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작업
"오빠, 이게 사실이야?"
하룬이 고개를 끄덕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레인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몇 번이나 사실 여부를 확인했다. 뫼비우스가 은밀하게 전해 온 서류를 훑어본 일레인의 눈은 충격으로 인해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으음. 이건 종말 시대를 끝장 낸 핵무기들을 모두 합한 것만큼이나 강력한 폭발력을 지녔어."
일레인은 그 서류의 가치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걸 이용해서 네가 해야 할 일들이 있어."
"....."
일레인은 아직도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지만 하룬은 그걸 무시하고 입을 열었다.
"현재의 불합리한 사회체제를 개선해야 하는데 한꺼번에 모든 것을 바꿀 수는 없어. 시뮬레이션을 해 보았는데 아무 대책 없이 이 서류를 공개하면 세상은 그야말로 생지옥으로 변하게 될 거야. 많은 사람들이 죽을 테고 그렇게 되면 유니온의 근간이 흔들리게 돼. 물론 말도 안 되는 권력을 휘둘러 온 구노블들은 말끔히 청소를 해야 하겠지. 하지만 사회체제는 안정적으로 유지해야 해. 그러니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이 사태를 주도하고 이끌어 갈 세력을 만들어야 해."
"가.......능할까?"
"신노블과 GPC에 소속된 휴먼들 중 명망이 높은 인사들과 각 유니온의 언더 시티들, 글로리 가이아와 휴먼가드에 속해 있으면서도 우리와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이 힘을 합치면 큰 혼란 없이 유니온을 개혁시킬 수 있어."
"그렇기는 하지만......."
일레인은 확신이 생기지 않는 모양이다. 그녀 역시 체계를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건 일단 조직부터 장악한 후에 할 일이었고 먼 장래의 일이라고 생각했었던 모양이다.
"이미 글로리 가이아에서는 전단장 출신의 제리코가 움직이고 있어. 세명 기업의 오너인 세류가 GPC 쪽을 맡을 거고, 또한 코원 언더시티의 시장인 파랑 님도 움직일 거야. 넌 휴먼가드 쪽만 맡으면 돼!"
일레인의 눈이 커졌다. 이미 그 정도까지 준비되고 있는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 모든 것을 오빠가 준비한 거야?"
하룬은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오빠 인맥이 정말 대단하네."
일레인은 진정으로 하룬의 능력에 감탄했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남자인 줄은 알았지만 이런 극비 자료를 입수할 정도의 정보 능력에 더해 세 암류는 물론 엄더시티에 이르는 폭넓은 인맥까지 가지고 있다니!
하룬이 말한 대로 신세계 협약이라는 제목의 서류를 이용해서 필요한 사람만 설득할 수 있다면 거사는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
'아무래도 너무 성급하게 오빠 동생 하기로 한 건 아닐까?'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지만 하룬의 외모는 볼 것이 없다. 평범함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니까. 더구나 능력 지상주의의 세상에서 살아온 일레인에게 남자를 선택하는 데 외모는 큰 요인이 아니었다.
황녀에게도 굴하지 않는 기개는 물론이고 실력을 포함한 개인의 능력은 정말 대단했지만 현실이 아닌 게임의 캐릭터라고 생각했기에 남자로서 특별한 감정도 없었다. 그렇기에 오빠로 대할 생각을 한 것이고.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설마 오빠가 게이머일 줄은 몰랐지.'
갇혀 있는 동안 하룬과 수차례에 걸쳐 내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가 현실에서도 돌풍 용병대를 운영하는 게이머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생각이 크게 바뀌기 시작했다.
'나와 비슷한 이상을 가지고 있는 남자, 같은 꿈을 꿀 수 있는 남자가 이렇게 옆에 있는데.....'
그동안 남자에는 관심이 없었던 일레인이지만 하룬의 앞에서는 왠지 이상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왜 이렇게 가슴이 뛰지? 오빠 얼굴에서 빛이 나오고 몸에서는 사정없이 빨아 당기는 매력이 철철 흘러나오는 것 같아.'
일레인의 얼굴은 어느새 붉게 변해 있었다.
