 하는 기라. 알긋나?”
진지할 때 나오는 사투리는 더욱 발음이 진하다.
그 성조에 담긴 뜻이 무엇인지 잘 아는 최연화로선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다만, 차선책은 생각해야 했다.
“정말, 만약에 실패를 한다면…… 그땐 어쩔 생각이십니까?”
“……그때사 마, 이판사판이지! 서울 한복판에 괴물이라도 풀어놓을 끼라.”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