하지만 하룬은 그런 일레인의 내심을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일레인, 넌 할 수 있어. 너와 내가 꿈꾸는 세상이 대부분의 휴먼이 바라는 그런 곳이니까. 확신을 가지고 자신감 있게 움직여. 필요한 것들은 모두 내가 지원해 줄 테니까."
"후우!"
일레인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 하룬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밝게 빛나는 그녀의 눈은 어느 때보다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하룬도 그 눈을 응시했다.
"좋아! 해볼게."
드디어 가장 필요한 사람이 결심을 했다.
"자, 그럼 세부적인 사항을 검토해 보자. 여기에 있는 자료들은 시뮬레이션 결과들이야. 이건 구노블 세력을 청산하기 위해 필요한 전력과 그 과정에 대한 자료들이고, 이건 어느 정도의 행정 인력과 기술 인력을 확보해야 유니온 체제가 무너지지 않는지에 관한 자료, 이것은 각 유니온 내 언더 시티의 위치와 연락 방법과 수뇌부에 대한 정보인데, 언더 시티 쪽은 파랑 시장님이 움직이겠지만 너도 알고는 있어야해. 그리고 이것이 제일 중요해. 각종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우리가 추구하는 세상에 동참할 수 있는 인사들의 명단이야. 이것들은....."
하룬은 뫼비우스의 타이푼 길드를 비롯해서 여러 선을 통해 모은 정보들과 자료들. 벨과 아리 그리고 아즈만이 머리를 맞대고 수없이 시행했던 각종 시뮬레이션 자료들을 일레인에게 넘겼다.
수많은 유니온에 대한 정보이기에 제대로 일을 준비하기에는 무척이나 미흡한 정보이지만 이젠 일레인의 능력을 믿어 보는 수밖에 없다.
"일단 파이런 황궁에 복귀를 한 다음에는 빨리 현실로 가야 해. 네가 있는 위치 근처로 내 약혼녀를 보낼 테니까 그녀를 만나 도움을 받아."
하룬은 필요한 연락 수단과 위치를 알려 주었다.
"약혼녀?"
그렇게 묻는 일레인의 얼굴이 금새 창백해졌다. 그런 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응. 오래전부터 결혼을 약속한 여자가 있어. 이름은 아리이고 착하고 지혜로운 여자야."
일레인은 아리의 이야기를 듣자 복잡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그 표정을 지웠다.
"오빠는 정말 이해를 할 수 없는 존재야."
뭐가 이해가 안 간다는 건지는 모르지만 하룬이 생각해도 자신은 특별한 존재이기는 했다.
"아리는 돌풍 용병대의 시크릿 팀의 팀장이야. 그녀가 운용하는 타이탄 워커와 거의 완성된 유니온 간 지하 도로 그리고 내가 넘겨준 자료라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을거야."
"알았어. 최선을 다할게."
힘든 감금 생활을 강인한 정신력으로 견디고 새로운 능력까지 각성한 일레인은 이전과 비교할 수도 없이 깊어진 눈빛으로 하룬을 한동안 응시하다가 몸을 돌렸다.
일레인은 임시지만 수행을 자청한 마샤인과 일룸을 대동하고 자신을 기다리는 황제와 황후를 만나기 위해 황도로 가는 워프 센터로 향했다.
'이제 시작이야!'
떠나는 일레인의 뒷모습을 보는 하룬의 눈빛이 강해졌다.
드디어 고스트와 그 배후가 무너졌다.
세 제국은 물론이고 상인들과 평민들도 일제히 만세를 불렀다. 그동안 고스트와 헤로파 상단으로 인해 곤궁한 생활을 해 왔던 것이다. 물류가 막히는 것이 얼마나 불편하고 괴로운지 모든사람이 철저하게 경험했다.
누구보다도 이번 일을 기뻐한 사람들은 평민들이었다. 약품을 비롯하여 생필품을 구할 수 없어 이방인들이 오기 전의 그 참혹했던 생활로 돌아갔던 것이다. 경험해 보지 못했다면 모를까 문물의 편리함을 직접 느낀 평민들의 불만과 고통은 엄청나게 높았다.
이방인들을 포함한 장인들은 일제히 새로운 물건을 만들어 내기 위해 작업장을 열었고 본의 아니게 직업을 잃고 쉬던 사람들이 휘파람을 부르며 직장으로 출근했다.
활기를 잃었던 시장은 상인 연합이 전리품을 풀자 급격히 활성화되었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던 물가는 삽시간에 제자리로 내려왔다. 시장과 상점에는 사람들이 들끓기 시작했고 도시와 영지의 재정은 빠르게 좋아졌다.
각 상단은 혹시 몰라 용병대를 대거 고용하여 상행을 꾸렸고 그동안 풀밭으로 변했던 길은 수많은 마차와 사람 들의 발길로 다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데빌 산맥 쪽의 상황은 별로 좋지 못했다.
짧은 시간 동안 연합군 측이 차지했던 성들 중 30여 개가 다크니스의 손으로 넘어간 상태였다.
가즈 로드를 비롯한 연합군 측은 100만에 육박할 정도로 숫자도 늘고 실력도 늘어난 다크니스에 속수무책으로 밀리고 있었다. 그간의 진공으로 인해 연합군 측은 전력이 분산되었고 다크니스는 반대로 뭉처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양쪽 전력이 심하게는 다섯 배까지 차이가 나니 어쩔 수가 없었다.
그에 비해 산악 연합은 약진하고 있었다. 하룬의 조언을 받아들인 산악 연합이 산맥 북서쪽을 장악하고 성을 건설하며 세력을 넓혀 가고 있었는데, 그동안 다크니스로부터 많은 동족들은 잃은 복수심 때문에 전력을 다한 데다가 다크니스도 광산잉나 거점도 별로 없는 그쪽은 도외시하고 있었다.
초토화 작전으로 내부의 불안 요소를 정리한 세 제국은 추가 지원군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이 다소 걸릴 것이다. 그때가 되면 다크니스는 데빌 산맥을 장악하는 것을 물론 세상 밖으로 나올 수도 있었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세 제국의 수뇌부들은 고스트와 그 배후의 섬멸에도 크게 기뻐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산 너머 산'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대충 일을 처리하고 세부 사항을 점검하기 위해 코엠 성으로 돌아온 하룬은 바로 아그레시아의 뇌파 통신을 받았다.
-하룬 대장, 초토화 작전 성공한 거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총사. 모두들 한 마음으로 애써 준 덕분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아니, 이번 작전은 오롯이 하룬 대장과 돌풍 용병대의 역량으로 인해 성공한 거에요. 제국들이라도 그 정도의 실력자들을 동원하거나 행여 그 일이 가능했더라도 작전의 보안을 유지할 수 없었을 거에요.
아그레시아는 진심으로 하룬의 역량에 감복했기에 몇 번에 걸쳐 그와 돌풍 용병대를 칭찬했다. 덕분에 하룬은 한동안 얼굴이 뜨거울 정도였다.
-그런데 데빌 산맥 쪽은 상황이 별로 좋지 않다고요?
이번 초토화 작전에 깊이 참여한 제국 정보 길드의 헤르쉬로부터 들은 이야기였다.
-후유! 좀 심각해요. 이번 일만 해도 제가 직접 가서 축하를 해주고 싶은데 상황이 심각해서 자리를 비울 수가 없네요.
아그레시아는 긴 한숨과 함께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국들의 지원을 기대하고 있지만 전황이 너무 열세라서 그때까지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하긴 헤르쉬의 정보와 판단에 의하면 연합군 측은 앞으로 열흘을 넘기기 힘들 것 같다고 했다. 그 정도로 다크니스의 공세가 맹력한 것이다.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하룬은 생각하지도 못했던 질문에 당황했다. 돈에 따라 움직이는 자신이 들을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았다.
-대장의 능력이라면 좋은 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졌어요.
-글쎄요, 생각 자체를 해 보지 않아서......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 주는 것은 좋은데 난데없는 말이라 당장은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좋은 해결책을 제시한다면 세 제국 측으로부터 어떤 것이라도 얻어 줄 테니까 한 번 생각 좀 해 줘요.
-그러지요. 일간 한번 들르겠습니다.
-그래 주면 더 좋지요. 오랜만에 오미차도 마실 수 있을 테고요.
그렇게 아그레시아와 통신을 끊은 하룬은 데빌 산맥의 상황이 생각보다 더 심각하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마음이 무거웠다.
'아무래도 정리를 해야겠지.'
이미 세워 놓은 작전이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었다.
하룬은 오랜만에 진수에게 연락을 했다. 시크릿 팀에 속하는 진수와 그 친구들은 에인족 전사들을 길잡이 겸 호위로 삼아 타르 분지로 향하는 길들을 조사해 오고 있었다. 일의 진척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날 밤늦게 하룬은 마츠루트 오새로 초대를 받았다. 일시는 다음 날 새벽이었고 장소는 마츠루트 요새 안에 있는 안가였다.
'무슨 일이지?'
초대를 한 주체는 아그레시아였다. 하지만 그녀는 낮에 통신을 했을 때만 해도 그를 초대할 생각이나 여유가 없어 보였던 것이다.
초토화 작전의 뒤처리를 위해 대원들 모두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을 때 하룬은 펠과 함께 은밀하게 마츠루트의 약속장소로 이동했다.
"총사님!"
"어서 오세요!"
그를 반기는 아그레시아는 그사이 얼굴이 반쪽이 되어 있었다. 심지어는 다크서클과 기미까지 생겼고 창백하기까지 해서 병자처럼 보일 정도였다
"어서 오게. 모두들 기다리고 있네."
"네?"
후버론의 말에 하룬은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그의 손에 이끌려 지하에 마련된 회의장으로 들어갔다.
회의장에는 익숙한 얼굴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 제국과 신전 연합, 마탑 연합 그리고 이방인들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이미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초토화 작전의 영웅을 이렇게 빨리 보게 될 줄은 몰랐네."
"자네 덕분에 제국의 숨통이 트였어.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네."
"초토화 작전의 성공을 축하합니다."
하룬은 수많은 사람들의 축하와 반가운 인사에 일일이 응대하고는 자신의 자리로 보이는 빈자리에 앉았다.
"이제 하룬 대장까지 도착했으니 비상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후버론의 제자이자 가즈 로드의 참모장인 파블로 마법사가 회의를 주재했다.
"오늘 이 회의를 소집한 목적은 무서운 기세로 확장하고 있는 다크니스를 상대할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서입니다. 먼저 현재 상황에 대한 브리핑을 들으시겠습니다."
그렇게 회의는 시작되었다.
회의에 대해서 아무런 정보도 가지지 못한 하룬으로서는 그저 듣고만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회의가 진행될수록 참석자들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갔고 분위기도 심각해졌다. 그만큼 다크니스의 전력이나 그 기세가 무서웠던 것이다.
다크니스를 상대할 여러 가지 의견이 나오기는 했지만 모두가 실현 가능성이 희박하거나 시간상으로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들뿐이어서 회의 분위기는 점점 더 가라앉았다.
"역시 현재 상황으로는 다크니스를 막을 특별한 계책이 나오지 않는군요. 그럼 미리 공지한 대로 돌풍 용병대에 의뢰를 하는 건에 대해서 표결을 붙이겠습니다."
'엉? 이게 무슨 소리야?'
파블로의 말에 하룬은 뜨악했지만 다른 참갇자들은 이미 들은 것이 있는지 각자의 앞에 놓인 매직 페이퍼에 가부를 써서 앞으로 전달했다.
하룬은 맨 앞에 앉아 있는 아그레시아를 쳐다보며 눈으로 무슨 일인지를 물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굳은 얼굴로 모이고있는 매직 페이퍼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마침내 의견을 쓴 매직 페이퍼가 모두 수거되자 아그레시아를 비롯한 몇 명의 대표가 앞으로 모여 그 내용을 정리했다. 그리고 다시 앞으로 나온 파블로가 하룬에게는 놀라운 선언을 했다.
"반대 의견은 전무, 이것으로 이곳에 모인 세력들은 돌풍 용병대에 다크니스를 상대하는 의뢰를 맡기기로 결정했습니다."
짝! 짝! 짝!
힘찬 박수에 이제까지 처져 있던 회의장 분위기를 단숨에 올려놓았지만 하룬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제 대표권을 가진 인사들만 남아 주시기 바랍니다."
파블로의 말에 12명만 남기고 다른 참석자들이 모두 회의장을 벗어났다.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이렇게 난데없는 의뢰라니.
"아무 통지도 받지 못한 하룬 대장으로서는 당황스러울 수도 있지만 우리는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일이에요."
아그레시아는 이번 회의에 대한 배경을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해 주었다.
가즈 로드를 비롯한 연합군 측이 다크니스에 밀리기 사작하자 세 제국과 신전 연합 그리고 마탑 연합은 심각한 위협을 느꼈다. 그래서 다양한 해결 방법을 모색했지만 특별한 수가 없었다.
"그런 참에 불가능할 거라고 여겼던 초토화 작전을 돌풍용병대가 멋지게 성공시킨 거에요."
"하지만 초토화 작전은 용병들과 각 도시나 영지의 기사단들이 참여했기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요. 하지만 돌풍 용병대가 아니었으면 실력 있는 용병들을 구하는 문제부터 시작해서 적들의 의심을 사지 않고 작전 지역에 모이는 것 등 수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을 거에요. 우리는 이전에도 그랬지만 초토화 작전을 통해 그런 돌풍 용병대의 신묘한 계책과 능력 그리고 실력을 재차 확인 할 수 있었고 이렇게 만장일치로 다크니스를 상대하는 일에 당신들의 도움을 받고자 하는 거에요."
"흐음."
너무 급작스러운 일이라 할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돌풍 용병대에게 전적으로 다크니스를 상대하라는 건 아니에요. 다만 상황을 반전시킬 계책과 용병 고용등의 문제를 맡아 주면 돼요. 그 대신 작전의 지휘권은 하룬대장에게 부여될 거에요. 의뢰에 대한 대금은 돌풍 용병대의 참여 정도에 따라 결정하면 되니까요."
그렇다면 조금은 안심이다. 무려 100만이나 되는 다크니스를 돌풍 용병대가 알아서 상대하라는 건 애초에 말이 안되는 이야기였다.
"좋습니다. 의뢰를 받아들이지요."
"호호호! 역시 하룬 대장은 일 처리가 시원시원해서 좋아요. 벌써 떨리던 가슴이 안정되는 것 같네요. 기대해도 되는 건가요?"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얼굴까지 크게 상한 아그레시아는 다소 들뜬 모양이다.
"일단 다크니스를 상대하는 건에 대해서는 저희 참모진에 서도 오랫동안 의견을 나눠 왔습니다. 적용 가능성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지만 몇 가지 방책은 세워 둔 상태고요. 일단 고문 회의를 통해 다시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그런 후 오늘 밤에 다시 이 인원으로 회의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룬의 말에 대표자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회의까지 하자고 나서는 것을 보면 좋은 방책이 있다는 말이 아닌가.
"역시 돌풍이로군. 초토화 작전만으로도 힘에 겨웠을 텐데 언제 그런 일까지 챙기고 있었단 말인가?"
후버론은 하룬을 안으며 크게 기뻐했다. 그 역시 총사를 보필하며 마음고생을 많이 했던 터라 의뢰를 맡자마자 대책을 내놓는 하룬으로 인해 불안감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하룬은 아그레시아로부터 통신이 가능한 은밀한 방을 배정받았다.
하룬은 벨과 아즈만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과 의념으로 혹은 통신기로 의견을 나누었다.
그러다가 생각하지도 못한 지원군을 얻게 되었다.
예정된 밤까지 시간이 남아 안부를 확인할 겸 붉은 모루 부족 드워프에게 통신을 했다가 건진 성과였다.
-이 땅은 우리가 살기에는 부적합한 것 같네. 광맥도 부족하고 무엇보다 생명체들이 살기 힘든 기후로 인해 농사도 짓기 힘들어서 생필품을 구하기도 너무 어려워.
안 그래도 고지대가 즐비한 스카이루프 산맥이고 추운 곳이라 잘 정착할지 걱정했는데 역시 예상대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모양이다.
붉은 모루 부족장의 말에 하룬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럼 후크란 산맥은 어떻습니까?
-후크란이라면 아주 오래전에 선조들이 탐사를 했던 곳이지. 그곳은 지형이 험해서 그렇지 기후도 온화한 편이고 광물들의 종류나 매장량도 많아 우리가 살기에는 적합하네. 하지만 그곳의 주인인 럼프족들이 우리를 반기지 않을 텐데. 이동하는 것도 문제가 많고.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제가 럼프족의 파탄이니 까요.
-그게 정말인가?
붉은 모루 부족의 부족장인 타루가는 하룬의 말에 깜짝 놀라더니 곧이어 함박웃음을 터트렸다.
-자네가 우리 일족이 그곳에 정착하게 허락만 해 준다면 우리가 만든 물품의 일정량을 주겠네. 물론 럼프족들과도 거래를 할 의향이 있고.
-그럼 됐습니다.
-하하하. 역시 자네는 우리의 영원한 친구일세. 아! 잠시만. 그린 엘프 로드인 다다디움이 곁에 있는데 할 말이 있다는군.
'그린 엘프 로드인 다다디윰이 웬일이지?'
-하룬 대장, 나 다다디윰이오.
-안녕하십니까. 잘 지내고 계시죠?
시크릿 대원인 진수와 그 친구들이 하룬의 부탁으로 데빌 산맥 쪽에서 모종의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에도 돌풍 상단에서는 특별히 실력이 뛰어난 이들로 하여금 엘프와 드워프를 전담하게 했다. 그들이 만든 아이템들은 비록 적은 수량이지만 엄청난 고가에 팔리고 있어 상행위가 크게 제한된 상단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었다.
-이런 말을 하긴 좀 그렇지만 상황이 많이 좋지 않네.
-그렇습니까?
엘프야 수림 지대에 잘 적응하는 아인종이니 다른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하룬은 깜짝 놀랐다.
-이곳에는 우리와 함께 호흡하고 그늘이 되어 줄 신성수가 잘 자라지 않네.
신성수라면 아그다왓트와 같은 나무를 말하는 걸까?
-신성수는 기후를 가리지 않지만 그래도 생장에 많은 영양 성분들이 필요한데 이 땅은 너무 척박하네.
-그럼 어떻게 하지요?
-자네가 럼프족의 파탄이라니 부탁하는 것이네만 혹시 우리도 후크란 산맥에 정착할 수 있겠나?
그거야 어려울 것이 없다 싶었다.
럼프족이야 총인구가 50만이 채 안되는 상황이고 후크란 산맥은 그 천배는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광대한 땅이다. 기후도 온화하고 강수량도 적당해서 수많은 동식물이 자라는 곳이다.
'어쩌면 드워프와 엘프 그리고 럼프족이 연합을 결성해서 후크란을 지키고 발전시킬 수 있을지도 몰라.'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각자 가진 장점들이 있으니 협력 관계만 잘 구축된다면 향후 혹시 제국에서 그들의 땅에 대한 야욕을 품는다고 하더라도 후크란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엘프들의 숫자가 어느 정도입니까?
-정확한 숫자는 아니지만 대략22만명 정도일세.
그럼 상관없다. 아니, 하룬에게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좋습니다. 다만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정착에 따르는 조건이 아니라 후크란에 살면서 인간들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 꼭 필요한 일입니다.
-무엇이든 말만 하게.
하룬은 다크니스를 상대할 때 전사들을 파견해 달라고 부탁했고 그린 엘프 로드인 다다디윰은 흔쾌히 그걸 받아들였다. 정령사도 아니고 주로 궁수 역할을 할 전사들을 파견해 달라니 부담도 크지 않았던 것이다.
회의장에서 다시 만난 사람들의 얼굴은 새벽에 비해서는 무척 편해진 상태였다.
"그래. 어떤 작전을 쓸 건가?"
후버론은 기다리기 힘들다는 듯 모두 착석을 하자마자 물었다.
"이방인들과 산악부족들을 우리 쪽으로 끌어들일 생각입니다."
"그들을?"
이 자리에 참석한 각 세려그이 대표자들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방인들은 이미 연합군으로 참전하고 있으며 산악 부족들의 경우 데빌 산맥 북서쪽을 영역으로 선포한 후 별 움직임이 없었던 것이다.
"우리의 계획이 성공한다면 적어도 익스퍼트 급에 오른 30만정도의 이방인들이 가세할 겁니다. 그리고 역시 그 정도의 실력을 가진 산악 연합의 전사들 20만 정도가 가세할 것이고요. 무엇보다도 도움이 될 수 있는 조력자들은 럼프족입니다."
"럼프족이라면 혹시 럼프 오크로 불리는 후크란의 산악부족을 말하는 건가요?"
다행하게도 아그레시아 총사가 그들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후크란 산맥 전역에 걸쳐 살고 있는 럼프족들은 강력한 전투력은 물론 마수를 부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 조상의 유지에 따라 수천 년에 걸쳐 몬스터 랜드의 몬스터들과 마수들을 막으며 대를 이어 오고 있습니다."
하룬은 그들에 대해 짧게나마 설명을 해 주었다.
"호오, 그럼 역사서에서 기술한 것처럼 럼프족들은 오크의 일종이 아니라 아인종이 맞았군."
다행하게도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대륙의 역사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진 이들이었기에 발몬의 존재는 물론 그의 수하였던 산악 부족들에 대해서 비교적 잘 알고 있는 편이었다.
"조건만 맞으면 럼프족도 길들인 마수들을 제외하고 20만에서 25만 정도의 전사를 동원할 수 있을 겁니다. 그들의 전투력은 산악 부족보다 한 수 위이니 엄청난 도움이 될 겁니다."
하룬의 말을 들은 사람들의 얼굴에는 의구심과 놀람 그리고 기대감으로 복잡해졌다.
"그게 가능하다면 분명히 우리는 이 열세를 벗어나 적극적으로 공세를 취할 수 있을 것이네. 하지만 그들을 어떻게 움직인단 말인가?"
후버론이 참석자들을 대표해서 물었다.
"산악 부족들은 이제 험준한 산악 지대에 거주하며 마수들을 사냥하며 살 수 밖에 없게 만들었던 조상의 유지에서 벗어나 세상과 유화되는 길을 선택하려고 합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전투에 필요한 군수품과 약 5년 치의 생필품을 제공하고, 향후 산맥 안의 일정한 영역을 자치적으로 다스리도록 세 제국에서 인정해 주는 한편 마수들이나 몬스터들이 세상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상황을 인정해서 매년 적당한 보상을 해 준다면 그들은 기꺼기 나설 겁니다."
"흠. 그거야 별로 어려울 것 같지 않군."
산악 부족이 다른 땅을 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이제까지 살아온 곳을 합법적으로 다스릴 수 있도록 자치권을 보장해 달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가 아니었다. 더구나 그들의 주 거주지는 광산들이 별로 없는 데빌 산맥의 중북부와 다크니스의 본단이 있는 서쪽 인근인 아닌가.
어차피 일부 광산 지대를 제외하고는 세금을 제대로 걷기에도 힘든 척박한 땅이니 자치령으로 지정하는 것은 별무리가 없어 보였다.
제국 측에서는 데빌 산맥과 후크란 산맥의 깊은 곳에 왕국이 들어서도 부족하지 않은 거대한 분지들이 널려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 분지들은 대부분 몬스터들과 마수들로 인해 주거지로 활용하지 못하지만 무척이나 기름진 땅들이었다.
결국 아그레시아가 나섰다.
"정치적인 문제는 제가 알아서 처리를 할게요. 럼프족의 경우도 산악 연합과 함께 처리하면 돼요."
세 제국의 황제들과 가까운 관계인 아그레시아가 이 정도 까지 말한다면 이 문제는 해결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 내가 병장기와 생필품 부분을 맡겠네. 이번 초토화 작전으로 인해 생필품의 경우 전리품으로 확보한 것들이 많으니 어렵지 않을 걸세. 또한 그들이 그동안 해 온 일들을 인정해서 재정적인 보조를 하는 건도 실사를 통해 확인만 된다면 그리 어렵지 않을 걸세."
후버론의 말에 하룬은 산악 부족에 대한 무거운 짐을 내려 놓을 수 있었다. 사실 실사를 한다지만 다크니스로 인해서 마수들의 위험성이 크게 부각된 상황이니 그동안 산악 부족들이 해 온 일은 확인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더구나 재정 보조 문제만 해도 어렵지 않았다. 세 제국으로서도 병사를 파견하는 것보다는 해마다 적당한 재정적 보조를 해 주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세 제국의 입장에서는 데빌 산맥이나 후크란 산맥은 크게 필요가 없는 땅인 것이다. 몇 개의 광산들이 있다지만 제국의 입장에서 보면 많은 광산들 중 일부일 뿐이다.
후크란 산맥 역시 인간이 살기에는 부적합한 험준하고 위험한 곳으로 알고 있으니 상관이 없었다.
"그럼 이참에 요새를 포함한 데빌 산맥 동부와 마츠 평원을 향후 총사의 자치령으로 하고 서부를 산악 연합의 자치령으로 그리고 후크란 산맥을 럼프족의 자치령으로 결정하도록 하지요."
어차피 주인이 없는 땅이기에 그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후버론이 이토록 자신만만하게 말할 수 있었다. 세 제국의 대표자들은 후버론의 의견에 바로 동의했다. 추후 조치가 뒤따라야 하겠지만 이 사안은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엘프들을 용병으로 고용할 생각입니다."
"엘프들을요?"
"네. 거기에 초토화 작전에 참여한 용병들도 계속 고용하게 되면 총8만 명이 더 늘어납니다."
하룬의 말에 아그레시아가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흠. 그럼 우리 쪽에 최소 60만 이상의 익스퍼트 급 실력자들이 충원되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총사. 그 정도라면 다크니스와 붙어도 전혀 밀리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고급 마법사 자원에 있어서는 우리가 한참 상위이며 그들에게 없는 신관들도 있기에 우리의 전력이 한참 더 위입니다."
하룬의 단정적인 말투에 참석자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이제야 어느 정도 안심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실력 있는 이방인들은 어떻게 움직일 거죠?"
"다 방법이 있습니다.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긴 하지만 어렵지 않습니다."
"대장의 말을 들으니까 왜 이제까지 대장에게 다크니스를 상대하는 의뢰를 하지 않았는지가 이상할 정도군요. 마치 준비를 한 것처럼 이럽게 쉽게 방책이 나오다니 말이에요."
"흐음. 흠."
사실 이 모두가 현실의 글로리 가이아와 휴먼 가드를 상대하는 일과 밀접하게 연결이 되어 있어 오래전부터 계획해 왔던 일이었지만 지금 이자리에서는 그 사실을 밝힐 수 없기에 하룬은 헛기침으로 상황을 넘겼다.
"좋아요. 그럼 대금 문제는 어떻게 하지요?"
"산악 연합과 럼프족을 제외한 나머지 전력을 고용하는 문제는 안는 조건으로 저희는 4,000만 골드와 몇 개의 물건을 원합니다. 거기에 제국 정보 길드의 정보력을 사용하기를 원합니다."
하룬의 말에 세 제국의 대표자들은 서로를 처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높은 금액이 아니었던 것이다. 초토화 작전을 위해 단기 고용한 용병들과 자유 기사와 자유 마법사 그리고 상단에 소속된 실력자들을 동원하는 데 약 3,000만원 골드가 풀렸다는 사실은 이들도 얼추 알고 있었다.
제국 정보 길드와는 따로 협상을 해야겠지만 그들은 세 제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할 상황이라 별 어려움 없이 계약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몇 개의 물건이라면 어떤 것들이죠?"
다들 하룬이 부른 대금보다는 그쪽이 더 궁금했다. 구할 수 없는 아이템이라도 언급된다면 그야말로 냉패할 것이다.
"대지의 숨결이라는 이름의 황토색 비수 혹은 단검을 찾고 있습니다. 또한 지헤의 파편이라는 이름의 고대 유물도 찾습니다."
하룬은 자신이 찾는 물건들의 생김새를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무려 수천만 골드의 대금을 챙긴 하룬에게 더 이상의 돈은 필요가 없었다. 방어구와 무기류 역시 이번 초토화 작전에서 얻은 전리품들 중 유니크 등급이 꽤 많았기에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하룬이 유일하게 원하는 것은 비도지존의 남은 유물과 지혜의 파편뿐이었다.
"좋아요, 계약 성립이에요. 부탁해요. 하룬대장! 당신에게 세 제국의 미래가 걸려 있어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그레시아와 하룬은 그렇게 악수를 통해 전대미문의 거대한 계약을 체결했다.